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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년 동안 경찰에 몸담았다가 퇴임한 전직 경찰간부가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회칼을 들고 있는 범인과 맞닥뜨렸을 때도 섬뜩했지만 내 손에 잡힌 범인이 ‘두고 보자’며 이를 갈 때는 정말로 두려움을 느꼈다. 나 자신에 대한 보복도 보복이지만 사랑하는 내 가족들에 대한 보복이 염려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내 가족을 외부에 노출시킨 적이 없다. 많은 경찰들이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또 다른 현직 경찰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면 나도 모르게 주변을 살피게 된다. 누군가 갑자기 뒤에서 나를 덮치지는 않을까 하는 공포가 밀려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강력반 생활 10년차인 한 형사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도 ‘오늘도 무사히…’라는 기도를 할 때가 종종 있다. 특히 집을 나설 때마다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족들 얼굴을 한번 더 쳐다보곤 한다.”
이 같은 전·현직 경찰들의 고백은 일선 경찰들이 알게 모르게 얼마나 신변의 위협을 안고 살아가는지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말이다. 이번에 경찰청 김원배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얘기는 한 모범 경찰관 피살 사건이다. 김 연구관은 “경찰들의 노고를 조금이나마 치하하고 그들이 좀더 안전한 여건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사건을 소개하게 됐다”고 밝혔다.
88서울올림픽을 약 6개월 앞두고 전국이 들떠 있던 1988년 3월 24일. 당시 삼천포 경찰서(현 사천경찰서) 소속인 장덕만 경장(가명·53)은 경남 사천시 OO동에 소재한 XX파출소(현재의 지구대)에서 야간 근무를 서고 있었다.
야간 근무조라 해도 가끔 오는 취객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구역이었기 때문에 장 경장은 여느 때와 같이 편안한 마음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밤 9시 40분경 갑자기 파출소 밖에서 웬 낯선 남자가 기웃거렸다. 파출소 안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던 남자는 장 경장 외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 안으로 들어왔다. 혼자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던 장 경장이 남자를 보고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런데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장 경장에게로 향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 경장은 자신에게 닥칠 일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뭔가 물어보는 척하던 남자가 갑자기 품 안에서 흉기를 꺼내 무방비 상태의 장 경장을 마구 찔렀다. 목 부위 등을 찔린 장 경장은 그자리에서 쓰러졌다.
장 경장의 비명과 함께 집기 등이 ‘와당탕퉁탕’ 요란스럽게 떨어지면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자 숙직실에 있던 동료 경찰이 황급히 뛰쳐나왔다. 하지만 이미 범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장 경장의 권총도 없어졌다. 바닥은 온통 피바다였다. 장 경장은 인근 병원 응급실로 급히 후송됐으나 10시 10분경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날 오후 집을 나서며 “잘 다녀올게”라고 한 말이 가족들에게는 마지막 인사가 되고 말았다. 2남 4녀를 둔 장 경장은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을 끔찍이 아끼는 성실한 가장이었다. 특히 장 경장은 관내에서도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모범 경찰관으로 소문이 자자했었다.
파출소 안에서 일순간에 일어난 경찰관 피살사건. 도대체 범인은 누구이며 왜 그랬을까. 즉시 수사본부가 설치됐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현장은 너무도 끔찍했다. 장 경장은 목 부위 등 급소 세 군데에 자창을 입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는데 워낙 상처가 컸고 출혈이 심해 발견 당시 이미 가망이 없는 상태였다. 정황상으로 볼 때 범인은 순식간에 장 경장을 살해하고 달아난 것으로 추측됐다. 숙직실에 있던 동료들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으로 보아 장 경장은 별 대항도 하지 못한 채 당한 것이 분명했다. 또 당시 파출소 내에는 긴급 상황 발생시 관내에 알리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비상벨이 있었지만 비상벨도 울리지 않았다. 장 경장은 비상벨을 누를 틈도 없이 변을 당한 것이었다.”
범인이 남기고 간 것은 270mm 크기의 족적뿐이었다. 하지만 목격자가 없는데다가 범인을 특징지을 수 있는 지문이나 머리카락 등이 발견되지 않아 수사는 처음부터 난항에 부딪쳤다.
애초에 수사팀은 원한 관계에 의한 살인사건으로 파악했다. 범행시간이 야심한 시간대도 아니었을 뿐 아니라 대담하게 파출소까지 찾아와서 흉기를 휘둘렀다는 점에서 장 경장에게 뭔가 원한을 갖고 있는 인물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수사팀은 일단 장 경장의 주변 인물들을 상대로 탐문 수사에 들어갔다. 금전이나 치정·채무관계 등 조금이라도 원한을 살 만한 것이 있는지 샅샅이 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장 경장에 대한 주변의 평도 좋았고 원한을 가질 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장 경장이 전임지에 근무할 당시 어떤 사람을 즉결처분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장 경장의 처분에 앙심을 품었을 수도 있다고 보고 바로 조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조사결과 그도 장 경장 피살사건과는 무관한 것으로 드러났다.
