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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해석하여 자신의 독특한 생명사상을 펼치거나, 그에 따른 생명운동을 벌이는 데 힘쓰고 있다. 시에서도 정치적 경향의 시보다는 주로 생명사상을 바탕으로 한 담시와 서정시를 쓰고 있다.
1963년 3월 [목포문학] 제2호에 시 <저녁 이야기>를 발표한 뒤, 1969년 11월 김현의 소개로 [시인]에 <황톳길> 외에 시 4편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1970년 [사상계] 5월호에 당시 특권층의 부패상을 판소리 가락을 통해 매섭게 비파난 담시 <오적>을 발표하여 일약 주목을 받았다.
그의 시세계를 크게 네 영역으로 나누어보면, 첫째 초기 서정시로, 현실에 대한 강렬한 부정과 민주주의 정신이라 이름붙인 시집 <남(南), 1982>과 <이 가문 날의 비구름(1988)> 등이 이에 해당된다. 넷째 최근의 서정시 세계로, 초기 서정시의 직설적인 표현과는 달리 달관의 자세로 구도자적 정서를 담은 시집 <애린 1 · 2(1987)> · <별밭을 우러르며(1989)>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1975년 일본 · 미국 · 유럽 등의 지식인과 작가들에 의해 노벨 문학상과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고, 같은해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가 주는 제3세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로터스상' 특별상을 받았으먀, 1981년 세계시인대회에서 주는 '위대한 시인상'과 같은해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위원화에서 주는'크라이스키 인권상'을 받았다. 산문집으로 <밥(1984)> · <남녘땅 뱃노래(1985)> · <살림(1987)> 등이 있다. 정치적 탄압으로 1970년대에 한국에서 펴내지 못했던 그의 많은 작품들이 일본에서 출판되기도 했다.
■ 김지하의 창작노트에서
슬프고 가슴을 찌르는구나. 실로 나라가 어지러워 민중의 삶은 척박하고 괴이하기 그지없다. 독재의 서슬 퍼런 칼날은 민중의 팔과 다리를 짓누르니 베어진 살에서 나온 피가 사방에 넘치는지라,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매 자유로워도 진정 자유로운 것이 아니니, 독재의 칼 앞의 삶은 감옥이고 살이 썩는 뜨거운 여름이로다, 살을 에이는 혹한의 겨울이로다.
그러나 이 감옥에도 창문은 있어, 아침이 몰려와 햇살이 들어 눈을 들어 바라보니 청명한 하늘에 새하얀 구름이 두둥실 떠다니고 그 밑으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산맥이 굽이굽이 흘러 내려가고, 나는 새 한 마리 아주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게야, 울화통이 터질 일일 게야. 저 새마냥 날고자 하는 맘은 묶인 육신에 갇혀 썩은 피로 흘러 내리고 시뻘건 몸뚱아리가 쇠사슬 속에서 꿈틀거리는데, 한순간 스쳐 사라지고 마는 자유의 날개짓, 저 청명하고 푸른 곳을 향해 날아가는 새, '나'를 두고 홀로 간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끝내 죽어서라도 시뻘건 몸뚱아리의 몸부림으로 저 새와 함께 저 푸르른 곳으로 자유롭게 날아갈 것이야. 한낱 미물인 저 새도 저렇게 자유롭게 창공을 날아다니고 있는데, 어찌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이렇게 갇혀 있어야 한단 말인가, '나'를 묶은 자들이여 그렇지 않은가 진정.
새
- 천상병 -
외롭게 살다가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이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 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 <사상계(1959) -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외롭게 살다가 죽을 '영혼의 빈 터'에 새날이 오고 새가 와서 울고 꽃잎이 필 때는 화자가 '죽는 날 / 그 다음 날'이라고 한다. '죽는 날'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단절되는 날이고, 따라서 그에게 세상의 모든 가치가 무화되는 날이므로 죽는 날의 '그 다음 날'은 이제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날이다. 그 때 새가 와서 운다. 그러므로 여기서 새는 화자가 살아 있는 현실의 존재가 아니라, 죽음 이후에 관련이 되는 내세적 존재이다. 그는 세상 사람들의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이 한창인 때에'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가 되어서 '살아서 / 좋은 일도 있었다고 / 나쁜 일도 있었다고 / 그렇게 우는' 것이다. 세상(현세)에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공존하므로 어느 한쪽으로만 쏠리거나 강조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아니다. 좋은 일과 나쁜 일, 즉 현실에서의 희노애락은 그 자체가 지상적 삶의 내용들이다. 그러므로 이 때 새의 울음은 이 모두를 아우르는 자세이다. 죽음 이후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벗어나서 거리를 두고 사물을 보게될 대 관조할 수 있는 자세 - 그것은 어쩌면 도가적 무위의식이나 불가적 무소유 혹은 기독교적 순명의 정신일 텐데, 시인은 그러한 정신으로 세상을 노래하는 것이다.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는 결국 아웃사이더적인 존재, 현실을 벗어나서 가치 초월적인 존재로 세상을 관망하는 자세인 것이며, 이는 젊은 날의 천상병이 이념적이고 동시에 감상적인 자세를 가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천상병의 작품에서 흔히 보이는 감상의 노출은 시인의 시적 자아가 상처받고 있음을 암시한다. 일본에서 태어나 유소년 시절을 보내고 해방 이후 조국에 돌아와 6 · 25 전쟁을 겪고, 4 · 19와 5 · 16의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감수성이 예민한 시인은 한마디로 상처받은 영혼이었다. 그는 자신의 그러한 상처받은 영혼을 새에 투사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새'는 '나'의 죽음 이후에 '나'의 삶과 죽음을 아름답게 노래하는 영혼의 분신 같은 것이다. '새'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어 현실을 초탈하면서도 존재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려는 시인 의식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그의 소박하고도 관조적인 감각이, 순진무구한 하나의 서정적 세계를 이루어 내고 있는 것이다.
