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다운 가치 발견, 진솔한 인간적 향내
<산림문학> 가을호 수필을 읽고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수필이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인간 본질에 대한 탐구와 이해다. 수필은 단순히 인간의 삶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수필적 사유란 인간의 삶에 대한 미학적 해석이며 사색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보다 따뜻한 안목으로 바라본 인간의 체온어린 모습이다. 그것은 문학적 열정만으로 완성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연륜을 무시할 수 없고, 인간을 이해하려는 태도와 심성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글이 단순한 정서와 사상의 기록물이 아닌 것도 이 때문이다. 수필가의 삶에 대한 인식과 역사를 보는 안목은 글이 지닌 빛깔이며 체온이라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윤재천은 뮨학이 인간 생활의 기록이어야 한다고 한 바 있다. 그것은 단순한 삶의 모습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참다운 가치를 발견해 낸 일의 기록이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맛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생활이 가치 발견의 현장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과 처절한 싸움에서 이겨야 할 것이다.
겨울호에서는 지난 가을호에 발표된 12편의 수필 중 강인철의 <도시공원>, 조은경의 <포비아> 그리고 김경래의 <마타리꽃>, 한태천의 <가리고 싶어요> 네 편에 대해 구조와 의미를 집중해서 읽어내려고 한다. 이들 수필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생태적인 합리성과 인간적 향내다. 산림문학지라는 특성에 걸맞는 소재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도 수필을 수필답게 하는 것은 인간적 향내다. 체험을 문학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잘 표현했다고 해서 그 모습이 완성되고, 인생의 한 단면을 진통과 고뇌로 감싸안았다고 해서 문학적 가치를 확보하게 되는 건 아니다. 수필은 무엇보다도 진솔하게 자기의 심중을 수채화처럼 엷게 드러내어야 하는 것이다. 향기가 나야 한다. 수필의 본질적 특성에 부합하는 고백이 녹아 있어서 인간적 향내를 내어야 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작가의 숨결과 체취가 드러나야만 수필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Ⅱ.
수필은 고급문학이다. 고도의 세련된 지적 통찰의 기록이어야 하고, 형상과 인식이 함께 녹아 있어 품맛과 손맛, 그리고 눈맛이 우러나야 되는 글이다. 강인철, 조은경의 수필에서 볼 수 있는 맛은 눈맛이다. 김경래 한태천의 수필은 향기를 풍겨낸다. 수필의 향이 체험의 적나라한 표백에서 나온다면, 지식과 체험과 사상이 용해되어 예술적인 문장으로 표현될 때, 한 편의 멋진 수필이 탄생된다. 수필의 맛은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데서 나온다고 하겠다. 수필의 맛은 담담하지만 건조해서는 안 되고, 톡 쏘는 재미도 있어야 하지만 속되어서도 안 된다. 철학성이 있어야 하지만 현학성이 짙어서도 안 된다. 참신한 시선과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해내는 인식에 수필의 참다운 맛이 나온다고 하겠다.
강인철의 <도시공원>을 읽으면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다’라는 말이 생각나게 된다. <세계일주 시작이 반>이란 수필집을 낸 바 있어, 이 분의 소재는 대체적으로 글로벌을 지향한다. 이 수필 역시 세계를 여행하면서 만나게 되는 도시공원들에 대한 의미를 담아내었다. 작가는 캐나다 ‘스탠리파크’, 영국 런던의 ‘하이드파크’, 그리고 미국 뉴욕의 ‘셑트럴파크’라는 도시공원의 존재적 가치를 생태적 합리성으로 접근하고 있다. 결말부에 가서는 외국의 도시공원에 견줄 수 있는 우리나라 도심공원의 예를 들어 ‘숲사랑’이 인간존중의 시종임을 설파하고 있다. 구성을 살펴보면 전략적인 것이 드러난다. 발단부에 ‘공세권’이란 말을 가져오고, 전개부에서는 여러 나라의 도심공원의 특성을 풀어놓고, 결말부에 가서 우리나라의 예를 든 구성전략은 매우 논리정연한 질서를 갖고 있다. 청와대의 개방과 용산미군기지가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것을 계기로 미래세대를 위한 백년대계의 통 큰 도시공원으로 거듭나길 바라는 작가의 녹색환경보전 정신에 박수를 보낸다.
