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方[5912]해동역사 제46권 / 예문지(藝文志) 5-서법(書法)
해동역사 제46권 / 예문지(藝文志) 5
서법(書法)
《조선삼자(朝鮮三咨)》
○ 명나라 왕세정(王世貞)의 이아루(爾雅樓)에 있는
법서(法書) 《조선삼자》는 홍치(弘治), 가정(嘉靖), 만력(萬曆) 연간의 자문(咨文)이다.
《패문재서화보(佩文齋書畫譜)》
○ ‘《조선삼자》의 발문(跋文)’에,
“내가 구한 조선의 자문은 모두 세 통으로, 이를 합하여 1권으로 만들었다.
첫 번째 것은 홍치 8년(1495, 연산군1)에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에게
보낸 자문으로, 동궁(東宮)의 천추절(千秋節)을 축하하기 위한 사신을
호송하는 데 대한 자문이다.
두 번째 것은 가정 41년(1562, 명종17)에 예부에 올린 자문으로,
만수절(萬壽節)에 진하(進賀)하는 데 대한 자문인데,
먹은 마치 순칠(純漆)과 같아 주색(硃色)이 짙고 투명하였으며,
자자(咨字)를 찍은 것은 상아(象牙)에 새겨 찍은 것처럼 정밀하였다.
세 번째 것은 만력 11년(1583, 선조16)에 예부에 올린 자문으로,
자성 황태후(慈聖皇太后)에게 진헌하는 데 대한 자문이다.
이들 자문은 전후의 기간이 90년이고 왕이 세 번이나 바뀌었는데도,
해서로 쓴 것이 마치 한 종이에 쓴 것처럼 정성스럽고 옥묵(玉墨)으로
윤색한 것만 같은바, 공경스럽고 삼가면서 영구히 하기를 이와 같이 하니,
오랫동안 나라를 누리는 것이 마땅하다.
공물은 단지 각종의 세저(細苧), 화석(花席), 표피(豹皮), 종마(種馬)뿐인바,
이는 대개 홍영(弘永)의 즈음에 매번 공물 가운데 금은(金銀)의 기식(器飾)이
대략 1천여 냥이 되었던 것을 선종황제(宣宗皇帝)가 그 나라의 토산물이
아니라는 이유로 진봉(進封)하지 말라고 경계시켜서이다.
이 때문에 그 나라 사람들이 감격하여 직공(職貢)을 더욱더 부지런히 해서
전복(甸服)에 비하였으니, 성스러운 황제의 조공을 적게 받아들이는
어짊과 기이한 물품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마음이 어찌 전 시대의
황제들에 비해 훨씬 뛰어나지 않겠는가.
이에 삼가 이 사실을 기록하여 약한 자를 돌보아 주는 것과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실로 서로를 인하여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드러내는 바이다.”
하였다. 《엄주속고(弇州續稿)》
모각왕우군십칠첩(摸刻王右軍十七帖)
○ 십칠첩(十七帖) 가운데 ‘평화스럽고 풍년이 들었는데 또다시 사신으로 나가니
풍일향이 있으므로 스스로 이름하였다[淸晏歲豐又所使 有豐一鄕故自名]’라고
한 곳이 있었는데, 내가 ‘풍일향’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러던 차에 고려의 각본(刻本)을 보니
‘생산되는 것에는 특이한 산물이 있다[所出有異産]’고 하였는바,
이것을 보고는 확연하게 깨달았으며,
인하여 왕저(王著)가 단지 방서(倣書)에 의거하여 돌에 새겨 넣은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진옥(辰玉) -살펴보건대, 왕형(王衡)의 자이다.- 을 생각해 보건대,
몽음공(蒙陰公)에게서 이 첩(帖)을 얻고서는 나에게 빨리 와서 감상하라고 하면서
마치 큰 보배를 얻은 듯이 하였다. 진옥의 서법(書法)은 여기에서 일변하였다.
《용대집(容臺集)》
살펴보건대, 증굉보(曾宏父)의 난정도지(蘭亭圖識)에
왕대순(王大淳)의 시를 인용하였는데, 그 시에,
소릉이 천년 자취 영원히 감췄는데 / 昭陵永閟千年跡
정무는 몇 개 모양 비석을 전하는가 / 定武猶傳幾樣碑
이것은 중원 땅의 저 옛날의 탁본인데 / 此是中原舊時本
돌은 지금 어찌하여 동이 땅에 떨어졌나 / 石今焉往落東夷
하였다. 그렇다면 왕 우군(王右軍)의 난정첩(蘭亭帖) 역시 우리 동방에 전해진 것이다.
소자운(蕭子雲)의 글씨
○ 남제(南齊) 소자운은 자가 경교(景喬)이며,
초서와 예서를 잘 써서 당시 서법의 모범이 되었다.
당시에 백제국 사신이 건업(建業)에 이르러서 소자운의 글씨를 구하였는데,
소자운이 마침 동양 태수(東陽太守)로 나가게 되어 배가 장차 출발하려고 하였다.