◆ 시집 <새>(1971)
이 책은 겉모습부터가 다른 시집하고 다르다. A4 용지만한 크기(4*6 배판 126면)에 자주색 하드커버를 하고 있다. 꽤 고급스런 양장본이다. 왜 이렇게 고급스럽게 시집을 만들었는지 후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1971년 천상병은 알콜 중독과 함께 심한 병환으로 고향으로 내려간다. 아니, 스스로 내려간 게 아니라 친구들이 고속버스를 태워 억지로 내려 보낸다. 그런데 그 뒤, 천상병은 고향집에도 부산 그 어디에도 서울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급기야 벗들은 그가 죽었을 것이라 짐작하며 슬퍼하다가, 천재 시인이 시집 한 권 내지 못하고 죽은 것을 안타까이 여겨 그동안 그가 써온 시들을 모아 근사한 시집을 낸다. 그것이 바로 <새>다.
그런데 5개월만에 서울의 한 정신병원에 나타난다. 아니, 스스로 나타난 게 아니고 새처럼 날아왔는지 어찌된 것인지 아무도 모르게 자신도 왜 자기가 여기에 있는지 모른채 그렇게 세상에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새>는 산 사람의 유고 시집이었던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새>는 1971년판이 아니고 1992년 20년만에 같은 모양 그대로 다시 나온 번각판이다. 살아 있는 사람의 유고시집을 내는 것도, 20년만에 초판본 그대로 번각본을 내는 것도 우리 문학사에 없던 일이라고 한다. 그 귀한 책이 내 손 안에 한 권 있다.
이 시집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잇는 천상병의 시 '귀천'을 비롯해 천상병 시인의 투명한 정신 세계를 느낄 수 있는 시들이 60여 편 실려 있다. 1949년부터 1971년까지. 그러니까 10대부터 불혹의 나이가 될 때까지 쓴 시들을 모은 것이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지우 -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 앉는다.
-<월간중앙>(1981)-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영화관에서 영화를 시작하기 전 '애국가'와 '대한 뉴스'를 상영했었던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 시는 극장에서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나오는 애국가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짧은 순간의 묘사를 통해, 80년대의 폭압적 현실상황에 대한 환멸과 극도의 좌절감을 풍자적 수법을 통해 형상화한 작품이다. 애국가의 가사를 인용하여 진지해야 할 행위를 경박한 행위로 바꿔 놓으며, 영화 관람이라는 일상적이고 사소한 행위를 시대와 현실에 대한 인식이라는 엄숙한 교훈성으로 확대시켜 놓음으로써 현실의 왜곡된 면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풍자를 보여 준다.
이 시의 공간적 배경이라 할 수 있는 '불꺼진 캄캄한 극장'은 암흑처럼 어둡고 침침한 암울한 현실 상황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화면에 비치는 '새떼'들의 자유로운 비상을 바라보면서 자유에 대한 갈망을 잠깐이나마 가져보지만, 애국가가 끝난 후에는 다시 주저앉을 수밖에 없어진다. '새'와 '우리'의 대조적인 상황 설정이 돋보이기도 한다. 즉, 새는 비상하는데 왜 우리는 그러지 못하는가라는 의문이 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다가, 결국 새들처럼 세상 밖 어딘가로 떠나지 못하고 제자리에 주저앉아 버리는 것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 시는 당시 군사 정권의 억압적인 사회 현실 속에서 자유로운 삶을 바라는 지식인의 비판적 태도와 현실적 절망감을 영화관 속의 한 상황을 묘사함으로써 암시하고 있다.
시를 '당대에 대한, 당대를 위한, 당대의 유언'으로 쓰고자 했던 작자가 바라본 1980년대는 죽음과 절망으로 가득찬 곳이자, 차라리 초월해 버리고 싶은 환멸의 공간이었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러한 현실 인식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폭압적 현실 상황에 대한 극도의 좌절감을 풍자적 수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즉 자신이 태어난 조국이 정말로 살고 싶지 않은 곳이라는 환멸적 인식과 함께,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다는 자괴감이 형상화되어 잇는 것이다.
