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 당시 1980년 5월 21일 시민군으로 위장하고 전남 38개 무기고 무기 탈취를 총지휘하였던 북한군 안창식 대위의 내연의 처였던 한
탈북여성은 전라도에 지하조직이 있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여기서 놀랄만한 것은 목포를 중심으로 광주폭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5개월 여 동안 목포,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숨은
지하조직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침투 조 인원들이 직접 목격한 일이지만 그들의 조직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같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전 함경남도고등중학교 교원 2009, 72쪽).
그 지하조직들 중 전라도 여러 무기고 위치를 파악하고 있던 조직이 <전남민청협>이었으며, <전남민청협>의 위장명칭이 <현대문화연구소>였다.
위장명칭 <현대문화연구소>는 합법적으로 사무실 공간을 사용하기 위한 명칭이었으며, 실제 지하활동을 위해서는 <전남민청협>이란 명칭을 사용하였다. 그녀는 남파공작원들이<전남민청협>의 협조를 얻어 무기고 위치를 사전 파악하고 있었던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미리 침투해있던 7명의 인원들과 합류한 안창식을 비롯한 11명의 인원들은 여러 개의 소조로 분산되어 전라도 현지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조직들이 사전에 확보해놓은 무기고들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한편 새로운 무기고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3개월여 동안 전라도 전
지역에 대한 정찰을 이 잡듯이 샅샅이 진행하였다고 한다. 1980년 2월말을 넘기면서 폭동이 전개되면 임의의 시기에 무기탈취가 원만히
진행될 수 있도록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무기고들에 대한 사전파악과 요해사업이 성과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전 함경남도고등중학교 교원
2009, 69-70).
1980년 3~4월에 전라도 현지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고 무기고들의 위치를 사전에 확보해 놓은 조직이 있었다. 더욱이, 한 탈북자에 따르면
파악된 무기고 위치가 군사작전지도에 표시된 무기 배치도가 작성되었으며, 시민군으로 위장한 자들은 그 무기고 배치도에 근거하여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였다. “북한 특수부대 요원들이 사전에 정찰해 두었던 전라도 지역의 무기고 배치도에 근거해서 그들의 지휘를 받아가면서 시민군이라고 위장한
자들이 조직적으로 먼저 병기고를 습격하여 무장폭동을 일으켰고…” (전 문천제력소 노동자 2009, 272). 탈북자들의 이런 증언은 광주사태를
총기획한 윤한봉이 증언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는 <전남민청협>이 군사작전지도용으로 쓰이던 만 오천분지 일 지도를 구해 무기고들의 위치를 표시한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래가지고 그 당시에 인자, 요즘은 지도가 아주 세밀한 지도까지도 나오는데 당시에는 만 오천분지 일 지도를 가지려면 신분이 확실한 사람
외에는 그걸 못 사게 되어 있었어. 살 때. 단파 라디오 사는 것하고 비슷해가지고. 그 지도를 인제 박화강씨, 그때 광주매일인가 있었는데
지금 한겨례 지국장 하다가 그만 뒀는데. 그 화강이 형한테 부탁을 해가지고 내가 만오천분지일 광주 지역 지도를 구해가지고...무장을 하기
위해서는 이제 총, 다이너마이트 이런 무기들이 필요하지 않냐. 그러니까 예비군 무기고가 어디가 있고 이, 다이너마이트는 어디에 있구나
이런 것들 좀 파악하고 도청을 어떻게 점거하기 위해서 도청 주변의 도로를 어떻게 어디 쪽으로 몰려들고 포위를 해야 하고 등등 고런 작전도
세우고 좀 그래야겠는데. 그래서 이제 지도를 구한 거예요. 지도를 구해가지고 이를테면 지원동, 지금은 소태동 쪽인데 거기 나가다보면 거기
채석장이 있었어요. 다이너마이트 창고도 있고. 현장 답사도 하고. 양림동 파출소 뒤에 있는 무기고부터. 이런 것들을 확인하고 다니면서
…… (윤한봉 2006, 윤한봉 구술녹취문 3차 1-4
http://trollwall.egloos.com/4237830).
이렇듯 무기배치도에 관하여 탈북자들의 증언과 정확히 일치하는 증언을 하는 윤한봉이 바로 1989년 8월 문규현 신부를 시켜 임수경을 방북을 도와
평양축전에 참석시킨 장본인이었다 (한겨레 2008년 6월 27일자).
조갑제 기자가 광주사태는 반공 민주화운동이었다고 주장할 때 그의 그런 주장의 유일한 구호는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구호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윤한봉은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자기가 만들어낸 위장구호였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왜그냐면 인제 내가 쩐남대 선언문을 썼는데 거기에 어떤 대목이 나오냐면은 그때만 해도 인제 가능하면 들어가서 빨갱으로 안 몰리기 위해서
일부로 북을 좀 까는 내용들이 한줄씩 들어가고 그랬다고, 518직전에도 뭐 이 전남대 시위때도, 북괴는 오판말라 이런 피켓도 들고
그랬는데, 근데 그게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북괴의 어쩌고 저쩌고 이런 대목들이 들어간다고 (윤한봉2006, 윤한봉 구술녹취문 1차 2-7
http://trollwall.egloos.com/4236007).
