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년 전 여름날을 잊지 못한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은 채 유난히 많은 말을 늘어놓았고, 일직선으로 내려오던 짱짱한 햇빛을 보았으며, 아지랑이 피워 올리며 약동하던 아스팔트의 뜨거운 기운을 느꼈다. 여름의 열기가 지끈대는 머리와 함께 호흡하는 것만 같았다.
열세 살 여름방학, 근이영양증을 진단받다
급작스러운 서울행이었다. 어머니는 병원에 가야 한다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차로 대여섯 시간은 걸리는 거리였다.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이 한창이었고, 친척 몇 분이 동행했다. 이따금 전해지는 걱정스러운 눈초리가 몸을 움츠리게 했다. ‘별일 아니다’라는 의미를 담은 갖가지 말들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준비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나는 경상남도에 있는 작은 항구 도시인 삼천포에서 줄곧 자랐다. 그 한적한 곳을 벗어나본 적이 거의 없던 내게 서울은 텔레비전에서나 보는 신기한 장소였으나, 그날의 여정은 설레지 않았다.
형과 나는 피를 뽑았다. 몇 가지 검사를 더 진행하고 결과를 받으려면 일주일 넘게 걸린다고 했다. 18년이 지나 유전상담을 목적으로 의무기록지를 떼고 나서야 이 검사가 ‘유전자 결손’과 관련된 것임을 알았다. “Dystrophin 유전자 결손 검사에서 유전자의 5’ 부위와 중간부위의 결손 다빈도를 보이는 19개의 exon 중에서 45, 47번 exon의 결손이 있습니다. 이 경우 in-frame transcription이 유발되므로 …” 생업이고 뭐고 모든 것이 삼천포에 있었던 우리 가족은 결과를 기다릴 만큼의 시간이 없었다. 내가 남기로 했다. 나는 수원 큰고모댁에서 보름의 시간을 보냈고, 가족 없이 처음으로 생일을 맞았다.
한두 번 더 병원을 방문했을 때, 중년의 재활의학과 의사는 내 어깨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고르는 듯한 모양새였다. ‘근이영양증’(筋異營養症, Muscular Dystrophy). 다큐멘터리 같은 데서나 들었을 법한 단어였다. 몸이 점점 약해질 수 있지만, 꽤 오랜 시간 일상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증세가 심하지 않다고, 그나마 다행이라고. ‘운이 좋은 케이스’라는 사실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숨을 고를 여유 따위는 없었다. 받아들이는 일 말고 다른 길이 없음을 알았다.
X염색체 유전자 돌연변이로 나타나는 희귀 난치성 질환, 근육 위축과 근력 저하로 온몸이 서서히 안 좋아지는 병이었다.1) 알려진 설명에 따르면, 근이영양증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점차 근육이 약해져서 계단을 오르내릴 수 없게 되고, 이후 더 진행되면 휠체어 생활을 하다가 누운 채로 지내게 되는데, 마침내 그 영향이 심장에 이르면 죽게 되는 수순이었다. 30가지가 넘는 유형에서 가장 흔한 ‘뒤센근이영양증’과 ‘베커근이영양증’ 중 베커 타입이라는 사실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라는 이야기였다.2) 이후 찾아본 바에 따르면, 뒤센형은 20대 이전에 베커형은 40대 이전에 심부전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다만 하나의 질환에 대한 대표적인 설명이 모든 사례를 담아낼 수 없듯이, 나는 베커근이영양증을 진단받은 여느 사람들보다 상태가 괜찮은 축에 들었다. 진행 속도를 비롯해 여러 면에서 훨씬 나았다. 베커형 기대수명을 훌쩍 넘어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는 60대 환자의 과거력과 비교해도 몸의 전망이 밝은 편이었다. 한때는 기도 응답으로 몸이 고쳐진 것은 아닐까, 스스로 생각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제는 달리지도 못하고, 자전거도 탈 수 없으며, 지지대 없이 일어나거나 계단과 경사를 오르는 일이 다소 힘에 부치지만(되도록 피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제법 오랜 기간을 (다소 힘겹더라도) 적어도 걸어는 다닐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열세 살이던 나는 병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기억 속 여러 장면을 떠올렸다. 어렸을 적 또래들과 놀다가 힘들면 으레 다른 아이들도 지쳤겠거니 생각했다.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셈이다. 어떻게든 내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신경 쓰던 어머니의 태도, 때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유심히 손자들 몸을 살폈던 외할머니 모습 등에서 가졌던 의구심들이 있었는데, 그 정체가 무엇인지 또렷해진 순간이었다. 눈이 뜨였고, 나는 알게 되었다. 왜 그토록 다리 아픈 일이 많았는지, 학교에서 단체 기합이 길어질 때면 왜 항상 열외로 분류됐는지, 왜 열 살 때부터 한 해를 더해 갈수록 달릴 수 있는 운동장 바퀴 수가 줄어들었는지….
