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하계는 있어도 안 되고 없어도 안 된다.
- 하계-
독자성을 자랑하는 하계 문화
상계를 지나면 곧 ‘하계下溪’ 마을이 나타난다. 아니 마을은 나타나지 않는다. 하계는 안동댐으로 옛 모습이 간 곳 없다. 마을 전체가 황량한 벌판이다. 산기슭을 떠나지 못한 몇 개의 집들이 마을을 더욱 황량하게 한다. 그러나 하계는 퇴계 후예들이 집성했던 마을로 퇴계 의 영광을 유감없이 발휘한 지역이었다. 하계가 배출한 인물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면, 정랑 이세진, 지중추부사 이세사, 참의 이세태, 참판 이태순, 응교 이가순, 참판 이언순, 대사성 이휘준, 참판 이만운, 정언 이만송, 정언 이중언, 정랑 이만도, 감역 이만각, 교리 이만규, 참의 이중두 등이 있다.
진성 이씨 문과 급제자는 48명(안동 외 전체 55명)으로, 그중 퇴계 후손이 32명이다. 그 가운데 하계 출신이 15명(계남 2명 포함)이나 되는데, 이는 다른 후예들의 집성 마을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계의 이러한 관료 배출에는 조선 후기의 정치적 역학 관계가 작용했다. 영남 남인은 퇴계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기에 퇴계 후예를 무력화하는 것은 곧 남인 지배의 첩경이었다. 이에 기득권 세력은 과거 합격과 관직 배려라는 당근을 쓰는 한편으로, 가문 간 분열을 조장함으로써 집권 예비 세력이자 강력한 재야인 영남 남인을 자신들의 손바닥위에 올려놓고 관리, 조종하려 했다.
기득권 세력의 이러한 계책은 영남 사림의 여론 진원지인 예안향교를 무력화하는 효과가 있었다. 하계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술책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계의 관료 배출은 이런 정치적 역학구조에서 계속되었고, 그 결과 하계 사람들은 퇴계 후손들 가운데도 유난히 자부심이 강하고 자기주장이 뚜렷한 하계만의 ‘하계문화’를 만들어갔다.
문화가 그렇듯이, 하계문화가 존재한다는 가정이 성립된다면 그 특징은 독자성에 있다. 하계에는 하계만의 주장과 여론이 있었고, 여기에 반하는 주장은 수용되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다른 씨족과는 물론이고 같은 씨족 안에서도 나타났다. 자연 상계와의 대립과 마찰은 피할 수 없었다.
하계의 이런 측면은 ‘병호 시비屛號是非’에서 극명하게 나타난 바 있다. 병호 시비는 병산서원과 호계서원을 거점으로 한 대표적인 ‘안동의 시비’였다.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이 누가 더 우위에 있는가”에 대한 작은 시비였지만, 차츰 이웃 가문들이 합세하여 대규모의 집단 시비가 된 그런 사건이었다.
이때 진성 이씨 전 문중이 류성룡이 우위라는 ‘병론’이었지만 하계는 김성일을 지지하는 ‘호론’이었다. ‘퇴계 후손들은 중립이었다’라는 말은 실상과 다르다. 당시에는 이 시비의 어느 편에든 속하지 않으면 양반 축에도 들지 못하는 시대였다.
회자되는 얘기지만, 퇴계 종손 고계 이휘영이 당시 어느 도회道會에 참석했을 때 진행자가 어느 쪽인지를 물었다. 고계가 “우리는 비병비호非屛非虎입니다”라고 하자 즉시 공박을 받았다. 참석자들은 “그렇다면 그대는 비반비상非班非常이 아닌가” 했다. 이 공박을 계기로 상계는 병론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고계집古溪集》을 보면 고계는 병호 양측을 화해시키고자 노력했음도 사실이다.
