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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ourse in Miracles 8:1 – 8:15
Chapter Eight: The Journey Back
제8장 귀향
I. Introduction
I. 서문
8:1 You are hampered in your progress by your demands to know what you do not know. This is actually a way of holding on to deprivation. You cannot reasonably object to following instructions in a course for knowing on the grounds that you do not know. The need for the course is implicit in your objection. Knowledge is not the motivation for learning this course. Peace is. As the prerequisite for knowledge, peace must be learned. This is only because those who are in conflict are not peaceful, and peace is the condition of knowledge because it is the condition of the Kingdom.
1 너는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해 달라고 요구함으로써 발전에 방해를 받는다. 이것은 실제로 박탈에 매달리는 방법이다.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알기 위한 수업의 지시 사항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너에게 이 수업이 필요하다는 것은 너의 거부에 함축되어 있다. 앎은 이 수업을 배우기 위한 동기가 아니다. 평화가 그 동기이다. 앎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 평화를 반드시 배워야 한다. 그 이유는 단지, 갈등하는 자들은 평화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화는 천국의 조건이기에, 앎의 조건이다.
2 Knowledge will be restored when you meet its conditions. This is not a bargain made by God, Who makes no bargains. It is merely the result of your misuse of His laws on behalf of a will that is not His. Knowledge is His Will. If you are opposing His Will, how can you have knowledge? I have told you what knowledge offers you, but it is clear that you do not regard this as wholly desirable. If you did, you would hardly be willing to throw it away so readily when the ego asks for your allegiance. The distraction of the ego seems to interfere with your learning, but the ego has no power to distract you unless you give it the power.
2 네가 앎의 조건들을 충족시킬 때, 앎은 회복될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이 내거시는 흥정이 아니다. 하느님은 전혀 흥정하지 않으신다. 이것은 단지 네가 하느님의 법칙을 하느님의 뜻이 아닌 뜻을 위해 그릇되게 사용한 결과에 불과하다. 앎은 정녕 하느님의 뜻이다. 네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있다면, 어찌 앎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나는 앎이 너에게 무엇을 제공해 주는지 말해 주었지만, 너는 분명 이것을 온전히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렇게 여긴다면, 에고가 충성을 요구할 때 앎을 그렇게 쉽사리 던져버리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에고의 방해는 너의 배움에 지장을 주는 듯이 보이지만, 네가 에고에게 그럴 힘을 부여하지 않는 한 너를 방해할 힘이 전혀 없다.
3 The ego's voice is an hallucination. You cannot expect it to say, "I am not real." Hallucinations are inaccurate perceptions of reality. Yet you are not asked to dispel them alone. You are merely asked to evaluate them in terms of their results to you. If you do not want them on the basis of loss of peace, they will be removed from your mind for you. Every response to the ego is a call to war, and war does deprive you of peace. Yet in this war there is no opponent. This is the reinterpretation of reality which you must make to secure peace, and the only one you need ever make.
3 에고의 음성은 일종의 환청이다. 에고가 “나는 실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환청은 실로 실재에 대한 부정확한 지각이다. 하지만 나는 너에게 환청을 혼자 쫓아버리라고 요청하지 않는다. 나는 너에게 단지, 환청을 그것이 너에게 초래한 결과라는 면에서 평가하라고 요청할 뿐이다. 네가 평화의 상실을 이유로 환청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의 마음에서 너를 위해 제거될 것이다. 네가 에고에게 보이는 모든 반응은 전쟁으로의 부름이며, 전쟁은 너에게서 평화를 앗아간다. 하지만 이 전쟁에는 적이 없다. 평화를 확고히 지키기 위해서는 실재를 이런 식으로 재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또한 네가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유일한 재해석이다.
II. The Direction of the Curriculum
II. 커리큘럼의 방향
4 Those whom you perceive as opponents are part of your peace, which you are giving up by attacking them. How can you have what you give up? You share to have, but you do not give it up yourself. When you give up peace, you are excluding yourself from it. This is a condition which is so alien to the Kingdom that you cannot understand the state which prevails within it. Your past learning must have taught you the wrong things simply because it has not made you happy. On this basis alone, its value should be questioned.
