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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4:1-6
▣ 영혼의 집-요한복음 14장-
왜 제자들의 마음은 불안했는가?(1절) 이는 그리스도께서 그가 그들 곁을 떠나실 것임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한 예로서, 베드로에게 경고하신 일은(13:36-38) 의심할 바없이 그들 모두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베드로를 지도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자신의 괴로운 마음은 제자들의 괴로운 마음과는 전혀 다르기는 하나, 자신의 내면적인 부담을 나타내셨다(13:21). 아마도 그 배반에 대한 말씀 또한 그들을 낙심하게 하였을 것이다.
이 장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열 두 제자를 위로하려고 하시며 그들의 불안한 마음의 요구에 응하셔서, 그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하는 이유를 다섯 가지로 말씀해 주셨다.
1. 그들을 위해 한 장소를 예비하기 위함(14:1-6)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나라를 “마음의 상태“가 아닌 실제적인 장소로 말씀하시며, 아버지께서 거하시는 사랑이 가득 찬 가정으로 묘사하신다. “처소“란 실제로, “거하는 장소“로서 우리의 영원한 하늘의 집을 말한다. 하늘나라는 예비된 백성을 위해 예비된 곳이다.
“목수“이신 그리스도는(막 6:3) 오늘날 그를 믿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하늘의 집을 짓고 계신다. 그리고, 그에게로 자기의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돌아오실 것이다. 바울은 후에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절에서 이 약속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몸 안에 없는 자들은 주님과 함께 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남아 계셨다면 자기 백성을 위해서 하늘의 집을 마련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죄인들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소망을 가질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것은 가능하다. 누가복음 15장 11-24절에 나와 있는 탕자에 대한 이야기는 요한복음 14장 6절과 관계가 있다. 죄인의 상징으로서 그 아들은 잃어버린 자이며(15:24) 무지하였고(15:17 / “스스로 돌이켜“) 죽어 있었다(15:24). 그러나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왔다(15:20). 그는 잃어버렸으나 그리스도는 길이시며, 그는 무지하였으나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며, 그는 영적으로 죽어 있었으나 그리스도는 생명이시다. 이제 그는 아버지의 집에 당도하였다 !"
요 14:7-11
2. 그들에게 아버지를 보이시기 위함(14:7-11)
빌립의 눈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늘 보기를 원했다. 1장 46절에서 그는 처음에 “와 보라“고 말했고, 6장에서는 많은 무리를 보고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먹이실 수 없을 것으로 결론지었다(6:7). 빌립에게로 왔던 헬라인들은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라고 말했다(12:21).
예수께서는 자기를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또한 9절에서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리라“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더욱 더 알게 되는 것처럼 아버지를 보는 것도 믿음에 의해서이다."
요 14:12-14
3. 그들에게 기도의 특권을 허락하시기 위함(14:12-14)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던 동안 그는 그들의 필요들을 공급하셨는데(16:22-24),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돌아가시면서 그들에게 기도의 특권을 남겨 놓으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 그분 자신의 요구를 위해서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12절의 “더 큰 일“이란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경험한 놀라운 기적과 축복들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주님의 일들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신 동안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신 반면에 우리는 토기로서의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더 큰 일“이다."
요 14:15-26
4. 성령을 보내시기 위함(14:15-26)
이 장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려 하신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성령을 “보혜사“(위로자)라고 부르고 계신데, 직역을 하자면 “너희를 도우려고 곁에 서 계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다른“이란 말은 “같은 류의 다른 것“이라는 뜻으로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신 것과 같이 성령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용된 것이다. 제자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제자들 곁에 계신 구주를 대신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진리의 영“이라고 부르신다. 성령께서는 죄인들을 깨닫게 하면 성도를 인도하는 데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17:17). 성령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다(14:6). 세상은 성령을 받지 못한다. 성령께서는 보는 것의 응답이 아닌 믿음의 응답으로 오시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오리라“(18절)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의미에는 상당한 논란이 있다. 문자적으로 그것은 “내가 너희에게 온다“(현재시제)라고 읽혀진다. 아마도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부활 이후에 사도들에게 오실 것과 성령의 인격속에서 그들에게 오시는 것, 미래에 그들을 하늘나라로 데려가시려고 오시는 것과 같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듯하다.
