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사자성어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다. 오늘은 느닷없이 '각자도생'이라 읊는다. 제각기 살아 나갈 방도를 꾀한다는 뜻이렷다. 아침 출근길에 웬 개인택시 한 대가 지하 주차장 입구 통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엊저녁에도 주차장에서 지켜야 할 예의에 대해 관리실에서 방송을 하던데, 기본적 공중도덕도 지키지 않는 이런 사람들 때문에 종종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전날 그 자리에 세워 둔 차에는 운전자석 앞창에 경고장을 붙여 놓았던데, 이 택시는 새벽녘에 들어왔는지 경고장이 없었다. 그랬더니 남편이 '주차금지'라고 쓰여 있는 팻말을 어디서 가져다가 그 차 앞에 세워 놓는 거다. 남들이야 통행이 불편하든 말든 저만 편하면 된다는 이기적인 인간도 얄밉지만, 그렇다고 굳이 그 차 앞에다 팻말을 세워 놓는 남편의 치기 어린 행동도 나로서는 심히 못마땅하다. 바쁜데 쓸데없는 참견 말고 출발하자고 했더니 저런 건 가르쳐야 한다며 대단한 일이나 한 것처럼 우쭐대는데 속으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실은 그 차 옆자리에 우리 차 한 대를 붙박이로 세워두고 있어서 신경이 쓰여 그런다는 걸 내가 모르는 줄 아는 모양이다.
"요즘 애고 어른이고 가르친다고 어디 남의 말을 듣나. 말하는 입만 아프지."
"하기야 각자도생이니까."
이럴 때 어울리는 말인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남편의 학습 활동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모르긴 해도 어제 신문에서 읽고 내게 써먹어 보려고 벼르고 있었을 게다.
스마트폰 시대가 되면서 우리 생활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뉴스를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볼 수 있으니까 자연히 신문을 읽지 않게 된 것도 그중 하나이다. 전에는 직원들이 아침마다 신문을 보는 대로 먼저 집어가곤 했는데, 요새는 누가 챙기지 않으면 온종일 비닐 포장도 뜯기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종이로 만든 것이라면 책이든, 팸플릿이든 하다못해 광고지 한 장이라도 함부로 버리지 못하는 남편에게는 신문을 독차지할 수 있는 이 현실이 꿈만 같을 것이다. 사무실 여기저기에 산더미처럼 쌓아두는 것만으로도 성에 차지 않은지 퇴근할 때 슬그머니 신문 한 보따리를 챙기기도 한다. 어려서 부모 곁을 떠나 형제끼리 서울 유학 생활을 했다던데, 그때 남편이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 뭐든지 아끼는 버릇이 몸에 배었나 보다. 불안한 마음에 그런 기벽이 생겼거니 이해는 하지만, 그 정도가 심해 어떨 때는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남편이 컴퓨터 마우스를 교체하는 걸 보고 있으려니 책상 위가 서류 뭉치며, 신문 등으로 너무 복잡하였다. 그래서 지나간 신문은 좀 버리라고 한마디 하는데, 공교롭게도 그 순간 책상 밑에서 작업을 하던 남편이 책상 모서리에 머리를 받혔다. 그러지 않아도 반격의 기회를 노리던 남편은 이때라고 싶었는지 내가 아침부터 잔소리를 떨어 재수 없이 다쳤다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몸을 옴짝달싹 못 하게 물건을 쌓아둔 제 탓이건만, 남자가 치사하게 마누라 핑계를 대며 성질을 부리다니 정말 유구무언이다. 사이좋게 출근해서는 오전 내내 둘이 입을 빼물고 눈길을 피하고 있으니 이게 무슨 꼴인가 말이다. 남편이니까 잔소리도 할 수 있는 거지 옆집 아저씨라면 온갖 쓰레기로 고물상을 차리든 말든 나하고 무슨 상관이랴. 내가 차려준 밥상은 반찬이 없어도 맛있게 먹으며 고맙다는 인사까지 하는 자상한 사람이 왜 책상 정리 좀 하라는 내 말은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리며 한 번도 들어주지 않는 건지 도무지 그 속을 모르겠다. 혼자 분을 삭이느라 씩씩대며 앉아 있는 자신이 한편 우습게도 느껴졌다. 남편이나 나나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 제 버릇이 쉽게 고쳐지겠는가. 나 자신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서 남의 마음을 바꿔 보겠다고 헛심을 쓰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겠다. 그리고 서로 크게 폐 끼치는 일이 아니라면, 제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며 살도록 풀어주면 또 어떠하랴. 일전에 어떤 부인이 나한테 자기 남편이 보내는 글에 댓글을 달지 말아 달라는 부탁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만난 적은 없지만 연배이고 관심사도 비슷하여 좋은 말벗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오해를 받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일이라 부끄럽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해 한동안 속앓이를 하였다. 그 얘기를 들은 남편조차 그 부인이 참 주책없는 사람이라고 비난을 하며 나를 두둔하는 것이다. 중늙은이가 된 부부가 그만한 신뢰도 없이 서로를 구속하고 간섭을 하고 나서는 일은 확실히 볼썽사나운 짓이다. 부부 사이에도 지켜야 할 예의가 있고, 그것도 같이 사는 사람끼리의 공중도덕이라 하겠다. 그런 걸 안다는 사람이 시답잖은 일로 남편에게 시비를 걸며 괜한 고집을 부렸으니 사돈 남 말 한 셈이 되었다. 그래, '각자도생'이 정답이다.
첫댓글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 하나씩 배우면 좋겠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