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뇌전증에 시베리아 유배 생활… 자신의 소설만큼 비극이었던 삶
바실리 페로프(Vasily Perov, 1834-1882), '도스토옙스키 초상화(Portrait of Fyodor Dostoyevsky)', 1872년, 유화, 81x99.6cm, 러시아의 군주제를 비판했던 도스토옙스키 저항의 눈빛이 그림에 잘 살아있다.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카라마조프의 형제들(Bratya Karamazovy)〉, 〈악령(The Devils, Demons)〉 등을 쓴 러시아 소설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yevsky, 1821-1881). 그의 삶은 자신의 소설만큼이나 비극적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러시아 군주제를 반대하는 반정부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집행 직전 극적으로 황제의 사면을 받고 시베리아로 보내져 수년 동안 혹한의 유배 생활을 했다. 그 과정에서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죽음을 떠올리는 날들을 보냈다.
도스토옙스키는 어렸을 때부터 뇌전증을 겪었다. 그는 뇌전증 발작이 시작될 때의 경험을 ‘이승과의 단절’, ‘저승의 시작’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뇌전증 발작 공포와 현실의 생존 공포가 어우러진 삶이 비극적 소설의 토양이 됐다.
예전에 간질 발작으로 불리던 뇌전증은 뇌 신경세포가 일시적으로 이상을 일으켜 과도한 흥분 상태가 유발된 것으로, 의식을 잃거나, 발작과 같은 행동 변화를 보인다. 이러한 뇌 기능의 일시적 마비 증상이 반복적으로 발생되는 상황이 뇌전증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시대에도 기록되어 있을 만큼 역사가 깊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뇌전증 발작을 보이면 악령에 사로잡혀 있다고 여겼다.
뇌전증 원인은 연령에 따라 다양하다. 어릴 때는 분만 중 뇌손상이나 뇌염, 뇌수막염을 앓고 난 후유증으로 생길 수 있다. 교통사고로 인한 뇌손상이나 뇌종양도 원인이다. 이유를 모를 때도 많다. 고령사회에서는 뇌졸중 후유증으로 뇌전증을 앓는 고령자가 늘고 있다. 국내 뇌전증 환자는 37만명으로 추산된다.
박진석 한양대병원 신경과 교수는 “진단에 뇌파, 뇌MRI, 양전자방출촬영(PET) 등이 사용되며 치료는 주로 항뇌전증 약제를 사용한다”며 “약물 난치성 뇌전증의 경우 해마, 편도, 해마곁이랑 등을 절제하는 수술적 방법으로 60~80%의 환자에게서 질병의 완화를 기대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뇌전증은 이제 <죄와 벌> 개념의 질병이 아니다. 사회적 인식을 새로이 하고 적극적으로 진단, 치료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도스토옙스키(Dostoyevsky)의 처형 사건] 도스토옙스키가 몸담고 있던 페트라솁스키 클럽이 1848년에 유럽 전체에 불어온 혁명의 바람에 이끌려 주민 봉기를 계획했으며 도스토옙스키도 농노들의 자유를 위해 가담했으나, 그 독선적인 성격은 여전해서 곧 모임에서 왕따당하고 빚은 빚대로 늘어날 뿐이었다.
러시아 제국 제11대 황제 차르 니콜라이 1세(Emperor Nikolai I, 1796-1855·재위: 1825-1855)/
니콜라이 1세 부부와 자녀들.
러시아 농노, 레핀강의 배를 끄는 사람들.