■ 시인 황지우(1952~)
시인. 전남 해남 출생. 서울대 미학과 졸업. 1980년 <문학과 지성>에 '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기존의 시 형식을 탈피하고 일상적인 언어를 과감하게 시화하여 해체시의 틀을 제시하였다. 시집으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 <겨울 - 나무로부터 봄 - 나무에로(1985)>, <나는 너다(1987)>, <게 눈 속의 연꽃(1991)>,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1999)> 등이 있다.
■ 참고자료 : "황지우 시인의 풍자 정신과 모더니즘"
아마도 오늘의 독자들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는 사전의 어떤 의식 없이 곧바로 시작을 알리는 벨소리와 함께 영화를 관람할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가 쓰여진 80년대의 정치적 권위주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영화를 감상하기에 앞서 치르는 의식이 있었다. 애국가의 연주 소리가 시작되면 모든 관객들은 일시에 의자에서 일어나 스크린에 방영되는 영상을 보며 애국가의 연주가 끝날 때까지 기립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좋은 의미에서 국가에 대한 충성과 사랑을 헌정하는 의식 또는 경배라 할 수 있다. 대개는 조국의 번영과 국토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미래에 대한 꿈을 보여 줌으로써 관객들의 애국심을 의식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들이지만, 이 작품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낙동강 하류의 철새 도래지 을숙도의 경관을 보여 주는 영상이다. 수만 마리의 아름다운 철새들이 을숙도의 갈대밭을 차고 푸른 가을 하늘로 날아오르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며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과 조국의 번영과 평화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보여 주는 데 유감이 없는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바로 이와 같은 영화 감상의 풍속을 시적 공간으로 끌어들여 독특한 풍자로서 당대의 우리 삶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클라크에 의하면 풍자란 진지한 것과 경박한 것, 사소한 것과 교훈적인 것, 극히 유치한 것과 고도로 세련되거나 우아한 것 사이를 왕복하면서 우행(愚行)의 폭로와 사악(邪惡)의 징벌을 기도하는 언술이며 넓은 의미로 위트, 아이러니, 비꼬기, 조소, 냉소, 욕설 등이 이 영역에 들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풍자의 기법으로 쓰여진 것이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시의 화자는 객석에서 기립하여 애국가의 경청과 함께 스크린에 떠오르는 영상을 본다. 그의 눈에는 마침 을숙도에서 철새들 수만 마리가 하늘로 비상하는 장면이 들어온다. 그러나 이 광경에서 화자는 본 영화 상영 전의 이 같은 의식이 의도하는 바, 국토의 아름다움이나 조국의 번영, 혹은 안식이 느껴지기보다는 문득 비상하는 저 철새들처럼 자신도 자유롭게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가 멀리 떠나고 싶은 충동에 빠진다. 시적 진술인 까닭에 직접적인 언급은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화자의 이와 같은 의식에는 조국에 대한 사랑이나 충성심보다 혐오감이나 배신감이 팽배해 있음을 독자들은 쉽게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 오세영, '20세기 한국 시의 표정'에서 -
새벽 1
- 정한모 -
새벽은
새벽을 예감(豫感)하는 눈에게만
빛이 된다.
새벽은
홰를 치는 첫닭의 울음소리도 되고
느리고 맑은 외양간의 쇠방울 소리
어둠을 찢어 대는 참새 소리도 되고
교회당(敎會堂)의 종(鐘)소리
시동(始動)하는 액셀러레이터 소리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도 되어
울려 퍼지지만
빛은 새벽을 예감(豫感)하는 눈에게만
화살처럼 전광(電光)처럼 달려와 박히는
빛이 된다. 새벽이 된다.
빛은
바다의 물결 위에 실려
일렁이며 뭍으로 밀려오고
능선(稜線)을 따라 물들며 골짜기를 채우고
용마루 위 미루나무 가지 끝에서부터
퍼져 내려와
누워 뒹구는 밤의 잔해(殘骸)들을 쓸어 내며
아침이 되고 낮이 되지만
새벽을 예감하는 눈에겐
새벽은 어둠 속에서도 빛이 되고
소리나기 이전(以前)의 생명이 되어
혼돈(混沌)의 숲을 갈라
한 줄기 길을 열고
두꺼운 암흑(暗黑)의 벽(壁)에
섬광(閃光)을 모아
빛의 구멍을 뚫는다.
그리하여
새벽을 예감하는 눈만이
빛이 된다. 새벽이 된다.
스스로 빛을 내뿜어
어둠을 몰아내는
광원(光源)이 된다.
