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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히 계세요 도련님.
지난 오월 단옷날, 처음 만나던 날
우리 둘이서, 그늘 밑에 서 있던
그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같이
늘 안녕히 안녕히 계세요.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춘향의 사랑보단 오히려 더 먼
딴 나라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천 길 땅 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어요?
더구나 그 구름이 소나기 되어 퍼부을 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여요.
- 서정주 시 ‘춘향유문-춘향의 말3‘모두
신령님...
처음 내 마음은
수천만마리
노고지리 우는 날의 아지랑이 같었읍니다
번쩍이는 비눌을 단 고기들이 헤염치는
초록의 강 물결
어우러저 날르는 애기 구름 같었읍니다
신령님...
그러나 그의 모습으로 어느날 당신이 내게 오셨을때
나는 미친 회오리 바람이 되였읍니다
쏟아져 네리는 벼랑의 폭포
쏟아져 네리는 쏘내기비가 되였읍니다
그러나 신령님...
바닷물이 적은 여울을 마시듯이
당신은 다시 그를 데려가고
그 훠_ㄴ한 내 마음에
마지막 타는 저녁 노을을 두셨읍니다.
그러고는 또 기인 밤을 두셨읍니다
신령님...
그리하여 또 한번 내위에 밝은 날
이제
산골에 피어나는 도라지꽃 같은
내 마음의 빛깔은 당신의 사랑입니다.
- 서정주 시 ‘다시 밝은 날에- 춘향의 말2’모두
* 시집:밤이 깊으면/답게/1996
향단(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이 다소곳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베갯모에 놓이듯한 풀꽃더미로부터,
자잘한 나비 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다오.
채색(彩色)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말어 올려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 다오.
향단아.
- 서정주 시 ‘추천사(鞦韆詞)- 춘향의 말1’모두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吾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련다.
찬란히 튀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고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서정주 시‘자화상‘모두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山)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을쳐 휘어드는
오후(午後)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아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아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 서정주 시‘무등을 보며‘모두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서정주 시 ‘동천(冬天‘모두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높았다, 낮았다, 출렁이는물살과
물살 몰아 갔다오는 바람만이 있어야 하네.
오- 우리들의 그리움을 위하여서는
푸른 은하물이 있어야 하네
돌아서는 갈 수 없는 오롯한 이 자리에
불타는 홀몸이 있어야 하네!
직녀여, 여기 번쩍이는 모래 밭에
돋아나는 풀싹을 나는 세이고.... .
허이언 허이언 구름 속에서
그대는 베틀에 북을 놀리네
눈섭같은 반달이 중천에 걸리는
칠월 칠석이 돌아오기까지는,
검은 암소를 나는 먹이고
직녀여, 그대는 비단을 짜세.
- 서정주 시‘견우의 노래‘모두
[미당 서정주 시전집 1] 민음사, 1991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곷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
- 서정주 시‘菊花옆에서‘모두
天年 맺힌 시름을
출렁이는 물살도 없이
고운 강물이 흐르듯
鶴이 나른다.
天年을 보던 눈이
天年을 파다거리던 날개가
또한번 天涯에 맞부딪노나
山덩어리 같아야 할 忿怒가
草木도 울려야할 서름이
저리도 조용히 흐르는구나.
보라, 옥빛, 꼭두선이,
보라, 옥빛, 꼭두선이,
누이의 수틀을 보듯
세상은 보자.
누이의 어깨 넘어
누이의 綏틀속의 꽃밭을 보듯
세상을 보자.
울음은 海溢
아니면 크나큰 齊祀와 같이
춤이야 어느 땐들 골라 못추랴.
멍멍히 잦은 목을 제쭉지에 묻을바에야.
춤이야 어느 술참땐들 골라 못추랴.
긴 머리 자진머리 일렁이는 구름속을
저, 우름으로도 춤으로도 참음으로 다하지못한 것이
어루만지듯 어루만지듯
저승 곁을 나른다.
- 서정주 시 ‘학(鶴)‘모두
* 미당 서정주 시선집 / 시와시학사, 2002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임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임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신이나 삼아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 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구비구비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은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 서정주 시 ‘귀촉도(歸蜀途)‘모두
* 서정주 시집, 『귀촉도』, 선문사, 1948.
*파촉(巴蜀) : 중국 쓰촨성(四川省)에 있던 촉 나라 땅.서역'과 함께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죽음의 세계를 뜻한다.
*육날 메투리: 삼 껍질로 짠 신.
*이냥 : 이대로.