상계의 병론 표명은 전 문중을 병론으로 인도했다. 그러나 하계는 끝까지 호론을 견지했다. 하계의 호론 가담은 하계의 문장門長 이야순이 대산 이상정의 제자 신분임도 한 몫을 했고, 역시 당대의 하계 학자였던 신암 이만각이 호론을 선도하는 정재 류치명의 생질이어서 더욱 그러했다. 무엇보다도 3대 참판댁으로 불린 ‘계남댁’의 호론 가담은 거의 버팀목이 되었다. 그런 여파가 남아 있어 그런지 하계는 최근까지도 하회의 풍산 류씨들과는 혼인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서애파’와만 하지 않는다. ‘겸암파’는 관련이 없다. 정말인지 궁금하여 《하계파보下溪派譜》를 살펴보니 시비를 한 전 기간 동안 거의 한 건의 혼인도 보이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겸암파는 겉으로는 병론을 표방했지만 안으로는 호론이나 중립을 견지했다. 그래서 이른바 ‘외병내호外屛內虎’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이 말 역시 오래도록 안동 일원에 회자되었다. 겸암 류운룡을 배향한 화천서원에서는 병호 시비를 어디까지나 병산서원의 일로 바라보는 시각도 엄연히 존재했다.
퇴계 후손들의 최대 문중 시비인 오천 광산 김씨와의 이른바 ‘100년 시비’라고도 하는 ‘문순 시비文純是非’에 대해서도 하계의 인사들은 ‘문순의 아래 문순이 태어남은 또한 문순에게 영광이다文純之下文純 又光於文純’이라 하여 광산 김씨의 입장을 수용하는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후조당 김부필에 내려진 ‘문순’시호에 대한 전체 퇴계 후손들의 ‘문순 아래에 다시 문순 없다文純之下 更無文純’란 극심한 반대논리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의례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기득권 세력의 술수에 의한 자중지란의 결과이기도 했다.
문순 시비는 퇴계 후손들이 불세출의 인물인 선조 퇴계가 그 제자와 동명시호의-어쩌면 격이 같아지는-외연적 현실을 심리적으로 수용할 수 없었던 점이다. ‘심리적으로 수용할 수 없음’에 대해서는 사실 그렇게 처리한 조정이나 실권자 김조순에게 항의할 일이지만, 당시 국왕 위에 군림한 김조순에게 정면으로 맞설만한 힘은 아예 없었다. 이러한 제약의 굴절된 감정이 철저하게 후조당 시호의 부당함을 변파하는 모습으로 나타났고, 광산 김씨는 이에 역으로 맞섰던 그런 사건이었다.
퇴계 후손들이 만든 《변파록辨破錄》은 이런 시호가 내리게 된 후조당의 ‘가장家狀(일대기)’과 ‘시장諡狀(시호를 받기 위한 공식조서)’의 글 내용에 대한 부정과 불인정을 논리적으로 설파한 책으로, 1922년 7월 간행되었으니 《도산급문록》이 출판된 지 8년 뒤이고, ‘문순’ 시호가 내려진 지 97년 만이었다. 이미 왕조가 무너지고 시대가 바뀌었지만 ‘문순’에 대한 시호의 옳고 그름의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요컨대 문순 시비는 이때까지도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었다. 《도산급문록》의 ‘후조당 시호 삭제’는 퇴계 후손들의 후조당 시호에 대한 최후의 도산서원 완의完議 입장을 견지한 것이며, 《변파록》은 이 입장에 대한 해명의 성격을 지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여담이지만 지난날 안동의 가문들 사이에는 네 차례 정도 뚜렷한 집단적 성격을 띤 시비가 있었다. 편의상 ‘안동의 4대 시비’라 해 본다.
첫째는 영천 이씨와 진성 이씨 사이에 전개된, 퇴계의 농암 제자 여부를 두고 벌인 ‘농퇴 시비聾退是非’, 둘째와 셋째는 이미 언급한 문순 시비와 병호 시비, 넷째는 안동 권씨와 안동 김씨 사이의 태사묘 위패 순서를 두고 전개된 ‘서차 시비序次是非’다. 이들 시비들은 안동에서 아직까지 금기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이들 시비는 글에 의해 전개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한마디로 ‘글의 전쟁’이라 할 수 있다. 글로 인한 시비 공방은 안동 문화의 근저를 탐색하는 결정적 콘텐츠가 된다. 하나의 예로 남치리의 여강서원 배향 공방과 관련된 류직柳稷의 글을 보면, “어제 (저편에) 모임이 끝나면 오늘 (이편에서) 모임을 갖고, 어제 (저편에서) 글을 보내면 오늘 바로 (이편에서) 반박문을 지으니 그 형상이 마치 적국과 대치한 것 같다”했다. 원문이 “昨日罷會 今又作會 昨日飛一通文 今日又製一通文 有如敵國相持”인데, ‘飛一通文, 又製一通文’의 방식은 ‘시비 문화’의 핵심적 요소였다. ‘왜 글인가’에 대해서는 언젠가 말할 기회가 있으리라 믿는다. 얽힌 사연과 정서들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저 먼 후일에 쓰라고 하는 그런 요구는 안동 발전에 기여하는 제안이 되기 어렵다. 그렇지만 이번 글은 ‘도산’을 쓰는 일이므로 쓰지 않는다.
