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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몸을 구별한 일" 민수기 6장 1-21절 석기현 담임목사 |
요즘 텔레비전 광고 중에 가정용 운동기구에 관한 것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특히 배가 나오지 않도록 복부근육을 단련시켜 주는 운동 기구들은 정말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판단을 내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계속해서 새로운 것들이 개발되어 선전에 나옵니다. 그런 광고 속에 인용되는 성공 사례란 것들을 보면 자신의 복부비만을 염려하는 사람들로서는 정말 침이 꼴깍 넘어갈 만큼 현혹적입니다. 몇 달 전에는 축 처져 있던 배가 제법 한자의 '왕' 자와 같은 무늬를 이루며 근육이 된 사진이라든지, 혹은 여자의 경우 이전에는 입을 엄두도 못 내었던 작은 사이즈의 날씬한 옷을 입게 되었다는 둥, 마치 현대판 신데렐라와 같은 체험담들은 그 광고에 나온 꽤 비싼 운동기구를 사고 싶은 구매의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이런 광고들은 사람이라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한 가지 욕구를 집중적으로 자극시킵니다.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이란 존재를 더 아름답고 더 멋있고 더 매력적인 사람으로 탈바꿈시켜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바로 그 욕구 때문에 사람들은 온갖 이상하게 생긴 기계를 방안에다 들여 놓고 매일 그것을 붙잡고 땀 흘리는가 하면, 혹은 조깅으로 혹은 헬스클럽에 다니면서 부지런히 몸매를 가꾸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기독신자는 그런 것을 무시해야 한다는 뜻에서 하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육체의 연습(physical training)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라고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그 같은 체력 단련도 분명히 자신에게 유익한 것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처럼 규칙적으로 운동한다는 자체부터가 부지런한 성격과 끈기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해내지 못할 일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들에게는 그처럼 몸매를 가꾸어 자신을 더 아름답게 하고자 하는 것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수준의 '연습(exercise)'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꾸고자 하는 '경건의 훈련'입니다. 아까 부분적으로 인용했던 디모데전서 4장 7절과 8절 말씀의 앞뒤를 다 이어서 보면 "...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육신을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하여 부지런히 체력 단련을 하듯이, 신자는 자신의 인격과 영을 하나님 앞에서 더 아름답게 다듬기 위하여서는 끊임없는 경건의 연습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펼치고 있는 본문의 주제가 바로 이 개인 경건에 해당됩니다. 이스라엘을 당신의 선택된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특별한 개인 경건생활의 연습을 한 가지 가르치셨는데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나실인의 규례'입니다. 이 시간 저는 바로 이 규례를 통하여 우리 기독신자들이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더 아름답고 건강하게 가꾸기 위하여 꼭 연습해야 할 경건생활에 관한 세 가지 교훈을 여러분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경건생활은 부정한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할 때 꼭 필요한 '영적 몸매'를 가꾸는 일입니다. 본문 1절부터 8절에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 3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4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 5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 6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7그 부모 형제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인하여 몸을 더럽히지 말 것이니 이는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 머리에 있음이라 8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그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나실인'이란 말은 원래 '따로 떼어 놓다'(set apart) 혹은 '구별하다'(separate)라는 어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실인이라 함은 곧 '여호와께 드려지기 위하여 따로 구별된 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본문에서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 혹은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날" 등 대여섯 번 