-<새벽>(1975)-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물리적, 자연적 시간으로서의 '새벽'을 청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시대의 도래, 또는 시대를 앞서가는 정신으로 상징화하면서 새롭고 정의로운 시대가 열리기를 소망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에서 '새벽'은 자연적, 시간적 때로서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새벽'은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시간이다. 즉, '새벽'을 거쳐야 밝은 세상으로 갈 수가 있다. 이러한 '새벽'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은 곧 새로운 시대 정신을 가진 사람이고, 그런 사람만이 어둠에 묻혀 있는 세계에 빛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선구적인 존재가 된다. 즉, '새벽을 예감하는 눈'만이 '스스로 빛을 내뿜어 어둠을 몰아내는 광원'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시는 '어둠-새벽-빛'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하여, 어둠을 물리치고 빛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새벽을 예감하는 눈'임을 노래한 작품이다. 여기에서 '어둠'은 부정적이고 어두운 현실을, '새벽을 예감하는 눈'은 시대와 역사를 보는 예지와 새로운 시대를 맞으려는 의지를, '빛'은 어둠을 물리치고 새롭게 도래한 시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데, 시적 화자가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새벽을 예감하는 눈'이다. 시인은 이 '새벽을 예감하는 눈'이라는 핵심적인 시구를 반복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선구자적 정신과 의식을 가진 사람만이 새롭고 정의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다는 주제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새벽'을 청각적 심상, 시각적 심상 등을 통해 감각적으로 나타냄으로서 실감을 높이고 있다.
이와 같이 이 시에서 대상을 삼고 있는 '새벽'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인간 역사와 관련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시는 현상으로서의 새벽과 본질로서의 새벽을 구분하고 있다. 현상으로서의 새벽은 우리가 늘상 접하는 새벽인 바, 2연에서는 청각적 이미지를, 4연에서는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그 현상을 그려내고 있다. 본질로서의 새벽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그 새벽을 바라보는 인간(주체)의 이성적 의식과 그에 따른 직관이 필요하다. 곧 누구나 새벽을 맞지만, 누구나 다 새벽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 않음을 이 시는 말하고 있다.
새벽 편지
- 곽재구 -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 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러므로, 끊임없이 자신을 돌이켜보면서 결백한 삶을 추구하는 젊은이에게 있어서 부끄러움이란 그의 양심의 뜨거움에 비례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것에서조차 괴로움을 느낀다.
그러나, 이 시가 보다 높은 경지를 이루는 것은 여기에 다음의 넉 줄이 이어짐으로써이다. 밤 하늘의 맑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들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걷겠다는 담담한 결의는, 자칫 무모한 번민에 그칠 수도 있는 양심적 자각을 성숙한 삶의 의지로 거두어 들인다. 그것은 극히 담담하면서도 의연한 결의와 태도를 느끼게 한다.
별도의 연으로 따로 떨어진 마지막 행은 이와 같은 결의를 시적으로 승화시킨 이미지이다. `오늘 밤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고 했을 때, 이 별의 암시적 의미는 어둠과 바람 속에서도 결코 꺼지거나 흐려질 수 없는 외로운 양심에 해당한다. 그것은 윤동주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젊은 이성의 상징이다. 바로 이 한 줄이 덧붙여짐으로써 양심의 결백함에 대한 그의 외로운 의지는 어두운 밤 하늘과 별, 그리고 바람이라는 사물들의 관계를 통해 더욱 또렷해지는 것이다.
[윤동주의 생애와 시] : 평론가 / 임헌영
1. 윤동주가 시를 썼던 시대인 1936~43년은 온 인류가 시를 외면한 시대였다. 그가 릴케와 프랑시스 잠을 노래했을 때는 포연이 장미의 향기를 쫓고 나귀등에다 탄환을 운반하던 때였다. 그가 즐겨 바라보던 하늘과 바람과 별의 허공엔 공습 경보가 요란하게 울리던 시절이었다.
인간의 역사 중 사람의 생명이 가장 값싸게 거래되었던 시대였고, 자유, 평등, 박애가 군국주의의 넝마주이 집게에 집혀서 오물 처리장으로 실려가던 때였다. 철학자에게는 복종의 철학이 강요되고, 음악인에겐 군가 작곡이 명령되며, 시인에게는 원고지와 펜으로 탄환을 만들 것을 강요하던 시대였다.
이 시대엔 고향을 애절하게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도 죄가 성립되었고, 친한 벗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것까지도 감시를 받았다. 하물며 창씨 개명도 하지 않은 '순이'에 대한 추억이나 '흰 옷'과 '살구나무'와 '희망의 봄'이야 영락없는 불온이었다.
1940년 전후 - 지구는 군가와 화약냄새로 가득 차서 모든 약소 민족은 겟슬러 총독 아래서의 윌리엄 텔처럼 두 개의 화살을 가지고 사과를 겨누고 있었다. 1876년 이후 유럽열강과 미국은 매년 24만 평방마일의 땅을 얻어왔다. 그 결과 1914년에 이르자 지구상엔 거의 모든 약소 민족이 어느 강대국의 한 식민지로 변하고 말았으며, 이것은 194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그래서 이 시대의 문학은 본의든 아니든 식민 종주국의 이익을 옹호하던가 아니면 민족독립운동을 돕던가 둘 중 하나에 봉사하게 된다는 양자 택일의 갈림길에 서야만했다.
한국 문학사는 이 시대를 '암흑기'로 말한다. 시와 소설의 발행고가 가장 낮은 시대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질적인 면에서도 예술적 여과를 거치지 못했으며,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식민 종주국의 이익에 보탬을 준 것이 많아서, 암흑기란 시대적 명칭은 자연스럽게 사용되어 왔다.
