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상 변호사가 《월간천관》에 '이청준문학관 건립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故 이청준 작가의 인물과 문학세계를 심층적 소개 중이다.
2022년 8월호, 9월호, 10월호, 11월호, 12월호, 2023년 1월호, 2월호이다. 이번이 일곱번째 연재기고이다. (편집자 주)
이청준과 좌우지간(左右之間) 공간, 이청준 문학관을 위하여(7)
1, 이청준의 유년기 체험
소설가 이청준이 보여주는 중도 관망자 태도는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의도적 침묵과 모호함에 섞여있는 자기 성찰적 자세는 어디에서 연원했을까? 냉정한 기록자로 보이면서도 뭔가 은폐적 행간을 깔고 있는, 숨김과 드러냄의 변주곡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이청준 소설에 등장하는 세상은 그 절반이 닫힌 듯하다. 하늘의 별을 꿈꾸었을 것임에도, 별들이 총총하던 밤하늘은 드물었던 것 같다.
문창성(文昌星)의 글에는 쓸쓸함과 고립감이 배어난다. 그 배경은 어디에 있을까? 쉽게 거론되는 사정들이 있긴 하다. 어린 시절에 부친과 형제들 절반의 거듭된 죽음들 가난한 고향에 두고 온 노모의 처지. 요컨대 가족들의 죽음과 허기로 요약되는 사정도 수긍할 만 하다. 그런 고난 고초 속에서 어린 학생이 <눈길>을 떠나 대처에서 태연하게 적응함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소설가 이청준에게 그 보다 더 근원적인 상처는 없었을까? 그 소설에는 가위눌림, 전짓불 체험, 통증, 가면을 쓴 얼굴, 밀고, 실종, 신경증 증세 등이 자주 등장한다. 그것들은 단지 소설 속의 허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이청준에게 들이닥친 실제 현실이었던 것 아닐까? 어린 원체험자 이청준에게 기실 고향은 한없는 그리움의 대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다시 기억하기도 싫은, 좌우(左右)지간의 밀고 당기는, 밀당 공간이 었을지 모른다. 가난과 허기보다 더 근원적인 내상(內傷)이었다.
2, 이청준과 6.25전쟁기
1939년생, 1945년 6세, 1950년 11세, 1954년 15세 광주서중 입학(2년을 끌어올리면 1937년생이겠다). 장흥의 해방공간 성격은 '여운형'의 '건준'에서 활동한, 사범학교 출신에 무소속 제헌의원 '김중기(6.25중 월북)'의 당선에서 알 수 있다. 한민당 출신으로 항일학생운동 옥살이 경력자 '고영완(1914~
1991)'은 낙선하고 말았다. 1948년 여순반란 사건은 보성 지역에서 차단되었으며, 장흥에서는 직접적 공방이 없었다. 그러나 1950년 6.25 무렵에는 사정이 달랐다. 농지개혁 작업이 착수되지 못한 현실에서 마주친 6.25 전쟁 중에 우익테러와 좌익테러가 교차되었다. 다른 지역 사례처럼, '보도연맹에 대한 우익테러'야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에 못지 아니한 좌익테러가 극심하였다. 장흥의 몇 집성촌에서는 무테러 무보복의 평온을 유지했지만, 대덕(회진) 해변지역은 그 피해가 극심하였다. 6.25 개전 후에 남한정부가 후퇴한 상태에서 인민군의 장흥 입성을 전후하여 지역 좌익이 저지른 악행은 심각하였다. 가히 학살 수준이었다. 바로 그 무렵에 이청준의 외갓집, 즉 <눈길>에 나온 노모의 친정집안은 '가' 수준에 이르고 말았다. 이청준의 몇 소설에 스쳐가는장면, '정자나무에 묶인 채로 몽둥이를 맞고서 가마니 속에서 죽어가는 모습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런 좌익테러를 당하고서 다시 '반동'으로 몰리지 않도록 좌익행세를 해야 했고, 다시 몇 달 후에 돌아온 우익 세상에서는 좌익으로 내몰리지 않도록 그 몇 달 좌익 치장 몸짓을 온통 털어내야 했다. 그 좌우지간(左右) 공간에서 감별사의 죽창(竹槍)같은 '전짓불' 정체를 요령껏 알아챈 사람은 겨우 살아남았다. 서로 주고받는 시선이 한없이 무서웠다.