반복되고 있는 표현이 바로 그 나실인이란 말의 뜻을 풀이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사람이 그처럼 자기의 몸을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바치고자 할 때 즉각적으로 생기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사람은 스스로 부정한 존재일 뿐 아니라 또한 온통 부정한 환경 속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는 점과 하나님은 정반대로 지극히 거룩하신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나실인에게는 세 가지 금기사항이 주어졌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부정한 것들을 자기 자신 속에서 없애고 대신 거룩한 것으로 채워 가는 일련의 과정이었습니다. 철저한 '금주 생활'이 그 첫째 과정이었습니다. 포도주나 독주는 물론이고 그런 것들을 본인에게 상기시킬 가능성 있는 관련 식품까지도 엄격하게 제한되었습니다. 이 같은 금주 명령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항상 바로 깨닫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즉 자신의 정신 상태가 어느 한 순간이라도 성령의 인도하심, 말씀의 계시가 아닌 술기운에 사로잡혀서는 아니 됨을 항상 자각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삭발 금지'가 그 두 번째 금령이었습니다. 머리털을 기르는 것은 그를 주장하는 어떤 권세자가 그 사람 위에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고린도전서 11장 10절에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실인 서약자는 자기 위에 계신 하나님의 권위를 항상 인식하고 온전히 그에게 바침이 되었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머리털을 깎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당시 이방 우상 숭배자들은 자기들의 신들에게 스스로를 헌신하는 표로서 머리털이나 수염 등을 이상한 모양으로 밀거나 깎든지 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셋째로 '사체 접근 금지' 명령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종교적으로 부정하게 여겨진 것들은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부정한 것이 바로 죽은 사람이나 동물의 사체였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바로 죄의 직접적인 결과이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고자 하는 자는 그 죄의 값인 죽음으로부터도 자신을 구별해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해서, 사체 접근 금지 명령은 곧 자신이 하나님 앞에 완전히 성별되어 있다는 사실을 항상 상기하고 실천하는 규례였던 것이었습니다. 나실인들은 이와 같은 세 가지 규례를 지킴으로써 자기 자신을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리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가꾸어 나갔습니다. 자신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성별시키기 위한 서원이었으니 그 모든 규례들은 역시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좋아하실 기준만을 따라 설정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회에서도 다른 사람 앞에 좀 더 아름답고 멋있게 보이기 위하여 꽤 애를 쓰지 않습니까? 자식은 부모 앞에서 단정한 자세를 갖추어야 하며, 부부 사이에서는 피차 매력 있는 모습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심지어는 직장의 상사나 손님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도 우리는 날마다 몸단장과 옷매무시에 신경을 쓰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가 그 하늘 아버지 앞에서는 더욱 자신의 몸가짐을 조심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아오며 그 분을 모셔 섬기며 살고자 하는 자들이 그 하나님의 면전에서 부정의 먼지를 풀풀 날리고 죄악의 때 냄새를 풍긴다는 것은 말도 안 될 일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경건생활이야말로 진정 하나님과 가까이 교통하며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성도가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좀 더 아름답게 보이고자 할 때 꼭 필요한 단장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의 영혼을 깨우고 그대로 순종하고자 애쓰는 모습, 나의 주권자 되신 하나님을 날마다 의식하며 그 앞에서 겸손히 머리 숙이는 기도생활, 더럽고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버리고자 하면서 선한 일에 한 가지라도 더 힘쓰는 자세 – 바로 이런 경건의 연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눈에 더욱 아름답고 멋진 영적 몸매를 가꾸어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경건생활은 그 어떤 경우에도 쉬지 않고 꾸준히 계속해야 효과를 볼 수 있는 '영적 운동'입니다. 9절부터 12절의 말씀에 "9누가 홀연히 그 곁에서 죽어서 스스로 구별한 자의 머리를 더럽히거든 그 몸을 정결케 하는 날에 머리를 밀 것이니 곧 제 칠일에 밀 것이며 10제 