한편 하계의 독자성은 심지어 제사 의례에서도 나타났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상계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포를 상 가운데 놓는데 이를 중포라 한다. 이것이 전통이 되어 원촌을 비롯한 모든 퇴계 후손들이 따라했지만 하계만은 따르지 않았다. 하계는 여전히 포를 제사상 끝에 올려두는데, 이를 ‘변포邊鮑’라 한다. 상계와 하계가 사실 한 조상에게서 나온 것을 생각하면 하계의 독자성은 더욱 부각된다.
하계의 이런 자부심은 드디어 그들의 조상을 불천위로 모시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하계 파조인 동암 이영도(퇴계의 셋째 손자)를 불천위로 옹립한 일은 하계 문화의 절정이자 독자성의 완전한 확보를 의미했다. 불천위 논의 계획은 상계, 원촌 등 다른 후손들과의 관계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원촌 사람들은 한때 상계를 갈 때 하계를 지나가지 않고 우회하는 산길로 갔다. 하계와의 긴장 때문이었다. 원촌이 본의든 타의든 하계를 잘 지나가지 않은 것은 병호 시비가 격화될 때도 그러했다. 그렇지만 1960년대 드디어 하계는 격렬한 반대에도 아랑곳없이 사당을 건립하고 위패를 모셨다. 동암 불천위 제사가 지금도 엄연히 계속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우스개로 하는 말이겠지만 안동에서 씨족과 관련된 말로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안동 권씨와 관련한 것으로, “권가가 권가 보듯 한다”라는 말이다. 안동에서 권씨는 파벌과 인물과 인원이 워낙 많다. 그러다 보니 같은 집안 사람이라 하더라도 서로 경쟁 상대가 될 때가 많은데, 이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인 듯하다.
다른 하나는 퇴계 후손들이 가끔 하는 말로, “하계는 있어도 안 되고 없어도 안 된다”라는 것이다. 이 말은 퇴계 후손들 사이에서 하계의 위상과 존재가 어떤지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지 싶다.
선생님 그럼 쉬이 뵙겠습니다, 하계의 독립운동
그러나 하계의 독자성이 에고이즘으로 굳어 버린 것만은 아니었다. 독자성은 민족의 수난기에 목숨을 초개같이 던지는 애국으로 나타났다. 하계는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 3대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향산 이만도李晩燾 가문을 비롯하여, 순절한 이중언과 더불어 이만원, 이목호, 이운호, 이용호, 이열호, 이비호, 이동봉 등등 허다한 인사들이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하계의 독립운동은 정말 찬연하다. 이런 정신은 원촌의 육사를 낳았다.
향산은 단식 24일째 순국했다. 단식 10여일 째, 제자이자 영양 의병장인 김도현이 찾아왔다. 그날 밤, 두 분 방 등잔불은 밤새 꺼지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날이 밝아 스승이 밥을 먹지 않으니 김도현도 그대로 떠났다. 향산이 “잘 가게”하니 김도현은 “선생님 그럼 쉬이 뵙겠습니다” 했다. 1914년, 11월, 7일 김도현은 동해 바다 속으로 영화처럼 천천히 들어가 순국했다. ‘쉬이 뵙겠습니다’는 ‘곧 이렇게 뵙겠다’는 뜻이었다. 그 누구도 그 말뜻을 몰랐지만 두 분은 알고 있었다. 향산은 안동 선비의 지성적 기개를 온몸으로 보여 준 대표적 지식인이었다.
일제시대, 토계를 찾는 사람들이 상계나 원촌을 가면 그냥 보내 주었는데 향산댁을 간다고 하면 일경의 조사를 받았다고 고로들은 회고한다. 최근에는 이만도의 자부 김락金洛 여사가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실명한 사실이 새로 밝혀져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숙연하게 했다.