미국 뉴욕은 세계인의 도시지만 그 중심 맨해튼에 ‘센트럴 파크’가 없었다면 얘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센트럴 파크를 찾는 사람이 년간 3천만 명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 공원이 지구촌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도시공원임을 말하고 있다. 동서 길이 830m에 남북 길이 4.1km의 직사각형으로 면적이 341만 제곱미터나 된다는데 만약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빼곡히 들어찬 맨해튼 마천루의 회색 도시 한가운데 푸른 녹색 점 하나가 알짜배기 땅을 떡 하니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아닐까? 센트럴 파크는 원래 버려진 습지의 골치덩이였다는데 150여 년 전 도시공원의 필요성을 주장한 뉴욕시당국이 공원부지로 지정하면서 시민들의 인식 또한 바뀌기 시작했고, 오늘에 이르러 뉴욕을 살리는 아니 뉴욕의 생명줄 보물1호로 사랑받고 있다. 도시공원은 남녀노소, 빈부, 신분 가릴 것 없이 모든 계층의 시민들이 건강한 일상을 즐기는 최적의 공간으로 자연이 베푸는 공공복지의 원천(泉)임을 뽐내고 있다.
-강인철 <도시공원> 중에서
우리나라는 인구 밀도가 높은 나라에 속한다. 천년 미래를 생각하는 작가라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공원녹지사업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야 할 것이다. 말과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 지성인이고, 지식인이다. 난개발 광풍에 성냥곽 같은 콘크리트건물이 녹지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는 것에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작가로서의 도리도 아니다. 이런 심각한 문제는 누군가가 짚고 또 짚어주어야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고, 해결의 대안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때 만약 센트럴 파크를 조성하지 않았다더라면 지금쯤 그만한 넓이의 정신병원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게 식견 있는 뉴요커들의 이구동성이라고 한다.”는 작가의 진술은 ‘자연이 베푸는 공공복지의 원천이 도시공원’이라는 작가 자신의 인식을 잘 대변하고 있다. 이들 도시의 공원이 ‘도시의 보석’으로 불린다는 소개도 주제의식을 뒷받침해 주는 좋은 근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우리가 한 작가에게 거는 기대는 삶에 대해 얼마나 깊이있게 의식을 갖고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고뇌하며, 나름의 해석을 도출하는가에 있다고 볼 때, 이 수필의 가치는 더욱 크다고 하겠다.
조은경의 <포비아>는 코로나19의 유행이 주는 일상의 변화를 포착한 글이다. 전개부 삽화는 결혼식장에서의 이야기다. 어느 날 친구와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했는데, 한 친구가 건강염려증의 하나로 ‘코로나19 포비아’에 걸려, 코로나19 유행이 시작되자, 자발적 격리상태로 모든 모임을 끊었다는 것이다. 코로나19의 휴유증은 그 친구만 앓고 있는 게 아니다. 다른 친구는 긴 골목길에 공포를 느끼는 악몽을 꾸기도 하고, 또 다른 친구는 고소공포증을 호소한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화학물질에 공포를 느끼거나, 다족류 연체동물이 싫고, 새가 무섭다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온통 포비아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여기저기서 ‘나, 이거 싫어, ’이거 무서워‘ 애매한 공포증, 병적인 공포, 혐오나 트라우마가 봇물처럼 터지듯 쏟아진다.”는 얘기가 전개의 전반부를 차지하고 있다. 작가도 새를 무서워 하는 사람이고, 한때 결혼 초창기부터 교직을 떠난 한참 후까지 이상한 악몽에 시달렸다는 작가의 고백은 전개부 후반부를 장식하고 있다.
그런데 예식이 끝나도록 한 친구가 끝내 보이지 않는다. ‘얘또, 그런 거지?’ 그 친구에게 굳이 병명을 붙이자면 건강염려증 중 ‘코로나19 포비아’ 그쯤 되지 싶다. 방역지침을 준수하고 서로 조심하자는데 어찌 딴말이 있으며 지침이 능사가 아닌 것도 잘 안다. 그녀는 코로나19 유행이 시작되자 자발적 격리 상태로 모든 모임을 끊었다. 밝고 쾌활한 성격에 딱히 지병도 없는데, 무슨 남모르는 이유가 있나? 비록 모임에 안 나오지만, 전화 통화로 몇 시간도 버티는 막강한 입담이 있다. 기 빨리는 그녀의 지구력持口力은 우주 최강이다. 그래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핸드폰 전파를 타고는 이동하지 않니?’ 놀린다.