이 증언 1-2에서 윤한봉은 자기를 비롯한 광주운동권은 통혁당의 청소년 조직 광랑 출신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1960년 후반에 통혁당의 공산주의
혁명 전략은 무장봉기였으며, 청소년 시절 그 이데올로기 영향을 광주운동권이 광주사태라고 불리는 무장봉기를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윤한봉이 지어낸 위장구호 ‘김일성은 오판 말라’가 실제로 광주사태 때 사용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 윤한봉의 동지 윤상원의 영어 통역이었던
인요한이 그 구호에 낚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선교사 자녀로서 어렸을 때 광주의 친구들과 함께 자랐던 인요한은 광주사태 때 아직 대학 진학을 못한
청소년이었으며 그래서 분별력이 모자라 쉽게 낚였다. 지난 5월 16일에 인요한이 채널A 박종진의 쾌도난마에 출연해 "아침에 반공구호를 외치고
시작했다”고 말했다.
무엇이 진실이었는가? 도청 접수 후 윤상원은 미국인들을 인질로 납치하려 했다. 그런데 그의 동지들이 그의 반미 발톱을 그렇게 너무 서둘러
드러내면 광주시민들의 협조를 얻기 어렵다고 말리며 설득하여 반미 구호를 갑자기 반공 구호로 바꾼 것이었다. 반공 구호는 위장구호요, 본래 목적은
반미였기에 지금도 각종 5.18 행사에서 반미 구호들이 외쳐진다. 유네스코에 5.18 기록물들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으니 한번 읽어보라. 그
어디에도 반공 이념의 흔적은 없고 오로지 반미 이념으로 가득 찬 성명서들뿐이다.
인요한은 아직 청소년이어서 분별력이 부족했기에 낚였던 것이겠지만 당시 윤한봉 동년배였던 조갑제 기자도 그 위장구호에 낚이셨는가? 위장 구호가
반공 구호라는 논리라면 그 위장 구호를 만들어 낸 윤한봉은 반공 투사라는 논리가 된다. 청소년 시절 통혁당 이념의 영향을 받아 광주운동권이 된
자가 반공 투사였는가? 미국 망명시 북한 당국과 공동으로 평양축전을 추진하던 윤한봉이 불법으로 임수경 양을 방북시켰던 것이 반공 행위였는가?
오늘의 임수경은 윤한봉이 문규현 신부를 시켜 그녀의 방북을 도와 평양축전에 참석시켰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그 누가 그녀를 가리켜
반공투사라고 말하는가? 윤한봉 본인도 자신의 입장은 반공이 아님을 분명히 밝혔다. 오히려 그는 반공 이념과 투쟁하던 자였다.
그렇다면 윤한봉이 반공이념과 투쟁할 목적으로 전략상 지어낸 위장구호가 진실된 반공구호일 수 있었겠는가? 만약 광주사태는 반공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조갑제 기자의 주장의 근거가 단지 윤한봉이 종종 쓰던 위장수법의 하나로써 지어낸 구호뿐이라면 실제로는 광주사태가 반공 민주화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는 셈이다.
2013년 5월 20일 역사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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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글에서 인용된 참고문헌들 윤한봉의 구술녹취문은 괄호에 링크가 있고 그 외의 문헌은 “역사로서의 5.18” 제4권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황석영의 책 『광주5월 민중항쟁의 기록』 및 지난 5월 15일 종편 시사프로그램에서 이주성 박사가 한 증언과 일치하는 증언, 즉 광주사태 때
5월 21일 무장시민군이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고 있었다는 뉴스를 북한에서 들었다는 납북 여배우 최은희의 증언 동영상 보기
http://cafe.daum.net/issue21/3IBb/737
경제풍월 5월호 인터뷰기사
http://www.econotalking.kr/xe/index.php?document_srl=88724&mid=interview_2010
"조갑제 기자의 주장에 대한 반론"
http://cafe.daum.net/issue21/3IBb/774
첫댓글 저 윤한봉의 구술녹취문의 출처는 2006년 518기념재단에서 출간한 '구술생애사를 통해 본 5ㆍ18의 기억과 역사' 2권에 있는 내용이죠.
http://pr.hankyung.com/newsRead.php?no=176982
천추님 소중한 정보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빨리 사 봐야 되는데.. 아직... 이번주 내로 택배시켜야 될듯..... ㅎㅎ
윗 글에도 나오지만......... 보십시오......... 저게 바로........... 통일전선전술식 심리전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멍청한 것들이... 겉과 속을 동일시 합니까? 이런 전술기법은....... 초등, 유아기적 왜곡기법입니다만............ 중등, 고등 선동질로 들어가면.......... 겉과 속을 전혀 이완시켜 따로 가게 만듭니다. 그래야.. 개대가리든, 닭대가리든, 고기대가리든... 다 걸려드는것 아니겠습니까?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어디로 갔을까요? 민주화 유공이란 단어 맞지않습니다.