사신이 물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30여 보쯤 떨어진 곳에서 배를 바라보고는
절을 하면서 앞으로 나왔다. 이에 소자운이 사람을 보내서 물으니, 답하기를,
“시중(侍中)의 척독(尺牘)의 아름다움은 멀리 해외에까지 전해졌는바,
오늘 구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명적(名蹟)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소자운이 3일 동안 배를 머물러 두고 30장을 써서 주고는
금화(金貨) 수백만을 받았다. 《남사(南史)》
구양순(歐陽詢)의 글씨
○ 구양순은 처음에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배우다가 점차 그 서체가 변하여
필력이 험하고 굳세어 한때의 절필(絶筆)이 되었다.
고려에서 일찍이 사신을 보내 그의 글씨를 구하니,
고조(高祖)가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구양순 글씨의 명성이
먼 오랑캐에게까지 퍼졌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저들이 그의 필적을 보고서 참으로 그의 형모(形貌)가 크고 잘 생겼다고 여기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이는 구양순의 형체가 조그마하고 못났기 때문에 한 말이다.
《위씨서설(韋氏書說)》
이옹(李邕)의 《행서첩(行書帖)》
○ 금릉(金陵)의 유중모(兪仲茅) 선생이 소장하고 있는 태화(泰和) 이옹(李邕)이
행서로 쓴 대조 선사(大照禪師) -원문 빠짐- 2천여 자로,
경황지(硬黃紙)에 썼는데 필법이 반듯하여 구우(歐虞)의 풍미가 있다.
선생이 말하기를, “이 글씨는 당나라 이래로 고려에서 소장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선화(宣和)나 정화(政和) 등의 옥새(玉璽), 군옥(羣玉)이나 추학(秋壑) 등의 도장,
소미(蘇米) 등의 발문이 하나도 없다. 신묘(神廟) 말년에 어떤 병사
-살펴보건대, 왜적을 정벌하러 온 장사(將士)이다.- 가 평양(平壤)에서
이것을 얻어 장차 막부(幕府)에 바치려고 하면서 나의 책문을 매개로 삼고자 하였다.
이에 내가 요동(遼東)의 일이 반드시 패하고 말 것이라 여겨
그에게 서둘러 가지 말도록 경계시켰는데, 얼마 뒤에 과연 그렇게 되어
이 서첩이 드디어 나에게 남겨지게 되었다.” 하였다.
《육연재이필(六硏齋二筆)》
서관(徐觀)의 글씨
○ 서관의 자는 상빈(尙賓)이고 화정(華亭) 사람이다. 어려서 한묵(翰墨)에 능하여 정통(正統) 신유년(1441, 세종23)에 향(鄕)에서 천거되어 국학(國學)에 유학하였는데, 재주와 명성이 더욱 드러났다. 교남(交南)과 조선 등 여러 나라의 사신들이 오면 그의 글씨를 사 가지고 돌아가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송강지(松江志)》
형동(邢侗)의 글씨
○ 형동의 자는 자원(子愿)이며, 임읍(臨邑) 사람이다.
융경(隆慶) 갑술년에 진사가 되고 태복시 소경(太僕寺少卿)을 지냈다.
서법은 종요(鍾繇), 왕휘지(王徽之), 우세남(虞世南), 저수량(褚遂良),
전미(顚米), 독소(禿素)를 본받았는데, 특히 왕 우군(王右軍)의 신체(神體)를 깊이
체득하여 천하에서 보배로 여겼다. 형 사마(邢司馬)가 왜적을 정벌하러
고구려(高句麗) -살펴보건대, 마땅히 조선(朝鮮)으로 되어야 한다.- 에 갔을 적에
이 장원(李壯元)의 아내가 자원 형동의 글씨를 좋아해서
그의 제자(弟子)가 되고자 하였다.
주 종백(朱宗伯) -살펴보건대, 난우(蘭嵎) 주지번(朱之蕃)이다.-
이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 종인(從人)이 마침 그의 글씨 2폭을 가지고 있었는데,
같은 양의 황금을 주고 그것을 구매하였다. 《대필산방집(大泌山房集)》
주지번(朱之蕃)의 글씨
○ 주지번의 자는 원개(元价)이다. 사관(史官)이 되어 조선에 사신으로 나갔는데,
조선 사람들이 와서 글씨를 써 주기를 요구하면서 초피(貂皮)와 삼(蔘)을 대가로 주었다.
《열조시집(列朝詩集)》
부록(附錄)
○ 당나라 태종(太宗)의 폐유감천첩(廢遊甘泉帖)은 단지 요동(遼東)의 역사(役事)
한 가지만 알 수가 있다. 《황산곡집(黃山谷集)》
○ 승려 몽귀(夢龜)는 세계(世系)를 알 수가 없다.
당나라 천복(天復) 연간에 동림사(東林寺)에 있으면서
전초(顚草)를 썼는데, 갖가지 모양새가 기괴하였으며 필력(筆力)이 굳세어 힘이 있었다.