21-26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성령을 통해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가질 더 깊은 교제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들은 자기들이 “고아들“처럼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18절/ 문자적으로 “위로가 없는“이란 뜻임), 사실상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은 성도와 구세주의 더 깊은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 관계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21절) 말씀을 사랑하는 것, 또한 성령의 가르치는 사역을 포함한다(26절).
말씀을 배우는 데에 시간을 드리며 그 말씀을 살아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버지와 아들과의 가깝고도 만족케 하는 교제를 즐길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얄팍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 말씀을 사랑하고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14장 1-3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교제하기 위해 하늘로 가는 성도에 대해 말씀하셨으나, 여기서는 성도와 함께 거하기 위해 오시는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 말씀하신다.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실로 “지상에서의 천국“이다."
요 14:27-31
5. 그의 평안을 허락하시기 위함(14:27-31)
제자들에게는 참으로 평안이 필요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며, 세상이 주는 방법으로 주지 않으셨다. 세상의 평안은 얕고 불만족하며 일시적이나, 그리스도의 평안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항상 만족을 주며 영원히 머무른다.
세상은 외적인 수단을 통해서 평화를 주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마음 속에 평화를 주신다. 심리학자들은 “정신(마음)의 평화“에 대해서 말하지만, 그리스도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하나님의 평화“를 주신다(롬 5:1). 빌립보서 4장 4-9절에는 신자가 평화를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이 설명되어 있다.
“내 아버지께서 나보다 크시니“(28절)란 말씀은 그리스도의 지상적인 삶의 날에 대해 언급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동등하시며, 인간의 아들(인자)로서 그리스도는 말씀과 일들을 주신 아버지께 순종하셨다(14:10/14:24).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늘로 돌아가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혼란과 불안을 조성하는 사단을 패배시키셨다(30절). 남아 있는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비극이나 실수로 생각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31절에서 십자가가 아버지를향한 그의 사랑의 증거임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명하셨기에 죽으셨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 오셨다.
이 장을 다시 읽으면 그리스도께서 당황하고 있는 그의 제자들을 얼마나 부드럽게 위로하고 계신지를 보게 된다. 이 위로의 말씀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요 15:1-11
▣ 참 포도나무-요한복음 15장-
요한복음 14장은 “일어나라. 여기서 떠나자“라는 말씀으로 끝나는데 이것은 다음에 오는 두 장이 동산으로 가는 도중에 말씀하여졌던 사실을 암시한다. 아마도 포도나무와 가지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어떤 포도원이나 금으로 된 포도나무 장식이 있는 성전을 지나가고 있었을 것이었다. 이 장은 비유(1-11절)와, 계명(12-17절), 그리고 경고(18-27절)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 비유(15:1-11)
연구를 시작함에 있어, 기억할 중요한 점은 어떤 비유에 있는 모든 일들이 반드시 특정 의미를 내포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한 비유는 중요한 한 진리를 가르친다. 그리고 그것을 “네 다리 모두를 가지고 서게“하려는 것은 이단으로 나가는 첫단계이다. 이 비유에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려는 주요한 진리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일의 중대성이다. 열매라는 말이 여섯 번 사용되며, 거한다는 말은 적어도 열 다섯 번 사용된다(반드시 “거하다“라고 번역된 것은 아니다). 요점은 친교이지 양자 관계가 아니다.
