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박재웅
종이컵 외
장마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연일 들이닥치는 불볕더위
냉방 시설이 없는 현장
검-판사 집 개 같은, 개보다 무섭다는 민원으로 굳게 닫힌 창문
열사풍熱沙風의 산업용 선풍기 몇 대 윙윙거리는 office 건물 인테리어 현장
그래도 늘 싱글거리며 한 시간 일찍 출근하는 일용 잡부 김씨
나이 제한과 혈압이 있어 헐값에도 잘 팔리지 않는 녹슨 기계라며
소금 땀, 먼지가 대수랴 수시로 오줌통 비우는 멸시쯤이야 하면서 웃음기 놓지 않는
호칭도 개-잡부 김씨로 불러 달라는 그
유독 음용수가 있는 곳으로 갈 때마다 일그러지는 표정이다
하루 출력 삼사십여 명의 노동자
울퉁불퉁 선 굵은 사내들로 문전성시, 일명 ‘정수기 카페’ 음수대 옆 떡하니 고래 입 벌리고 있는 분리 수거함을 두고
바닥에서 짓밟히는 일회용 종이컵만 보면 가슴이 벌렁벌렁한다는 일용 잡부 김씨
정년을 2년 앞두고 명예퇴직했다는데
퇴직금 몽땅 부은 프랜차이즈 치킨집 일 년 만에 탈탈 털리고 택배 차 강매 사기까지
결국 두 무릎 접고 옛 직장 동료 아들 식당에서 서빙 일 했다는데
역병이 돌고 손님 줄어 로봇을 들인 아들, 갈 곳 잃어 들숨 날숨도 막막했다는데
한번 쓰이고 버려지는 것과 하루밖에 모르는 간극에서
애당초 재생의 길조차 밟혀 버려지는 것들의 시름을 차마 볼 수 없었던지
남다른 손재주로 개인 컵 보관함 만들며 한마디 툭, 던진다
“제아무리 로봇 놈도 이런 거 못 만들고 오줌통 버릴 줄은 모르겠지……”.
그날 이후
사라진 종이컵의 행방을 아무도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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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대
닫힌 대문은 녹슬고 낡은 지붕 잡풀 돋아나도
살아 계시듯 정갈한 뒤꼍 장독대
작은놈 큰놈 가지런히 서로 기대어
낮이면 태양을 담고 밤이면 별 총총 옛 달을 좇는
서러운 행주치마의 안식처
삭히고 삭혀서야 내놓아야 한다는 듯
.
봄이면 붉은 작약 가을이면 흰 국화 곁에서
바람 맵게 스친 날 소쩍새 시름마저 그윽하게 곰삭던 한 생애
고요한 달빛이 찍은 서글픈 문양
유정(有情)한 저 달은 몇 번이나 구름에 숨겨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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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웅|경기 이천 출생으로 2010년 ‘분단과 통일시’ 제2집 《동행》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쟁이로 불린다는 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