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반, 집에서처럼 이 시간이면 정확히 잠을 깬다. 어제 저녁 과음을 한 탓인지 머리가 좀 아프다.
일어나 찬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부옇게 밝아 오는 창밖을 내려다본다. 어젯밤 불빛이 명멸하던 보문단지 놀이터의 놀이기구도 불 꺼지고,
호수는 잠자는 듯 고요하다. 호수 건너 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추며 지나가고.
5시 YTN 뉴스를 보고 새벽부터 욕조의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다.
간단히 짐을 정리하고 배낭에 물 두통과 사탕 몇 개, 모자와 선글라스, 갈아입을 옷을 꾸리고 쿨맥스 반바지에 쿨맥스 속옷과 상의를 입고
로비에 나가니 경주의 친척 차가 와서 대기하고 있다.
옅은 안개가 낀 새벽길을 차는 달린다. 연분홍 꽃이 핀 배롱나무와 키 작은 상록수로 잘 가꾸어진 조용한 길,
남산을 왼편에 두고 출발 10여 분만에 신라 건국 신화 전설이 어린 나정과 신라의 막을 내린 곳으로 원망의 대상인 포석정을 지나
오늘의 산행, 아니 답사기점인 삼릉이다.
입구에 잘 그려진 경주 남산 코스가 반기고.
차는 9시경 데리러 오기로 하고 혼자서 인가 들이 있는 마을을 지나니까 때맞추어 “꼬끼오”하고 닭 한마리가 선창을 하니
여기서 “꼬끼오” 저기서 “꼬끼오”하며 응답이 바쁘다. 이정표를 보니까 삼릉사, 삼릉계곡으로 가기로 하였으니까 길을 따라 돈다.
사과가 붉게 익어가는 과수원을 지나가다가 사진 한장을 찍고.
밭에 있는 매를 프린트한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허수아비를 보았다.
조그마한 절이 나타나 들어가니까 망월사이다.
절의 마당에는 고추를 말리고 있다.
가다보니까 이게 아닌데 하고 길을 물으니 촌부가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것이 이정표에서 잘 못 든 것,
혼자이니 이럴 때 좋다. 불평할 사람들이 없고 어차피 오늘은 하산시간만 맞추면 되니까 걱정이 없다.
돌아오면서 보니까 웬 가꾸지도 않은 무덤들이 그렇게 많은지.
삼릉에는 여러 명이 커다란 카메라를 매고 아니면 설치 해놓고 각도를 달리하며 사진을 찍느라고 바쁜 사람들을 만난다.
아마 사진 동호인 회의 출사 광경 같다.
완만한 곡선의 자그마한 왕릉 셋.
그리 넓지 않은 둘레를 돌며 이들이 살았던 천 년 전의 과거를 생각해 본다.
건너편에는 마지막 비극의 왕, 경애왕의 왕릉이 보이는데 내려 올 때 들리기로 하고.
상선암과 경애왕릉 가는 이정표가 귀신모양의 신라 와당처럼 만들어 졌고.
출입자 전자 계수기를 통하여,
나무로 깐 길을 올라간다.
주위의 아름드리 소나무는 왕릉이 만들어지고 난 뒤에도 수도 없이 죽었다 다시 살아났겠지.
약간은 축축한 듯한 산의 공기, 아직은 열기가 올라오지 않았고 해는 저 산 너머에서 뜨고 있으니 쾌적한 산행이다.
숲에는 산비둘기 “꾸룩 꾸룩”, 매미도 종류 별로 노래이어가기를 하고 있고 내가 모르는 새들의 노래 소리도 듣기가 좋다.
물가에서 흐르는 물소리까지도.
산길을 완만히 오르다가 무슨 안내판이 보여 가까이 가보니까 천연색으로 독버섯 사진을 찍어 놓고 중독 시 주의 사항 가르쳐 준다.
계곡을 건너 목이 없는 석불좌상.