이전에도 몸을 둘러싼 궁금증을 어머니에게 물어보고는 했다. 그때마다 돌아온 대답은 분명치 않았다. 나는 남들보다 몸집이 작아 학교에서 늘 맨 앞줄에 앉았다. 그런 탓에 ‘그냥 몸이 약하기 때문’이라며 뭉뚱그리는 말에도 더는 따져 묻지 않았던 것 같다.3) 그다음 머릿속을 스쳤던 기억은, 휠체어를 타는 작은외삼촌과 불편한 다리로 지팡이를 사용하는 큰외삼촌에 관한 것이었다. 이분들 모습은 다가올 나의 미래였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남들보다 체력이 뒤처지기는 했어도 얼마든지 뛰어다니거나 자전거를 탈 수 있었던 시절이라, 현재가 아닌 미래에 대한 걱정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견딜 만했다고 할까. 실감 나지 않았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문제는 어렸던 나를 사로잡았던 강렬한 감정이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어머니를 향한 마음이었는데, 배신감에 가까웠다. 그동안의 눈치로 보면 이미 어머니는 내 병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왜 한 번도 몸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던 것일까. 처음 보는 의사로부터 긴 설명을 들어야 했다. 그날 이야기를 듣는 내 곁에는 큰고모 한 분밖에 없었고, 나는 마음속에 차오르는 당혹스러움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추후 알게 된 사실에 따르면, 내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두 살 위인 형이 걸음마 단계에서 곧잘 넘어지고는 했는데, 그때 방문한 동네 병원에서 이미 진단을 끝낸 상황이었다. X염색체 반성 열성 유전으로, 여성은 보인자이고 남성에게서 증세가 발현된다고 했다. 가계도까지 고려하면 다른 병이 아닌지 의심하거나 더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서울 병원행은 말 그대로 향후의 의료비 지원 등을 위한 목적이었다. 복지제도를 이용할 때 쓰일 서류를 위한 사전 확진 작업이었을 뿐. 그러면 이 병에 대해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의사의 진단 이후 만난 물리치료사에게서 몇 가지 주의 사항과 간단한 스트레칭 방법을 들을 수 있었다.
근육에 힘을 많이 쓰면 증세가 심해져 병이 더 빠르게 진행될 가능성이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최우선 사항은 무리하지 않는 것. 과격한 운동을 피하되 몸의 적당한 사용이 권장되었으나 기준이 불분명했다. 찬 바람을 많이 쐰다거나 하는, 근육에 좋지 않은 일은 될 수 있으면 피해야 했다. 일상생활을 유지하면서 스트레칭이나 물리치료를 이어갈 것을 고려할 필요는 있었다. 물속에서 수영하는 일, 정확히 말하면 수영장 같은 데서 가볍게 걷는 일을 꾸준히 실천하면 좋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들이 딱히 병의 진행을 늦추는 데 큰 효과가 있지는 않았다. 언제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는 하늘에 맡겨야 하는 상황이라, 안 하는 것보다 낫겠지만, 이런 행동들로 몸이 드라마틱하게 나아지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되었다. 한마디로 ‘고칠 수 없는 병’이라는 말이었다.4)
비가시적 장애와 가시적 장애 사이
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싫었다. 도움을 마지못해 받아들인 적이 많았고,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면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오랫동안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지냈다. 무거운 물건을 든다거나 하는, 일상의 여러 일을 조심해야 하는데도, 대학 시절 끙끙거리며 기숙사로 박스를 옮겨 반나절을 누워서 휴식을 취했던 때도 있었다. 약한 몸을 가졌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었다. 주변 사람들 발걸음에 맞춰 무리하게 걷다가 그들과 헤어진 후 힘들어서 몸을 붙잡고 울었던 적도 여러 번이다.