시인 윤동주는 바로 이런 암흑기의 몇몇 유성 중 뛰어난 시인의 하나이다. 이 시대에 우리는 어학자 이윤재와 시인 이육사 그리고 윤동주를 함흥과 북경과 후쿠오카의 옥중에서 잃었다.
고문, 영양실조, 동상 그리고 정신적 고뇌 등으로 일관된 하루하루의 옥중생활을 윤동주도 1943년7월, 체포이후 1945년 2월16일, 죽는 날까지 반복했을 것이다. 이 시인의 동생 윤일주의 기록에 따르면 1944년 6월 이후 월 1매의 엽서 쓰기가 허락되었다고 하는데, 아마 이때가 형이 확정된 때로, 그 이전엔 모든 외부와의 연락이나 독서가 금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후 주사를 맞았다고 하는데, 그 내용물은 아직도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으며, 최후의 순간에 큰 소리를 치며 죽었다는 간수의 증언도 그 내용은 알 수가 없다. 이 모국어의 순수 시인이 우리말로 고함 지르고 죽은 심정이야 이해가 가지만 왜 간수에게 일어로 한마디를 남기지 않았을까!
2. 흔히들 시인 윤동주를 저항의 시인이라 부른다. 원래 저항이란 순수 예술의 한 속성이 된다. 일반적으로 저항의 예술과 순수예술을 이원론 적으로 분리시키는 경향이 최근 우리 문단을 지배하고 있는데, 예술이란 그 순수성 자체가 가장 강력한 저항을 나타낸 것임을 수긍해야 될 것이다.
예술적 창조란 말할 필요도 없이 개성의 표현이다. 이 '개성'이란 곧 타아와의 조화와 갈등을 동시에 지닌 것으로 이는 바로 모든 '자기 개성'의 반대자에 대한 조화를 위한 저항이 되는 것이며, 이것이 순수 예술의 본질이 된다.
따라서 저항은 고대 원시예술의 시발점부터 순수예술이 지닌 한 속성이 되어 왔다. 즉 자연에 대한 저항을 나타낸 동굴의 벽화로부터 종교에 대한 저항을 표현한 르네상스시대, 이어 권력과 사회에 대한 근대화예술과 비인간화해 가는 과학에 대한 저항을 보여주는 현대예술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이런 세계사적 보편성으로서의 저항의 문학이 1940년대 암흑기의 한국에서도 독특한 양상으로 나타났으며, 그 중 윤동주의 큰 비중을 차지한다. 위에서 본 저항문학의 주제에 의한 분류와는 달리 이는 문학인의 기능이나 대사회적 자세로 나누어보면 다음 세 가지의 형태를 보게 된다.
첫째는 문학인 자신이 단체나 결사 등에 직접 가담하는 경우로, 이때 그 문학인의 작품은 오히려 매우 서정적일 수도 있다.
둘째는 일시적인 의무나 지원 세력으로 어떤 단체나 운동에 뛰어든 경우가 있다.
마지막 셋째는 직접운동권에 가담하거나 지원하지는 않으면서도 순수한 문학작품으로 정서적인 저항을 시도하는 예가 있다.
이런 세 가지 형태의 저항적 자세는 세계 문학사에서 얼마든지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우리의 짧은 문학사에서도 첫 번째에 해당하는 예로는 이육사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지하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면서도 지극히 서정적인 작품을 남긴 좋은 본보기가 된다. 두 번째 경우는 이상화, 한용운이 항일운동에 참여한 것을 들 수 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바로 윤동주나 김소월 같은 시인으로, 자칫하면 이런 시인에 대한 저항의지를 묵과해 버릴 수도 있을 만큼 그 작품은 깊은 서정과 민족 정서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래서 오늘의 우리는 윤동주에게 왜 윤봉길이나 안중근처럼 되지 못하고, 아니 하다 못해 이육사처럼 비밀 결사에라도 참여하지 못했느냐는 추궁은 할 수 없으며, 이런 시가 지닌 진정한 가치를 재음미, 평가하는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옥사 그 자체가 윤동주의 시문학 전체를 대변해 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의 순수한 시가 곧 역사적 저항의지의 표현으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치 인류사에서 가장 혹독했던 짜르 치하에서 가장 찬란했던 문학이 창조되었듯이, 1940년대의 혹독한 식민 통치 아래서 우리의 순수 저항시는 태어났던 것이다.
이런 시대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저항의 시는 진정한 영혼의 고통을 겪는 사람만이 아는 순수한 고뇌의 절규가 스며 있으며, 그 끝간데 모를 고뇌의 깊이 속에 '순수 저항시'의 참된 가치가 스며있다. 이런 시는 누구를 선동하지는 않으나 감동을 주며, 울리지는 않으나 가슴을 찌르며, 취하지는 않으나 각성제가 된다.