사진을 한 장 찍고, 오르다 촛불이 켜진 곳이 있어 가 보았더니 별 유적은 없고 암굴에서 치성을 드린 흔적이 보인다.
다시 옆길로 나가 작은 계곡을 지나 선각육존불.
또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는 석조 여래좌상을 보고는.
다다시 주 등산로로, 날은 밝아 오면서 더위도 같이 따라 온다.
상선암 오르는 길은 좀 빡세다. 몇 년 전 왔을 때는 상선암 자판기 뽑아 마신 커피는 얼마나 향기로웠는데.
마애 석가 여래좌상 보고 헬기장으로 해서 금오산 정상까지 올랐었다.
능선을 타고가다 용장사 옛터를 거쳐 내려오다 길을 잘못 들어 헤매다 골이 깊고 물이 많은 용장골로 내려왔었고,
또 한번은 좀 하산길이 쉬운 포석정으로 내려 온 적도 있었고.
그러고 보니 오르는 남산의 반대편에서 후배와 같이 칠불사코스를 가서 찍은 사진이 내 연구실 창가에 있네.
나이 탓일까? 평소 운동부족으로 비만해진 몸 탓일까? 오늘은 왜 이리 힘이 드는지.
상선암에서 물을 한잔 마시며 숨을 몰아쉬고, 커피를 마시려고 보니까 그 때 그대로 낡은 자판기라 정나미가 떨어진다.
오늘의 목표인 마애석가여래좌상.
이 불상은 삼릉계곡에서 가장 큰 불상이라 마애 대불좌상이라고도 불린다.
입구에 한쪽 벽면에 균열이 가있으니 조심하라는 표지가 서있다. 그 자리에서서 부처님의 눈으로 멀리 조망해 본다.
앞은 녹음이 짙은 산등성이 너머로 먼 산들이 아득히 보이는구나.
커다란 마애불의 앞에는 선점하고 있는 부인네 3명이 가부좌를 틀고는 하는 이야기가 재미있어 슬쩍 끼어 물어 본다.
“요즈음 양동마을에는 가보셨어요? 아이고 말도 마세요. 그저께 한번 가보았는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몰려오는지,
또 동네에 쓰레기가 쌓여 큰일 났어요.” 그렇다. 그 마을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보존이 잘되고 있었는데. 어떤 묘책이 없을까?
미리 예약을 받아 하루에 몇 명씩 마을 구경을 하면 어떨까?
이번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하회는 우리의 친가 쪽, 양동은 우리 집안과 사돈, 겹사돈 등 걸리는 연이 많은 곳이다.
경상도에서는 양동이라면 반가 음식도 알아주는 곳, 어릴 때 양동 아지매 집에서 수란 국을 먹은 기억이 난다.
지금도 나의 친척누나가 서울에서 “양동 한과”를 하고 있지요. 내가 "언덕을 넘어 옥산서원도 좋지요.” 하니까
“그럼요, 회제 이 언적선생님 서원 아닙니까? 규모는 작지만.” 하며 대구를 한다.
다음 기회에 두 곳을 모두 다시 가보아야겠다.
하산 길은 언제나 바쁘다. 10분 늦겠다고 전화를 하고 햇살을 등 뒤로 맞으며 원점으로 회귀를 하니까 아홉시 10분,
차가 와서 기다리고 있네. 땀에 흠뻑 젓은 몸으로 에어컨이 잘되어 있는 차를 타고 돌아 왔다.
비록 3시간의 혼자한 산행이지만 아쉬운 것 하나 없다.
추가로 찍은 몇장의 사진을 보탠다.
첫댓글 사진 잘 찍었네요... 잘 보았습니다. 전날 과음하고 다음날 일찍 일어나서 등산하다니, 체력 참 여전한 가 봅니다.
호텔로 돌아와 샤워 후 옷 갈아입고 식당에 가서 제일 먼저 시키 것, "여기 시원한 맥주 두병(작은 병이니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