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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믿음 · 희망 · 사랑 : 믿음의 촛불 밝히기 (3) 기도 편
지난주에는 ‘믿음’의 대표적인 인물 아브라함과 다윗을 만나 보았습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흔들림 없는 굳센 ‘믿음’이었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믿음’으로 바치는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요? 기도에는 정답이 없으니 참 어렵게 느껴집니다. ‘어느 기도는 옳고, 어느 기도는 그르다’라고 단언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마침 우리에게는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최고의 기도 <주님의 기도>가 있으니, 그 속에서 믿음의 기도 수칙을 몇 가지 찾아볼까 합니다.
구하라, 감사하라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우리가 곤경에 처해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때 하느님의 능력이,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또한 우리가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감사드릴 때,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바로 이때 우리 하느님의 이름이 빛나게 됩니다.
“환난의 날에 내 이름을 불러라. 내가 응답하리라.”(호세 2,23 참조)
우리가 어려울 때 불러야 할 이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럼 감사는 언제 해야 할까요?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를 드립니다. 당장은 고통과 절망만 보여도 그 속에 축복이 숨어있음을 굳게 믿기에 감사드릴 수 있는 것이지요. 늘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선순환이 일어납니다. 항상 감사와 찬미를 달고 사는 삶, 그 길에는 좋은 일이 뒤따라옵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심을 기대하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이는 나의 일상, 내가 속한 일터나 모임, 더 나아가 인류의 구원까지,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선한 작용을 하여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속 요셉이 형제들에게 했던 말,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창세 50,20)처럼, 또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라는 말씀처럼, 하느님의 선한 이끄심을 믿는 것입니다.
사용계획서를 제출하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무언가를 청할 때 확실하게 하느님과 사인이 맞으려면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응답을 주셔도 응답인 줄 모르게 되고, 또 이로 인해 감사를 떼먹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때 가장 좋은 방법은 ‘사용계획서’를 제출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에 쓰겠다는 확실한 약속과 신용이 바탕이 될 때, 우리는 주님께서 응답해 주시는 은총 속에 살 수 있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온전한 빛 속을 걸어가며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저는 인간이고 당신은 하느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일이다. 바로 그 순간 변화가 일어난다.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된다.”
헨리 나웬의 이 말을 통해 우리 주님과의 관계를 묵상해 보게 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 노력이 필요하듯, 하느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온전한 믿음으로 바치는 ‘기도’임을, 또한 우리는 기도 없이 살 수 없고, 기도 덕에 살아가는 존재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희년의 표징들 (3) 기도, 전례
희년을 드러내는 네 번째 표징은 기도(Prayer)입니다. 기도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에게 지도와 같습니다. 순례의 목적지를 뚜렷하게 보여 주고, 방향을 잃을 때마다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줍니다. 때로는 발걸음이 무겁거나 지칠 때 쉴 곳을 찾아주고,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해줍니다.
기도의 뿌리에는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과 하느님 사랑의 제안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염원이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향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 모두를 기도로 부르시고 각자 성부께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시는 분은 성자의 영이십니다. 따라서 이번 희년 동안 특별히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를 정성스럽게 자주 바친다면, 이 기도가 지닌 생생한 은총과 구원의 힘을 깨닫고 하느님 나라를 향한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희년 기간 중 순례 여정에서 바치는 기도는 과거는 물론 현재도 그 길을 걷는 다른 순례자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로마로 가는 길은 실제로 많은 성인이 직접 걸었던 길이기도 합니다. 이때 바치는 기도는 희년의 은총을 얻기 위한 특별한 통로가 됩니다.
희년의 다섯 번째 표징은 전례(Liturgy)입니다. 전례는 교회의 공적 기도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르면, “전례는 교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전례헌장 10항)입니다. 그리스도교 전례의 중심은 단연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참으로 받아 모시는 성찬례의 거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해주신 것처럼 당신 제자들과 함께 걸으며 그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신비를 드러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제자들처럼 주님을 초대할 수 있습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29). 전례는 주님을 모시고 그분과 일치를 이루는 친교의 자리입니다.
