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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언어(요13장34-35)
성경본문:요한복음13:34-35.
34-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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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3천 명 정도의 주한미군이 철수해서 이라크로 간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강력한 국방력은 사실은 강력한 가정들입니다. 탄탄하게 서 있는 가정들보다 더 강력한 국방력은 없습니다.
가정이 불행하고 흔들리면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강력한 나라를 만들지 못합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사랑의 언어를 배우자고 했습니다. 인정해주는 언어, 칭찬해주는 언어, 격려해주는 언어, 친절한 언어, 겸손한 언어를 배워서 실천하면 그것을 통해 서로 사랑을 느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34절) 하신 말씀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구약성경을 통해 반복적으로 주어졌던 계명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새 계명이란 전에 없던 계명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받아들여야 하는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날의 문제들에 발목이 잡혀서 해가 새롭게 떴는데도 새롭게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여러분이 그동안 수없이 들어왔더라도 오늘 이 아침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새롭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랑은 일방적이 아니라 쌍방적이라는 말입니다. “One-way Street”가 아니라 “Two-way Street”입니다. 주고받는 것입니다.
한 쪽은 주기만 하고 한 쪽은 받기만 한다면 얼마 안 가서 주는 쪽이 지쳐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 1부 예배 후에 어느 남자분이 울상이 되어 저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결혼생활 20년 동안 제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아내가 받아주질 않습니다. 이제 지쳤습니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 노력을 했고 많이 참기도 했지만 이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라고 하소연을 하더군요.
영원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무한히,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때로 내가 방황하고 문제를 일으켜도 하나님의 사랑은 지칠 줄 모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한번 상대방을 칭찬하면 상대방도 나를 칭찬해줘야 됩니다. 한 쪽만 일방적으로 칭찬하고 상대방은 비판만 한다면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 사랑을 느낍니까? 무엇보다도 나를 가치 있는 소중한 존재로 여겨주고 존중해줄 때입니다.
사람들이 다투는 모습을 보면, 대개 처음에는 어떤 문제를 놓고 다투지만 나중에는 서로의 말꼬리를 잡고 싸웁니다.
“왜 날 무시해? 당신이 뭔데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해? 후배가 선배에게 반말이네.”
존댓말로 시작했지만 누군가가 무시하는 투로 말하기 시작하면 원래 문제는 뒷전으로 가고 말 표현 때문에 싸웁니다.
사람은 무시당할 때 제일 억울하고 속상하지요.
어떤 처녀에게 어떤 종류의 남자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나를 소중하게 여겨주는 남자요.” 그 말은 맞았으나 저 여자는 불행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만약 자기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가 그 때 생각한 것이 ‘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내가 평생 소중하게 여겨줄 사람을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 생명과 재산, 시간과 노력을 다 바쳐 사랑해서 그의 소중함을 드러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될 것입니다.
내가 사랑을 줄 사람을 만나야지, 받으려고만 하는 사랑은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한 쪽만 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주는 것입니다.
사랑의 언어 가운데 “미안해요”는 간단하지만 아주 도움이 됩니다.
어떤 때는 이 한 마디로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지만 서푼도 안 되는 자존심 때문에 끝까지 이 말을 못합니다.
대부분의 문제가 ‘네가 먼저 미안하다고 해야지’ 하는 기 싸움입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아예 쓰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미안하다는 말을 언제 마지막으로 하셨습니까?
얼마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웬 젊은이가 저를 툭 치면서 탔습니다. 그런데 미안하다는 눈치도 없어요. 내가 타는데 왜 막느냐는 식이지요. “미안합니다” 한 마디면 서로가 좋지 않습니까? 미안하다는 말은 상대방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의사표시입니다.
“고마워요.” 이것도 사랑의 언어입니다. 큰 선물을 받아서가 아니라 작은 일에도 고맙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짧은 단어를 그렇게 아껴서 언제 쓰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1년에 한두 번만 말고 많이 쓰십시오.
“사랑해요.” 역시 상대방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표현입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서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의 언어를 배우십시다.
훈련을 해야 됩니다. 왜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을 하십니까? 사랑이 좋은 줄 알면서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연습하고 훈련해서 습관으로 만들라고 하십니다.
얼마 전 목사님들의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의 일입니다. 제 강의를 마친 후 질문시간에 어느 분이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보니, 김목사님은 매일 웃으시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됩니까? 저는 얼굴이 굳어서 잘 안 됩니다.”