차르 니콜라이 1세(Nikolai I, 1796-1855·재위: 1825-1855)는 이런 개혁 모임들에 여러 스파이를 두고 있었는데 1849년 도스토옙스키와 그가 가담한 그룹 23명이 체포된다. 8개월을 감옥에서 보낸 후에야 형 선고를 받기 위해 꺼내졌으며, 이전에는 보통 이 정도 죄는 몇 개월 간 유배가 고작이었으므로 이들은 '이제야 끝나는구나'하고 안심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신부(神父), 수십 명의 병사(兵士)들과 수천 명의 군중(群衆), 그리고 관(棺)들이었다. 한 장교가 나와 '죄인들은 모두 반역죄로 총살'이라 선고했으며 장교가 형수들의 죄명과 형을 낭독하는 동안 도스토옙스키는 정신이 멍해지면서 근처 교회의 종탑에서 쏟아내리는 금색 햇빛이 차차 구름에 가려지며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자기 또한 곧 영원히 어둠의 세계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때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만약 내가 죽지 않는다면,
만약 산다면 나의 삶은 끊임없는,
영원처럼 느껴지며 1분이 백년과 같으리라,
만약 내가 살아남는다면
인생의 단 1초를 소홀히 하지 않을 텐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yevsky)의 주민봉기 반역죄로 총살형 선고를 받고.
마지막으로 신부에게 고해성사(告解聖事)를 한 후, 첫렬 죄수들의 머리에 두건이 덮이고 병사들이 총을 발사하기 직전, 갑자기 형장에 마차가 급히 난입해 황제가 특사로 그들의 형을 감형하였음을 알렸다. 사실 황제는 정말로 처형할 생각은 없었고, 단지 '혁명 놀음'을 하겠다고 설치는 젊은이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처형 쇼를 한 거였다.
실제로 니콜라이 1세는 소위 지식인들에게 이런 처형 연극을 즐겼고, 나름대로 효과도 있었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때의 경험을 '죽음의 집에서의 기록'이라는 소설에서 풀어놓고 있다. 몇몇 사형수들은 이 사건의 영향으로 미쳐버렸으나, 도스토옙스키는 '죽을 고비를 넘겨야 정신을 차리는 인간'의 표본이 되었다. 단 도박 중독은 그 후로도 쉽게 고쳐지지 않았지만.
대신 4년간 시베리아 옴스크에서 중노동 후 군입대를 하게 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미 1844년 중위로 제대한 상태였다. 그러니 재입대나 마찬가지였는데 이번엔 사병이었다. 4년간 군 복무 평이 좋았는지 하사관으로 진급하기도 했다. 1854년 석방되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5년 뒤인 1859년 해배령이 내려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게 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사건 이후로 사람이 바뀌어 4년간 최악의 환경을 견디면서 머릿속에 글을 썼다고 하며, 군에 들어가게 된 후 출판하는 것을 허가받게 된다. 근데 사실 시베리아에서도 그 성격을 못 죽이고 따돌림 당했다. 위에 언급된 책에서는 "동료들은 내가 너무 잘난 집안 출신이라서 날 왕따시킴"이라고 정신승리 했지만.
이후의 그는 죽는 날까지 마치 페이지 하나하나, 작품 하나하나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처럼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 불후의 명작을 연달아서 내게 된다. 그 전에는 글자 하나마다, 한 장마다 시간을 들이며 하루 종일 망상을 하던 그였지만 이후로 쉬지 않고 글을 썼으며 쓰고 있지 않을 때는 쓸 내용을 중얼거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 탓인지 그의 작품들은 거의 극도로 세밀하고, 집념이 느껴지는 묘사가 눈에 많이 띈다.
✺ 카라마조프의 형제들(The Book of The Brothers Karamazov by Fyodor)
―도스토옙스키( Dostoyevsky)(1879-1880)―
카라마조프가의 친부살해를 소재로 한다. 표트르 카라마조프는 돈 문제로 장남 드미트리와 다퉜는데, 그날 밤 표트르는 누군가에게 피살되고 장남 드미트리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다.
이 미완성 대작은 도스토옙스키를 평생 괴롭힌 신과 악마, 선과 악의 두 원리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했던 야심작이다. 이 두 원리의 대결은 이반의 극시 <대심문관(大審問官)>과 장로 조시마의 수기와 대비하는 형식으로 전개되는데 결국 두 원리의 통일이 성취되지 않은 채 끝나고 있어, 작자 자신의 자아 분열이 얼마나 심각했었는가를 여실히 말해 주고 있다.