어떨 때는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주변에 내 병에 대해 고백했다. 피치 못한 상황도 많았다. 수련회 같은 데서 단체 활동을 한다거나 물건을 옮기는 등 힘쓰는 일에 동원될 때 그랬다. 그렇지만 처음 만난 사람에게나 내 처지를 이해받고 싶을 때 급작스럽게 병을 고백하기도 했다.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고, 위안받고 싶었던 것일까. 왜 이렇게 태어나야 했는지, 딱히 해결할 길이 없는 이 몸뚱이를 붙들고 언제까지 살아야 하는지, 어쩐지 울분에 찬 마음을 되삼키면서. 간간이 속에 있는 것들을 게워내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나는 경증장애인이다. 2008년 발급받은 지체장애 4급 복지카드를 갖고 있고, 기차를 타거나 영화를 볼 때 할인받는 용도로 사용한 지도 꽤 오래되었다. 그렇더라도 장애인 정체성은 늘 애매했다. 이 정체성을 인정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정확한 시점은 모른다. 아마도 증상이 조금 가시화되고, 인식에 전환이 생겼던 때부터겠다. 아직 일상에서 지팡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지팡이를 짚고 다닐지 말지 고민하던 몇 년 전 즈음에야 확실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물론 여기에 핵심적인 영향을 준 것은 관련 저술 번역 및 출간으로 한국에 꾸준히 소개되고 있는 장애학(disability studies)이다).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고, 가만있으면 멀쩡해 보이는 시간이 길었다. 20대 초반에는 병을 알게 된 남성 지인들로부터 ‘군대 안 가서 좋겠다’라는 무신경한 말을 듣기도 했다. 현재도 업무상 인터뷰이를 만나거나 바깥에서 회의를 진행하면 눈썰미 좋은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득이하게 가파른 길을 걷거나 계단을 오르내리는 상황과 맞닥뜨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뜻밖에 알게 되더라도 대다수는 짐짓 모른 척하거나, 잠시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이는 데 그친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 ‘잔디회’(한국근육디스트로피협회)에 간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근이영양증의 흔한 케이스로 휠체어 생활을 하는 분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복잡했다. 그분들에 비해 괜찮은 몸 상태 때문에,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서 어정쩡한 위치에 놓여있는 듯한 느낌을 받고는 했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이 이 땅에서의 삶을 쉽게 통제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더욱 극적으로 드러내는지도 모른다. 병을 갖고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불운’한 것인데, 내 몸이 ‘운이 좋은 케이스’로 여겨지기도 하니 말이다. 어떨 때는 병의 진행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리다는 사실을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말을 듣고는 했는데, 그렇다고 내가 ‘진행성 질병’이라는 불안의 굴레, 미래가 저당 잡힌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 몸이 비가시적 장애와 가시적 장애의 경계에 있는 까닭에 발생하는 고민 또한 존재한다. 앞으로의 글을 통해 기술하겠지만, 언어화하지 않아서 읽히지 않는 고통은 삶의 현장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이제 내 몸은 더욱 뚜렷하게 비가시적 장애에서 가시적 장애로 점차 나아갈 것이다. 모든 인간이 겪는 육신의 쇠락을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더 선명하게 경험하는 셈이다. 장애는 때때로 인간의 취약성을 더욱 민감하게 체감하도록 만든다. 성경이나 문학작품 등에서 ‘장애은유’가 곧잘 사용되는 것도 이 때문이겠다.5)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에서 드러나는 풍경들