4 네가 적이라고 지각하는 이들은 네 평화의 일부이거늘, 너는 그들을 공격함으로써 평화를 포기하고 있다. 포기하는 것을 과연 어떻게 소유할 수 있겠는가? 너는 소유하려고 공유하지만, 그것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평화를 포기할 때 너는 자신을 평화에서 제외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천국과 너무도 다른 조건이기에, 너는 천국 안에 만연한 상태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네가 과거에 배운 것은 너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못했다. 이런 이유만으로도 그것은 분명 너에게 잘못된 것을 가르쳤을 것이다. 단지 이런 근거만으로도, 그것의 가치를 의문에 붙여야 한다.
5 If learning aims at change, and that is always its purpose, are you satisfied with the changes your learning has brought you? Dissatisfaction with learning outcomes must be a sign of learning failure, since it means that you did not get what you want. The curriculum of the Atonement is the opposite of the curriculum you have established for yourselves, but so is its outcome. If the outcome of yours has made you unhappy and if you want a different one, a change in the curriculum is obviously necessary.
5 배움의 목적은 언제나 변화다. 이것을 고려할 때, 너는 너의 배움이 가져다 준 변화에 만족하는가? 학습 결과에 대한 불만족은 분명 학습 실패를 나타내는 신호일 것이니, 그것은 네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속죄의 커리큘럼은 네가 스스로 짠 커리큘럼과 정반대이지만, 그 결과도 마찬가지로 정반대다. 만약 네가 짠 커리큘럼의 결과가 너를 불행하게 만들었고, 네가 다른 결과를 원한다면, 커리큘럼의 변화가 명백히 필요하다.
6 The first change that must be introduced is a change in direction. A meaningful curriculum cannot be inconsistent. If it is planned by two teachers, each believing in diametrically opposed ideas, it cannot be integrated. If it is carried out by these two teachers simultaneously, each one merely interferes with the other. This leads to fluctuation, but not to change. The volatile have no direction. They cannot choose one because they cannot relinquish the other, even if the other does not exist. Their conflicted curriculum teaches them all directions exist and gives them no rationale for choice.
6 가장 먼저 도입되어야 할 변화는 방향의 변화다. 의미 있는 커리큘럼은 일관되지 않을 수 없다. 서로 정반대의 아이디어를 믿는 두 교사가 커리큘럼을 짠다면, 그것은 통합될 수 없다. 그런 두 교사가 커리큘럼을 진행한다면, 각 교사는 단지 다른 교사를 방해할 뿐이다. 이것은 변화가 아닌 동요로 이끈다. 불안정한 자들에게는 방향이 전혀 없다. 그들이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하나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 다른 하나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들의 갈등하는 커리큘럼은 그들에게 모든 방향이 존재한다고 가르치며, 선택을 위한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못한다.
7 The total senselessness of such a curriculum must be fully recognized before a real change in direction becomes possible. You cannot learn simultaneously from two teachers who are in total disagreement about everything. Their joint curriculum presents an impossible learning task. They are teaching you entirely different things in entirely different ways, which might be possible except for the crucial fact that both are teaching you about yourself. Your reality is unaffected by both, but if you listen to both your mind will be split about what your reality is.
7 이런 커리큘럼의 총체적인 무의미함을 먼저 충분히 인식해야만, 방향의 진정한 변화가 가능해진다. 모든 것에 대한 의견이 총체적으로 불일치하는 두 교사에게서 동시에 배울 수는 없다. 그들이 공동으로 제공하는 커리큘럼은 불가능한 학습 과제를 제시한다. 그들은 너에게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완전히 다른 것을 가르치는데, 둘 다 너에게 너 자신에 대해 가르친다는 아주 중요한 사실만 제외한다면, 그것은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둘 다 너의 실재에 영향을 줄 수는 없지만, 만약 네가 둘 다에게 귀 기울인다면, 너의 실재가 과연 무엇인지에 관해 마음이 분열될 것이다.
III. The Rationale For Choice
III. 선택의 근거
8 There is a rationale for choice. Only one Teacher knows what your reality is. If learning that is the purpose of the curriculum, you must learn it of Him. The ego does not know what it is trying to teach. It is trying to teach you what you are without knowing it. The ego is expert only in confusion. It does not understand anything else. As a teacher, then, it is totally confused and totally confusing. Even if you could disregard the Holy Spirit entirely, which is quite impossible, you could learn nothing from the ego because the ego knows nothing.