희년의 특징적인 전례 예식은 성문을 여는 예식입니다. 20세기까지만 해도, 이 예식의 시작은 다소 상징적으로 교황님이 성문을 감싼 벽돌 벽을 깨고 이후 석공들이 벽돌을 완전히 제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다 1950년부터는 성문을 가로막은 벽이 사전에 철거되고, 장엄 성가가 흐르는 중에 교황님이 첫 번째 순례자로서 외부에서 성문을 밀고 통과하는 걸로 바뀌었습니다. 성문을 여는 예식 외에도 성년에 거행되는 다른 모든 전례는 희년의 순례가 개개인의 사적인 행동이 아니라 주님 나라를 향한 하느님 백성 전체의 여정임을 드러냅니다.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3) 「교회헌장」의 초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1회기
1962년부터 시작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제4회기를 거치면서 1965년에 막을 내렸습니다. 공의회의 결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네 개의 헌장은 문헌이 완성되기까지 많은 안건과 논의를 거쳤습니다. 먼저 성 요한 23세 교황이 이끈 제1회기에서는 「전례헌장」 「계시헌장」 「교회헌장」의 초안이 제출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의견이 개진된 가운데 채택된 문건 없이 의안들은 다음 회기로 넘겨졌습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속개된 제2회기에서는 「전례헌장」이 채택되었고, 「교회헌장」은 새로운 초안이 제출되어 논의되었습니다. 그리고 제3회기에서 「교회헌장」이 채택되었고, 「계시헌장」과 「사목헌장」은 제4회기에서 채택되었습니다.
네 개의 헌장 중에서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인 「교회헌장」은 「인류의 빛」 (Lumen Gentium)이라는 제목으로 반포되었는데, 최종 문헌을 보기 전에 헌장이 완성되는 과정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면 교회에 관한 토론이 3회기 동안 진행되었다는 것은 다양한 의안이 제출되었다는 뜻이고, 그 논의 과정을 보면 헌장의 주요 내용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1회기에 처음 제출된 교회에 대한 의안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중단되었던 교회에 대한 의안을 이어받은 것으로 오타비아니(Ottaviani) 추기경과 트롬프(S. Tromp) 신부에 의해서 작성되었습니다. 이 초안에서 교회는 하느님으로부터 보장된 적법성과 효력을 지닌 거룩한 통치 체제로 다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초안은 거부되었습니다. 수에넨스(Suenens) 추기경은 공의회 시작 단계부터 초안이 한쪽으로 치우쳐있음을 인식하였고, 「교회헌장」은 ‘안을 향한 교회’(ecclesia ad intra)의 관점과 ‘밖을 향한 교회’(ecclesia ad extra)의 관점이 모두 고려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곧 ‘신비로서의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 안에서 세상과 함께 살아가는 교회’에 관해서도 헌장에 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수에넨스 추기경의 주관으로 새로운 초안이 필립스(G. Philips) 신부에 의해서 준비되었는데, 이 초안의 작성에 콩가르, 라너, 라칭거, 젬멜로트, 스킬레벡스, 도세티 등의 신학전문위원들이 참여했습니다.
필립스는 신비로서의 교회에서 출발하여 포용적이고 개방적인 교회에 이르는 구상으로 「교회헌장」의 새로운 초안을 만들었고, 많은 교부의 공감대를 이끌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제2회기에 제출된 새로운 초안은 다음과 같이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었는데, 매우 간결하고 단순하지만 부족하지 않고 온전한 모습의 교회가 그려집니다
(1) 교회의 신비
(2) 교계제도 (특히 주교직)
(3) 하느님 백성 (특히 평신도)
(4) 교회의 성화 소명
[교회의 언어] Auxilium(아욱실리움)
오늘은 하느님의 말씀 주일이자, 해외 원조 주일입니다. 누군가를 돕는 방식은 매우 다양합니다. 봉사활동, 기부, 기도, 동반 등이 모두 도움에 포함됩니다.