팔일에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지고 회막문에 와서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11제사장은 그 하나를 속죄 제물로, 하나를 번제물로 드려서 그의 시체로 인하여 얻은 죄를 속하고 또 그는 당일에 그의 머리를 성결케 할 것이며 12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릴 날을 새로 정하고 일년 된 수양을 가져다가 속건제로 드릴지니라 자기 몸을 구별한 때에 그 몸을 더럽혔은즉 지나간 날은 무효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이 말씀은 나실인의 서약이라는 것이 얼마나 엄격하게 적용되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나실인 서약 세 가지 중에서도 세 번째 서약, 즉 사체 접근 금지 서약은 가장 지키기 어려운 면이 있었습니다. 금주나 삭발 금지 서약은 자기 자신의 의지만 확고하다면 그것을 지키는 과정에서 어떤 외부적인 방해를 받을 일은 없었습니다. 잔치 자리에서 누가 포도주를 권해도 마시지 않으면 되는 것이고, 나실인의 그 긴 머리가 보기 싫다고 본인이 잠자고 있을 때 몰래 그 머리를 깎아버릴 사람도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체 접근 금지 규례는 달랐습니다. 이것은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우연히 범하게 될 소지가 실로 다분한 규례였습니다. 본문에서 "누가 홀연히 그 곁에서 죽어서 스스로 구별한 자의 머리를 더럽히거든"이라고 예를 드는 것이 그 한 가지 경우입니다. 아직 죽은 사람은 아니었는데 나실인 서약한 사람과 만나 이야기 나누는 동안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는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혹은 이웃집에 잠시 들렀다 가려고 우연히 들어갔는데 마침 그 집에 초상이 나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나실인은 전혀 자기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그 나실인 서약의 세 번째 규례를 어기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실인은 그런 경우에조차 그 모든 지나간 날 동안 자신을 구별한 것이 "무효"가 된다고 했습니다. 무효가 될 뿐 아니라, 그처럼 우연히 자신을 부정케 한 일에 대해서 남달리 특별한 속죄제물을 드려야만 했습니다. 보통 사람이 그런 부정을 타게 되었을 때에는 물로 씻고 하루 저녁을 기다리든지 조금 더 심한 경우에는 칠일을 기다려 가장 값싼 속죄제를 드리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실인의 경우에는 비둘기 두 마리로 속죄제와 번제를 함께 드려야 했을 뿐 아니라, 새로 나실인의 서약 기간을 시작하기 위하여 가장 비싼 제물인 "일 년 된 수양"을 속건제물로 바쳐야만 했던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런 식으로 본의 아니게 우연히 나실인 규례를 범하여 그 동안의 모든 노력이 수포가 된다는 사실 자체만 해도 참으로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정을 씻는 방법까지도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요구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한번 나실인의 서약을 하면 그 서약이 어떤 경우에도 결코 가볍게 여겨질 수 없으며, 그 당사자는 자기의 서약을 끝까지 엄격하게 자신에게 적용하며 지켜야 할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서원하고 지키는 개인의 경건생활을 두고 신자라는 사람들조차 가볍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어쩌다 한 번씩 어겨도 별 일 아닌 것처럼 여기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그 시작한 날부터 결코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구원의 확신은 그것이 완성될 때까지 조금이라도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경건생활은 그 중간의 과정에서 적당히 왔다 갔다 해도 되는 것으로 편리하게 간주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마치 체중조절을 하겠다고 시작했던 다이어트가 힘들어지면 도중하차해도 그것을 두고 내게 무어라 말할 사람 없고, 하루 한 번씩 하겠다고 작정했던 체조시간을 나중에 귀찮다고 자주 빼먹어도 그것을 지적하면서 날 욕할 사람은 없다는 식인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작정해서 시작했던 일이니 내가 어겨도 아무 관계없다는 논리를 신자의 경건생활에 적용시켜서는 결코 안 됩니다. 일단 우리가 신앙고백을 하고 경건생활을 서약한 후에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맺은 약속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무리 그 경건생활의 서약이 사람 가운데서는 나 혼자만 알고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꾸준하고도 철저하게 그 생활을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연습해야만 합니다. 