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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투 블루(평양. 이튿날 오후5시경) - 1
평양의 9월 하순은 가을이 깊다. 중심 시가지에서 3~4킬로미터 떨어진 한적한 고급 간부 주택단지는 스산한 바람으로 낙엽이 흩날렸다. 대동강을 끼고 공원이 조성된 이 아파트의 특호단지 도로를 한 소녀가 타박 타박 걷고 있었다.
학교 수업이 끝난지 한참이나 지난 때문인지 아이는 친구도 없이 혼자였다.
운전수가 딸린 승용차를 탈 수 있는 신분 높은 집안 소녀 었지만 이 아이는 차 타기를 싫어했다.
차를 타고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같이 놀아주지 않는다고 했다.
해가 지려는 듯 아파트 사이로 보이는 서쪽 하늘에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보통 이 시간 평양 시민들은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소녀가 막 차도로 내려서 길을 건너려는 순간 뒤쪽 커브 도로에서 검은색 자동차가 나타났다. 급커브 길 때문인지 자동차가 아이를 미쳐 발견 하지 못한 듯했다.
운전자는 다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핸들을 틀어 간신히 소녀를 피했다. 끼익~ 하는 타이어의 마찰음이 조용한 아파트 단지를 크게 울렸다.
아이는 다행히 승용차 옆문에 슬쩍 떠밀려서 넘어졌다. 크게 다치지 않은 듯 했다. 운전자는 내리지도 않았다. 차는 멈출듯이 잠시 멈짓 멈짓 하더니 그대로 달아났다.
아이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여자 아이가 옮겨진 병원은 발칵 뒤집어졌다. 비상이 걸린 것이다.
아이가 할아버지의 이름과 집 전화번호를 또박또박 간호사에게 말 했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말을 확인한 병원 관계자는 크게 놀랐다. 그들은 서둘러 공동병실에서 개인병실로 아이를 옮겼다. 병실 침대 머리맡에 급하게 꽃병을 준비해 꽃을 꽂았다. 그리고 이미 퇴근한 욋과, 내과 과장 등 의사들을 황급히 병원으로 다시 불러 들였다.
같은 시각,
아직 중앙당 집무실에 있던 박봉주는 공관에 상주하는 자택 비서로부터 급히 연락을 받은 것이 6시30분 쯤이었다.
북한 권력 서열 3위인 그는 작년에 사고로 아들을 잃었다. 이후 귀여운 손녀와 며느리를 위해 대동강변 특호주택 단지에 아파트를 마련해 주고는 틈만 나면 이들을 챙기던 중이었다.
비서가 걸어온 전화를 주의 깊게 듣고 있던 그는 “알았어” 라고 만 짧게 대답했다.
그러나 마음이 바뀐 박봉주가 재차 말했다.
“내가 곧 병원으로 가겠다고 병원장에게 연락을 해, 뭐? 뭐라고? 그럴 필요까진 없어, 내가 직접 병원으로 가겠다. 그러니 너무 소란을 떨지 마라.”
아직은 가을인데도 그는 한기를 느껴 코트를 걸쳤다. 이미 어둠이 깔린 평양 고등병원으로 통하는 뒷길은 사람의 그림자 조차 보이지 않았다.
평양의 부족한 전력 사정으로 뒷길은 가로등이 없었다.
두 대의 검은색 벤츠가 어둠을 뚫고 달려 열려있는 병원 후문 앞에 잠시 멈추어 섰다. 병원이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어 계단으로 연결된 후문까지 차량 통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는 되도록 이면 조용히 행동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뒷길 쪽을 택한 것이다. 그가 탄 벤츠가 멈추자 경호원들이 달려와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열린 차문에서 잠시 불빛이 도로를 비췄으나 문이 다시 닫히고 나니 어둠이 쌓였다.
차에서 내린 박봉주가 걸음을 내딛는 순간 4명의 경호원들이 코트를 입은 그를 둘러쌌다. 순간 사람들 그림자에 뒤섞여 누가 누구인지를 분간하기가 힘들어졌다.
바로 이 때, 어둠 속에서 한발의 총성이 크게 울렸다.
‘탕~‘
총알은 정확하게 박봉주의 이마에 명중, 머리를 관통해 후두부로 나왔다. 명중시의 둔탁한 충격음과 경호원의 비명이 1초도 안 되는 사이에 순식간에 연속적으로 들렸다.
관통한 총알은 그의 뒤에 서있던 경호원의 어깨에 틀어박혔다. 상황이 위급해 경호원은 통증조차 느끼지 못했다. 경호원들은 반사적으로 팔을 벌려 보스의 몸을 에워 싸며 거의 동시에 권총을 빼내 어둠속을 향해 겨누었다.