저는 제 얼굴을 못 보니 제가 웃는지 잘 모릅니다. 의식하며 일부러 웃는 것이 아닌데 사람들이 저더러 웃는다고 하는군요.
한 번은 TV에 나오는 제 모습을 봤습니다. 진짜 조금 웃기는 웃더군요. 아마 연습 탓이겠지요.
매일 하던 것이 저절로 몸에 익은 것이지, ‘이제 웃어야지’ 하고 웃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삶을 즐겁게 살려 하고, 사물을 아름답게 보려 하고, 사람을 사랑하려 하면 됩니다.
저는 사람을 보면 정말 즐겁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의 소중함에 대해 참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9:6).
사람을 죽이면 자기도 죽어야 하는데,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자신을 닮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원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형제에게 ‘라가’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라가’란 바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바보’보다 험한 말이 얼마나 많습니까?
인간을 멸시천대하고 짓밟는 단어가 수없이 많지만 비교적 경미한 ‘바보’라는 말만 해도 지옥불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그만큼 사람이 하나님께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온 천하보다 사람이 더 소중합니다. 사람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큰 죄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 최소한 서너 명이 있으니 여러분은 부자입니다. 그것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사랑은 좋은 감정을 불어넣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지 않습니까? 저는 얼마 전에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큰 글씨 몇 자와 내용으로 볼 때 다른 교회에 나가시는 연세 드신 할머니이신 것 같았습니다.
“목사님, 제가 TV를 보니 목사님이 나왔어요. 목사님 설교를 들으니 힘이 납니다. 너무 좋아요. 그런데 목사님 인물이 잘 났데요.”
저는 제 인물이 잘 난 줄 미처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제게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켜 주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감정이 들게 하는 말과 행동이 사랑입니다.
어느 어머니는 딸과 같이 사는 것이 너무 좋다고 하십니다. 딸도 마찬가지로 엄마랑 같이 사는 것이 너무 좋아서 평생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엄마가 딸을 사랑해주기 때문입니다.
딸이 자라는 동안 어머니는 딸에게 계속 긍정적인 감정을 갖게 해주었기 때문에 엄마만 생각하면 좋습니다.
그런데 모든 아들 딸이 그렇게 말할까요?
어렸을 때부터 계속 부정적이고 어두운 감정을 심어주었던 부모가 같이 살자고 한다면 아마 싫어할 것입니다.
안된다는 말은 못하고 돌아서서 “같이 살자고 하시는데 이걸 어떡하나? 무슨 다른 방법이 없을까?” 걱정할 것입니다.
결혼 후에까지 계속 부정적이고 어두운 감정을 계속 심어줄 부모를 어느 자식이 견딜 수 있겠습니까?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준 부모와 어떤 자식이 같이 살고 싶겠습니까?
자녀의 소중한 가치를 인정해주고 좋은 감정을 일으켜준 부모라면 혼자 살겠다고 해도 자녀들이 같이 살자고 할 것입니다.
얼마 전 멀리 떨어진 한 호텔에서 휴일을 보내면서 어느 젊은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부부는 휴일이면 시댁과 처가를 번갈아 방문하며 지냈는데, 이번에는 시댁에 갈 차례이나 부부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고 그곳에 왔다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들으니 ‘이 젊은 부부는 부모님 댁에 가는 것이 부담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들고 재미없어서 자주 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긍정적인 자아상을 심어주었더라면 자녀들이 그럴까요? 부모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목소리만 들어도 반갑고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사랑은 또한 상대방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입니다.
무시하고 멸시하고 가치를 떨어뜨리고 시기하고 미워하는 태도는 사랑이 아닙니다.
부정적인 것을 심으면 부정적인 것이 나옵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영원한 보편적 진리가 있지 않습니까?
소중하게 여기면 소중히 여김을 받고, 경시하면 경시를 받습니다.
틀림없습니다.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형제로서, 서로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말과 행동 속에 사랑이 있습니다.
각각 75세와 70세 정도 되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가정을 심방한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평생 할아버지를 섬기며 사셨는데 할아버지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가슴에 맺힌 한을 할아버지 앞에서 저에게 털어놓으셨어요.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제게 폭로한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부끄럽게 생각하라고 그러신 모양입니다.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돼지우리에서 쥐엄 열매로 겨우 허기를 면하려다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아버지 집에는 무엇이든 풍성한데, 이제 그만 아버지 집에 돌아가자.”