장애인이 존재 자체로 “고난의 현실에 대한 예언적 기능”6)을 떠안는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장애인이 맞닥뜨리는 실존이 인간이 삶에서 겪는 고통(고난)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약함의 표지’ 같은 역할을 한다는 말이겠다. 장애학 연구자 로즈메리 갈런드 톰슨이 지적하듯이, “신체적 부적당과 일탈을 체화한 것으로 구성된 신체적 장애를 지닌 몸은 취약함, 통제, 정체성과 같은 골치 아픈 문제들에 대한 사회적 불안의 저장소”7)로 기능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장애인이 비장애인보다 더 불행하게 살아간다고 단정하는 것은 단견일 테다. 각자가 겪는 개별적 고통의 크기를 비교하는 일은 불가능할뿐더러, 고통과 불행이 반드시 정비례하지도 않으니까. 인생살이의 복잡성을 고려하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삶 또한 이분법적으로 단언할 수 없다. 다만, 장애 자체가 물리적 손상과 정치·사회·문화·역사적 맥락이 얽혀있는 ‘복합적 상호작용’8)의 산물이기에, 이를 통해 예리하게 포착할 수 있는 현실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앞으로 언급할 ‘장애신학’ 담론도 장애를 둘러싼 특유의 시선에서 출발한다.
나는 기독교 신앙을 갖고 매주 교회를 출석하는 장애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모태신앙은 아니지만, 아기 때부터 어머니 등에 업혀서 교회를 다녔고, 열일곱 살이 돼서야 회심을 경험했다. 한국의 보수적인 장로교회에서 자라난 나는 회심 직후 기독교 신앙이 환한 빛으로 삶의 종착점까지 이어지는 길을 비춰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지금 내가 도달한 자리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런 마법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신앙은 강렬한 빛으로 우리 앞길을 환하게 밝혀주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중보자가 되셔도, 아무리 ‘신령해 보이는’ 기독교인이라고 할지라도, 세계 내에서 한계 지어진 존재인 인간은 뼈저리게 깨달을 수밖에 없다. 인간 편에서 미래를 향하는 발걸음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 속 여정과 다르지 않음을. 우리는 이 길이 어딘가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 끝에 자리하고 있는 종착점이 어떤 모습일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다만 소망할 수 있을 따름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물음을 붙잡고 사는 일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미국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회고록 《한나의 아이》(IVP)를 통해 남긴 유명한 말을 좋아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답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9) 우리는 이 고백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님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하우어워스가 24년간 이어온 첫 번째 결혼은 그야말로 ‘실패’였다. 전처 앤은 심각한 조울증(양극성장애)을 앓았다. 각종 망상이 심해질 때면, 자신을 지구를 구원할 존재로 여기기도 하고, 다른 남자들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며 그 사람들과 성적 합일을 이뤄야 한다거나 결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앤은 ‘다른 세계’ 속에 살면서,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하우어워스 잘못으로 돌리며 폭언을 일삼았으며, 결국에는 갈라서는 길을 택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아들 애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붙잡고 끊임없이 가슴 졸일 수밖에 없었다. 하우어워스가 꺼낸 고백은 이혼한 앤의 자살 시도와 죽음에 대한 서술 이후에 나온다. 고통은 살아있음에 대한 증언이기에, 답 없이 사는 일은 모든 인생에게 예외 없이 주어진 것이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도무지 발버둥을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와 삶의 복잡성을 정직하게 마주하며 배우는 일과 다르지 않다. 하우어워스가 밝히듯, 이 ‘살아남기’와 ‘견디기’ 여정 가운데 사랑과 우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은은한 위로를 준다.
