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윤숙(1909~1990)
개성 호수돈여고 졸업, 이화여전 영문과 졸업.
이광수의 문단제자.
간도용정명신여학교 교사.
서울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이승만을 만나면서 빛을 발하여 외교활동을 전개,
UN한국임시단장인 메논을 꼬드여
남한만의 총선거를 통한 단독정부수립을 유도한다.
1951년 부산 피난지에서 ‘낙랑클럽’을 조직하여 한국정부와
미군장성 주한 외교사절을 잇는 로비활동을 했다.
국제펜클럽, 반공대회 주도 등 친이승만에서
친박정희로 옮겨타며 화려한 이력을 쌓아갔다.
줄을 만들 줄도 알고, 줄을 탈 줄도 알았다. 성공을 향한 본능적 촉이 좋았던 모양이다.
굵직한 요직과 대표를 거쳐가며 부와 명예를 다 쓸어담고 살다가 죽었다.
국민훈장모란장,대한민국예술원 원로회원,
죽어서는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문예』를 주도한 모윤숙(毛允淑, 1909~1990)은
함남 원산의 독실한 크리스토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마루도 없는 부엌 한 칸, 방 두 칸짜리 초막집 부뚜막에서 밥을 짓던
그의 어머니는 갑자기 산고(産苦)를 느끼고 그 자리에서 모윤숙을 낳는다.
모윤숙은 원산보통학교 2~3학년 때 자신의 이런 출생 일화를 소재로
「생일과 아궁이」를 비롯해 「해당화」 · 「명사 십리」 · 「죽음」이라는 시를 써서
작문 교사를 놀라게 한다.
이후 모윤숙은 함흥 영생보통학교, 개성 호수돈여학교, 이화여전 영문과를 거치며
이광수를 비롯해 테니슨 · 셸리 · 키츠 · 번스 · 롱펠로 등의 작품을 탐독한다.
이화여전 3학년 마지막 학기 때는 학생회 회장으로 뽑혀 비밀 결사를 주도하고
교지에 애국시를 발표해 종로경찰서 사찰계 주임의 감시를 피해 다니는 등
능동적인 학창 시절을 보낸다.
졸업 전인 1932년 모윤숙은 『동광』에
「검은 머리 풀어」라는 시를 선보이며 문단에 나온다.
이어 「조선의 딸」 · 「이 생명을」 등을 내놓는데,
시들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경기도경찰서에서 구류를 살기도 한다.
간도 명신여고와 서울 배화여고 교사 등을 거쳐 『삼천리』 기자로 입사한 그는
‘시원’ 동인으로 활동하는 한편 ‘극예술연구회’에 가담,
체호프 작 「앵화원」의 라네프스카야 역을 맡아 무대에 서기도 한다.
이 무렵에 모윤숙은 여학교 시절부터
문학적 연모의 대상으로 가슴에 품어오던 이광수를 처음 만난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있던 이광수 또한 그에게 호의를 느껴 영운(嶺雲)이라는 호를 선사하고 첫 시집 『빛나는 지역』의 서문을 써주기도 한다. 모윤숙은 이화여전 동창회 후원으로 열린 『빛나는 지역』 출판 기념회를 계기로 최정희 · 이선희 같은 여성 문인들을 비롯해 김광섭 · 이하윤 · 함대훈 · 유치진 등과도 알고 지내게 된다.
얼마 뒤 모윤숙은 이광수의 중매로 독일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돌아온 안호상과 만나
화촉을 밝히고 딸도 하나 낳는다.
그러나 모윤숙이 열정과 감성을 앞세우는 반면
남편인 안호상은 이성과 지성에 치우치는 성격이어서
두 사람은 이윽고 서로 겉돌게 된다.
그의 남편은 누구 못지않은 애국자일 뿐더러
독일에서 헤겔을 전공하고 돌아온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지만,
집안에서는 가부장의 권위를 내세우며 여성을 비하하는 일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남편의 이런 태도에 환멸을 느낀 모윤숙은 곧 그와 별거에 들어간다.
1937년 모윤숙은 그 동안의 아픔과 공허를 쏟아부어
일기체 산문집 『렌의 애가(哀歌)』를 발표한다.
이렇게 시작되는 모윤숙의 연시집 『렌의 애가』는 나오자마자 장안의 화제가 된다.
‘시몬’을 향한 애정을 통해 자아를 발견해가는 여성 ‘렌’의 상념을 감성적인 언어로 표현한 이 글에서 ‘시몬’이 누구인가 하는 게 관심의 초점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시인 스스로 ‘시몬’은 실재하는 어떤 남성이 아니라 현실 속에는 없는,
영원한 이상형의 남성이라고 해명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좀처럼 믿으려 들지 않는다.
‘렌’은 아프리카의 밀림에서 일생 동안 짝을 부르며 목이 타도록 혼자 울다가 쓸쓸히 죽어간다는 새다. 이 ‘렌’이라는 새는 모윤숙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연서(戀書) 문학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렌의 애가』는 당시 덤핑판을 제외하고도 46쇄를 찍을 만큼 인기를 끈다.
1940년대에 접어들며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모윤숙 또한 일제에 협력하게 된다.
1941년 10월에 출범한 ‘조선임전보국단’에 들어간 그는 이내 친일 행각을 노골화한다.
같은 해 12월 27일 부민관 대강당에서 열린 ‘결전 부인 대회’에 참가한
그는 박순천 · 박인덕 · 김활란 등과 함께 연사로 나서
“미영(美英)을 격멸할 자는 아세아요, 대일본제국이요,
국가의 뒤에서 밀고 나가는 원동력은 아내요, 어머니이다.······
여성의 머릿속에 대화혼(大和魂)이 없고 보면
이 위대한 승리의 역사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라고 열변을 토한다.