예배생활, 기도생활, 봉사생활 못하는 자기 자신을 두고 '누구라도 어쩔 수 없는 경우이니까'라고 스스로 변명하기 시작하면, 몸을 가꾸기 위한 운동을 하기로 결심하고도 작심삼일로 끝나는 사람처럼, 결국 자신의 성화생활에 아무런 진보도 얻지 못하게 될 것이고 시작할 때는 신실했던 신앙도 점점 더 약골이 되어 갈 것이 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경건생활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으로, 혹은 적당히 해도 되는 것으로 가볍게 취급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마치 자기 집 거실이나 안방에서 아령이라도 들고 날마다 꾸준히 운동을 하는 사람처럼, 자신의 영적 골방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스스로 채찍을 가하면서 꾸준히 경건생활을 계속함으로써 실로 '금세와 내세에 약속을 가져다주는' 멋진 효과를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경건생활이란 모든 신자들이 각자가 성취해야 할 공통적인 '영적 과제물'입니다. 13절 이하 21절에 "13나실인의 법은 이러하니라 자기 몸을 구별한 날이 차면 그 사람을 회막문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14그는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되 번제물로 일년 된 흠 없는 수양 하나와 속죄 제물로 일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하나와 화목제물로 흠 없는 수양 하나와 15무교병 한 광주리와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들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들과 그 소제물과 전제물을 드릴 것이요 16제사장은 그것들을 여호와 앞에 가져다가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 17화목제물로 수양에 무교병 한 광주리를 아울러 여호와께 드리고 그 소제와 전제를 드릴 것이요 18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 문에서 그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 19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이 그 머리 털을 민 후에 제사장이 삶은 수양의 어깨와 광주리 가운데 무교병 하나와 무교전병 하나를 취하여 나실인의 두 손에 두고 20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들 것이며 그것과 흔든 가슴과 든 넓적다리는 성물이라 다 제사장에게 돌릴 것이니라 그 후에는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느니라 21이는 곧 서원한 나실인이 자기 몸을 구별한 일로 인하여 여호와께 예물을 드림과 행할 법이며 이 외에도 힘이 미치는 대로 하려니와 그 서원한 대로 자기 몸을 구별하는 법을 따라 할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 기록된 내용은, 나실인이 그 서원한 기간이 끝났을 때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사들을 가르친 것입니다. 나실인은 "자기 몸을 구별한 날이 차면" 네 가지 종류의 제사, 즉 번제, 속죄제, 화목제, 소제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되어 있었으며, 그와 함께 그동안 길러왔던 자기의 머리털을 밀어 화목제를 드리는 불에 던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여기 이 제사에 관하여 주목할 점은, 나실인에게 요구된 제물의 양과 준비할 때 드는 경비는 당시 일반 백성의 경우는 물론이며 일반 제사장의 경우의 것조차 능가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여기 기록된 제물의 수준은 바로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위임받을 때에 드렸던 제물의 수준에 상응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나실인과 제사장 사이에는 여러 가지 현격한 차이점들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은 오직 남자만 될 수 있었지만 나실인은 남녀 구별 없이 누구나 할 수 있었으며(2절), 성막에 출입하며 제사를 주관하는 것과 백성들을 가르치고 축복하는 것 역시 제사장에게만 국한된 일이었습니다. 또한 제사장은 특별한 옷을 입고 머리 손질도 했지만 나실인은 그렇지 않았으며, 제사장은 백성들이 바치는 제물로 생활했지만 나실인은 오로지 제사장 앞에 제물을 가져가야 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오직 한 가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구별되어 바쳐지는' 점에 있어서는 평신도 출신인 나실인이 대제사장과 아무 차이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나실인 서약은 "특별한 서원" 즉 아무나 자원하는 대로 하는 서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그 서원을 하게 되면 자신의 "몸을 구별하는 일"의 수준은 문자 그대로 대제사장의 성별된 생활과 질적으로 맞먹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점은 오늘날 신약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가 경건생활을 작정하고 결심해야 할 필요성과 어느 정도 열심히 경건생활을 노력하고 지속해야 하는지 그 정도에 있어서는 모든 기독 신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인용했던 디모데전서 4장 7절과 8절에 계속 이어지는 9절에서도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경건생활이란 결코 목사에게만 주어진 명령이 아닙니다. 