산은 높고 높고 강은 길고 길다
차를 세워 두고 천천히 걸어가며 하계 벌판을 바라본다. 농작물이 심어져 있지만 물이 빠져 황량하다. 고가들이 즐비하던 옛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수졸당, 향산댁, 계남댁, 초산댁, 정언댁, 새영감댁, 삼산댁, 곡목댁, 법전댁, 초밭댁, 춘양댁 등. 그 집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지금 원형을 잃고 부실하게나마 하계에 남아 있는 집은 수졸당, 초산댁, 새영감댁, 법전댁 등이며, 내가 그 향방을 알고 있는 집은 단천으로 옮긴 계남댁과 안동 시내로 옮긴 향산댁 뿐이다.
원촌으로 돌아가는 길모퉁이에 이르니 퇴계 묘소의 표지석과 더불어 묘소를 오르는 계단이 나타난다.
퇴계 묘소는 다듬어진 돌계단을 따라 10분 정도 산을 오르면 나온다. 대현 길지大賢吉地임이 한눈에 느껴진다. 주산, 안산, 내룡, 혈처 모두 산서山書에서 말한 그대로다. 후손들은 퇴계 묘소를 ‘산성山城 묘소’라 한다. 산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둘러바도 산성의 흔적은 잘 보이지 않는다.
퇴계 묘소는 퇴계의 유언 한마디가 묘소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현장이어서 꼭 볼 만하다. 그 한 마디가 궁금해 참배하고 곧 비석부터 살펴보았다. ‘10자의 글자’, 퇴계는 “조그만 돌에 열 자의 글자만 써라”라고 당부했다. 과연 비석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쓰여 있었다.
퇴계는 1570년 12월 8일, 70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운명 3일 전 12월 6일, 장례 유언을 남기며 조카에게 기록하도록 했다. 이를 ‘유계遺戒’라 한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국장國葬을 하지 말라.
작은 돌[小石]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써라.
비문은 내가 지은 <자명自銘>만 써라.
남에게 널리 물어 하라. 다만 ‘지금 현실에 맞게 해야 하며 옛 법과 멀어서도 안 된다’는 말을 따름이 옳을 것 같다.
퇴계는 이날 제자들을 마지막으로 만났다. 주변에서 만류했지만 “삶과 죽음이 갈리는 마당에 아니 만날 수 없다”며 옷을 단정히 입고 맞이하여 “내 평소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 여러분과 종일토록 강론했으나 이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했다.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인사였다. 다음날 7일, “나의 모든 서책은 굉중宏仲(이덕홍李德弘)이 맡아 관리하라” 했다. 그 다음날 8일, 최후의 한마디는 “저 매화나무에 물을 주라”였다. 그러고는 자리를 바르게 하도록 하고는 앉은 채로 눈을 감았다. 돌아가셨다.
죽음은 슬프다. 퇴계의 죽음은 슬프고 감동적이다. 나는 《도산전서》를 20여 년 정도 보았고, 또 퇴계를 연구하여 학위도 받았다. 그래서 나름대로 퇴계는 이러저러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도산전서》의 이 장면을 대할 때면 가슴에 차오르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목이 멘다. ‘그 무엇’이 아직 무엇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퇴계에 대한 나의 화두다.
여기서 잠시 퇴계의 자기 고백인 <자명>이나 다시 한 번 읽어 보자.