윤동주의 저항시도 바로 이런 각도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원하는 삶의 최소공약수를 빼앗긴 시대를 배경으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혁명이니, 평등이니, 자유니 하는 어마어마한 이상들은 내일의 시인에게 남겨 두고서 그는 오직 하나의 평범한 약소 민족의 생활인으로서 열심히 살고자 했을 뿐이었다.
이 평범한 꿈-"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며, 별과 어머니와 소녀와 서정 시인을 그리며 살고자 하는 꿈이 허락되지 않았을 때 그는 하는 수 없이 저항시인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 윤동주의 이런 순수한 약소 민족의 서정적인 삶의 추구 자세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가장 쉬운 해답을 우리는 멀리 북간도에서 찾을 수 있다. 1886년, 증조부 때부터 북간도로 이주해 간 윤동주는 짧은 생애 중 모국이라고는 학창 시절 4~5년 정도밖에 있어 보지 못한 영원한 방랑자 였다.
새봄이 다 가도록 / 기별조차 없는 님
가을밤 응신까지 / 또 어찌 참을래요
두만강 눈 얼음은 / 다 풀리어 간다는데
새봄은 아니오라 / 열 세 봄 넘어와도
못참을 나랴마는 / 가신 님 날 잊을까
강남의 연자들은 / 제집 찾아 다 왔는데
(간도 이민 민요 '기다림')
기온의 차이가 극심한 대륙, 근대 이후 배일 사상의 온상지였던 땅, 일본력이 아닌 단군기원을 공공연히 사용하며 헌옷을 입고 추위에 동포들이 떨며 청국인 지주와 일본 군인들에게 이중으로 혹사당하던 원한과 설움과 서정과 꿈과 웅지의 옛 땅 -- '총독부 문서 1912년 청국 국경 부근 관계 사건철'에는 간도로의 조선인 이주 원인을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즉 토지가 비옥해서 생활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가는 것, 항일 및 망명 이주, 기독교 연구 전파 등등.
할아버지 때부터 기독교를 믿었다고 전하는 윤동주는 이런 독특한 환경 속에서 민족 고유의 순수한 정서를 그리워하면서 자랐을 것이며, 특히 문학 청년 시절에 백석의 '사슴'을 통하여 한민족의 서정을 익혔기 때문에 나중 일본에 가서도 민족 정서를 잊을 수 없었으리라.
3. 이처럼 행동적 저항보다 순수한 민족 정서로서의 저항시인인 윤동주는 시를 통하여 1) 조국만가와 조국 부재의식, 2) 민족적 피해의식 3) 민족적 저항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굳이 따진다면 이 세 가지는 다 민족적인 정서의 순수 저항으로, 독립이나 조국에 대한 열망에까지 확대 해석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바람이 부는데 /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불어'에서)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
('별헤는 밤에'에서)
위의 인용에서처럼 시인 윤동주는 '시대를 슬퍼한 일도'없고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하늘의 별을 헤일 수 있는 약소 민족의 이방인의 한 민감한 청년으로 살았다. 따라서 그의 시를 너무 도식적으로 해석하여 '흰 옷'은 민족의 저항을 '봄'은 해방을 상징한다는 식의 풀이는 버려야 할 것이다. 이런 단견적인 비평은 자칫하면 우리의 민족이 지닌 보다 근원적인 정서의 저항성을 속류화 시킬 소지가 없지 않다. 따라서 윤동주가 지닌 시 세계에서의 저항의식은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북간도 이주민의 윤택하지 못한 생활 정서를 노래함으로써 우리 민족 정서의 한 영역을 확보해 주었다. 시계도 없는데 애기가 울어서 새벽을 안다는 '애기의 새벽'이나, 장에 가는 엄마를 내다보려고 손가락에 침을 발라 문을 쏘옥쏘옥 뚫는 '햇빛.바람'등은 평범하면서도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소년적 정서를 잘 전해주고 있다. 또 프랑시스 잠의 영향을 많이 받은 당나귀와 시골 풍경의 차분한 묘사는 북간도의 추위를 녹여주는 가작들이다.
특히 이와 같은 생활적인 서정시 속에서 우리가 높이 평가해야 될 점은 궁극적으로는 허무주의가 아닌, 생에 대한 애정과 긍정적 자세가 스며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소년적인 정서의 탈을 벗고 보다 민족적 정서의 원천적인 시로서의 저항의 세계로 돌입하는 모습이 다음에 나타난다.
한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무서운 시간'에서)
이런 자괴와 겸허속에서 이 시인은 민족의 슬픔을 깊숙이 맛보며 현실과의 대결에서도 항상 자성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 그래서,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쉽게 씌어진 시'에서)
라고 하면서도,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자세로 '나팔소리 들려올 ' 새벽과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 흘릴 날을 기다리면서 지조 높은 개가 어둠을 짖는 소리를 들으며 짧은 생을 끝냈다.