*귀촉도(歸蜀途) : 문자 그대로는 '촉(蜀) 나라로 가는 길'. 여기서는 두견새(소쩍새. 접동새) 울음소리와 겹쳐 있다.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서 낼름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 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찟어진 채로 오줌을 누곤 못쓰겠다면서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인가 지나간 뒤에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을 지나다가는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리운채 첫날 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 서정주 시 ‘신부‘모두
내 나이 80을 넘었으니
시를 못쓰는 날은
늙은 내 할망구의 손톱이나 깍어주자
발톱도 또 이쁘게 깍어주자
훈장 여편네로 고생살이 하기에
거칠대로 거칠어진 아내 손발의
손톱 발톱이나 이뿌게 깍어주자
내 시에 나오는 초승달같은
아내 손톱밑에 아직도 떠오르는
초사흘 달 바래보며 마음달래자
마음달래자 마음달래자
- 서정주 시 ‘늙은 사내의 詩‘모두
*시집<80소년 떠돌이의 시>.시와시학사
밤이 깊으면 淑숙아 너를 생각한다.
달래마눌같이 쬐그만 淑숙아
너의 全身전신을,
낭자언저리, 눈언저리, 코언저리, 허리언저리,
키와 머리털과 목아지의 기럭시를
유난히도 가늘든 그 목아지의 기럭시를
그 속에서 울려나오는 서러운 음성을
서러운서러운 옛날말로 우름우는 한마리의 버꾸기새.
그굳은 바윗속에, 황土황토밭우에,
고이는 우물물과 낡은時計시계ㅅ소리 時計의 바늘소리
허무러진 돌무덱이우에 어머니의時體시체우에 부어오른 네 눈망울우에
빠앍안 노을을남기우며 해는 날마닥 떳다가는 떠러지고
오직 한결 어둠만이적시우는 너의 五藏六腑오장육부. 그러헌 너의 空腹.공복
뒤안 솔밭의 솔나무가지를,
거기 감기는 누우런 새끼줄을,
엉기는 먹구름을,
먹구름먹구름속에서 내이름ㅅ字자부르는 소리를,
꽃의 이름처럼연겊어서연겊어서부르는소리를,
혹은 그러헌 너의 絶命절명을.
- 서정주 시 ‘밤이 깊으면‘모두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수부룩이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까투리 메추래기 새끼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괜찬타, ......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
포그은히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낯이 붉은 처녀(處女)아이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울고
웃고
수구리고
새파라니 얼어서 운명(運命)들이 모두 다 안기어 드는 소리, ......
큰놈에겐 큰 눈물 자죽, 작은놈에겐 작은 웃음 흔적,
큰 이야기 작은 이야기들이 오부룩이 도란그리며 안기어
오는 소리,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끊임없이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山도 山도 靑山도 안기어 드는 소리, ......
- 서정주 시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모두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서정주 시 ‘푸르른 날’모두
어이할꺼나
아,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
남몰래 혼자서 사랑을 가졌어라
천지엔 이미 꽃잎이 지고
새로운 녹음이 다시 돋아나
또 한 번 날 에워싸는데
못 견디게 서러운 몸짓을 하며
붉은 꽃잎은 떨어져 내려
신라 가시내의 숨결과 같은
신라 가시내의 머리털 같은
풀밭에 바람 속에 떨어져 내려
올해도 내 앞에 흩날리는데
부르르 떨며 흩날리는데...
아,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
꾀꼬리처럼 울지도 못할
기찬 사랑을 혼자서 가졌어라
- 서정주 시 ‘신록‘모두
복사꽃 픠고, 복사꽃 지고, 뱀이 눈뜨고, 초록제비 무쳐오는 하늬바람우에 혼령있는 하눌이어, 피가 잘 도라...... 아무病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일좀 슬픈일좀, 있어야겠다.
- 서정주 시 ‘봄’
* 모든 것이 충족된 넉넉함을 시마는 혐오한다. 이것은 꼭 물질의 넉넉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결핍된 상태, 그 결핍을 채우려는 시인의 정신이 죽창처럼 곤두서 있는 지점에서 시마는 슬그머니 시인에게 스며든다. 그래서 시인은 "피가 잘 돌아 아무 병도 없으면, 가시내야 가시내야 슬픈 일 좀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아름답지 아니한가?
-정민의 <한시미학산책>
선운사 골짜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않았고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것만 시방도 남았읍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읍니다.
- 서정주 시 ‘禪雲寺 洞口‘모두
제주(濟州)에서 떠돌다 맞은
회갑(回甲)해 크리스마스날 밤
눈 내리는 바닷가
주막(酒幕)에서 만났던 그 계집애-.
고등학교(高等學敎) 2학년(二學年) 국어(國語)책에서 배웠다고
내 시(詩) [국화菊花 옆에서] 를
고스란히 외여 읊던 그 계집애.
짖궂은 어느 술친구가 작자(作者) 나를 소개하자
내 곁에 와 내 마고자에
두 눈 묻고 흐느끼던 그 계집애.