나면서 어리석고 生而大癡
자라서는 병도 많네. 壯而多疾
중년에 어찌하여 학문을 좋아했고 中何嗜學
만년에 어찌하여 벼슬을 얻었는가. 晩何�爵
학문은 구할수록 더욱 멀고 學求愈邈
벼슬은 사양하면 더 내리시네. 爵辭愈孀
나아가면 넘어지니 進行之큡
물러나서 감추리라. 退藏之貞
나라 은혜 망극하고 深慙國惠
성현 말씀 두렵도다. 亶畏聖言
산은 높고 높고 有山큀큀
강은 길고 길다. 有水源源
산촌에 돌아오니 婆娑初服
모든 비방 사라진다. 脫落衆�
내 소회 막혀 있고 我懷伊阻
내 깊은 뜻 누가 알랴. 我佩誰玩
생각하건대 옛 성현만이 我思古人
진실로 내 마음 사로잡았네. 實獲我心
어찌 후세에 寧知來世
지금 이루지 못한 것을 알아줄까. 不獲今兮
근심 속에 즐거움 있고 憂中有樂
즐거움 속에 근심 있네. 樂中有憂
돌아가리니 乘化歸盡
다시 무엇을 바랄까. 復何求兮
<자명>은 비석에 각이 되어 있다. 금보가 썼다. 2003년 2월, 동행한 권기윤 교수와 올라와 이 글을 다시 읽어 내려가는데, 그때 교수는 무언가 느낀 바가 있었는지 문득 “산은 높고 높고 강은 길고 길다有山큀큀 有水源源”라는 구절은 외워야 한다며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비석 옆에서 점심을 먹는 도중에도 그랬다. 그가 그러니 나 역시 자꾸 그 구절에 눈길이 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권기윤 교수의 그 중얼거림이 화두처럼 자꾸 떠올랐다. 그래서 중얼거렸다.
산은 높고 높고 강은 길고 길다, 산은 높고 높고 강은 길고 길다…….
이 말을 가끔 되뇌다 보니 묘하게도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씀이 교차되어 떠올랐다. 유교와 불교, 불교와 유교는 어떻게 다른가? 돈오의 경지는 진정 있는가? 생각이 꼬리를 물고 끝없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화두를 끌어안고 고행할 인내심이 없는 사람으로는 부질없는 일이었다. 여러 상념 끝에 뜻도 모르면서 대강 이렇게 정리했다. 우리 모두 산과 같고 강과 같아야 하며, 또 높은 산 긴 강이 되어야 한다고. 전자는 불교적인 인생이고 후자는 유교적인 인생이라고. 설령 그렇게 되지는 못하더라도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하며 그런 인물이 되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그것이 인생이라고.
퇴계는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 “더 바랄 것이 없다”라고 했다. 최선을 다했기에 그런 표현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것은 인생 결산이고 고백이다. 그리하여 퇴계는 자신의 말처럼 ‘높은 산’이 되었고 ‘긴 강’이 되었다. 수많은 추모의 글도 그렇게 썼다. 더 이상 수사할 수 없는 표현들이었다.
류운룡은 “천천히 걸으심은 학이 춤추고 한가로이 계심은 매화 향기 같았다” 했다. 이이는 “의지는 밝은 해를 꿰뚫었고 행동은 맑기가 가을 물과 같았다” 했다. 김성일은 “순결하고 아름다와 갈고 닦은 금과 옥, 산처럼 무겁고 못처럼 깊고 고요하다” 했다. 남치리는 “봄바람이 자리 위에 불고 가을 달을 가슴 속에 품었다” 했다. 조목은 “밝은 해는 빛을 잃고 상서로운 구름은 색채가 사라졌다” 했다. 이덕홍은 “봄이 왔으나 산 매화는 슬픔을 토하고 개울가 버들은 시름을 머금었다” 했다.
기대승은 말했다. “산은 무너질 수 있고 돌도 깨어질 수 있지만 나는 아노니 선생의 이름은 하늘과 땅과 더불어 영원할 것山可夷 石可朽 吾知先生之名 與天地而�久”이라고.
한 위대한 인생의 죽음을 생각하며 산을 내려오는데 자꾸만 길 옆의 단아한 무덤으로 눈길이 간다. 석물은 있지만 아무런 표식이 없다. 퇴계 며느리 금씨 부인의 무덤이다.
부인의 무덤이 여기에 있게 된 것은 유언 때문이다. 부인은 평소 “아버님 살아생전 내가 모셨는데 여러 가지로 부족함이 많았다. 죽은 후라도 아버님을 정성껏 모시고 싶으니 내가 죽거든 아버님 가까이 묻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꿈은 이루어졌다. 효부의 지극한 정성은 지금 저승에서도 계속되고 있으리라.