이처럼 동주의 시는 간도로 간 조선인의 정서와 식민지 조선인의 서정을 노래한 것으로, 그 저항의식을 나타냈다. 그의 저항시가 가진 특징 중 우리가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기독교와 관련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를 크게 노출시키지 않았다는 점과 복고주의적인 정서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 기독교는 물론 우리나라 민족의 저항세력에 도움을 주기는 했으나 근본적으로 민족적 전통의 정서와 많은 갈등을 겪어왔는데, 윤동주는 이를 극복하여 종교보다 민족적 정서를 우위에 둔 훌륭한 시인이었다. 또 복고주의 역시 간도로 이민간 사람들 속엔 상당히 간직되었고 당시의 군국주의적 식민지 치하에서도 공공연히 자행되었건만, 이를 극복하며 새 시대의 민족적 정서를 노래해 주었다. 그러기에 윤동주의 시가 오늘의 독자에게도 신선감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4. 그렇다면 윤동주의 시와 그의 저항은 우리 문학사에서 어떤 위치에 서게 될까. 위에서 본 것처럼 그는 저항의 자세 중 순수한 서정적 작품으로 저항을 시도한 이른바 예술적 저항의 시인으로서 한 표본을 이룬다. 이런 계열에 속하는 다른 시인으로는 김소월을 들 수 있는데, 윤동주는 소월에 비하면 보다 진한 저항의 체취가 묻어 나온다. 다만 민족적 공동운명체로서의 정서는 소월이 단연 으뜸이며, 이 점에서는 동주는 그에 뒤진다.
원래 예술에서의 저항이란 가장 전염력이 강하려면 서정성을 지녀야 되는 것이다. 흔히들 전투적 선동성을 저항문학의 제일로 삼는 예가 있으나, 대중적 내지 민중적 저항의 유발엔 짙은 서정이 더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다. 코자크 부대가 폴란드를 침략했을 때 쇼팽의 피아노를 박살내어 땔감으로 쓴 것은 가냘픈 그의 음악이, 그 환상적이고 아름다우며, 서정적인 선율이 어느 독립군가보다도, 폴란드 인에게 애국심을 강력히 호소했기 때문이다.
윤동주가 오늘의 독자에게 깊은 감동과 호소력을 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의 서정성에 있다는 사실은 오늘의 민중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 설정에 많은 암시를 준다고 하겠다.
서울길
- 김지하 -
간다
울지 마라 간다
흰 고개 검은 고개 목마른 고개
팍팍한 서울길
몸 팔러 간다
언제야 돌아오리란
언제야 웃음으로 화안히
꽃피어 돌아오리란
댕기 풀 안쓰러운 약속도 없이
간다
울지 마라 간다
모질고 모진 세상에 살아도
분꽃이 잊힐까 밀 냄새가 잊힐까
사뭇사뭇 못 잊을 것을
꿈꾸다 눈물 젖어 돌아올 것을
밤이면 별빛 따라 돌아올 것을
간다
울지 마라 간다
하늘도 시름겨운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길
몸 팔러 간다
-시집 <황토>(1970)-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1960년대 말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도시로 떠나야만 했던 이농민들의 아픔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몸 팔러 간다', '팍팍한 서울길', '하늘도 시름 겨운 목마른 고개 넘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서울로 가는 그 길은 결코 가고 싶지 않은 길이며 가기 힘든 길이다. 화자는 서울이 '모질고 모진 세상'임을 알고 있고, 그곳에서 고향을 그리워하기만 할 것이며 자신은 몸을 파는 일을 할 수밖에 없음을 직시하면서 그곳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 나타난 것은 경제 부흥의 기치 아래 추구해 온 산업화로 인해 상실되어 가는 농촌의 삶이다. 시인은 이를 통해 우리가 걸어 온 산업화의 길이 우리의 전통적 삶의 아름다움을 앗아가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우리 농촌은 왜곡된 경제화 정책과 농촌이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으로 말미암아 서서히 쇠퇴 일로를 걷기 시작하였다. 그로 인한 농민들의 대규모 이농(離農) 현상과 농촌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하게 되었다.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도시로 몰려간 농민들은 단순히 노동력만을 파는 것을 지나 여인들은 몸을 팔게 되었음은 물론, 결국에는 농촌의 삶 또는 그들의 정신마저 도시에 팔게 되는 비극적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이농 현상은 단순히 농촌만의 문제가 아닌, 전 국민적 관심사로 대두된 동시에 한국인 모두가 고향을 잃어 버리게 됨으로서 심각한 고향 상실 의식을 갖게 되었다.
삶의 원형적이고 화해로운 질서로서의 고향 공간은 사라져 버린 대신, 시멘트로 대표되는 획일적이고 비인간적인 도시 문화만이 이 땅에 남게 되었다. 이 시는 바로 이러한 이농 현상과 그로 인한 농촌 문화의 붕괴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서글픔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시의 표현은 '간다 / 울지 마라 간다'는 구절의 세 번에 걸친 반복에 초점이 놓여 있다. 이 구절이 작품의 서두, 중간, 결말 부분에 놓여 시상을 개폐시킴은 물론 시상을 응축시키는 기능도 갖고 있다. 몸을 팔기 위해 서울로 가야만 한다는 표현은 그 결연한 의지만큼이나 상대적으로 서글프고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냄으로써 비장한 느낌을 전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의 묘미는 이러한 단호함과 비장함이 한데 맞물려서 서로 밀고 당기는 것에서 시적 긴장이 생겨나는 것이며, 그 긴장의 구도가 세 번씩이나 반복되며 주제를 강조시키고 있다.