눈 내리는 이 밤은 또 어디메서 울고 있는가.
눈물도 말라 인제는 캬랑 캬랑 하는가.
- 서정주 시 ‘눈 오는 날 밤의 감상(感想)‘모두
* 시집 : 떠돌이의 詩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을 아는 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
門(문)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오게
低俗(저속)에 抗拒(항거)하기에 여울지는 자네.
그 소슬한 시름의 주름살들 그대로 데리고
기러기 앞서서 떠나가야 할
섧게도 빛나는 외로운 雁行(안행)-이마와 가슴으로 걸어야 하는
가을 雁行이 비롯해야 할 때는 지금일세.
작년에 피었던 우리 마지막 꽃-菊花(국화)꽃이 있던 자리,
올해 또 새 것이 자넬 달래 일어나려고
白露(백로)는 霜降(상강)으로 우릴 내리 모네.
오게
지금은 가다듬은어진 구름.
헤매고 뒹굴다가 가다듬어진 구름은
이제는 楊貴妃(양귀비)의 피비린내나는 사연으로는 우릴 가로막지 않고,
휘영청한 開闢(개벽)은 또 한번 뒷門으로부터
우릴 다지려
아침마다 그 서리 묻은 얼굴들을 추켜들 때일세.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을 아는 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
門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 서정주 시‘가을에’모두
* 미당 서정주 시전집 1/민음사
누님.
눈물 겨웁습니다
이, 우물 물같이 고이는 푸름 속에
다수굿이 젖어있는 붉고 흰 木花 꽃은,
누님.
누님이 피우섰지요?
퉁기면 울릴듯한 가을의 푸르름엔
바윗돌도 모다 바스라저 네리는데….
저, 魔樂과 같은 봄을 지내여서
저, 無知한 여름을 지내여서
질갱이 풀 지슴ㅅ길을 오르 네리며
허리 굽흐리고 피우섰지요?
- 서정주 시‘木花‘모두
덧없이 바라보던 벽에 지치어
불과 시계를 나란히 죽이고
어제도 내일도 오늘도 아닌
여기도 저기도 거기도 아닌
꺼져드는 어둠 속 반딧불처럼 까물거려
정지한 '나'의
'나'의 설움은 벙어리처럼......
이제 진달래꽃 벼랑 햇볕에 붉게 타오르는 봄날이 오면
벽 차고 나가 목매어 울리라! 벙어리처럼,
오-- 벽아.
- 壁서정주 시 ‘壁(벽)‘모두
* 시선집<질마재로 돌아가다>.미래문화사
바다속에서 전복따파는 제주 해녀도
제일좋은건 님오시는날 따다주려고
물속바위에 붙은그대로 남겨둔단다.
시의전복도 제일좋은건 거기두어라.
다캐어두고 허전하여서 헤매이리요?
바다에두고 바다바래여 시인인것을....
- 서정주 시 ‘시론’
어느 해 봄이던가, 머언 옛날입니다.
나는 어느 친척의 부인을 모시고 성안 동백꽃나무 그늘에 와 있었습니다.
부인은 그 호화로운 꽃들을 피운 하늘의 부분이 어딘
가를 아시기나 하는 듯이 앉아 계시고, 나는 풀밭 위에 흥근한 落花가 안쓰러워 주워모아서는 부인의 펼쳐든 치마폭에 갖다 놓았습니다.
쉬임없이 그 짓을 되풀이하였습니다.
그뒤 나는 年年히 서정시를 썼습니다만 그것은 모두가
그때 그 꽃들을 주워다가 드리던 --- 그 마음과 별로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제 웬일인지 나는 이것을 받아줄 이가 땅위
엔 아무도 없음을 봅니다.
내가 주워모은 꽃들은 저절로 내 손에서 땅 위에 떨어
져 구을르고 또 그런 마음으로밖에는 나는 내 시를 쓸
수가 없습니다.
- 서정주 ‘나의 시‘
내 늙은 아내는
아침저녁으로
내 담배 재떨이를 부시어다가 주는데,
내가
<야 이건
양귀비 얼굴보다고 곱네.
양귀비 얼굴엔 분때라도 묻었을 텐데?>
하면,
꼭 대여섯 살 먹은 계집아이처럼
좋아라고 소리쳐 웃는다.
그래 나는
천국이나 극락에 가더라도
그녀와 함께 가볼 생각이다.
- 서정주 시 ‘내 늙은 아내‘모두
아아 레이테만 어데런가
언덕도
산도
뵈이지 않는
구름만이 둥둥둥 떠서 다니는
몇 천 길의 바다런가
아아 레이테만은
여기서 몇만 리련가......
귀 기울이면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소리......
우리의 젊은 아우와 아들들이
그 속에서 잠자는 아득한 파도소리......