복음서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께서 주목했던 장소는 탄식과 부르짖음이 빗물 웅덩이처럼 고여있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항상 장애인이 있었다. 그들이 서있는 자리를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더욱 또렷하게 드러나는 복잡미묘한 인생의 풍경들이 있다. 앞으로 이어질 글은 이와 관련해서 장애학과 장애신학이 던지는 물음들에 대한 것이다. 장애학과 신학 중 어느 쪽도 전공하지 않은 어정쩡한 아마추어이지만, 내가 마주한 이야기들을 조금씩 나눠보겠다.
■ 주
1) ‘근이영양증’에 대한 설명은 2008년 번역 출간된 알란 E. H. 에머리의 《근이영양증 – 환자와 가족을 위한 책》(백의)을 주로 참고했으며, 여러 대학병원 홈페이지에 나온 백과사전적 정보도 고려했다.
2) 뒤센형은 근섬유(muscle fibre)를 구성하는 근세포막(sarcolemma)을 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단백질인 디스트로핀(dystrophin)이 결핍된 상태이지만, 베커형은 돌연변이 유전자가 합성하는 디스트로핀이 결핍된 것이 아니라 불량한 상태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증세가 약하다.
3) 정신분석학자 시몬느 소스는 《시선의 폭력》(한울림스페셜)에서 자신의 증상에 의구심을 갖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을 장애아의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언급한다. 문제는 어른들이 “애매모호하고 불분명한 대답”(72쪽)을 한다는 데 있다. 아이에게 상처가 된다고 생각하거나 난처하기 때문인데, 이것은 오히려 아이에게 혼란을 준다(73쪽). 2007년 논문 〈진행성 질병이 있는 학생을 위한 교육현장에서의 동행: 그 의미와 과제〉(채기화, 《지체· 중복·건강장애연구 Vol. 50 No. 3》)는 아이가 이해하지 못해도 질문 내용에 대해서만큼은 진정성 있게 자세히 설명하는 편이 좋다고 지적한다. 둘러서 말하면 불안감을 증폭시킬 수 있다. 숨기지 않고, 언제든 물어볼 수 있다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진솔한 대화가 가능하다.
4) 현재는 ‘새로운 디스트로핀 유전자 삽입’ ‘세포가 유전적 지시를 읽는 방식 제어’ ‘근육 성장 촉진’ ‘근육 회복 가속화’ ‘손상으로부터 근육 보호’ ‘근육의 염증 퇴치’ ‘근육 섬유증 차단’ ‘근육으로의 혈류 최대화’ ‘디스트로핀 결핍 심장 보호’ 등을 통한 잠재적 치료법이 개발되는 중이다(참고: 한국근육장애인협회 홈페이지 http://www.kmda.or.kr/446). 〈국제신문〉 2021년 7월 12일 자 기사에 따르면, 뒤센근이영양증 유전자 치료제가 양산부산대학교병원 만 네 살 환자에게 국내에서 처음으로 투약되었다. 아직 치료 가능성이 완벽하게 가시화된 상황은 아니다. 승인된 치료제는 임상적 효과가 완전히 확립되지 않았으나 증상의 심각성 때문에 허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고, 약값 또한 수십억 원에 달한다고 알려졌다.
5) 채은하, 〈장애(인)와 치유 ― 온(ohn) 신학으로서의 장애인신학 시도〉, 《장신논단 Vol. 48 No. 4》(2016) 참조.
6) 안교성, 《장애인을 잃어버린 교회》(홍성사), 26쪽. 책에 표시된 각주를 보면,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가 쓴 《Suffering Presence》(University of Notre Dame, 1986)를 참고하여 사용한 표현으로 보인다.
7) 로즈메리 갈런드 톰슨, 《보통이 아닌 몸》(그린비), 17쪽.
8) 톰 셰익스피어, 《장애학의 쟁점》(학지사), 3장 ‘장애: 복합적 상호작용’ 참조.
9) 스탠리 하우어워스, 《한나의 아이》(IVP), 375쪽.
첫댓글 주변에 근이영양증을 가지고 있는 가족이 있습니다,
모두 힘겨운 시간들을 잘 견뎌내고 있지요..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참된 이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
도무지 발버둥을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와 삶의 복잡성을 정직하게 마주하며 배우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