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에 얽긴 추억들 3
17세기에는 7.4%의 양반이 1958년에는 48.6%로 증가했다고 하니 자화자찬 격이며 당(唐)나귀를 타고 머슴에게 고삐를 잡혀야 양반으로 행세를 했고 가장 활동적인 옷과 거리가 먼 장죽(長竹; 긴 담뱃대)을 입에 물고 도포(소매가 커서 물건을 넣고 다님)를 입고 통영(경남에 위치)갓을 쓰는데 말총(horsehair)으로 만들어 자칫하면 망가지는데 노동과는 거리가 멀게 치장을 한 사람들이 행세를 할 때 이었고 비가오더라도 뛰면 아니 되고, 언제나 천천히 걸어야 품격을 갖추는 것이고 ‘양반은 짚불은 안 쪼인다.’라는 말도 있는데, 처음 대하는 사람이라면 상스럽지 않으려고 말끝에 “여쭈어라”라는 말을 삽입 하여 중간에 하인을 통하여 말을 전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던 시절도 있다.
경주김씨 시조 김알지는 금함(金函)에서 나왔다고 하여 김(金), 박씨는 고허촌장 소벌공에게 발견된 박과 같은 알에서 나왔다고 박(朴)인데 신화이지만 그레도 배꼽은 있을 것 이라는 추측이며 역사책의 구지가(龜旨歌)에 보면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아니옷 내여는 구워서 먹을래.”로 되는데 여러 부족들이 왕을 갈망해서 나온 노래이며 머리수(首)에서 온 김수로(金首露)왕이라 칭한다.
고려 중기 문종 9년(1,055)에 ‘성이 없는 사람은 과거볼 자격을 주지 않았다’하는 것을 보면 이때부터 성을 쓰기 시작한 시기로 보며 조선 초기 까지 천인계급에서는 성을 쓰지 않았다고 하며 태조는 신라인 김씨가 권능(權能)으로 보필하여 권(權=저울추, 권세; 권력과 세력으로 통한다)씨성을 하사하여 안동권씨의 시조라고 하며 동국여지스람에 그때 목천(木川)사람들이 자주반란을 일으켜 미워하여 성을 주었다는데 우[소牛(于氏)], 상[코끼리象(尙氏)], 돈[돼지豚(頓氏)], 장[노루獐(張氏)]등으로 고쳤다고 하며 이웃집을 말 할 때 무슨 ‘댁(宅)’이라고 벼슬이름이나 시집오기전의 고향마을 이름에 댁 자만 부치면 누구의 집인지를 알 수 있었으나 비천한집사람들은 택호(宅號)를 갖지 못한다.
이름이 천할수록 오래 산다하여 아이들의 이름을 붙인‘개똥이 엄마’, ‘점백이 아버지’등으로 통하는데 아들을 낳으면 머슴아이라고 천명(賤名)으로 부르며 남자는 또 태어나라고 또(又, 또우)자를 써서 또출(又出), 또바위(又岩)등이며, 여자아이도 계집(집에 계시다 에서온 말)아이라고 낮잡아 부르며 그만 낳으라고 끝(末, 끝말)자를 써는데 남자아미는 '끝생[末生]가 되고 여자라면 '끝남이(末妊; 말임, 아이밸 임)', 만약 계집종이라면 들어온 달을 부쳐 1월이면 ‘일월이’, 3월이면 ‘삼월이, 4월이..... .’가 된다.