8 선택의 근거는 정녕 있다. 오로지 한 교사만이 너의 실재가 무엇인지 안다. 그것을 배우는 것이 커리큘럼의 목적이라면, 바로 그 교사에게 배워야 한다. 에고는 자신이 무엇을 가르치려 하는지 알지 못한다. 에고는 너의 정체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가르쳐주려고 한다. 에고는 오로지 혼동에 대해서만 전문가다. 에고는 그밖에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교사로서의 에고는 총체적으로 혼동되어 있으면서 총체적으로 혼동시킨다. 비록 불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네가 성령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다 하더라도, 에고로부터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왜냐하면 에고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9 Is there any possible reason for choosing a teacher such as this? Does the total disregard of anything it teaches make anything but sense? Is this the teacher to whom a Son of God should turn to find himself? The ego has never given you a sensible answer to anything. Simply on the grounds of your own experience with the ego's teaching, should not this alone disqualify it as your future teacher? Yet the ego has done more harm to your learning than this alone. Learning is joyful if it leads you along your natural path and facilitates the development of what you have. When you are taught against your nature, however, you will lose by your learning because your learning will imprison you. Your will is in your nature and therefore cannot go against it.
9 이런 에고를 교사로 선택할 그럴듯한 이유라도 있는가? 에고가 가르치는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무시하는 것이야말로 말이 되지 않겠는가? 이런 에고가 하느님의 아들이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의지해야 할 교사인가? 에고는 너에게 이제껏 그 무엇에 대해서도 말이 되는 답을 준 적이 없다. 단지 에고의 가르침에 대한 너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더라도, 앞으로 너를 가르칠 교사의 자격을 에고에게서 박탈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에고는 이것 말고도 너의 배움에 더 큰 피해를 끼쳤다. 배움이 너를 너의 자연스러운 길natural path을 따라 인도하여 네가 가진 것을 드러내도록 돕는다면, 너는 즐겁게 배울 것이다. 하지만 너의 본성nature을 거슬러 가르침을 받는다면, 너는 배움으로써 잃을 것이다. 그럴 때 너의 배움은 너를 감금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의 뜻은 너의 본성 안에 있으며, 따라서 너의 본성을 거스를 수 없다.
10 The ego cannot teach you anything as long as your will is free because you will not listen to it. It is not your will to be imprisoned because your will is free. That is why the ego is the denial of free will. It is never God who coerces you because He shares His Will with you. His Voice teaches only His Will, but that is not the Holy Spirit's lesson because that is what you are. The lesson is that your will and God's cannot be out of accord because they are one. This is the undoing of everything the ego tries to teach. It is not, then, only the direction of the curriculum which must be unconflicted, but also the content.
10 네가 에고에게 귀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너의 뜻이 자유롭게 남아있는 한, 에고는 너에게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다. 너의 뜻은 자유롭기에, 감금되는 것은 너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에고는 자유로운 뜻에 대한 부정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너와 공유하시기에, 너에게 결코 강요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의 음성은 오로지 하느님의 뜻만 가르친다. 하지만 그것은 성령의 레슨이 아니니, 그것은 곧 너의 정체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레슨은, 너의 뜻과 하느님의 뜻은 하나이기에 서로 일치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에고가 가르치려는 모든 것을 무효화한다. 그렇다면, 커리큘럼의 방향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갈등이 없어 한다.
11 The ego wants to teach you that you want to oppose God's Will. This unnatural lesson cannot be learned, but the attempt to learn it is a violation of your own freedom and makes you afraid of your will because it is free. The Holy Spirit opposes any imprisoning of the will of a Son of God, knowing that the will of the Son is the Father's. The Holy Spirit leads you steadily along the path of freedom, teaching you how to disregard or look beyond everything that would hold you back.
11 에고는 네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싶어 한다고 가르치고 싶어 한다. 이런 부자연스러운 레슨은 정녕 배울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배우려는 시도는 너 자신의 자유에 대한 침해로서, 너로 하여금 너 자신의 뜻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너의 뜻은 정녕 자유롭기 때문이다. 성령은 아들의 뜻이 곧 아버지의 뜻임을 알기에, 하느님 아들의 뜻을 감금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반대한다. 성령은 자유의 길을 따라 너를 확고히 인도하면서, 너를 지체시키는 모든 것을 무시하는 법, 즉 그 너머를 보는 법을 가르친다.
12 We said before that the Holy Spirit teaches you the difference between pain and joy. That is the same as saying that He teaches you the difference between imprisonment and freedom. You cannot make this distinction without Him. That is because you have taught yourself that imprisonment is freedom. Believing them to be the same, how can you tell them apart? Can you ask the part of your mind that taught you to believe they are the same to teach you the difference between them?