6절을 그리스도인이 열매 맺지 못하면 구원을 잃고 지옥에서 불타게 될 것으로 가르치는 것은 비유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다. 그러한 가르침은 앞의 다른 구절의 명백한 가르침을 모순되게 한다(요 6:47/요 10:27-29 등).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6절에서 말씀하신 그 가지가 던져진 후 말랐다는 것을 주의하라. 만일 이 가지가 “구원을 잃은“ 타락한 그리스도인을 상징한다면 그는 먼저 “마르며“, 열매 맺기를 실패하고, 그리고는 던져져야만 한다.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지킨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그의 말씀 안에 사는 것과 기도하는 것(7절), 그리고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10절)과 그의 말씀으로 우리의 생활을 깨끗이 지켜나가는 것을 의미한다(3-4절).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데 실패하는 그리스도인은 쓸모없는 가지처럼 된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아무 데에도 소용이 없다. 고린도전서 3장 15절은 우리의 행위가 불로 시험받을 것을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은사와 기회를 사용하는 데에 실패한 그리스도인들은 은사와 기회를 잃을 것이다(눅 8:18).포도나무 안에 있는 가지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것과 그의 생명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 안에 거함으로써 그의 생명은 우리를 통해서 흐르고 열매를 맺는다. 육적 그리스도인들이 “행함“을 산출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영적 그리스도인만이 계속해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열매가 많은 가지는 “깨끗케 되어“ 더 많은 과실을 낸다는 것에 주의하라(2절의 “제해 버리다“는 3절의 “깨끗케 하다“와 같은 단어이다).
하나님은 말씀과 징계 등을 통해서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 왜냐하면 더 많은 과실을 맺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왜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통해서 지나가야만 할 것인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스도인이 과실을 맺는 데서 “더 맺는“ 데로(2절), 그리고 “많은“ 과실을 맺도록(8절) 나아감으로써 그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 “거하는 생활“의 증거들은 구주의 사랑을 의식하는 것(9절), 말씀에 순종하는 것(10절), 응답된 기도(7절), 그리고 즐거움(11절)이다."
요 15:12-17
2. 계명(15:12-17)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열 한 번째 계명“이라고 할 수 있다. 확실히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은 다른 믿는 자들과 같이 사이좋게 지내야만 한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제자의 표시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친구들“이라고 부르신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은 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증거이다. 지금 그들은 그리스도의 자녀들을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증명해야만 한다. 친구들은 서로 사랑해야만 하며 각각 서로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순종은 종으로서가 아니라 친구의 복종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친구이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뜻을 알고 그의 비밀에 참여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였다. 하나님은 그에게 소돔에 대한 계획을 말씀하셨다."
요 15:18-27
3. 경고(15:18-27)
형제들의 사랑으로부터 그리스도는 세상의 미움에 대해 방향을 돌리신다. 세상은 왜 그리스도를 미워하는가?
세상이 먼저 그리스도를 미워했고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했기 때문이다(요일 3:13).
우리는 더이상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요일 4:5/요 17:14).
세상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거절했기 때문이다(20절).
세상은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이다(16:1-3).세상의 죄가 그리스도에 의해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은 그리스도와 아버지를 반대하는 모든 사회제도를 말하며, 적그리스도적인 사람들과 제도들과 철학들과 목적들로 이루어진다. “세상“의 임금은 그리스도의 최고의 대적인 사탄 안에 있다(요 14:30).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다. 배와 물에 대한 옛 예화는 아직도 훌륭하다. 배가 물에 있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없다. 그러나 물이 배안에 들어올 때에 조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적으로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롯처럼 점차적으로 그렇게 된다. 먼저 세상과 사귀고(약 4:4), 다음에는 세상을 사랑한다(요일 2:15-17). 그리고 마침내 세상에 일치한다(롬 12:2).