하계 잔영
산을 내려오니 ‘양진암고지養眞菴古址’라는 표석이 있고, <동암언지東巖言志>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퇴계가 토계에 마련한 최초의 집이며, 시는 그때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표석 옆에는 ‘동암’이라 불리는 바위가 흙 속에 얼마간 묻혀 있고, 그 뒤 움푹한 곳에 수졸당守拙堂이 있다. 댐 수몰로 옮겨진 건물이다. 수졸당은 동암 종택을 가리키는 당호다. 정확하게는 동암의 아들 기岐의 호가 수졸당이어서 그렇게 명명되었다.
하계는 퇴계의 셋째 손자 동암 이영도李詠道(1559~1637)가 터를 열었다. 동암은 영특하고 포용력이 있어 대현의 후예답다는 칭찬을 들었으며, 퇴계로부터는 “나를 계적繼蹟할 자는 반드시 이 아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과연 그러했다. 형이 일찍 죽어 퇴계 후사 문제가 불거졌을 때 동암은 범인들이 하기 어려운 결단을 했다. 일대기라 할 수 있는 ‘가장家狀’을 보니, 이때 조목, 김성일, 우성전 등 퇴계의 수제자들이 모여 의논한 결과 동암으로 후사를 잇게 하기로 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잇는다’는 이른바 형망제급兄亡弟及의 관행을 따르기로 한 것이었다. 동암은 자신이 적손이 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음에도 그것을 거부했다. 큰집을 지키고자 한 것이었다. 동암은 원주목사 등의 관직을 지닌 채 홀로된 형수를 돌보며 둘째 아들을 성장시켜 혼인과 동시에 큰집으로 보냈다. 하계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둘째 아들 신행을 바로 상계로 해 버렸다”고 했다. 동암의 큰 인품을 기리는 말이다.
그래서 지금 퇴계 후손이란 ‘의인(도산면 의인리)’을 제외하고는 상계, 하계, 원촌, 단천, 섬촌, 부포 모두 동암의 자손이 된다. 의인은 퇴계의 둘째 손자 이순도의 후예들이 집성한 곳으로, 이른바 의인파의 터전이 되었다. 그러나 하계 사람들은 이순도가 퇴계의 형 이해의 넷째 아들 치�에게 양자로 갔다고 주장하여 그의 후손을 공식적인 퇴계 후손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계의 자부심은 이런 혈연적 정통성에 근거한 것으로, 하계 문화 형성의 근본 토대가 되었다. 따라서 지난 시절, 하계와 수졸당이 지녔던 힘과 위상은 대단한 것이었다.
수졸당을 나와 하계 벌판으로 내려갔다. 어렴풋한 옛 길 농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 들어가니 기름져 보이는 땅에 온갖 곡식이 심어져 있다. 담배, 수박, 호박 등. 담배 잎은 한없이 넓고 싱싱하며, 수박은 크고 윤이 나서 여간 탐스럽지 않다. 그런데 지천에 깔린 호박은 곳곳에 썩은 것이 보인다. 지나친 여름 비 때문인지 모르겠다. 진흙이 신발 밑창에 더덕더덕 달라붙는 길을 걸으니 어느덧 강가에 다다랐다. 강 건너 마을은 의인이다.
의인에는 99칸 집, ‘창덕궁을 본 따 지었다’는 ‘번남댁[이동순 가李同淳 家]’이 있다. 99칸이 맞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불렀다. 하계의 ‘계남댁[이만운 가李晩運 家]’과 더불어 한때 ‘양남兩南’으로 불리며 가세를 자랑했다. 초등학교 동창생의 집이었다. 그를 따라 초등학교 시절 딱 한번 가보았다. 그 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지금 가보고 싶으나 강에 막혀 바로 갈 수 없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의인의 유적 가운데는 안동댐 부근으로 이건하여 지금 ‘다례원’이라는 간판을 걸고 그 안주인이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는 ‘교리댁[이만형 가李晩瀅 家]’이 기억에 남아있다.
하계 벌판을 되돌아 나와 동편 산기슭으로 돌아나가니 하계의 또 다른 명가인 ‘초산댁[이태순 가李泰淳 家]’이 나타난다. 이태순-이만각으로 가학家學이 이어지는 이집은 하계 최고의 혼인을 자랑하기도 했다. 혼인에 대해 언젠가 주손 이상섭 어른을 만나니 “족보를 보면 지금도 거룩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셨다.