- 조은경 <포비아> 중에서
이 작품의 가치는 설득의 기법에 있다고 하겠다. 작가는 도처에 포비아 현상이 퍼져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여러 근거를 들고 있는데, 직접적인 체험과 간접체험의 예를 내세운 것이다. 문학인이라면 그 시대 그 사회가 처해 있는 상황을 누구보다도 선견지명으로 파악, 예견하고 개인적 또는 인위적 속박에서 상실된 삶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고, 불행과 고통을 함께 앓고 그 실상을 정확히 표현하는 것이 주요 책무다. 우리가 한 작가에게 거는 기대는 현실을 얼마나 리얼하게 그려내느냐 하는 기술적인 문제보다 보이지 않는 진실을 찾아내고,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는 것이다. 조은경의 수필은 사회문제를 들추는 내용이라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것으로써 공감할 만한 소재라 하겠다. 문학의 목적이 감동에 있다고 할 때, 꼭 서정수필만이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다. 지성적인 수필도 감동을 창출할 수가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시대의 밑그림 하에 구체적인 상황제시와 작가 개인의 고백적 체험이 녹아 있어 이 수필은 문학적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김경래의 <마타리꽃> 이란 수필은 꽃 자체에서는 발 냄새가 나지만, 수필은 인간적 향내를 진하고 풍기는 작품이다. 현대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연을 상실했는지도 모른다. 각종 매체를 통한 자연에 길들여져 있으며, 이미지로서의 자연을 실제로 자연보다 더 친숙하게 느낀다. 매체들에 등장하는 자연은 자연 자체보다 인간의 욕망을 투사한 대리물에 지나지 않는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 이미지 속에 자연이 들어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김경래가 자연 속에서 만나는 ‘마타리꽃’은 학생들을 데리고 숲속에 가서 직접 만난 식물이고, 자연이다. 자연의 원형과 우리를 대면케 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마타리’란 이름이 생긴 연유를 찾아가는 작가의 의지는 여러 재미있는 마타리 이름의 유래를 제공한다. “고약한 냄새를 맡았니?”에서 유래했다느니, 영화에 나왔던 “이중간첩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여인 마타 하리”와의 연관도 재미있다.
오래 전 숲해설가 동료들과 월악산국립공원을 방문했을 때다. 그곳에서 얼굴이 무척 맑고 아주 편안해 보이는 백발의 노인을 만났는데, 같이 갔던 젊은 친구가 ‘나도 빨리 늙어서 저 노인처럼 되고 싶다’고 했다. 외모가 아니라 어떠한 대상에게서 느껴지는 느낌이나 감정인 인상인 것이다.
예쁜 마타리꽃의 독특한 향기 때문에 세상은 공평하다는 것과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겉모습에 걸맞게 내면도 가꾸어야 한다는 걸 배운다. 아름다운 내면의 향기를 품어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선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 김경래 <마타리 꽃> 중에서
이 수필의 관전 포인트는 단순히 ‘마타리’란 꽃 이름의 유래를 아는 것이 아니다. 작가가 ‘마타리꽃’을 대면하면서 자신의 의식을 어떻게 변용해나가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체험을 통해 무엇을 느끼고, 그 느낀 것을 어떻게 문학적으로 전달해서 감동을 주느냐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뉘는데, 하나는 전개의 전반부에 놓인 학생들과 숲에 갔을 때고, 다른 하나는 전개 후반부 일반 가족들하고 숲에 갔을 때다. 의식의 변화는 후자에서 오는데, 결국 작가는 “예쁜 마타리꽃의 독특한 향기 때문에 세상은 공평하다는 것과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겉모습에 걸맞게 내면도 가꾸어야 한다”는 걸 배우게 되는 것이다. 독자의 관심사는 작가가 말하고 싶어하는 내용이다. 그 말의 내용이 어떠한 차원의 것이며, 어떠한 용기를 차지함으로써 가치가 주어지느냐가 관전 포인트라 하겠다. 작가가 아름다운 내면의 향기를 품어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꽃처럼 자신도 ‘누군가에게 선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에서 ‘선물’은 메시지를 상징하는 적재로써 문학적 효과를 낸다고 하겠다.