오늘날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즐기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로부터 떨어지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세상적인 것이며 버려야만 한다. 세상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이다(갈 6:14). 세상은 그리스도를 미워한다. 그런데 어떻게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22-24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계시가 책임을 가져온다는 근본적인 진리를 말씀하신다. 그의 말씀과 그의 행위들은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죄악됨을 계시하셨다. 인간은 변명할 수 없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가지로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못박는 일에 함께 참여한 사실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증거이다.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시편 69편 4절을 인용하신다(25절). 그 말씀은 우리를 강하게 하며 격려한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성령의 사역을 말씀하시는데,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는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수행하는 착한 행실들로써 이 일을 하신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에게 증거하시고, 그 후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에게 증거한다(26-27절/ 행 1:8).
▣ 요약
우리는 이 장의 첫부분(1-11절)에서 말씀이 믿는 자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12-17절에서는 믿는 자의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를 다루며, 그 반면에 18-27절은 그리스도인의 세상에 대한 관계를 다루고 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또한, 우리와 구주와의 관계가 첫번째에 놓여 있음에도 주목하게 될 것이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다면 우리는 자연적으로 형제를 사랑할 것이며 세상의 미움을 능히 극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 16:1-11
▣ 보혜사-요한복음 16장-
이 장은 성령의 사역에 관해 중점을 두고 있다. 제자들은 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떠나셔야만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 성령의 오심으로 더 큰 축복들을 가능케 할 것이라는 점을 보이신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육신의 힘으로 유지될 수가 없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려 한다면 하나님의 영이 필요하다. 우리 주님은 믿는 자를 통해서 일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묘사하신다.
1. 세상을 책망하는 성령(16:1-11)
세상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친구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가오는 그의 핍박에 대해 경고하셨는데, 마침내 그 때가 이르자, 그들은 휘청거리며 넘어졌다. 변화되지 못한 상태에서의 바울은 2절에서 묘사하는 것의 완전한 표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사실을 좀더 일찍 말씀하지 않으신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는 그들을 떠나려하시면서, 그들을 격려하는 말씀을 주셨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핍박에 대해 말씀하셨으나(마 5:10-12), 그 출처(종교적인 사람들)와 이유(세상의 무지와 증오)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는 이제 불신앙의 세상 속에서 교회를 통해 행할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설명하신다. 성령께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14:17) 잃어버린 세상에 오셨다는 점을 명심하라. 성령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바로 그 사실이 세상에 대한 고소이다 ! 실제로, 그리스도는 세상에 계셔서 왕으로서 통치하셔야 한다. 그러나, 세상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으며, 이제 성령께서 여기 계시며 인류에게 그들의 가공할 무서운 죄를 깨닫게 하신다. 성령께서는 세상에 대해 삼중의 책망을 하신다.
죄에 대해서-이것은 불신앙의 죄이다. 성령께서는 개인적인 죄들에 대해 세상을 책망치 않으신다. 이것은 양심이 할 일이다(행 24:24-25). 성령께서 세상에 계심은 세상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증거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대신 계셔야만 한다. 영혼을 정죄하는 죄는 불신앙, 즉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이다(요 3:18-21).
의에 대해서-이것은 불의함, 즉 잃어버린 영혼의 죄에 대한 것이 아니다.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대한 성령의 책망에 대해 말씀하신다. 여기에는 인격적인 적용이 있기는 하지만 개인적인 불신자에 대한 것은 아니다. 성령께서 세상에 계신다는 것은 이제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에 대한 증거이다. 이 땅에 계신 동안 그리스도는 사기꾼처럼 법을 어기는 자요 죄인으로 비난받으셨다. 그러나 이 땅에 성령께서 계시다는 사실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일으키시고 하늘로 받으셨다는 증거이다.
심판에 대해서-이것을 사도행전 24장 25절의 “장차 오는 심판“과 혼동하지 말자. 여기서 그리스도는 미래의 심판이 아니라 십자가에서의 과거의 심판을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12장 31-32절에서 사단과 세상을 심판하실 일에 대해 말씀하셨었다(골 2:15 참조). 세상에 성령이 계심은 사단이 심판을 받았고 패배했다는 증거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이 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심판을 개인적인 불신자에게 적용할 수 있다. 성령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의 불신앙의 죄와, 의의 필요성과, 그가 사단에게 속해 있으므로(엡 2:1-3), 잃어버린 편에 있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신다. 성령께서 주도하는 책망이 없이는 구원이 없으며, 성령께서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책망하시는 데에 말씀을 사용하신다."