내사 들어본 말 중에서 가장 어색한 말은 김천의 옆집 아주머니의 말로 기억이 잘 안날적에 “거석이 아들 머석이”가 된다
아이들 이름은 천할수록 오래 산다하여 돌쇠[石鐵(호적상)] 막둥이(末生,) 일본사람들의 이름도 허드레로 부르기는 비슷해서 다나까(田中; 밭 가운데), 나까무라(中村; 중간 동내), 도요다(豐田; 풍년드는 밭, 도시이름, 일본에는 산이 많아서 밭이 많으니 '다:田'을 많이사용하는데 차이이름 중 '혼다', '미스다' )등 자연을 택하며 고려시대의 장가(長歌), 사모곡(思母曲)에 ‘어마님 티 괴시리. 없闖라.’라는 구절이 있는데 ‘괴다’는 ‘사랑한다’의 옛말이고 가요곡에 가장 많이 실리며 일본어의 ‘고이(こい)’가 된다하여 아마도 구전으로 내려오는 동족일것 이라는 말을 뒷받침 한다는데 물을때 마다 끝에 한국어에도 있듯이 ‘까?’ 가 들어가는데 ‘데스까?’(입니까?), ‘이마스까?’(있습니까?)등도 일환일까?
어른들이 해방 후 일어를 혼용했는데 한소대[반소매], 한따이[반대], 한게끼[반격], 나라비[정렬], 돈내기[도급], 소지[청소], 메가네[안경], 고바이[물매], 니꾸사꾸[륙색], 도꾸이[단골], 도라무깡[드럼통], 가라[거짓, 가라오케(거짓 오케스트라)]등이 있다.
곁머슴은 밥과 옷만 얻어 입지만 상(上)머슴이라면 새경(私耕:연봉)으로 벼 100말(斗, 10섬, 쌀 10가마니에 해당하는데 너무 적다)을 받게 되며 그나마 가족이 많은 사람은 선(先)새경 이라 하여 앞당겨 받으니 고용상의 빚이 되어 평생 고용살이를 면할 수가 없는데 게다가 부모처자가 있으면 글도 가진 돈도 없는 몸이 되어 각질 성곽속의 멍게 마냥 옴짝달싹 할 수도, 시골을 떠난다는 것도, 불가능이니 이들의 자녀를 상급학교에 보낸다는 것은 어림 반 푼(엽전 한 잎 의 반)어치도 없다.
채권 장수는 손가방을 들고 채권, 달비채(긴 머리카락), 은비녀들을 사며 동네 골목골목을 기웃거리고 엿장수는 도부(到付; 장사치가 물건을 가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팖)치면서 가위소리를 절컹절컹 울려 그가 왔다는 것을 알리는데 삼배로 된 헌옷이나 닳아빠진 고무신, 쇳조각, 빈병, 곡식 등을 엿과 바꾸게 되며 인단 비누, 바늘, 단추, 머리핀, 인두, 동정 속, 검정비누, 양잿물, 나프탈렌, 가짜 옥비녀 등 잡화를 팔며 엿은 주걱을 가위로 쳐서 조각을 떼어내는데 크고 작은 것은 그의 마음에 달려 있으니 지금도 ‘엿장수 맘 데로.’ 라는 말을 쓴다.
지금도 아이들이 엿이나 과자류를 선호하는데 그들에게는 필요한 당분의 공급원이다.
사람들은 미투리를 소금물에 적셔서 꿉꿉하게 만들어 신으며, 멀리 갈 때는 아예 스페어 신을 봇짐밑에 메어달고 떠나며 운동을 할 때는 벗겨지니 운동화가 나왔는데 가난한자들은 끌고 다니는 나막신(게다), 중간층은 검정 고무신, 가진 자는 생고무 바닥의 백(白)고무신을 신었는데 그 당시 이승만(미국인들은 “싱맨 뤼” 라 부름)대통령도 신고 김천에 왔단다.
내가 워싱턴 지하철회사에 다닐적에 나보다도 나이기 더 많은 동료는 1875년에 출생을 하여 90세를 산 ‘Syngman Rhee'를 기억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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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을 만들고나니 누군가가 철사고리를 훔쳐갔단다.
그 당시 '독닙신문' 후배 '독립신문'의 기사란다.
미국인들은 중국글은 페이지가 뒷쪽에서 시작을 하며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것이 우습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