얼굴에 붉은 홍조를 띠우고
『갔다가 오겠습니다』
웃으며 가느니
새와 같은 비행기가 날아서 가느니
아우야 너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사람
인씨(印氏)의 둘째아들 스물 한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²특별공격대원
귀국대원
귀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둥이로 내려져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공항 오장(伍長)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몇 천 길의 바다런가
귀 기울이면
여기서도, 역력히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소리 ......
레이테만의 파도소리......
- 서정주 시‘송정오장 송가(松井伍長 頌歌)‘모두
**(매일신보 1944년 12월 9일)
1)오장(伍長)은 일본 육균 계급의 하나로 하사에 해당한다
2)가미가제(神風)는 일종의 글라이더 폭탄과 갈 때까지의 연료만 싣고 가서는 글라이더에 몸을 실은 채로 미국 등의 군함과 부딪쳐 자폭하던 패전 말기의 잔인한 공격 방법.
* 서정주(徐廷柱) Seo Jeong-ju: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호는 미당(未堂)이다. 화사집을 냈을 무렵에는 궁발(窮髮)이라는 호도 사용했다. 탁월한 언어 감각과 전통 소재의 활발한 활용으로 대한민국 문학계(특히 현대시)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목이라고 불리는 인물로 평가받지만 친일, 친독재 행위와 반인륜 범죄에 대한 미화 때문에 기회주의적 어용 문인의 행태를 보였다 평가도 받는다. 친일 전력이 있는 문학가의 글은 교과서나 참고서에 되도록 싣지 않으나, 그의 글은 정말 잘 썼고 중요성이 높다 보니 여전히 때때로 실리며 모의고사에도 출제된다.
2000년 10월 아내가 사망하자 충격을 받고 쓰러졌으며 나중에는 곡기를 거부한채 술만 마시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하게 된다. 이후 산소호흡기를 쓰고 투병하다가 11월에 "잘 봐달라고 말씀하더라고 해."라는 최후의 인터뷰를 남겼으며 12월 22일부터 혼수 상태에 빠졌고 2000년 12월 24일에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는데 생 전1,000여 편에 달하는 문학 작품을 남겼다.
** 광주학살이 있었던 80년대 어느 날 KBS 프로그램 녹화 중에 그(서정주)는 우리 국민이 정서가 메말라서 그의 시를 읽지 않는다고 내게 말했었다. 그러자 나는 "아닙니다. 선생님의 시만 안 읽습니다. 선생님의 시에는 우리 모두의 아픔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는 격노해서 그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나의 입장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우리 모두의 아픔을 잊고 있는 시, 그래서 광주의 학살자를 하늘이 내리신 분이라고 찬양하며 대통령을 만들어 주는 시인의 시는 이 땅에서 지워져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의〈국화 옆에서〉를 심의위원 자격으로 국정 국어교과서에서 삭제시켰다.
-김우종 著- 「서정주의 음모와 윤동주의 눈물」책머리에서 [김영원 옮김]
*** 한국 시문학계와 문학계에서 ‘빼놓고’ 싶으나 빼 놓을 수 없는 시인. 85세의 삶에서 지울 수 없게도 짙게 결쳐진 ‘친일’과 ‘80 광주와 군부정권’에 대한 기회주의적 처신으로 그의 시를 사랑하는 시민들이 그의 시를 기억에서 ‘애써’ 외면 해야 했다. 서정주의 시를 다시 읽고 정리하며 ‘아릿한 아품’을 느껴,
아. 프. 다.
첫댓글 2003년, 시 전문 계간지 ‘시평’에 시인 손진은씨가 ‘서정주가 빠진 국어교과서’라는 글을 썼다. 드물게 나온 ‘서정주 포용론’이었다. “서정주 작품이 빠진 것은… 안목의 부재, 경직성에서 파생된 것” “서정주 시는 일제 말기의 논리적 파탄(파시즘 체제 옹호 등 친일 행각)까지를 포함해 끌어안아야 할 유산이다.” 20년이 흘러 손 시인이 말했다.
“초등학교만 졸업한 누님이 밭을 매며 그의 시를 외셨다. 서정주 시는 그런 시다. 당시 어떤 평론가는 ‘국화 옆에서’의 국화가 ‘사무라이’를 상징한다는 말까지 하더라” 그 시가 젊어 방종했던 미당의 먼 친척 누이를 노래했다는 걸 알 사람은 다 알았다. 한국어라는 텃밭을 흐드러진 꽃밭으로 가꾼 시인, 절개를 지키지 않았던 시인은 살아서도 죽은 세상을 살다 2000년 타계했다. 그래도 좌파는 ‘부관참시’ 죽창질을 멈추지 않았다.
조선일보 칼럼중 일부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