장로나 권사나 집사의 직분이 따로 있다고 그에 따른 경건생활의 수준이 각각 차별이 있는 것도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신자'가 받고 지켜야만 할 가장 일반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이 우리 신자들의 공통분모가 되어야 할 것이라면, 경건생활이야말로 신자들의 공통분자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 모두는 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에 "나는 성령의 은혜만 의지하고 그리스도를 좇는 자가 되어 그 교훈대로 힘써 행하며 모든 죄의 길을 버리고 보이신 본대로 경건한 생활을 하기로 작정합니다. "라고 똑같이 서약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경건생활을 '나보다 더 경건해야만 할 사람이나 할 일'이라고 결코 착각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경건생활은 남녀노소 직분유무를 불구하고 모든 기독신자에게 주어진 필수적인 영적 과제임을 깨닫고 바로 자기 자신부터 하나님 앞에서 약속한대로 이 서원을 결코 잊거나 어기지 않고 반드시 이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나실인으로 서원한 자들은 이처럼 '자기 몸을 구별한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더욱 온전한 모습으로 성화되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를 당신의 선민으로, 당신의 자녀로, 당신의 신부로 불러 주신 주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도 그 부정하고 더러웠던 모습을 벗어버리고 그 깨끗하고 성결한 모습으로 새롭게 옷 입을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답고 멋진 '영적 변신'은 오직 '자신의 몸을 구별하는 법'을 지켜 행하는 경건생활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에 '미운오리 백조되기'라는 연예프로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외모에 불만이나 문제가 있는 지원자들을 뽑아서 성형수술을 통해 미인으로 바꾸어 주는 리얼리티 프로였는데, 당시 미국에서 상당히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 무슨 '도전! 신데렐라'인가 하는 제목으로 비슷한 프로가 케이블방송에 나왔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요즘도 그와 같은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렛미인'이라는 또 다른 프로가 생겼다고 합니다. 자신의 외모를 아름답고 멋있게 바꿀 수만 있다면 몇 달씩이나 계속되는 다이어트와 운동은 두말할 것도 없고 위험한 수술까지도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는 지원자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녀 같은 신세에서 하루아침에 공주가 된 신데렐라의 기쁨이 아무리 꿈같다 할지라도 어찌 경건생활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자녀로 변화되어 가는 감격에 비길 수가 있겠습니까? 각고의 노력 끝에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게 된 사람들이 마치 다시 태어난 기분이라고 말들 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중생을 받고 그 주님을 본받아 거룩하게 성화되어 가는 성도의 행복에 어찌 견줄 수나 있겠습니까?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지만, '경건은 범사에 유익'할 뿐 아니라 '금세와 내세에 약속'까지 있는 실로 놀라운 영적 건강운동(exercise)입니다. 오직 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드릴 줄 아는 신자만이 이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어제보다 오늘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가가기를 소망하면서 경건생활을 결단하고, 결코 게으름을 피우거나 변명을 앞세우지 않고 꾸준히 경건생활을 연습하며, 그 경건생활을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부터가 꼭 성취해야 할 과제인 줄로 명심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생활의 건강을 날로 증진시켜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
손상률 목사 / 하나님의 얼굴 (민 6:22-26)
하나님은 영(靈)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요 2:24).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보게 되면 죽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삿 13:22).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사람을 하나님과 대면하는 사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천하만민 가운데서 구별된 제사장 나라라고 하였습니다(출 19:6). 이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자의 삶을 사는 사람을 ‘나실인’이라고도 합니다(민 6:1-21).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들은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하는 축복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누구도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얼굴이 그들에게로 향하는 특권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1. 은혜를 베푸시는 얼굴입니다.
25절에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주님 얼굴빛의 광채를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하고 기도하였습니다(시 4:6).
