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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3일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사순절 셋째 주일)
갈망이 이끄는 자리
사55:1~9; 시63편; 고전10:1~13; 눅13:1~9
예수님의 “회개하라”는 외침은 “(너희) 삶의 방향을 바꾸라”, “(너희) 행복의 방향을 바꾸어라”라는 외침으로 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꾸 들어서 식상한 말처럼 들리지만, 사순절에 우리는 항상 이 문제로 씨름을 하게 됩니다. 물론 사순절에만 우리가 이 문제로 씨름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핵심적인 명제이며 우리 삶의 핵심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향해 말씀하신 첫 일성이 바로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1:15)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온 우주 삼라만상을 창조하신 후에 “참 좋다”라고 탄성을 지르신 그 “좋음”으로 돌아감입니다.(<힌네 톱 메옷> 와! 참 좋다!) 동시에 “참 좋다” 하신 그 “좋음”으로 자라남입니다. “돌아감”이 “자라남”입니다. 회복이 성장이지요. 이미 여기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고, 이미 여기 있는 것을 만나는 것이고, 이미 여기 있는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럼 우리 삶의 방향이 어떻길래, 우리가 찾는 행복의 방향이 어떻길래, 우리 삶의 방향을 바꾸고, 우리 행복의 방향을 바꾸라고 하는 걸까요?
우리들은 “보여지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알려진 것”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이지요. 우리는 “보여지는 것, 알려진 것”, 즉 대상을 갈망하는(탐하는) 사람들입니다. “보는 자”로, “아는 자”로는 행복하지 못합니다. 아니 실제로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알고 있는 “보여지는 것, 알려진 것”을 손에 넣음으로써만 행복할꺼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행복인데, 행복의 대체물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아주 분명한 상징이 있습니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았습니다. 하와가 보기에, 그 나무의 열매는 “먹음직했고”, 나무 자체가 “보기에도 좋았고(눈에 쏙 들었고), 슬기롭게 해줄 듯 탐이 났다(<카맛> 갈망하다, 탐내다)”고 했습니다. “보여지는 것”에 완전히 눈이 돌아갔습니다. “알려진 것”을 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자신이 “보는 자”임을 잊어버렸습니다. 그 자신이 “아는 자”임을 잊어버렸습니다. 회개하라, 행복의 방향을 바꾸라는 부름은,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보여지는) 것에서, 단순한 “보는 자”로, 슬기롭게 할만큼 탐스럽다고 알려진 것에서 그냥 “아는 자”로의 전환을 말합니다. (“보는 자”, “아는 자”는 어떤 대상에 대한 의식이 아니라, 깨어있는 의식, 그리스도 의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본디 만드신 나로 존재하는 봄이며, 그 나로 존재하는 앎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대상을 탐하는 인간으로 추락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욕망의 역사라고 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여기서의 욕망은 탐욕에 가깝습니다. 욕망과 탐욕의 관계를 오늘 테오리아에 올린 글이 아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원한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갖고자 하는 것이 욕망이다. 필요 이상의 지나친 욕망을 탐욕이라고 한다. 탐욕은 내가 필요한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가 바라는 것을 내가 필요로 하는 것으로 여기는 마음이다.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는 광고가 내게 알려준다.” 라깡이 말한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입니다.
(여기 글에서는 욕망은 욕구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욕망이라고 할 때는 탐욕과 그렇게 분명히 나뉘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욕구와 욕망도 우리 안에서 구별이 쉽지 않습니다. 욕구, 욕망, 탐욕, 이 분명한 단어들이 실제로 우리 안에서는 뒤죽박죽 혼재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실상이 그렇습니다.)
욕망이 역사를 만들었고, 지금도 역사를 만들고 있습니다. 수많은 문학작품,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바로 인간의 이 욕망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종교와 신앙도 욕망 투성이지요. 이 주제가 아니라면, 우리 역사에, 우리 문학과 드라마에, 우리 종교와 신앙에, 우리 삶에 무엇이 남아 있을까요? 권력에의 욕망, 인정에의 욕망, 돈에 대한 욕망, 식욕, 성욕, 사랑에의 갈망, 오늘 시편에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까지!
오늘 시편63편의 시인은 이렇게 간청합니다. “하나님, 주님은 나의 하나님입니다. 내가 주님을 애타게 찾습니다. 물기 없는 땅, 메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목이 마르고, 이 몸도 주님을 애타게 그리워합니다.”
새한글 번역은 이렇습니다. 새한글 번역은 어순을 우리말에 맞추지 않고, 히브리어 원전의 어순을 따랐습니다.
“오, 하나님, 주님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내가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을 향해 목말라 합니다, 이 사람이요./ 주님을 간절히 바랍니다, 나의 몸이, 메마른 땅에서/ 그러다 지칩니다, 물이 없어서.”