러시아 소설의 대가로 칭해지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소설로써, 도스토옙스키가 평생 고민해 온 인간 존재의 본성과 다양한 사회적·윤리적 문제에 대한 사고가 집약된 도스토옙스키 문학의 정수이다. 또한 당시 러시아 사회의 모순을 정확하게 투영한 내용으로 베테랑 작가의 사회 비판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등장인물] · 카라마조프가(家)의 가장 표트르 : 골수까지 광대 근성이 밴, 미천한 계급으로부터 입신양명한 사람으로 탐욕스럽고 음탕하기 이를 데 없는 지주였다.
· 장남 드미트리 : 부친의 음탕방자한 피를 이어받아 청년의 정열에 탐닉하여 이를 전혀 제어할 수가 없다. 그런가 하면 풍부한 시적 감수성이 뛰어나 영원한 것에 대한 순진한 동경심을 품고 있다.
· 차남 이반 : 철저한 무신론자·합리주의자이다. 그의 왕성한 지적 탐구는 "불사(不死)란 없다. 따라서 모든 것은 허용되고 있다"고 하여 도덕적 허무주의를 도출해 낸다.
· 서자 스메르자코프 : 간지(奸智)에 뛰어난 비열함으로 이반의 심오한 이론에 대해 자기 나름의 비속한 해석을 내리고 유산을 한몫 차지할 생각에서 부친살해를 결행한다.
· 막내아들 알료샤 : 종교심이 두터운 순결 유화한 사람으로 그의 맑고 선의에 찬 마음은 타인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동정에 넘쳐 있다.
[줄거리] 아버지 표트르는 고리대금업으로 돈을 번 졸부지만, 탐욕스럽고 방탕하게 살면서 3명의 아내에게서 4명의 아들을 얻었다. 서자 스메르자코프는 집에서 하인으로 일하면서 아버지로부터 받는 차별 때문에 아버지 표트르를 증오한다. 또한, 아버지 표트르와 아들 드미트리는 그루셴카를 사이에 두고 애욕의 투쟁을 벌인다. 한편, 드미트리는 동생 이반과 함께 두 여성 카테리나와 그루셴카와 사랑과 질투의 관계를 형성한다.
어느날, 드미트리는 돈문제에 쪼들리면서 아버지와 몸싸움까지 하며 다툰다. 그리고 표트르는 누군가에 의해 살해된 채 발견된다. 서자 스메르자코프가 진범이었으나 살해되던 날 간질 발작을 일으켰기 때문에 의심을 받지 않게 된다. 결국 장남 드미트리는 살인범으로 체포, 투옥되고 재판을 받게 된다.
차남 이반의 추궁을 받던 스메르자코프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털어놓지만, 이반이 말했던 "신만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는 사상이 자신의 범죄를 부추겼다는 말을 남기고 자살한다. 더군다나 드미트리가 카테리나에게 보낸 편지에 '평소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다'라는 내용이 공개되면서, 그는 마음 속으로 저지른 살인도 살인과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자기 죄를 인정하고 유죄 판결을 받고 시베리아 유형을 떠난다.
바실리 페로프(Vasily Perov, 1834-1882·러시아 화가, 사회운동가), '자화상'.
바실리 페로프(Vasily Perov)는 19세기 러시아의 화가 그룹이었던 이동파(Peredvizhniki)의 일원이었으며, 당시 러시아 화단을 지배하던 고전주의를 거부하고 일반 대중을 위한 새로운 사실주의·자연주의 미술을 주장했다. 미술이 인도적이며 사회적인 이상을 나타내는 유용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러시아의 중산층 및 농민의 생활에서 따온 감동적인 주제들을 사실적이고 알아보기 쉽게 그린 화가이다.
[자료출처 및 참고문헌: 조선일보 2024년 02월 22(목)(김철중 영상의학과 전문의, 논설위원 겸임, 의학전문 기자·안상현 기자), 인터넷 교보문고, Daum·Naver 지식백과/ 글과 사진: 이영일∙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