곧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는 ‘조선교화단체연합회’의 이름으로
전국 39개 도시에 ‘부인계몽독려반’을 보내는데,
이 때도 모윤숙은 함흥 · 원산 · 북청에 가서 학도병 출진을 부추긴다.
해방이 되자 모윤숙은 앞에 놓인 여러 길 가운데
남한 정부를 지지하는 우익 문단 쪽에 발을 들여놓는다.
『렌의 애가』로 거둔 명성이 이어지던 차에 반공을 앞세운 그의 열렬한 문학 활동은
이내 정치권에까지 알려진다.
모윤숙은 당시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던 이승만의 부탁을 받고
유엔한국위원단 위원장인 크리슈나 메논을 설득하러 나선다.
메논은 인도 사람으로 처음에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는 현존하는 적대 관계를 심화시켜 한국의 영구 분단을 초래할 것”이라며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한다.
그러나 모윤숙을 몇 차례 만난 메논은 자국 정부의 뜻까지 거스르며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를 역설하게 된다.
유엔에 가기 전날 밤 그를 이화장으로 데려가 이 박사를 지지하는 서명이 든 두루마리를 그의 주머니에 넣어줄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우정과 국가의 운명이 이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감격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일 나와 메논 씨와의 우정이 없었다면 남한만의 단독 총선은 아마 없었을지도 모른다.
모윤숙, 『회상의 창가에서』(중앙출판공사, 1968)
이후에 모윤숙은 유엔 총회를 비롯해 해외에서 열리는 갖가지 국제 회의에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한다.
창작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아 1947년에 시집 『옥비녀』를 펴내고,
1949년에는 월간 문예지인 『문예』를 창간하는 저력을 발휘한다.
1950년에 이르러 6·25가 터지자 모윤숙은 피난 대열에 끼지 않고 끝까지 남아
“곧 미군이 오니까 안심하라.”고 외쳐댄다.
그러나 곧 인민군이 벌떼처럼 밀려든다.
할 수 없이 그는 보따리를 인 아낙네로 변장,
경기도 광주의 한 초막집으로 숨어들어 식모살이를 하며 인공 치하에서 3개월을 보낸다.
이 때 눈앞에서 인민군의 총에 맞아 쓰러져가는 국군을 보며
그의 반공 정신은 더욱 투철해진다.
이런 일을 겪고 나서 모윤숙의 시는 한결 현실 참여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 누른 유니폼 햇빛이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구나 /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나온다 /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 나는 죽었노라.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 / 질식하는 구름과 원수가 밀어오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 드디어 드디어 숨지었노라
모윤숙,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 부제 : 나는 광주 산 속을 헤매다가 문득 혼자 죽어 넘어진 국군을 만났다」, 『풍랑 ― 전쟁 편』(일문서관, 1953)
이듬해 1·4후퇴 때는 모윤숙도 다른 이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한다.
그는 피난지에서 『문예』의 부정기 간행을 위해 애쓰고, 세 번째 시집 『풍랑』을 펴낸다.
휴전 뒤, 모윤숙의 대외 활동은 다시 눈부시게 펼쳐진다.
해외 시찰을 하고 돌아온 그는 1954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창립에 앞장선다.
1955년 그는 ‘한국자유문학가협회’ 시 분과 위원장과 ‘문총’ 최고 위원으로 선임된다. 1957년에는 국무부의 초청으로 미국 문화계를 둘러본다.
그는 이 때 로버트 프로스트 · 메리엔 무어 · 엘리자베스 비숍 등
당대의 문호들을 만나고 돌아온다.
이 밖에도 그는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위원장, 아시아 반공 대회 한국 대표,
세계 여성 대회 한국 대표 같은 갖가지 직함으로 나라 안팎을 넘나들며 활동한다.
모윤숙은 그 와중에도 1959년 네 번째 시집 『정경(情景)』을 펴내고,
1960년에는 수필집 『포도원』을 내놓는다.
1960년 4·19와 1961년 5·16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그는 날개가 꺾이고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대외 활동에 치중한 나머지 오랫동안 소홀하게 다룬 부분들이
하나둘씩 문제로 불거지는 것이다.
문예빌딩에 이어 회현동 집까지 빚과 세금으로 넘어가는가 하면,
그가 믿고 맡긴 통장에서 은행 지점장이 예금을 빼돌렸는데도 소송할 돈이 없어
포기하는 등 그는 경제 면에서 어려움에 빠지며 고통을 겪는다.
다행히 해방 전부터 거듭 찍어낸 『렌의 애가』 열기가 지속되어
여기서 나온 인세 수입으로
서울 성동구 화양동에 집과 대지 340여 평을 장만해 위기를 넘긴다.
1970년 그는 ‘한국문인협회’ 부위원장을 역임하며 시집 『풍토』를 펴내
국민 훈장 ‘모란장’을 받고, 1971년에는 공화당 전국구 국회 의원이 되기도 한다.
1973년 그는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장에 추대되며,
1974년에는 시집 『논개』와 『모윤숙 시선집 I · II』를 잇달아 펴낸다.
그는 1979년 서사시 「황룡사 구층탑」으로 ‘3·1 문화상’을 차지하고,
세네갈 정부로부터 문화 훈장을 받는다.
1980년에는 「렌의 애가」를 비롯한 대표작 60편이
미국 뉴욕의 라치우드출판사에서 영역 출간된다.
같은 해 고혈압으로 쓰러진 모윤숙은 병상에 있는 동안에도 계속 시를 써서
1983년 시집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를 펴낸다.
문학뿐 아니라 정치 외교 분야와 여성계에서도 맹활약을 펼치던
이 신여성은 반신 불수 상태의 삶을 이어가던 끝에 1990년 6월 세상을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