오늘 우리 새번역 성경에 “...메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목이 마르고”에서 “내 영혼”은 히브리어로 <납쉬>입니다. “내(나의)” 라는 소유격을 떼면, <네페쉬>가 됩니다. <네페쉬>는 우리말 시편에서는 주로 “영혼”으로 번역되는데, 이 말은 그냥 사람으로서의 “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새한글 번역은 “주님을 향해 목말라 합니다, 이 사람이요”라고 번역했습니다.
이것을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네페쉬>의 원래 의미는 “목구멍”, “욕구”입니다. 그러다, “생명”, “사람” 이라는 뜻으로도 쓰이게 됩니다. <네페쉬>는 한 마디로 “갈망하는 인간”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인간을 “갈망하는 인간”으로, “목구멍을 채워야 하는 존재”로 보았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시편 시인의 “내가 주님을 애타게 찾습니다. 물기 없는 땅, 메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목이 마르고, 이 몸도 주님을 애타게 그리워합니다.”라는 시구 속에서, 우리는 시인의 목마름을, 갈망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시인은 광야를 잘 알고 있습니다. 메마르고 황폐한 땅, 전갈이 우글거리고 바위투성이의 땅, 그 땅에서의 결핍과 욕구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타는 목마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만 보면, 시인은 지금 하나님 부재, 하나님 없음을 경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는 애타게 그리워하고, 그로 인해 타는 목마름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타는 목마름”으로 그는 하나님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갈망은 하나님 부재의 상황이면서 동시에 갈망은 하나님 현존의 상황이기도 합니다. 대단한 역설이지요?
오늘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고, 누가복음만 전하는 이야기가 두 개가 나옵니다.
총독 빌라도에 의해 사람들이 성전에서 죽임을 당했고, 실로암 탑이 무너져 깔려 죽었는데, 이들은 뭔가 죽을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거야 라는 당시의 통념을 넘어, 예수님은 지금 여기서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이 말씀을 들으면, 우리에겐 당장 우리의 안에 있는 죄책감과 인과응보라는 통념이 곧바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그렇게 작동한다면, 이 말씀에 여러분의 죄책감과 통념을 섞게 된다면, 그것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회개의 촉구는 예수님께서 첫 일성으로 하신 그 회개의 촉구와 똑 같습니다. 행복의 방향을 바꾸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이런 말씀에도 꿈쩍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행복의 방향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이어서 하나의 비유를 소개합니다. 이것도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를 심어놓고는 열매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열매를 맺을 때가 되었는데도, 무화과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포도밭 일꾼에게 말합니다. “보세요, 내가 3년째 와서 무화과 열매를 딸까 했지만, 열매를 본 적이 없으니, 나무를 그냥 베어버리세요. 뭐하러 땅만 버리겠습니까?” 그러자 포도밭 일꾼은 “주인님, 올해도 그냥 놓아둬 보시죠. 그동안 그 둘레를 파고 거름(<코프리온> 똥)을 줘보겠습니다. 그래도 열매를 맺지 않으면 그때 가서 베어버리지요.”
우리는 이 비유가 회개를 촉구하는 비유 바로 다음에 나오기 때문에, 당연히 회개를 촉구하는 본문으로 보게 됩니다. 대부분의 성경 주석들이 그렇게 설명하고 있고 누가가 이 비유를 여기에 편집한 의도도 그것이었을지 모릅니다. 세례요한의 예도 있지요. “도끼를 이미 나무뿌리에 갖다 놓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신다”(눅3:9) “회개에 마땅한 열매를 맺어라” 라는 것이지요.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버림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은 회개의 열매를 기다리고 계시고,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 가차없이 베임을 당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비유를 독립적인 비유로 보게 되면, 우리 관점은 바뀌어 집니다.
그럼 이 비유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실 이 나무는 애초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 같습니다. 일꾼이 나무 둘레에 거름을 듬뿍 주겠다고 하지만 3년 동안 없었던 열매가 열릴 것 같지 않습니다. 이 나무는 우리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열매를 맺으려고 많이 애썼습니다. 우리가 우리 일상의 삶을 열심히 살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어떤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가요? 우리가 처한 일상의 삶이 뭔가 그렇게 크게 달라지던가요? 우리가 기도를 오래 바친다고 어떤 열매를 맺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삶에 대박 맞는 그런 날이 올까요? 사실, 우리의 삶에는 흙먼지만 가득할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요? 오늘 이 비유는 우리가 바라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를 보여주는, 좀 충격적인 상징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계속 잘못하고, 이런 저런 계획을 세워보지만 그 십분의 일도, 백분의 일도 못 따라 가고, 그저 하루하루는 똑같은 꼴아지로 흘러가고, 신앙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과의 사귐은커녕 하나님의 현존은 전혀 감지되지 않고, 기도를 해도 늘 그저 그런 모습에 실망합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늘 뭔가를 추구하고, 행복과 성공을 저 앞에 있는 목표로 생각하며, 그것을 향해 충실하게 나아가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바울도 그랬지요? 앞으로 달려 나가라고! 그러나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온, 지금 우리 모습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만족스럽습니까? 열매를 맺었습니까?