한편, 화자는 서울에서 일용 노동자로서 힘겨운 삶을 살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몸 팔러 가'는 상황으로 표현함으로써 더욱 비감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한편, 수출 주도형의 경제 구조 지탱을 위한 저임금과, 농민들에 대한 정부의 저곡가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언제 돌아온다는 약속도 할 수 없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결혼을 맹세할 수도 없이 막막한 심정으로 고향을 떠나 '모질고 모진' 서울로 향해 가는 무거운 발걸음이지만, 결코 고향의 '분꽃'과 '밀냄새'는 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고백 속에는 화자의 회한과 분노가 짙게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지하 시인의 시는 원초적 삶을 영위하는 데 저해되는 현실을 강렬한 언어로 비판한다.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체념에 떨어지지 않고 깨어 있으려는 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노력을 보여준다. 올바른 삶의 회복을 희구하는 그의 시는 비극적인 삶의 체험을 처절하고도 절제된 언어로 표출한다. 사회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 풍자시 「오적」을 『사상계』에 발표하게 되는데, 구비문학의 풍자 정신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의 부패와 거짓을 신랄하게 질타한 이「오적」과 더불어 「비어」는 장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된다.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으나 보석으로 풀려나기도 했다.
서울꿩
-김광규-
서울 특별시 서대문구
한 모퉁이에
섬처럼 외롭게 남겨진
개발 제한 구역
홍제동 뒷산에는
꿩들이 산다.
가을날 아침이면
장끼가 우짖고
까투리는 저마다
꿩병아리를 데리고
언덕길
쓰레기터에 내려와
콩나물대가리나 멸치꽁다리를
주워 먹는다.
지하철 공사로 혼잡한
아스팔트 길을 건너
바로 맞은쪽
인왕산이나
안산으로
날아갈 수 없어
이 삭막한 돌산에
갇혀 버린 꿩들은
서울 시민들처럼
갑갑하게
시내에서 산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1983)-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개발에 떠밀려 서울의 한 개발 제한 구역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꿩들의 모습을 통해 도시 문명 속에서 갑갑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비애를 노래한 작품이다. 꿩 가족의 비참한 모습을 객관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도시 문명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 더 읽을 거리기
김광규 시인은 평이한 언어와 명료한 문장으로 일상적인 소재에 깊은 내용을 담아 내고 있어, 그를 흔히 난해시에 식상한 독자와의 통교(通交)를 회복시킨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시 역시 일상적 삶에서 소재를 취해 도시 문명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찌들린 삶을 살아야 하는 도시인의 비애를 서울꿩에 빗대어 노래하고 있다.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고 현실에 얽매어 본성을 잃고 살아가는 도시인의 아픔을 적절하게 형상화한 시로,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와 발상과 표현면에서 유사성을 띠고 있다.
이 시는 홍제동 개발 제한 구역에 사는 꿩들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담담하게 보여주는 형식을 띠고 있다. 하지만 시의 구석구석에 사용된 시어들, 예를 들어 '섬처럼 외롭게 남겨진', '개발 제한 구역', '쓰레기터', '콩나물대가리', '멸치꽁다리' 등을 사용하여 꿩이 처한 처지를 제시함으로써 개발에 떠밀린 꿩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는 자연물의 대표적 대상인 '꿩'과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이루어지는 '문명의 자연 파괴'가 대립적으로 형상화되고 있으며,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 문명의 잔혹함을 보여주고 있다.
'장끼(아버지)'와 '까투리(어머니)', 그리고 '꿩병아리(아이)'로 형상화한 꿩 가족이 '쓰레기터에 내려와 / 콩나물대가리나 멸치꽁다리'를 주워 먹는 모습은 문명에 의해 훼손되어가는 자연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것이면서도, 현대 사회에서 소외되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 시에는 꿩들이 원래 자기들의 보금자리였던 서울이 인간의 거처가 되어 파괴되면서 불쌍한 처지가 된 모습을 '지하철 공사로 혼잡한 / 아스팔트길'에 가로막혀 있다는 표현을 통해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런 무자비한 개발로 인한 자연의 훼손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 작품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비판한 것은 아니지만 도시화로 삶의 터전을 잃은 꿩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인간의 욕망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홍제동 뒷산에 모여 사는 꿩들은 쓰레기통을 뒤져 먹고 살며 자유롭게 움직이지도 못하며 갑갑하게 산다. 더욱이 '갇혀 버린 꿩들은 / 서울 시민들처럼 / 갑갑하게 / 시내에서 산다.'고 말함으로써 자연을 훼손한 대가가 자연의 한 구성 요소인 인간들(서울 시민)에게까지 미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서울에 사는 평강 공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