3, 그 무렵 사정에 관한 자료들 <장흥군향토지, 1975>는 장흥경찰서 관점의 공식적 기록을 남기고 있을 뿐 당시 좌우익의 구체적 피해를 언급하지 않았다. 완도군 약산도'로 피난을 간 장흥경찰서 경찰과 대덕해변의 좌익 사이에 전투가 있었다. 이청준 선생의 묘소 건너편에 '약산도'가 있다. <대덕읍지, 1996, 제129쪽>, <회진면지, 2007, 제359>는 좌우 쌍방의 피해에 안타까움을 표하면서 객관적이고 중립적 자료 확보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진실화해위 상반기 보고서, 2009>는 장흥해변의 좌익테러로 인한 피해발생을 확인하였으며, <오마이뉴스, 2021. 2. 6. 자>도 위 '진실화해위 상반기 보고서'를 인용하였다. <장강신문, 2022. 3. 7. 자>가 보도한 <민간 피해 진실규명 1차조사 마무리, 장흥문화 공작소> 역시 '장흥해변 좌익테러 피해'를 실상을 총론적 차원에서 확인하였다. <연합뉴스, 2022. 10. 5. 자>가 보도한 <제2기 진실화해위 보고서> 역시 '1950년, 9, 10월경에 장흥해변지역 '민간인 140명'이 좌익 테러로 학살되었음'을 인정하였다. 그 대덕회진 마을들에서 6.25 개전 초에 빈발했던 좌익테러의 참상 속에 이청준의 외갓집, 그 노모의 친정집은 '일문멸가 수준의 현장이 되고 말았다.
4, '좌우이념 대립의 상처와 후유증상'에 관련된 소설들
자유의 문/ 인간인(아리아리 강강)/ 소문의 벽/ 숨은 손가락/ 가해자 얼굴/ 개백정/ 씌여지지 않은 자서전/ 흰 철쭉/흰옷 등등과 '전짓불 체험' 장면
5, <흰옷, 1993>과 장흥 버꾸놀이 농악, '함께 아파하기'
장편소설 <흰옷>을 놓고 '이념적 투항'을 찾아내는 분위기도 있으나, 이청준 작가후기'에서 '대승적 화해, 아픔을 함께 나누기"를 적극 강조하였다. 해한(解恨)이 아닌 해원(解寃)을 말하면서 장흥 버꾸 (法鼓)놀이'를 부러 거론하였다. 꽹가리와 징 등 날카로운 쇳소리를 강조하는 전통풍물농악과는 달리 '장흥 버꾸놀이'는 북(소고)과 장구 소리를 위주로 진행한다. 그 복색에서도 자극적인 색동옷(色服)을 줄이고, 흰 옷과 흰 바지저고리 등의 소복(素服), 흰고깔 흰 허리띠 위주로 차려 입는다. 삼색 띠가 등장하기는 한다. 장흥버꾸놀이의 특징 하나는 북중심부를 '둥둥' 치면서도, 북의 '변죽'을 '딱딱' 쳐준다는 것이다. 소설 <흰옷>은 이제 막 개교한 회진초등학교(대흥동초학교)의 교장과 여교사가 6.25 공간의 좌우대립과 갈등으로 인하여 풍금과 함께 장흥군 북쪽 유치 산간으로 입산하였다가 결국에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소설의 화자(話者)는 그 당시 학생이었다. 소설은 어떤 큰 희망에 부풀었을 젊은 교장과 여교사가 시대적 불운 앞에 죽어갈 수밖에 없던 억울함을 위로하는 '보림사 위령제'로 결말을 짓는다. 그 위령제에 등장한 '장흥버꾸놀이'는 씻김굿의 새로운 형식으로 이해된다. 소설에는 옛 회진포 풍경과 물길과 그 무렵 여객선 이름도 등장하고, 그 시절 풍금이 노래하던 풍금의 꿈도 스쳐 지나간다. '섬'이 아닌, '유자섬'과 '노력도, 대구도가 나온다. '회령리, 선유리' 마을 이름이 등장한다. 어느 누군가는 영화화를 해볼 수 있는 작품도 되겠다. 소설 <흰옷, 1993>은 <가해자의 얼굴, 1992>과 더불어 '대승적 화해'와 '함께 아파하기'를 말한다.
<덧붙임>
1. 한승원 선생님도 '동학 화해론'을 피력하셨지만, 이청준 선생님도 동의하셨을 것이다. 필자는 장흥신문 '동학 100주년' 기고문에서 화해론을 제안했었다.
2. 이청준의 '자유'는 개인의 존엄성과 더불어 균형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념적 억압을 극도로 혐오하셨다.
3. 이청준 선생님을 모시고 장흥 강진 해변일대를 2박 3일간 돌아다닌 일이 있었는데, 선생님은 해방정국과 6.25 전후, 4.19 무렵에 활동한 장흥출신 좌우익 인사들 동향에 해박하셨다. 그때 메모를 못한 아쉬움이 크다.
4. 이청준은 6.25 무렵 회진초교 교사들 사연에 관하여 <단편 전근발령, 1966>을 썼으며, 다시 <장편 흰옷, 1993> 을 썼던 것이니, 그 내용 처리와 방향에 대해 평생 고심하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