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호 작가가 AI로 제작한 디지털 시대에 인간의 정체성을 질문하는 2분 14초 길이의 영상 중 첫 장면으로 대머리의 여성이 알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빛이 지문처럼 반사된 얼굴 뒤로 또 다른 얼굴이 숨어있다. 이 그림은 AI 작가 이병호(69)가 생성형 AI 프로그램으로 만든 작품이다. 소셜미디어와 인공지능(AI)으로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인간은 과연 무엇인지를 질문하며 이렇게 표현했다. 이씨는 챗GPT와 미드저니, 런웨이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들을 2년 전부터 써본 후, 10년 넘게 몰두한 사진 작업 대신 생성형 AI로 이미지를 작업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작가가 AI로 그동안 완성했던 작품을 발표하는 전시가 최근 대전의 ‘갤러리 탄’에서 ‘가상유희 3(AI Goodbye William)’이라는 제목으로 열리고 있다.
이병호 작가의 AI - POST HUMAN IDENTITY 2024 연작. 지문처럼 빛이 반사된 얼굴 뒤에 또다른 얼굴이 숨어 있다.
이병호는 LG, 삼성 등에서 반도체 회로 기판을 제작하는 연구원으로 30년 넘게 일하고 지난 2009년에 퇴직했다. 퇴직 후에 취미로 사진을 시작했는데 어느 날 제리 율스만(Jerry N. Uelsmann)의 작품을 본 후 초현실주의적인 사진으로 방향을 잡았다. 제리 율스만은 디지털 사진 이전에 암실 인화 작업만으로 초현실적인 합성 사진을 제작한 사진가였다. 작가는 사진을 배울 때도 촬영보다 프린트된 사진들을 합성해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포토콜라주 형식에 관심을 갖고 매달렸다.
이병호 작가의 AI - POST HUMAN IDENTITY 2024 연작. 여성의 머리와 귀에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기호들이 장식처럼 늘어져 있다.
새로운 방향의 시각 예술로 방향 전환을 한 작가는 새로운 것들을 배우는 데 거침없었다. 메타버스가 한동안 유행하자 블렌더(Blender) 같은 3D 모델링을 제작하는 프로그램도 배웠다. 2022년 챗GPT와 함께 생성형 인공지능의 시대가 되자 생성형 이미지 제작 AI인 미드저니(Midjourney)와 이미지를 동영상으로 만드는 AI인 런웨이(Runway)나 클링(Kling)을 배워 AI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10년 넘게 몰두한 콜라주 사진 대신 AI로 창작 방식을 바꾸려 하자 주변 사람들이 말렸다고 한다. 하지만 작가는 세상의 변화를 피할 수 없기에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하나씩 배워갔다”고 했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이제는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시각적으로 구체화시키는 자신만의 방법을 만들었다고 했다.
이병호 작가의 AI - POST HUMAN IDENTITY 2024 연작.
이병호 작가의 AI - POST HUMAN IDENTITY 2024 연작. 목을 장식한 금빛 광선은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도구처럼 보인다.
AI와 협업하는 예술.
생성형 AI로 만든 작품을 예술로 규정할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미 존재하는 예술 작품을 기반으로 명령어(프롬프트) 몇 줄로 이미지를 쉽게 불러오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물인 작품들을 스타일만 가져와 이것저것 조합한다고 예술로 인정될 수 있을까? 더구나 테크닉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디어가 AI가 축적한 데이터에서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씨는 이런 몇 줄의 명령어만으로 작품들을 순식간에 만들지 않는다. AI 이미지 한 점을 예로 들어도 평균 한 달이 걸린다고 했다. 몇 초면 그림이나 영상이 만들어지는 AI로 작가는 왜 한 달씩이나 걸릴까?
이병호 작가의 AI - POST HUMAN IDENTITY 2024 연작. 반도체 회로처럼 연결된 다른 얼굴이 중첩되어 보인다.
이병호 작가의 AI - POST HUMAN IDENTITY 2024 연작. 콜라주(합성)사진의 형태로 제작했다.
이병호는 자신만의 AI 예술 창작 방식을 개념미술(Conceptional Arts)에서 창안한 개념설계방식(Conceptual Design Process)이라고 했다.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구체적이고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예술 작품으로 구현되도록 AI의 도움을 받아 발전시키는 방법이다. 즉 주제 선정과 표현 방식을 먼저 챗GPT에 질문하면 AI가 제안한 답변 중에서 주제를 선별하고 표현 방식을 결정한다. 이때 주제를 함축하는 명령어를 계속 다듬어 가는데 이미지 생성과 피드백의 반복을 통해서 시각적 구조를 다듬는다. 작가는 전체 한 달의 기간 중 20일을 이렇게 개념을 잡는 데 쓴다고 했다.
이병호 작가의 AI로 제작한 디지털 시대의 인간의 정체성을 질문하는 2분 14초 길이의 영상 중 한 장면.
이렇게 잡은 초기 프롬프트를 통해 미드저니로 형태가 나오면 색조와 구도, 스타일 등의 시각 예술의 구성 요소를 다시 생성과 피드백을 반복해가면서 시각적인 구조를 다듬는다. 그리고 다시 미드저니의 고급 기능을 통해 이미지를 정교하게 수정한다. 이렇게 작품을 만들어 가는 동안 AI는 새로운 제안도 하고 또 새로운 아이디어도 떠오른다고 했다. 결국 AI와 협업을 하면서 예술이 완성되어 가는 방식이다. 이 씨는 “AI도 성질을 부릴 때가 있다”고 했다. 잘 나오다가 가끔 어처구니없는 결과물이 반복해서 나오는데, 이상해서 명령어를 다시 찾아보면 사용한 단어에서 문제가 시작됐다는 걸로 알게 되었다.
이병호 작가의 AI POST HUMAN IDENTITY ver .EGON SCHILLE 2025.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쉴레의 스타일이 연상되는 AI작품이다.
이렇게 완성된 AI 작품의 주체는 누구일까? 이 질문에 작가는 뚜렷한 확신이 있었다. “AI에 한두 번의 명령으로도 우연히 멋진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예술의 범주로 볼 수 없다”고 단언했다. 작품으로 인정되려면 작가가 뚜렷한 주제를 갖고 연속적인 작품으로 이어지도록 연속성을 갖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카메라가 처음 나왔을 때 사진도 예술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던 것처럼 이병호 작가는 AI도 틀림없이 몇 년 안에 예술 작품을 만드는 훌륭한 매체로 자리 잡을 것이라면서 그러기 위해선 “작가들의 AI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했다. AI를 갖고 노느냐, AI에게 휘둘리느냐의 문제라면서.
AI로 작업하는 이병호 작가.
이병호 작가의 대전 전시는 오늘까지 마치고, 15일 부터 장소를 옮겨 청주 사진갤러리 ‘예술곳간’에서 오는 4월 27일까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