총알은 어둠에 묻힌 건너편 숲 속에서 날아왔다. 숲속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미리 대기해 있던 저격수들은 라이플 PSG-1과 야간 조준경, 그리고 그들이 사용한 고속세열탄의 기막힌 성능에 만족해 했을 것이다.
박봉주는 어두운 길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머리에서 피가 흥건히 흘러내렸다.
바닥에 쓰러진 박봉주를 수석 경호관 임경웅 대좌가 재빨리 부축해 승용차 뒷좌석으로 밀어 넣었다. 차문이 닫히기도 전에 대좌는 당황해 하는 운전병을 향해 소리쳤다.
“빨리! 빨리!”
운전병은 힘껏 액설레이터를 밟았다. 자동차 급발진에서 오는 ‘끼익~‘ 하는 소리가 어두운 밤하늘에 길게 울려 펴졌다.
달리는 승용차 안에서 경호책임자 임경웅은 망연자실 했다. 뭉클뭉클 피가 뿜어져 나오는 보스의 머리를 무릎에 받치고 하늘을 쳐다 보았다. 그의 머리 속은 복잡했다.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했다.
경호 수칙이나 위급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교본을 통해 배웠지만, 평양에서 감히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당 군사위원이 피습 당하는 일이 벌어 지리라곤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기에 당황을 했다.
우선 ‘권력서열 순위’에 속하는 보스가 부상을 입으면 평양 육군병원으로 연락을 해야겠지만, 이미 그는 숨이 끊어진 것 같았다.
그러나 임경웅은 이 엄청난 사건을 어디에, 누구에게, 맨 먼저 보고를 해야 하는지를 잘 알았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차가 큰 길로 나섰을 때 임경웅은 룸 라이트를 켜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보스의 용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피격당한 환부를 보았을 때 경험상 이미 돌이킬수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이런 때 일수록 기밀 유지가 최우선이었다. 운전자와 수행 경호원들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라도 알려지면 안 될 일이었다.
임경웅 대좌는 정신을 더욱 가다듬었다.
경호원들이 탄 차가 뒤에서 필사적으로 따라 붙는 것을 그는 룸 밀러로 확인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위치해 있는 인민무력부 분실로 직행하라고 운전병에게 행선지를 명령했다.
우선 그는 자동차에 비치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차창에 커튼이 쳐진 당 중앙 군사위원 전용 벤츠가 급 정차하자 이미 연락을 받고 대기중인 무장 병력들이 차를 둘러쌌다.
피 묻은 윗옷을 벗고 차에서 내린 임경웅은 부동자세로 경례를 올려 붙이는 인민무력부 분실장을 쳐다보지도 않고 분실장실 그의 집무실로 직행했다.
집무실 방문을 닫아 잠근 임경웅 대좌는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주석궁 연결해! 긴급이야!”
잠시 뒤 전화가 연결되면서 전화기 저쪽에서 신분 확인과 무엇 때문에 전화 한지를 먼저 물어 왔다.
“나, 박봉주 중앙 군사위원장 경호관 대좌 임경웅이오. 국방위원장 각하께 급하게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그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으나 목소리가 심히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런 목소리 때문인지, 주석궁의 담당 비서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잠시 기다리라는 대답 을했다.
“무어? 누구라고?”
곧 저쪽에서 쨍하는 특유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흘러 나왔다. 김정은의 목소리였다. 그가 친히 전화를 받은 것이다.
임경웅은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김정은을 보아 왔지만, 직접 대화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긴장감으로 갑자기 목이 마르고 입술까지 타들어가는 듯 했다.
꿀꺽 소리나게 침을 한번 삼키고 재빠르게 혀로 입술을 적셨다.
그리고는 단숨에 조금 전 일어난 사건에 대해 요점만 보고 했다.
임경웅의 보고가 끝나자 수화기 저쪽에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내 짧게 몇 마디의 질문을 했다. 이어 간단한 지시를 내린 후 ‘꽝’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제서야 임경웅은 긴 숨을 몰아 쉬었다.
김정은은 옆에서 걱정스런 얼굴로 대기하고 서있는 비서를 향해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죽었어? 박봉주가? 허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칠흙같이 어두운 창 밖을 응시했다. 그는 함경도 일대를 휩쓸고간 태풍 피해 보고를 받고 골머리를 썩이든 중이었다.
평양의 가을밤은 이렇게 깊어 갔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