1) 조명하는 빛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빛의 근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1서 1:5에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연계나 인간 세계에 나타나는 모든 빛의 근원자입니다(창 1:3). 빛은 의와 진리와 생명을 상징합니다(요 1:4). 한편 어둠은 죄와 마귀와 죽음을 상징합니다(엡 6:12). 성경은 예수님이 없는 세상을 마귀가 지배하는 어둠의 권세라고 하였습니다(눅 22:53). 범죄한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어디에나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지만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의의 빛, 진리의 빛으로 조명을 받게 됩니다. 이사야 9:2에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고 하였습니다.
2) 치료하는 빛입니다.
말라기 4:2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고 하였습니다. 의(義)의 태양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지으실 때 가장 먼저 ‘빛이 있으라’ 하시고 빛을 지으신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창조 당시에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였는데 거기에 하나님께서 빛을 보내셨습니다. 그 빛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생명의 빛이 되었습니다(요 1:4). 의학계에서 엑스 레이(X-Rey)나 레이져(laser) 광선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얼굴빛이 죽음 아래 있는 영혼을 치료하여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시 80:19).
3) 인도하는 빛입니다.
모세와 함께 애굽에서 올라온 이스라엘 백성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광야길을 여행하면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출애굽기 13:21-22에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빛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시편 119:105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밤중 같은 세상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등불을 비춰 주시고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승리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요 14:6).
2. 평강을 주시는 얼굴입니다.
26절에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향하는 곳에 은혜가 있고 그 은혜의 결과로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엡 1:2).
1) 평강의 근원지는 예수님입니다.
마귀가 지배하는 곳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이전에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며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 평강을 잃었습니다. 창세기 3:8에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속에 죄가 들어오면 하나님의 낯을 피하게 되고 그 결과 두려움과 불안이 지배하게 됩니다. 여기에 예수께서 평강의 왕으로 찾아오셨습니다(사 9:6).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4:27).
2) 얼굴을 마주 대할 때 평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체를 가진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요 4:24). 그러나 신령한 눈이 열린 사람은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마 5:8). 다윗은 주의 얼굴빛이 비춰지는 곳에 참된 기쁨과 평강이 있다고 노래하였습니다. 시편 4:6-7에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고 하였습니다. 요나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고 하는 사람은 불행하게 됩니다(욘 1:3). 시편 73:27에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고 하였습니다. 또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28절).
3) 하나님과 교통하므로 평강이 있습니다.
얼굴을 마주 대한다는 것은 서로 눈을 맞추며 마음이 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하며 마음을 같이 하는 사람입니다. 옛날 모세는 이스라엘을 이끌고 광야길을 여행하는 동안 하나님과 대면하면서 그의 뜻을 받아 백성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출애굽기 33:11에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34:10에도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라고 하였습니다. 얼굴을 마주 대한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마주하는 것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교통하는 것을 뜻합니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관계라 하더라도 얼굴만 대하고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평안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빌 2:5).
3. 보호하시는 얼굴입니다.
24절에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라고 하였습니다.
1) 지극한 애정의 표현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을 세상 가운데서 구별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신 7:8).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한 애정을 표현
하실 때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으로 비유하였습니다(말 3:17). 그러나 부모의 사랑은 한계가 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이사야 49:15-16에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 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때때로 시험을 당하거나 마음속에 회의가 밀려들다가도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의 사랑의 체온을 의식할 때 새 힘을 얻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적극적인 손길을 의미합니다.
시편 121:5-6에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얼굴이 마주하는 곳에 어떤 어두운 세력도 해칠 수가 없습니다. 밤과 낮의 구별 없이 항상 자기의 얼굴 앞에 두시고 지키며 보호하신다는 뜻입니다. 신명기 32:10에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41:10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이 너를 붙들리라”고 하였습니다.
3) 임마누엘의 축복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예측 못하는 시련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 담대함과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눈앞이 캄캄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렀을 때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의식하게 됩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가족들을 먼저 보내놓고 자기만 혼자 남았을 때 하나님과 마주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환도뼈가 부러지는 처절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붙들고 늘어져 결국 이스라엘이라는 승리자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 때 야곱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하며 그곳 이름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불렀습니다(창 32:30). 그는 평생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승리자의 삶을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