한편 아버지는 자기를 버리고 떠난 자식을 날마다 기다립니다.
저는 그 아들이 왜 집에 돌아왔을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단지 배가 고파서 돌아왔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소중히 여겨주었고, 실수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재산의 반을 떼어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보라며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매일 아들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지내는지, 제대로 먹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는지, 문 앞에서 아들을 기다립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자식에게 느낌으로 전해진 것입니다.
그런 것을 <텔레파시>라고 하지요. 사람은 참 정확합니다.
여러분도 느끼겠지만 저는 하나님과 사람이 전공이니까 이 점을 잘 압니다.
누군가를 내 마음속으로 좋지 않게 생각하면 그도 나를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만난 적이 없어도,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람은 정확하게 압니다. 말을 좋게 해도 마음이 그렇지 않으면 즉시 알아챕니다.
탕자의 마음속에는 자기를 존중하고 사랑해준 아버지의 이미지가 남아있었습니다.
평생 그 집에서 자랐으니 아버지의 모습을 알지요.
아버지는 아들에게 좋은 감정을 많이 이입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생각을 하다가 마음이 뭉클해져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야지” 한 것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너는 왜 형보다 못 하냐? 왜 속만 썩이느냐? 이 아무짝에도 못쓸 자식아. 너 같은 놈은 낳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 이런 식으로 했다면 그 아들은 굶어죽었으면 죽었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 말 안 듣고 나가더니 꼴좋구나.” 이런 말을 들으러 오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장점을 봐주었습니다.
성경에는 없지만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너는 용기가 있어. 네가 네 인생을 구축해보려고 집을 나갔는데, 비록 실패했지만 젊은이라면 그런 것도 해봐야지. 돈이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 거야. 참 잘 돌아왔다.”
사랑은 또한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켜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서로’라는 말이 29번이나 나옵니다. “서로 발을 씻어주라.”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주님이시고 선생님이신 소중한 분이 자기를 낮추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을 때 제자들이 사랑을 느꼈습니다.
무식한 갈릴리 어부들을 하나님의 아들이 높여주신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롬12:10) 했습니다.
존경이란 상대방이 가치 있는 사람임을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서로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떡 먹으러 올 때에 서로 기다려주라”(고전12:25)고도 했습니다.
지금은 성찬 때 작은 떡과 잔을 상징적으로 받지만 초대교회에서는 저녁을 정식으로 먹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막 예수를 믿어 미숙했기 때문에 식사 때 먼저 가서 욕심을 내며 먹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서로를 배려하고 앞세워주라고 하십니다.
제가 미국에 처음 갔을 때 아주 이상하게 보이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자동차 문을 열어주고 아내가 타면 문을 닫은 후에 운전석으로 가는 것입니다.
아내도 혼자 할 수 있는데 왜 열어주는지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내가 외출하고 돌아오면 외투를 벗겨주기도 하더군요.
처음엔 그런 것들이 참 이상하게 여겨졌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문화로 정착된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려면 사실 남자가 노력을 많이 해야겠지요. 부부가 걸을 때도 미국 사람들은 꼭 보조를 맞춰 같이 걸어갑니다.
저도 제 아내와 같이 걸어가 보려 했는데 힘들더군요.
아내보다 제가 발이 기니까 자연히 앞서서 가게 되지요. 같이 가려면 제가 속도를 늦춰야 됩니다. 답답하지요.
하지만 여자가 남자보다 다리가 짧으니 어쩔 수 없이 다리가 긴 쪽에서 배려를 해줘야 됩니다.
지난주에 어느 부인이 제게 이런 불평을 했습니다.
예전에 남편과 먼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큰 길을 대여섯 번 건너는 동안 한 번도 아내를 돌아보지 않고 혼자 먼저 가버리더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집에 도착해보니 먼저 온 남편은 낮잠을 자고 있었답니다.
이제 칠순을 바라보는 분인데 아직도 그 일이 한이 맺혀서 저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소중함을 인정해주지 않고 그들의 가슴에 어두운 감정을 넣어주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고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질 수 있도록 칭찬해주고 돌봐주고 격려해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잘못했으면 미안하다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34절).
예수 잘 믿는 것은 찬송 잘 하는 것으로도, 성경 1백독 한 것으로도, 한 달 동안 금식기도 한 것으로도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긍정적인 감정을 넣어주어 긍정적인 자아상을 갖게 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와 예수님의 제자의 모습으로 서로에게 날마다 나타내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