지금 어부(御府)에 소장된 것이 10폭이며,
기신라검첩(寄新羅劍帖)이 있다. 《선화서보(宣和書譜)》
[주-D001] 홍영(弘永) : 홍영(洪永)의 잘못인 듯하다.
홍은 홍무(洪武)를, 영은 영락(永樂)을 가리킨다.
[주-D002] 전복(甸服) : 도성에서 500리 떨어진 곳에 있는 지역을 말한다.
여기서는 중국 국내의 뜻으로 쓰였다.
[주-D003] 왕저(王著) : 송나라 성도(成都) 사람으로, 자가 지미(知微)이며,
글씨를 잘 썼는데, 필적이 매우 아름답다.
[주-D004] 방서(倣書) : 글씨 쓰기를 연습할 때 모사한 글자를 말한다.
[주-D005] 왕형(王衡) : 명나라 태창(太倉) 사람으로, 호가 구산(緱山)이며,
《구산집(緱山集)》을 저술하였다.
[주-D006] 몽음공(蒙陰公) : 몽음은 산동성에 있는 현 이름인데,
몽음공은 누구를 가리키는지 정확하지 않다.
[주-D007] 증굉보(曾宏父) : 송나라 여릉(廬陵) 사람으로 자가 유경(幼卿)이며,
《석각포서(石刻鋪敍)》를 지었다.
[주-D008] 소릉(昭陵) : 당나라 태종(太宗)의 묘호(廟號)로, 섬서성(陝西省) 예천(禮泉)에
있는데, 이곳에는 유명한 소릉구준석각(昭陵九駿石刻)이 있다.
[주-D009] 정무(定武) : 난정서첩(蘭亭序帖)의 석각(石刻) 이름이다.
당나라 태종(太宗)이 왕희지(王羲之) 부자(父子)의 서법을 좋아해서
난정서(蘭亭序)의 진적(眞跡)을 얻고는 탁본을 떠서 학사원(學士院)에 새기도록 명하였다.
그 뒤에 오대(五代) 시대 양(梁)나라 때 이를 변도(汴都)로 옮겼으며,
다시 전란 통에 잃어버렸다가 북송(北宋) 때 발견되어 정주(定州)에 놓아두었다
. 대관(大觀) 연간에 휘종(徽宗)이 이를 선화전(宣和殿)에 놓아두게 하였는데,
북송이 망한 뒤에는 석각이 없어지고 말았다.
정주가 송나라 때 정무군(定武軍)에 속하였으므로,
이곳에 있던 석각을 정무 석각이라고 한다.
[주-D010] 왕 우군(王右軍) : 왕희지(王羲之)를 가리킨다.
[주-D011] 유중모(兪仲茅) 선생 : 명나라 유언(兪彦)을 가리킨다
. 중모는 유언의 자이다.
[주-D012] 구우(歐虞) : 당나라 구양순(歐陽詢)과 우세남(虞世南)의 병칭으로,
모두 글씨를 잘 쓰기로 이름난 사람들이다.
[주-D013] 군옥(羣玉) : 옛날에 제왕이 서책이나 서화 등의
진적(眞跡)을 보관하던 곳을 말한다.
[주-D014] 소미(蘇米) : 북송 시대의 서법가(書法家)인 소식(蘇軾)과 미불(米芾)의 병칭이다.
이들은 서화에 대한 발문을 많이 썼다.
[주-D015] 교남(交南) : 교지(交趾)의 남쪽인 지금의 월남 북부 지방을 가리키는 듯하다.
[주-D016] 형동(邢侗) : 원문에는 ‘邢伺’로 되어 있는데,
《명사(明史)》 권288에 의거하여 ‘邢侗’으로 바로잡았다.
형동은 글씨를 잘 쓰고 시문을 잘 지어 동기창(董其昌), 미만종(米萬鍾),
장서도(張瑞圖)와 함께 ‘형장미동(邢張米董)’이라고 일컬어졌다.
[주-D017] 융경(隆慶) 갑술년 : 융경 연간에는 갑술년이 없는바,
만력(萬曆) 갑술년의 잘못이다. 만력 갑술년은 만력 2년(1574, 선조7)이다.
[주-D018] 전미(顚米) : 송나라 때의 서법가인 미불(米芾)을 가리킨다.
미불은 괴석(怪石)을 몹시 좋아하였으며, 행동거지가 세속을 벗어나
구애되지 않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전미’라고 불렀다.
[주-D019] 독소(禿素) :
당나라 때 초서(草書)를 잘 썼던 승(僧) 회소(懷素)를 가리키는 듯하다.
[주-D020] 형 사마(邢司馬) : 임진왜란 때 구원병으로
나온 형개(邢玠)를 가리킨다.
[주-D021] 전초(顚草) : 서법(書法)의 하나로,
종횡으로 분망하게 쓰는 광초(狂草)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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