수사팀은 음주 단속이나 사소한 시비건과 관련해서도 장 경장뿐만 아니라 다른 경찰에게 앙심을 가질 만한 사람들을 추적하고 일일이 조사했으나 역시 의심가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수사는 점점 미궁으로 빠졌다. 수 개월이 지나도 범인의 흔적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상황이 이쯤되자 수사팀에서는 범인의 정체를 둘러싼 이런저런 얘기들이 흘러나왔다. 이렇다 할 증거도 남기지 않은 채 감쪽같이 달아난 것으로 보아 범인은 보통인물이 아닐 거라는 분석도 나왔다. 그 결과 사건 현장 인근에 해안선이 있다는 점에 주목, 대공 사건일 수도 있다고 보고 한때 수사가 진행되기도 했다. 또 탈영병의 소행일 가능성도 제기됐다.
범인이 장 경장을 살해한 후 장 경장의 권총까지 훔쳐 달아났다는 사실은 범인이 일반인은 아닐 거라는 분석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무엇보다 수사팀을 긴장케했던 것은 권총을 탈취해간 범인이 추가 범행을 저지를 위험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민간인의 총기 소지는 예기치 못한 사고를 일으킬 가능성이 다분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방면에 걸쳐 끈질기게 수사가 진행됐음에도 범인의 윤곽은 끝내 드러나지 않았다. 결국 한 모범 경찰관의 억울한 죽음은 사실상 미제사건으로 분류돼 사람들의 뇌리에서 완전히 잊혀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9년 6개월이 지난 1997년 9월 11일. 허름하고 초췌한 행색의 한 남자가 사천경찰서를 찾아왔다. 노동일을 하는 박달수 씨(가명·34)였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박 씨는 강력반에 들어서자마자 주저앉으며 눈물을 쏟았다. 잠시 후 그가 강력반 형사를 붙들고 털어놓은 얘기는 실로 충격적이었다. 9년 6개월 전 장 경장을 살해한 범인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박 씨는 수사팀의 예상과 달리 평범한 인물이었다. 그는 장 경장과 안면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으며 당연히 어떤 원한에 의해 살인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범행 당시 스물다섯 살이었던 박 씨가 그토록 무서운 범행을 저지른 이유는 바로 돈 때문이었다.
박 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날 일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박 씨의 얘기는 이랬다.
범행 당시 삼천포에 있는 한 공장에서 경비원으로 근무하던 박 씨는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가난뱅이’란 말은 어려서부터 박 씨를 지독하게 따라다닌 꼬리표였다. 불우한 가정 환경과 가난에 찌든 생활에 진절머리가 났던 박 씨는 20대가 돼서도 변하지 않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비록 작은 공장에서 일하며 돈을 벌기는 했지만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는 생활을 유지하기도 버거웠다. 좀처럼 빛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날들이 계속되자 결국 박 씨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무서운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한탕 크게 해서 제대로 한번 살아보자는 생각이었다.
‘나도 한번 잘 살아보고 싶다’는 20대 청년의 그릇된 욕망은 결국 무서운 범죄로 이어지게 된다. 애초에 박 씨가 계획한 것은 은행강도였다. 하지만 은행을 털기 위해서는 총이 필요했다. 결국 박 씨는 총 때문에 출입이 자유롭고 경찰관 한 명이 지키고 있는 파출소에 침입한 것이었다. 그리고 장 경장을 준비해간 흉기로 찌른 뒤 권총을 탈취해 도망친 것이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장 경장이 사망하자 박 씨는 원래 계획이었던 은행강도를 포기하고 그대로 잠적하고 만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의 인생은 엉망이 되고 만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박달수는 장 경장을 살해할 의도는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장 경장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겁이 난 그는 그 때부터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도망자 생활에 들어갔다. 자신의 범행이 발각돼 체포될까 두려운 나머지 한 곳에 정착하지도 못하고 고정적인 직업도 갖지 못한 채 공사판을 떠돌아 다녔다고 그는 고백했다. 9년 6개월 동안의 떠돌이 생활은 그야말로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그는 하룻밤도 발을 제대로 뻗고 잔 적이 없을 정도로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겠지 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심신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그는 9년이 지났어도 사건을 잊지 못하고 자수하게 된 것이었다. 경찰서에 제 발로 걸어들어왔을 때 그는 마치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이었다고 했다.”
마지막 단계는 증거물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범행 사실을 모두 털어놓은 박 씨는 증거물을 숨겨둔 장소에 대해서도 순순히 밝혔다. 경찰은 박 씨가 지목한 사천시 사천읍의 한 야산에서 범행에 사용된 길이 35cm의 녹슨 흉기 한 자루와 장 경장의 권총을 발굴함으로써 수사를 종결지었다. 그는 범행 증거물들을 집 뒷산에 묻어뒀던 것이다.
한 모범 경찰관의 죽음의 진상이 9년 6개월 만에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