12 우리는 전에, 성령은 고통과 기쁨의 차이를 가르친다고 말했다. 그것은 성령이 감금과 자유의 차이를 가르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너는 성령 없이는 이런 구분을 할 수 없다. 너에게 감금이 곧 자유라고 가르친 자는 너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 둘이 똑같다고 믿는 네가 어찌 그런 구분을 할 수 있겠는가? 그 둘이 정말로 똑같다고 믿도록 너를 가르친 너의 마음 부분에게 그 둘의 차이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할 수 있겠는가?
13 The Holy Spirit's teaching takes only one direction and has only one goal. His direction is freedom, and His goal is God. Yet He cannot conceive of God without you because it is not God's Will to be without you. When you have learned that your will is God's, you could no more will to be without Him than He could will to be without you. This is freedom and this is joy. Deny yourself this and you are denying God His Kingdom because He created you for this. When we said, "All power and glory are yours because the Kingdom is His," this is what we meant.
13 성령의 가르침은 오로지 하나의 방향만 향하며, 오로지 하나의 목표만 가졌다. 성령의 방향은 자유이고, 성령의 목표는 하느님이다. 하지만 성령은 네가 없는 하느님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너 없이 존재하심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의 뜻이 곧 하느님의 뜻임을 배웠을 때, 너는 하느님이 너 없이 존재하고자 뜻하실 수 없듯이 하느님 없이 존재하고자 뜻할 수 없다. 이것이 정녕 자유이며, 이것이 정녕 기쁨이다. 너 자신에게 이것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곧 하느님께 그의 왕국을 부정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바로 이것을 위해 너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왕국은 하느님의 것이기에, 모든 권능과 영광이 네 것이다.”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였다.
14 The Will of God is without limit, and all power and glory lie within it. It is boundless in strength and in love and in peace. It has no boundaries because its extension is unlimited, and it encompasses all things because it created all things. By creating all things, it made them part of itself. You are the Will of God because this is how you were created. Because your Creator creates only like Himself, you are like Him. You are part of Him Who is all power and glory and are therefore as unlimited as He is.
14 하느님의 뜻에는 한계가 없으며, 모든 권능과 영광이 그 안에 있다. 그것은 힘과 사 랑과 평화에 있어서 끝이 없다. 그것은 그 확장이 무한하기에 끝이 없고, 모든 것을 창조했기에 모든 것을 아우른다. 하느님의 뜻은 모든 것을 창조함으로써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만들었다. 바로 이런 방법으로 네가 창조되었기에, 네가 곧 하느님의 뜻이다. 너의 창조주는 오로지 당신과 닮게만 창조하시며, 따라서 너는 정녕 그를 닮았다. 너는 정녕 모든 권능과 영광이신 분의 부분이며, 따라서 그처럼 무한하다.
15 To what else except all power and glory can the Holy Spirit appeal to restore God's Kingdom? His appeal, then, is merely to what the Kingdom is and for its own acknowledgment of what it is. When you acknowledge this you bring the acknowledgment automatically to everyone because you have acknowledged everyone. By your recognition you awaken theirs, and through theirs yours is extended. Awakening runs easily and gladly through the Kingdom in answer to the Call of God. This is the natural response of every Son of God to the Voice of his Creator because it is the Voice for his creations and for his own extension.
15 모든 권능과 영광이 아닌 다른 무엇에게, 성령이 하느님의 왕국을 회복하라고 호소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성령의 호소는 천국 자체에게 자신의 정체를 인정하라는 호소다. 네가 이것을 인정한다면 이미 모든 이를 인정한 것이므로, 그러한 인정을 자동적으로 모든 이에게 가져다주게 된다. 너는 너의 인식을 통해 모든 이의 인식을 깨우며, 그들의 인식을 통해 너의 인식이 확장된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깨어남이 왕국 곳곳으로 부드럽고도 기쁘게 퍼져 나간다. 이것은 하느님의 모든 아들이 자신의 창조주의 음성에게 보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것은 곧 아들의 창조물들과 아들 자신의 확장을 위한 음성이기 때문이다.
[출처] [3월 30일] 텍스트 8:1 – 8:15 (한국 기적수업 공부 모임) | 작성자 도서출판 기적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