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에 대한 오해
東洋哲學을 사주(四柱), 관상(觀相), 작명(作名)과 떼어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길거리에 붙어있는 간판 탓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동양철학 연구자들 탓도 있을 것입니다. 유교 경전 가운데 주역(周易)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런 혐의에 빠지기 쉬운 편입니다. 요즈음은 '명상 술'이다
기공'이다 '단'이다 하는 유행이 일어난 덕분에 동양철학이 더욱 신비한 것으로 눈길을 끕니다.
그러나 동양철학은 이러한 유행에 관한 것이 아니며, 점이나 사주, 관상, 궁합 등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공자나 노자는 신비주의나 미신을 말하지 않았고, 만일 그랬다면 철학사에서 다루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동양철학에 대한 오해의 출발점은 동양과 서양의 철학적 특성을 양분하여 설명하는 논리에서 비롯됩니다.
오해 1,
동양철학은 옛 유물이다.
골동품이나 음력 같은 것이다.
나와는 별로 관계가 없다.
오해 2,
동양철학은 점이다. 운명 학이다.
사주, 관상, 수상, 족상, 궁합, 작명 등이다. 심심풀이로 점을 친 적이 있는데, 아주 엉터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 경험 과학이 가진 통계적 예측력이 있을 것이다.
오해 3,
동양철학은 심오하다. 그러나 논리적이지 않다.
무언가 이치가 있는 것 같지만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특별한 수행을 쌓은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신비한 무엇이다.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독특한 영역이 있는데, 그것은 과학이 더 발달하면 해명될지도 모른다.
결국 '동양은 정신적이고 서양은 물질적이다.
동양은 종합적이고 서양은 분석적이다.
동양은 실천적이고 서양은 이론적이다. 동양은 윤리적이고 서양은 주지적이다. 등등' 이러한 방법으로 열거하면 할수록 동양철학에 대한 오해는 깊어집니다.
동양철학의 진실
철학은 현실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현실을 이해하고 그 토대 위에서 어떻게 살 것이며,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문제 삼는 것은 동양철학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철학을 공부하고, 철학공부를 통하여 우리의 정신을 단련합니다. 우리는 동양철학을 과거의 철학 또는 골동품으로 생각하지 말고, 동시에 과거의 철학에 이 시대의 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동양철학을 알지 못하고 감성적으로 거부하는 태도를 비판하며, 동시에 동양철학을 영원한 우주적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비판해야 합니다. 동양철학의 진실은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이 공간, 이 세상을 좀더 살 만한 곳으로 바꿔보려는 사람들이 정신을 단련하고, 주변 사람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재료를 제공하려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유가 사상 대 도가 사상
◈ 儒家思想과 道家思想의 비교 ◈
유가(儒家) 사상(思想)
비교 도가(道家), 사상(思想), 공맹사상(孔孟思想)
인물 노장사상(老莊思想), 현실주의 사상
바탕 초현실주의 사상, 수기치인(修己治人)
중심 무위자연(無爲自然), 요순(堯舜)
전형 황제(黃帝), 봉황(鳳凰)
상징 붕조(鵬鳥)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비유, 마음을 비워라"
정치, 사회, 윤리 분야 영향
예술, 문학 분야
지배계급의 이념
중세이념, 피지배계급의 정서 대변
출세지향, 일류지향, 부정적 측면, 비 현실, 염세(厭世)
사상(思想)의 황금기라고 하는 춘추전국시대에 형성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 중에서 동양 사상의 큰 줄기를 형성하면서 두 축의 역할을 해온 사상은 유가(儒家)와 도가(道家)를 꼽을 수 있습니다. 춘추(春秋)와 전국(戰國)이라는 당시의 상황은 극도의 혼란한 사회 정세가 지속되었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자연스럽게 사상과 산업의 발전을 유도하게 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공,맹(孔,孟)에게서 완성된 자기완성을 통한 후에 사회로 베풀어져 나가야 한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유가(儒家)와 노장(老莊)에게서 이룩된 인간의 모든 인위적인 행위를 버리고 저절로 그러한 상태의 자연을 따르라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가(道家) 사상은 2000년 이상을 동양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으로 인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그 사상적 기조를 이해한다는 것은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밑거름이 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특히 두 사상을 이해하는 측면에서 마지막 항목인 각 사상의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유가적 입장에서 사고한다면 그 폐단은 영장 중의 영장이 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생각하지 않는 일류 지향, 출세 지향의 모순점에 빠지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현대 사회까지 기성세대들이 말하는 '무조건 출세해서 큰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바로 이러한 유가적 입장의 폐해가 아닌가 합니다.
물론 도가 적 입장에서도 그 폐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인위적 표현을 허상으로 여긴다면 더 이상 현실에서 살아갈 가치를 찾을 수 없게 되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현실을 부정하게 되는 비현실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가사상과 도가사상은 그 사상적 조화를 적절하게 유지하면서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적응하는 것이 진정한 동양 사상의 조화로운 발전이 아닌가 합니다.