하지만 도움을 뜻하는 라틴어 단어 “Auxilium(아욱실리움)”은 우리에게 도움에 관해 더 중요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단순히 일회적인 도움이나 나의 남는 힘을 사용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에서만 돕는 것이 아닙니다. “Auxilium”은 ‘거부할 수 없는’, ‘거부해서는 안 되는’ 도움을 뜻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면서 거절을 생각하지 않듯이 도움은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행해야 하는 사랑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Auxilium”은 또 다른 뜻으로 “해독제”, “치료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독(毒)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은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중독(가난, 소외, 시련 등)으로 삶이 위태로운 이에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도움(Auxilium)입니다. 우리 삶에서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도움(Auxilium)을 통해 우리가 서로를 살리는 삶을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
[가톨릭 교리 상식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미사보 꼭 써야 하나요? 왜 남자는 안 쓰는걸, 여자만 써야 하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가톨릭교회에서 미사보 착용은 의무가 아닙니다. 개별 성당에서 사목적인 목적으로 착용을 권할 수는 있겠지만, 미사보를 써야만 영성체를 할 수 있다거나 전례에 참여할 수 있다거나 하는 규정은 교회법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미사보가 원래 전달하고자 했던 의미가 현대에도 오해 없이 유지될 수 있도록 고민해 보는 것은 필요하겠습니다. 미사보를 여성만 쓴다는 점에서, 미사보가 여권 신장의 가치와 상충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없지 않으니까요.
실제로, 미사보의 시작에 ‘여성’에 국한되는 문화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구약의 레베카의 사례만 봐도 그렇죠. 남편이 될 이사악이 가까이 오자 너울을 꺼내어 얼굴을 가렸다는 이야기(창세 24,65 참조)는 미사보의 시작에 면사포와 비슷한 문화적 맥락이 있었음을 추정케 합니다.
그러나 머리를 가리거나 혹은 머리에 쓰던 것을 벗는 행위는 ‘남녀 상관없이’ 거룩함을 마주하는 경건한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모세도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 자신의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분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그러자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탈출 3,6)는 구절을 통해 이를 살펴볼 수 있지요. 엘리야도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1열왕19,13)고 합니다.
이러한 실천이 초대 교회 시대로 넘어오면서 당시의 문화적 맥락에 따라, 남성은 머리에 쓴 것을 벗고 여성은 머리를 가리는 관습으로 발전했습니다. 특히, 바오로 사도께서 그렇게 요청하셨죠. 그러나 이는 남녀 간에 차이를 두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코린토1서 11장 4, 5절에 해당 말씀이 나오는데, 바로 이어지는 11절과, 12절에서 사도께서는 이 모든 실천이 하느님을 위한 것임을 명백히 밝히십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가 있을 수 없고 여자 없이 남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남자도 여자를 통하여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사보를 쓰는 것과 모자를 벗는 것은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 온전히 하느님을 위한 실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게다가 사도의 말씀은 미사보가 당시의 그리스도교 풍습이었다는 것을 보여줄 뿐,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신앙의 의미를 담은 것은 아닙니다.(미사보 착용의 방식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것이죠.) 실제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당시 유다교의 풍습을 반영한 것인데, 현재 유다교는 다시금 변화가 생겨 남성들도 머리에 키파를 씀으로써 무방비 상태에서 하느님의 보호에 온전히 의지한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우리 교회도 그러한 이유로, 20세기 들어 미사보를 더 이상 의무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여성만 쓰느냐 남성도 쓰느냐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점은 미사에 임하는 마음가짐일 것입니다. 미사보를 썼다고 하더라도 온통 분심으로 미사 시간을 다 보낸다면, 하느님 앞에 나왔음을 되새기는 미사보의 의미가 무색하겠지요. 동시에, 미사보를 거부하고 현대적 의미만 새롭게 하겠다고 하다가, 중요한 것을 놓치지는 않는지도 함께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톨릭 신학]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평화
‘평화’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인류의 관심사 중의 하나이지요. 그러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평화는 어떠한 모습의 평화일까요? 고대 세계에서 이해하고 기다렸던 평화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를 비교해 보면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평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이해했던 평화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그리스 신화를 살펴봅니다. 그리스 신화를 대표하는 신들에는 올림푸스의 열두 신이 있지요. 하늘과 천둥을 지배하는 제우스, 전쟁과 지혜의 여신인 아테네, 예언의 신인 아폴로 등이 유명합니다. 신화를 대표하는 신들인 만큼,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을 보여줄 텐데, 흥미롭게도 평화를 담당하는 신은 여기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평화’를 담당하는 신은 ‘호라이’라고 하는 여신들 중의 한 명입니다. 