오늘 비유는 깊은 욕망을 갖는 인간 본성과 그 안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어떤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혹스런 질문입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온갖 종류의 시련을 참아 견디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토록 근심걱정에 시달리고, 원치 않는 병이나 걸리고, 자식들은 속 썩이며,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또 삶은 이렇게 무기력하고 우울하기만 할까? 이런 시련들이 결국은 내 과오와 잘못에 대한 징벌의 표징인가? 아니면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려고 하시는 시련일까? (오늘 말씀에도 있네... ‘하나님은 여러분이 감강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이 시련을 견디고 인내하면 결국에 엄청난 보상으로 갚아주시니까 참아야 하나?”
이 비유가 암시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이 어느 쪽에도 기대를 걸라고 권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꾸 “겨자나무”에서 “레바논의 백향목”이 되는 것에 관심이 있고, 누룩으로 부풀어진 엄청난 부피의 밀가루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불임의 나무가 열매를 많이 맺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강박에 눌리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뽑아버릴 거야, 베어버릴거야, 라고 한다면 이것이 과연 복음이 될까요?
저는 오늘 예수님의 비유에서 너 아닌 것이 되려고 애쓰지 말라 라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것에게 너무 닦달하지 말라!
많은 교회에서는 예수께로 와서 성공하고 번영하고 복 받으라고 합니다. (성공하고 복받은 사람의 간증을 은혜스럽게 풀어놓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공하기를, 번영하고 복 받기를 욕망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더 성장하고 더 초연해지고 더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초연해질 것을 욕망해야 하고, 더 내려 놓으려고 발버둥을 쳐야 합니다! (초연해지고 더 내려놓으려고 발버둥치는 이 모순을 보십시오!)
결국은 욕망의 충족이 핵심입니다. 대상의 충족이 핵심입니다. 그것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영적이든! 영적인 것도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마귀는 영적인 것을 “보여지는” 대상으로 만드는 아주 귀신같은 재주를 가졌습니다. 많은 힘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아주 힘이 듭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보고 열매를 맺으라고 하니, 자꾸 환상을 쫓게 됩니다.
여러분,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는지 아시겠습니까?
이 무화과나무가 목표지향적인 성공지향적인 나무가 되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맺지 못하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현재의 느낌인데, 늘 현재가 비어있습니다. 긴장과 스트레스만 늘어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해 언제나 불행하고 행복지수는 끝없이 하락하고, 우울과 불안이 자리를 잡습니다. 지금 행복하지 못하면 행복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행복은 짜릿한 기분과도 다릅니다. 평온한, 고요한 머무름입니다. 지금 행복할 때, 그때 하나님은 아주 까까이 계십니다. 우리의 숨보다 더 가깝고 우리의 생각보다 가까우며, 우리의 선택보다 가깝고, 우리의 의식보다 가까이 계십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무엇을 해서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은 그냥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사랑받을 일을 해서, 성장해서, 기도해서,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은 그냥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빛을 가지고 보면 우리는 “보는 자”,“아는 자”가 됩니다.
“보여지는 것”, “알려진 것”, 즉 대상에 우리의 행복을 걸면 불행해지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보여지는 것”, “알려지는 것”만을 욕망하며 살게 되면, “보는 자”, “아는 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는 자” “아는 자”는 보여지는 대상, 알려지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는 자” “아는 자”는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시편 시인의 노래를 보았습니다. 시인은 메마르고 황폐한 땅에 주님을 찾아 목이 마르다고 했습니다. 이 시인의 갈망은 부재이며 현존입니다. 갈망은 없어서 바라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이미 이끌림을 받는 현존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에서 일꾼은 나무에 거름을 주겠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달콤한 무화과를 풍성히 거두어들이는 체험이기 보다 “똥”을 맛보는 체험이기 쉽습니다. 그런데 농부는 그냥 그 일을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럴 때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생생한 현존을 발견합니다. 단순한 갈망이 우리를 인도합니다.
머튼의 기도 중에 이런 기도문 아시지요.
“나의 주 하나님,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는 모릅니다. 내 앞에 펼쳐질 길도 보지 못합니다. 그 길이 어디서 끝날지도 확실히 모릅니다. 나 자신마저 진실로 알지 못합니다. 당신의 뜻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내가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갈망이 실제로 당신을 무척 기쁘게 해드린다는 것을 믿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 안에서 그런 갈망을 지니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면 당신이 나를 바른 길로 이끌어주실 것을 압니다. 내가 바른 길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도 말입니다.”
시편 시인의 갈망은 마침내 주님을 뵙고, 맛깔진 음식을 배불리 먹은 듯이 영혼이 만족하는 곳으로 이끌었습니다. 그것은 멀리 가서 도착한 자리가 아니라, 바로 갈망의 자리, 그곳입니다.
오늘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모든 목마른 사람들아, 어서 물로 나오너라. 돈이 없는 사람도 오너라. 너희는 와서 사서 먹되,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지불하지 말고 포도주와 젖을 사라.” 하나님 안에 있음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이미 있는 곳에 어떻게 다시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있는 것을 어떻게 가질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