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冠岳山) 산행/ 이영성
정유년(丁酉年) 새해를 맞아 두 번째 일요일인 1월 8일에 고향 친구들과 함께 관악산(632m)에 올랐다. 관악산은 서울과 경기도(과천, 안양)에 걸쳐 있는 산으로 산등성이가 남태령을 거쳐 청계산~백운산~광교산으로 연결되는 한남정맥을 이룬다. 관악산은 산의 정상인 연주봉의 모습이 마치 갓의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 연주봉에는 돌기둥을 깎아 세운 듯한 암벽 위에 연주암의 응진전(應眞殿)이 자리하고 있는데 바위로 이루어진 이 일대 봉우리를 연주대라 부른다. 관악산은 연주대를 정점으로 화강암으로 된 바위 능선이 사방으로 길게 연결되어 있으며, 능선 여기저기 기묘한 형상을 한 바위들이 많아 산행의 재미를 더해준다.
관악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흔히 연주대 아래 남쪽 산등성이에 있는 연주암(戀主庵)을 즐겨 찾는다. <연주암중건기>에 의하면 연주암은 신라 문무왕 17년(677년)에 의상대사가 연주봉 절벽 위에 의상대를 세우고 수행했으며, 그 아래 골짜기에 절을 짓고 관악사라 이름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뒤 조선조 태종 11년(1411년)에 셋째아들인 충녕(뒤에 세종대왕)이 세자로 책봉되자 둘째아들인 효령이 관악산에서 2년 동안 머물면서 관악사를 지금의 연주암 자리로 옮겨 가람 40간을 세웠다고 전한다. 그래서 지금 연주암에는 효령각(孝寧閣)이라는 전각 속에 효령대군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그리고 연주암 아래 골짜기에는 폐사된 관악사터가 남아있다.
관악사지(冠岳寺址)는 비록 오래 전에 폐사된 절터지만 우리나라 불교건축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절터를 보면 알 수 있듯 관악사는 급경사 지대에 석축을 쌓아 평탄하게 만든 뒤 그 위에 절집을 세웠다. 이는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절집을 배치한 전형적인 산지가람형식이다. 주춧돌과 석축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관악사에는 적어도 6개 이상의 절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는 일시에 건립된 것이 아니라 산사태에 의해 절집이 훼손되면 다른 자리에 대지를 조성하여 옮기거나 그 터를 보수하여 다시 지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리고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도자기 조각이나 기와 조각이 15세기 전반에서 18세기까지 걸쳐있는 것을 볼 때 관악사는 18세기까지 명맥을 유지하다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관악사지는 석축을 쌓는 데에도 적잖은 인력을 들였음직하다. 그런데 수백 년 동안 존속했던 절이 어째서 폐사되었을까? 많은 의문이 생긴다. 그런데 관악사지 전체를 천천히 훑어보면 그러한 의문이 쉽게 풀린다. 절집이 있던 평평한 석축 사이에는 빗물을 계곡 아래쪽으로 빼기 위한 커다란 배수로가 만들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관악산은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이다. 따라서 비가 내리면 빗물이 흙 속으로 스며들지 않고 한꺼번에 계곡으로 밀려든다. 그러니 관악사는 큰 비가 내릴 때마다 산사태와 같은 수해를 겪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어느 해의 장마 때 회복할 수 없는 만큼 큰 수해를 당한 끝에 결국 폐사하게 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관악사지 1차 발굴작업 땐 주로 석축과 배수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관악사지에는 한 개의 우물과 한 개의 석종형 부도, 그리고 절집의 주춧돌과 석등 부재 몇 개가 남아 있을 뿐 절이라면 반드시 있어야 할 석탑이 흔적조차 없다. 따라서 고려 후기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연주암 법당 앞의 삼층석탑은 관악사지에서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현재 과천시에서는 관악사지 2차 발굴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주춧돌 등 많은 석재유구가 발굴되고 있다. 과천시에서는 관악사 복원사업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삼태기처럼 생긴 계곡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던 관악사. 절터에서 눈을 들어 위를 바라보니 수직절리의 연주대가 바로 머리 위에 있다.
연주대의 이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유래담이 전한다. 하나는 고려말의 충신이었던 강득룡이 고려왕조가 멸망하자 관악산에 숨어 살면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 고려의 도읍이었던 송도(개성)를 바라보며 통곡했는데 이 때문에 ‘주군을 그리워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효성이 지극했던 효령대군이 관악산에 절을 짓고 경복궁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임금을 그리워했기에 대군의 심경을 기려 연주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이야 어떻든 법당 앞에 있는 삼층석탑은 효령대군이 세운 것이라 전해지고 있으며, 효령각(孝寧閣)에 대군의 영정을 모신 것으로 보아 연주암이 효령대군과 밀접한 관계가 있던 사찰임이 분명해 보인다.
연주암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고쳐지었다. 특히 고종 5년(1868년)에 명성황후의 하사금으로 극락전과 용화전을 신축한 이래로 대웅전이나 응진전 등의 절집을 새로 짓거나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주암의 성보는 아무래도 대웅전 앞에 서 있는 삼층석탑이라 할 수 있다. 이 탑은 전체적으로 균형감이 뛰어나고 단아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리고 연주대 응진전에는 비단에 16나한의 모습을 그린 탱화가 봉안되어 있고, 응진전 옆의 암벽을 파서 만든 감실에는 약사여래석상이 안치되어 있다. 이 석상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기복신앙(祈福信仰)의 대상으로 응진전을 찾은 여인네들이 석상 앞에서 손빌이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겨울답지 않은 따스한 날씨 탓이었을까? 우리 일행이 관악산 들머리에 있는 과천향교 앞에서 길을 잡아 산을 오르기 시작했을 때 이미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산을 오르는 내내 하산하는 등산객들에게 길을 비켜 주느라 종종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얘기를 나누며 산길을 느릿느릿 오르다보니 정오가 되어서야 겨우 연주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연주암에서 등산객들에게 제공하는 점심공양으로 허기진 배를 채운 뒤 내처 연주대에 올랐다. 연주대에서 잠시 응진전에 들렀다가 발굴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 관악사지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관악사지에서 잠시 쉬며 담소를 나누다가 계곡을 따라 과천향교 쪽으로 하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