제우스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테미스(θέμις) 사이에서 태어난 ‘호라이’(Ὧραι) 여신들은 세 명의 자매로 구성되는데, 그들은 ‘에우노미아’(Εὐνομία), ‘디케’(Δίκη), 그리고 ‘에이레네’(Ειρηνη)입니다. 그리스어로 표기한 여신들의 이름이 가진 뜻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테미스는 ‘법, 질서, 정의’를, 호라이는 ‘시간’을, 에우노미아는 ‘질서’를, 디케는 ‘정의’를, 그리고 에이레네는 ‘평화’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우스는 법과 질서 그리고 정의(테미스)를 바탕으로 시간(호라이)을 탄생시켰다. 이러한 원리들을 잘 지켜나간다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 세상에도 질서(에우노미아), 정의(디케), 그리고 평화(에이레네)가 있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고대 그리스인들은 법과 정의를 바탕으로 질서가 이루어질 때 평화가 가능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는 평화는 어떤 평화일까요? 루카복음을 보면, 즈카르야는 예수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합니다.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주실 것이다.”(루카 1,77-79) 즈카르야의 노래에 따르면, 죄의 용서를 통한 구원을 행하시는 분도,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주시는 분도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평화는 다음과 같이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용서를 통해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인도하신다.’ 그리스 신화에서 말하는 평화와는 사뭇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법과 정의’를 바탕으로 한 평화(그리스 신화)와 ‘용서’를 바탕으로 한 평화(복음). 여러분들은 어떠한 평화를 추구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모두 예수님이 초대하시는, ‘용서를 통한 평화’를 살아갈 수 있다면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가톨릭 교회 교리서와 함께 “교리 문해력” 높이기 (42) 교회의 어머니 마리아
요한 복음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에게 어머니를 맡기며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성모님은 사도들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사도신경의 순서에 따라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셨음을 고백하는 부분에서 마리아께 대한 주요 교리를 정리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평생 동정이시고 원죄 없이 잉태되셨으며 하늘로 불러올리심을 받았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교회에 대한 교리들을 정리하는 후반부에서는 이와 더불어 교회 안에서 마리아의 위치에 대해 설명하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며,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므로 마리아는 그리스도 지체들의 어머니시라는 것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963항).
마리아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에서부터 시작해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 아드님과 온전히 일치하셨습니다. 또한 그분의 승천은 당신 아들의 부활에 특별히 참여한 사건이며, 세상 끝날 이루어질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을 앞당겨 실현한 것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966항). 그분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모든 활동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함께 하심으로써 하느님 백성으로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 모든 구성원들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신앙과 사랑의 모범이시며, 따라서 교회의 가장 뛰어나고 유일무이한 지체이시며, 교회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는 본보기가 되십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967항).
그러나 모든 성인들의 통공 교리에서도 알 수 있듯, 성인들은 단순히 우리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니며 천상 교회와의 일치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는 분들이십니다.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모든 구원 활동에 전적으로 함께 하셨던 마리아께서는 천상에 들어 올림을 받으신 뒤에도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에 함께 하십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 안에서 수많은 전구를 통하여 마리아께서는 위험과 고통을 겪고 있는 모든 이들을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 때문에 마리아께서는 교회 안에서 변호자, 원조자, 협조자, 중개자라는 칭호로 불립니다(교회 헌장 62항).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교회 안에서 중개자로 불리는 마리아의 역할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 그리스도와 똑같은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때때로 지나친 성모 신심은 마치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로 성모님을 내세우기도 하고,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에 또 다른 중개자로 성모님이 필요한 것처럼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피조물도 구세주와 결코 똑같이 헤아려질 수 없으며, 마리아께서 교회 안에서 중개자로 불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유일한 중개자 그리스도께 일치되어 그분의 구원 임무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마리아의 종속적인 임무를 믿고 체험하는 것이며 신자들에게도 어머니의 도움과 보호로 우리의 유일한 중개자, 곧 구원자 그리스도께 더욱더 가까이 따르자고 권장합니다(교회 헌장 62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