요 16:12-15
2. 그리스도인을 가르치는 성령(16:12-15)
제자들은 말씀에 대한 그들의 무지함을 느꼈음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성령의 가르치는 사역을 설명하심으로써 그들을 안심시키셨다(14:26/15:26).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으심“은 성령께서 자신에 대해 말하거나 자신에게 주의를 끄는 일을 결코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령께서 성경을 쓰신 분이며, 성경의 각장에는 성령에 대한 많은 참고 구절들이 있다. 이 구절은 성령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것을 성도에게 가르치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지시를 얻으려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가르치시며 그렇게 행하심으로써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다.
가이 킹(Guy King)이라는 사람은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방법을 세 가지로 제시하였다.
성령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책을 썼다.
성령은 믿는 자를 그리스도와 닮게 만든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신부를 찾는다.
그리스도께 굴복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성령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 시편119편 97-104절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겸손한 그리스도인을 가르치실 수 있는지를 보라. 측정기는 나이와 경험, 교육이 아니라 말씀을 배우며 말씀으로 살려고 자원하는 마음이다."
요 16:16-22
3. 성도를 위로하는 성령(16:16-22)
그리스도께서 떠나신다고 말씀하신 것 때문에 제자들은 대단히 불안해하며 낙심하였다. 16절은 역설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므로 너희가 다시 나를 보리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여기에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 먼저, 그들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에 그리스도를 다시 보며, 그들은 또한 성령께서 그들에게 강림하셨을 때에 그리스도를 본다. 그들은 육체적인 안목을 영적인 시각으로 바꿔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령의 가르치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히 2:9).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고난당할 일을 아이의 탄생에 비유하신다. 그것은 기쁨이 뒤따르는 진통이다. 이사야 53장 11절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제자들은 울고 슬퍼하지만 그들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슬픔과 고난을 갖지만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그것은 즐거움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것도 빼앗을 수 없는 종류의 기쁨을 주신다."
요 16:23-33
4. 성도의 기도를 돕는 성령(16:23-33)
“그 날에“는 아마도 성령이 오셔서 그들 가운데서 그의 사역을 시작할 날에 대해 언급하는 듯하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 제자들은 그들의 질문과 필요를 개인적으로 그에게 얻는 데 익숙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가셨을때 기도하는 가운데 그들을 도우며(롬 8:26-27) 아버지께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셨다. 성경의 기도는 아버지께, 아들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서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26절).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그들의 요구에 응하시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27절).
기도는 굉장한 특권이다. 기도에 대한 그리스도의 다른 말씀들을 숙고하자(요 14:13-14/15:7/15:16). 믿는 자는 성령께서 자기에게 말씀을 가르치시도록 허락함으로써 그의 기도생활에서 성장한다. 왜냐하면 기도와 성경은 동반하기 때문이다. 유다서 20절은 우리에게 “성령 안에서 기도할 것“을 명한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지 않은 것들을 구하는 기도, 육적인 기도가 너무도 많다(약 4:1-10). 성령께서 우리에게 기도의 짐을 지우실 때 받아들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롬 9:1-3). 성령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일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신다. 기도는 하나님의 싫어하시는 일들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붙잡는 것이다.
제자들의 간증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기쁘게 했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다가오는 실패를 경고하신다(32절). 비록 아버지께서 마침내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 버리실지라도 주님께서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일은 얼마나 축복된 일인가 ? 그리스도께서 체포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평화와 기쁨을 주시며, 그들에게 승리를 약속하신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특별한 임무를 가지신다. 우리는 성령께서 그의 길을 갖도록 허락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