한태천의 <가리고 싶어요>라는 수필은 특이하게도 발단부가 2021년 산림문학 신인상 수필 부문 수상소감의 일부를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물론 제목도 그 중에서 뽑아냈다. 문단의 말석에 앉으면서 부끄러운 심사를 겸손하게 표현한 것이다. 전개부 내용은 산림문학의 한 코너에 있는 <책 속의 한 줄>에 인용된 자신의 졸고에 대한 감회와 감사가 놀람과 함께 놓여 있다. 물론 작품의 배경은 자연 속 상주 경천대다. 이 글에는 문인삼락 중 하나인 등단의 기쁨이 진하게 베어 있다. 창작의욕의 배경에는 인간의 인정투쟁이 놓여 있다. 인간은 누구나 인정욕구를 가지고 있다. 특히 문인은 독자들로부터 자신의 이름이 기억되고, 또 자신의 문장이 다른 사람의 글에 인용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한태천은 등단한 것만으로도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고 싶을 정도인데, 곧이어 자신의 글 중 일부 대목이 존경하는 L 선생의 글에 인용되는 영광을 안았던 것이다.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또 선배 작가는 후진 양성을 위해 신진 작가의 글을 인용해 준답니다. 당신의 글을 누군가는 인용하니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라고. 좀 부족하지만, 더 노력하여 ‘빛을 발할 수 있는 좋은 글로 보답하라.’라고. 그리고 인용한 글을 소재로 하여 글은 이렇게 쓴다는 기법을 가르치기도 한답니다. <세 길>을 인용하여 쓴 글은 글쓰기의 사례를 보여 준 것이랍니다.
선생님께서 경망스러운 내 행동을 강하게 질타하시는 듯합니다. 속내가 다 비치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쿵 떨어지는 기분입니다. 두려움이 엄습해 옵니다. 오줌 싸는 애기처럼 전신이 떨립니다. 먹다 남은 커피잔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구름이 빛을 가려 유광(流光)은 사라지고 선생님도 가셨습니다.
- 한태천 <가리고 싶어요> 중에서
그 기쁨은 잠시 그는 겸손하게 또 두려움을 느낀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비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오줌 싸는 애기처럼 전신이 떨립니다. 먹다 남은 커피잔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산다는 것은 단순한 생물학적인 삶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삶은 그것이 참다운 삶일 때 부단한 자기성찰과 그것에 따른 자기정신을 내포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어진 삶에 만족하고 그 속에 안주해 버리려 한다면, 자칫 자기성찰의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거나 혹은 그것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삶은 인간다움을 상실하게 되고, 기껏해야 생물학적인 수준의 생존 상태만 유지하게 된다. “선생님께서 경망스러운 내 행동을 강하게 질타하시는 듯합니다. 속내가 다 비치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쿵 떨어지는 기분입니다. 두려움이 엄습해 옵니다.”라는 진술은 꾸준한 정신적 성장을 이루려면, 응분의 고통을 겪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고통을 외면하는 데 급급하지만 한태천은 그것을 반성적 성찰로 승화시켜낸 것이다. 독자들이 작품 속에서 찾는 감동의 주된 원인 또한 작가의 정신적 행적과 관련이 있다. 그 행적이 주인공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킬 때 가장 감동적일 수 있는 것이다.
Ⅲ.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자기성찰의 기회를 갖지만, 더러는 인생의 삶을 크게 바꾸어 놓을 정도의 결정적인 성찰의 계기를 갖기도 하는데, 이런 계기를 겪고 난 후에는 사람들이 몰라보게 변모하거나 괄목할만한 도덕적 성장을 이룩하게 된다. 이런 결정적인 자기성찰의 계기는 우연히 마련되는 일이 드물고, 대개의 경우 오랜 정신적 여정을 거친 후에 충격적으로 마련된다. 훌륭한 생각이 결여된 상태에서는 좋은 작품을 기대할 수 없다. 강인철, 김경래, 조은경, 한태천 수필가는 깊은 생각에서 수필을 길어 올리는 작가이기에 좋은 수필을 쓰는 것이다. 이 수필들은 참다운 가치를 발견해냈을 뿐만 아니라, 진솔한 인간적 향내를 품어내고 있어 우리에게 감동을 안겨준다. 이들은 모두 신변적 소재를 가지고도 그림자의 인격화를 구축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좋은 수필가의 대열에 설 수 있는 저력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