유가 사상의 계보
유가 사상은 동양의 역사에서 항상 전면에 등장하는 사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가 사상이 중세 지배계급(支配階級)의 이념(理念)으로 동양의 역사를 이끌어왔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유가 사상만으로 동양의 사상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동양의 역사를 접할 때 유가 사상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동양의 전반적 역사 흐름을 조감(照鑑)해 볼 수 있기 때문에 금번 유가 사상의 계보(系譜)를 통해 동양의 역사적 흐름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 유가사상(儒家思想)의 계보 ◈
시대, 계보[인물], 유가사상; 특징, 우리나라 삼황오제(三皇五帝), 요(堯), 원시유학(原始儒學), 고복격양(鼓腹擊壤), 선양(禪讓), 단군조선(檀君朝鮮) 순(舜), 하(夏), 우(禹), 걸주(桀紂)의 주지육림(酒池肉林) 탕(湯)의 혁명은(殷), 탕(湯), 주(周), 문왕(文王) 무왕(武王)의 혁명, 봉건제(封建制) 완성, 무왕(武王), 주공(周公), 춘추(春秋), 공자(孔子), 제자백가(諸子百家) 전국(戰國), 맹자(孟子), 진(秦) <단절> 분서갱유(焚書坑儒) 한(漢), 동중서(董仲舒), 훈언고학(訓言古學), 유학 이념화, 삼국시대(三國時代), 수(隋),당(唐), 한유(韓愈), 불교, 도교 성행
송(宋), 정자(程子), 성리학(性理學), 관념론적 철학, 고려(高麗), 주자(朱子), 원(元), 라마교, 명(明), 왕수인(王守仁), 양명학(陽明學), 지행합일(知行合一), 조선(朝鮮), 청(淸), 고염무(顧炎武), 고증학(考證學). 복고주의(復古主義), 실학(實學)
국치일(國恥日)
아직도 일제치하의 기간을 36년이라고 하십니까?
유구한 반만년의 역사(歷史)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 그러나 찬란한 문화 전통의 역사가 무참하게 짓밟힌, 그로 인해 역사의 줄기가 단절되어 버린, 바로 일제(日帝)에 의해 질곡(桎梏)의 굴레를 지게 된 치욕(恥辱)의 날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단절된 역사를 복원하고 일제(日帝)의 잔재를 청산하고 있다 하면서도 가장 기초적인 문제인 잘못된 용어나 잘못된 일제 압제(壓制) 치하의 기간(期間)을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먼저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과 '한일합방(韓日合邦)'이라는 명칭에 대해 이의(異議)를 제기합니다. 무엇이 '보호'입니까? 일제(日帝)가 우리를 보호한 것입니까? 강압에 의한 치욕적인 조약. 그렇다면 우리가 조약 명칭에 '보호'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이나 '을사조약(乙巳條約)'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이 명칭 역시 우리의 치욕을 풀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명칭이 맞을까요. 바로 '을사륵약(乙巳勒約)'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당시부터 우리의 민족적 지식인 들은 이렇게 불러왔습니다.
늑약(勒約)'은 억눌러서 이루어진 조약이라는 의미입니다.
곧 을사년(乙巳年-서기 연도를 잘 모르겠으면 본 사이트 간지이야기를 보세요)에 일어난 강압에 의한 치욕의 조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한일합방(韓日合邦)'이라는 명칭도 '합방(合邦)'의 의미가 나라가 합쳐졌다는 일제(日帝)의 입장에서 불리던 명칭입니다. 이 역시 경술년(庚戌年)의 나라의 치욕{국치(國恥)}이라는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불려야 합니다.
아울러 '경술국치(庚戌國恥)'의 국치일(國恥日)이 몇 월 며칠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일반인이 얼마나 될까요!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한 인물이었던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으로 하여금 고종(高宗)을 협박하여 강제로 합병문서에 조인하게 했던 치욕의 날, 8월 29일입니다. 과거는 돌아갈 수는 없어도 잊혀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때 일본(日本)의 소학교(小學校) 학생들의 교육용 한자(漢字)의 수가 1945자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무의식의 소치는 부끄럽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45-10=36}이 맞습니까? 명칭의 문제 보다 더 큰 잘못이 있습니다. 바로 일제(日帝)가 우리를 강점(强占)했던 기간을 36년이라고 서슴없이 부르는 것입니다.
올해 8월 15일 광복절(光復節)에도 신문, 방송 등 언론(言論)에서까지 아직도 일제(日帝)의 압제(壓制) 치하(治下)를 36년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36년이 아니면 몇 년일까요.
초등학교(初等學校) 1학년 학생들에게 우리 민족(民族)이 1910년에 강제로 나라를 빼앗겼다가 1945년에 광복(光復)을 맞았다고 하면 나라를 빼앗긴 기간을 몇 년간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당연하게 {1945 - 1910 = 35} 35년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보면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34년 11개월 14일입니다.
곧 35년도 안 되는 기간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36년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까움을 넘어 답답한 심정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식이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의 수학 실력보다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민족의 암울한 치욕(恥辱)의 시기, 반만년 역사를 단절(斷切)시킨 수치(羞恥)의 역사. 그러한 치욕(恥辱)과 질곡(桎梏)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지금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일제(日帝)로 인해 만들어진 모든 것들 중에서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잘못 알고 잘못 쓰고 있는 것들에 대해 바로잡는 작업이 선결되어야 진정으로 일제(日帝)의 잔재(殘滓)가 사라질 것이고 민족의 정기(精氣)가 올바로 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