편집이 잘 되어 일베에 오른 글 http://www.ilbe.com/1263285820
시스템클럽 논객 한반도님의 댓글:
내가 이 글을 보고 주목한 것은 광주에 침투했었다는 안창식 대위의 내연의 처라고 밝힌 탈북여성의 증언이다. 자세한 내용을 여기서 밝힐 수는 없지만 그녀의 증언내용의 신빙성을 나름대로 따져볼 수 있는 검증키워드를 나는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녀의 증언내용은 서울 소재 대학가 운동권 지하조직과 연관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증언을 통하여 학창시절 운동권에 대하여 늘상 품었던 의문을 풀 수 있는 확고한 단서를 찾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 이제서야 궁금증이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증언은 그만큼 신빙성이 큰 것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탈북자의 증언이 대한민국 현대사의 숨겨진 이면을 밝히는데 얼마나 긴요한 것인가를 몸소 깨닫고 나는 전율하고 있다. 탈북자들이 때로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보다 더 정확하고 분명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http://www.systemclub.co.kr/board/bbs/board.php?bo_table=board02&wr_id=42910
그래서 북한 특수부대원이 털었다는 소리지? 그러면 그 특수부대가 어떻게 왔는지 말 좀 해보시지?
윤한봉이 말한 지도부분은 " 당시에는 만 오천분지 일 지도를 가지려면 신분이 확실한 사람 외에는 그걸 못 사게 되어 있었어" 만오천분의 일지도가 아니라 오천분의 일지도를 잘못말한거 같습니다.
당시 나와있던 민간인이 살수있던 지도는 2만오천분의 일지도랑 오만분의 일지도 (미군이 군용도로 만든)였는데.. 75년에 국립측지원에서 오천분의 일지도를 제작해서 만들었는데 (국립지리원 출범하면서) 이건 일반인이 못구하던 지도였죠.
오만분의 일 지도를 민간인 살 수 있었던 것이 확실한가요? 제가 알고 있던 바로는 오만분의 일 지도를 소지한 분이 화순 북면에 있었고, 그 외의 오만분의 일 지도는 미8군이 보유하였으며, 한국군은 미군의 협조로 보유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알고 있었기에 윤한봉이 오만분의 일 지도를 만 오천분지 일 지도라고 잘못 말한 것이 아닌가 궁금했었습니다. 그런데 1996년에 출판된 그의 자서전 "운동화와 똥가방" 54쪽에도 만 오천분지 일 지도라고 기록되어 있더군요.
네 확실합니다. 1차 5개년 경제계획때 미군이 만든 5만분의 일지도를 민수용으로 만들기위해 국립건설연구소에서 61년부터 시작해 63년에 완성해서 출판사들도 이걸 모델로 민간에서도 이걸 모델로 썼었는데 5만분의 1지도가 정확도나 이용도가 떨어져서 한화협동사업으로 2만5천분의 일지도를 66년부터 71년말까지 제작했었죠. 즉 둘다 민간용으로 쓰기위해 제작된 지도였죠. 70년대 중고등학교 지리부도봐도 서울시 지도는 5만분의 1지도였고요. (7만5천분의 1이나 10만분의 1지도도 있었슴)
5천분의 1지도는 74~79년인데 도로망이 모두 다 나와있는 지도라 민간시판이 안되던거였다가 이게 풀린게 82년도였죠
유익한 정보입니다. 5.16 혁명직후 5만분의 일 지도도 민수용으로 공급되기 시작하였군요. 만 오천분지 일 지도 역시 군사작전용 지도라고 합니다. 윤한봉이 당시로서는 민간인은 구하기 힘든 지도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 점은 사실인 듯합니다.
만오천분의 일지도는 당시는 물론 지금도 존재하는지 조차 의문입니다. 한국경우는 일단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발행하는 국가기본도가 지금도 5천분, 1만분, 2만5천분, 5만분 25만분, 60만분, 100만분, 300만분의 1지도죠
한국 군사지도역시 미군UTM체계 따라간건데 military grid는 1:12,500(시가전용), 1:25,000, 1:50,000, 1:십만, 1:25만, 1:50만, 1:100만단위로 나갑니다. 만오천분의 일짜리도 있는데 용도가 Nautical Set (해상지도용) 이고요.
지금도 만오천분의 일지도 찾을려해도 임상도나 오리엔티어링용지도들이고요.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204290009921102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2-04-29&officeId=00009&pageNo=11&printNo=4969&publishType=00020
82년도 기사인데 안보상 이유로 민간에 판매안되다가 민간에 판매된다는 기사죠. 휴전선과 해안선 취약지구는 국립지리원장 사전승인받아야만 구입가능하고요.
5만분의 1지도경우는.5만분의1지도 구해서 보시면 알겠지만... 제가 어느 특정건물을 지도상에 표기해도.. 남이 그 지도만보고 그 특정건물 찾는다는건 힘듭니다.. 대략 어느동 어느부근에 있다는정도만 알수있으니까요.
잘 보았습니다. 광주사태 때 목포 해안이 뻥 뚫렸습니다. 윤한봉이 구한 지도가 해안선 취약지구를 표시한 지도였었는지 궁금해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