초산댁을 지나니 옛 도산초등학교의 터가 나타난다. 도산초등학교는 안동에서 안동초등학교, 예안초등학교 다음으로 90여 년의 역사를 지녔지만 지금 자취도 없다. 댐 수몰로 단천동으로 옮겼다. 도산초등학교 일대 지명은 ‘자하고紫霞皐’인데, 퇴계가 한때 이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 집터가 바로 도산초등학교의 터전, 아니면 그 주변 어느 지점이 아닐까 싶어 이리저리 가늠해 보았으나 정확한 곳은 알길 없다. 퇴계는 자하고 주변을 사랑했고 많은 시를 남겼다.
동편으로 조금 나아가니 정자가 보인다. 들어가 보니 광뢰 이야순李野淳(1755~1831)이 공부한 ‘수석정漱石亭’이다. 이야순은 퇴계후손 가운데 최고의 학자로 평가되는 분이지만, 지금 수석정은 매우 퇴락하다. 이야순은 과거를 포기하고 학자의 길로 일관한 ‘안동처사’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 수석정에 오르니 앞에 ‘도산 9곡’ 가운데 그 6곡인 ‘천사곡’이 구비쳐 흐르고, 강 건너 석벽 위에 ‘월란사’가 까마득히 보인다. 강물이 흐르는 물가에 나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더듬으며 한참을 서성거렸다.
나는 도산초등학교에 다녔다. 그 때 등하교 길목에 있었던 계남댁에 들려 ‘고래골 할매’라고 부르는 아름답고 인자한 할머니께 여러 음식을 얻어먹었다. 할머니 역시 예안 장을 가는 걸음에 우리 집에 들르기도 했다. 내 할머니의 외가였지만 당시는 몰랐다. 고래골 할매는 그러니까 《도산급문록陶山及門錄》의 편찬을 주도한 당대의 학자 효암 이중철의 손부였는데, 이중철이 곧 이조참판을 역임한 이만운의 조카였고, 할머니에게는 외종조부가 되었다. 지금 같으면 거의 무심할 정도의 인척이었지만 당시의 인정은 그렇지 않았다.
나의 동생은 증외가曾外家인 ‘정언댁[이만송 가李晩松 家]’에서 1년을 밥을 얻어먹었으며, 또 한 집 증외가인 ‘새영감댁[이중두 가李中斗 家]’과도 적지 않은 인연이 있다. 지금 우리 집에는 이들 집에서 보낸 여러 종류의 글들이 남아 있고, 계남댁의 글은 두루마리로 남아 있다.
하계와는 이런 인연만이 아니었다. 근년 어머니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면 영원히 몰랐을 수도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한 때 수졸당에 살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6.25 직전, 우리 집은 가화가 겹쳐 잠시 고향을 떠나기로 하고 이사의 적지를 하계로 결정했다. 하계로의 이사는 위 인척들과 ‘향산댁’의 주선과 권유가 있었다. 향산댁과 우리 집은 대대로 남다른 세의世誼를 견지했다. 이리하여 우리는 계남댁 뒤 ‘곡목댁’을 사서 2년을 살았다. 곡목댁은 ‘곡목할배’라는 분이 사셨던 상당한 규모의 口자 집이었다. 할머니의 외사촌이었다.
그런데 그때 입주하기 전 얼마간을 수졸당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 기간을 어머니는 한 달이라 했는데, 수졸당 이재영 종손을 만나니 ‘세 달 정도’라 했다. 종손의 말씀과 어머니의 기억은 차이가 있었다. 어머니는 얼마간 빙 둘러서 들어가야만 액운이 없어진다는 미신 때문에 그렇게 했는데, 어느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하계의 생활은 2년으로 끝났다. 어느 날 밤, 신원을 알 수 없는 ‘밤 사람’이라는 인물들에 의해 여러 집들이 방화되고, 신병에 위협이 닥쳐왔기 때문이다. 그 날 삼산댁과 면사무소는 전소했고, 우리 집과 계남댁 등의 많은 고가들의 일부가 화재를 당했다. 우리는 퇴계 종택과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멀리 충청도 대전으로 이사 길에 올랐다. 대전으로의 이사는 당시 횡횡한 ‘대전천도’의 유언비어 때문이었다. 이로써 하계의 생활도 종지부를 찍었다. 모두가 혼돈 시대의 사건이고 역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