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27일(주일) 낮 설교 - 성령강림 후 제12주 -
더 높은 곳을 향하여
{ 로마서서 12 : 1~8 }
Ⅰ. Story. 「 부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 」
하루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나이를 물었습니다. 다 큰 아이가 아버지의 나이도 모르는데 기가 막힌 아버지가 소리쳤습니다. “아니 너는 벌써 열 살이나 된 놈이 아빠 나이도 몰라?” 그러자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아빠, 저 올해 열 두 살이에요.” 그러자 아빠가 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열두 살이나 된 놈이 아빠 나이도 모르는 건 더 나빠.” 사람들은 대부분 모든 사물을 자기기준으로 보고, 자기와 맞지 않는 것은 좀 체로 용납지 않으려 합니다.
자기가 듣고 싶어 하는 것만 듣고,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고, 자기가 알고 싶어 하는 것만 알려고 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부분의 것이 자기 관심의 결과물입니다. 신념이나 직관이라는 것도 사실은 자신이 관심을 둔 것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미국 심리학자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스는 1979년 의미 있는 한 가지 실험을 합니다. 학생을 두 팀으로 나눠 농구공을 패스하게하고, 이것을 찍어 동영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실험대상자에게 검은 셔츠 팀은 무시하고 흰 셔츠 팀이 패스한 수만 세어달라고 했습니다. 동영상 중간에는 고릴라 옷을 입은 여학생이 약 9초에 걸쳐 무대중앙으로 걸어와 선수들 가운데 멈춰 서서 카메라를 향해 가슴을 치고 나서 걸어 나가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실험대상의 절반은 패스 수를 세는 데 정신이 팔려 그 여학생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에 집중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치고 마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을 ‘부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라고 이름 붙었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보고 있으면 모두 본다고 착각을 하지만, 실제 눈뜨고 보고 있어도 다 보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는 것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고 자신이 성공했다고 느낄수록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느라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기준을 넘는 다른 것을 보고 듣고 알려면 먼저 귀, 눈, 머리가 아닌 침묵이 필요합니다.
Ⅱ.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중에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이 찬송은《신편 찬송가, 1935》에 처음 채택되면서 온 국민의 애창곡이 된 찬송인데, 92장「위에 계신 나의 친구」를 작사한 존슨 오트만 (Johnson Oatman, Jr.)목사가 1898년에 작사한 가사로, 찰스 가브리엘(Charles H. Gabriel) 목사가 같은 해에 작곡한 곡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주기철목사의 일화가 함께 전해지고 있습니다. 일본식민지 하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끝까지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던 이들은 일본정부에 의해 엄청난 박해를 당하게 됩니다. 그 중 한 분이 주기철목사님입니다. 일본은 경찰뿐만 아니라 헌병대까지 동원하여 일본이 시행하는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핍박했습니다. 주기철목사님도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다는 죄 아닌 죄목으로 잡혀가서 무진 고문을 당합니다. 그 중 하나가 나무 판에 못을 박아놓고 그 위를 걸어가게 한 것입니다. 일본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하지 않을 경우 못이 박힌 나무판 위를 걸어가야 했습니다.
주기철목사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는 이 찬송을 부르며 끝까지 못이 박힌 나무판 위를 걸어갔고, 결국 나무판을 벗어나면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그 길이 험하고 매우 좁은 길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가야합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니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11:16) 그렇습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은 결코 이 세상 풍조를 따르지 않습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어갑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성도들은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은 아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닙니다. 손과 발이 움직여야 건강하듯이, 믿음의 실천이 있어야 건강한 신앙입니다.
Α. 우리는 온전한 헌신을 드려야 합니다(1).
믿음의 사람이라면, 생활이 빛이 나야합니다. 빛 된 삶이란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로 하면 ‘도덕적’이어야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도덕적 수준이 높아야합니다. 만약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들이 실제 생활에서 비도덕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세상에서 빛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다면, 누가 그의 말을 신뢰하고 복음을 믿겠습니까. 일단 말의 신뢰가 떨어지면, 그 다음부터는 그가 어떤 좋은 말을 해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날마다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훈련과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중 하나가 1절 말씀대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 몸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자칫 잘못 이해하면 인신제사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말씀하신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문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영적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지, 정말 몸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말일까요? 온전히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전인적인 헌신을 하라는 것입니다. 몸이란 말은 우리의 육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은 우리의 영혼육을 모두 의미합니다. 우리의 영혼육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주일신자(선데이크리스천)이 아니라 전일신자(에브리데이크리스천)가 되라는 것입니다. 언제어디서나 주님과 함께 헌신된 삶을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너희 착한 행실을 통하여’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에녹을 기뻐하셨을까요?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신앙인이었기 때문입니다.
Β.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2).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성도는 이 세대를 본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본받아 살아가야합니다. 여기에 기록된 ‘이 세대’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아이온’입니다. ‘세계, 세상’을 의미하는데, 꽃 중에 코스모스라는 꽃이 있습니다. 아이온은 코스모스와 비슷한 뜻을 가진 말입니다. 코스모스는 공간적이고 현상적인 세상을 의미한다고 하면, 아이온은 시간적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의미합니다. 새로운 삶을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헌신으로 규정했기에 더 이상 이 세대를 따라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왜 이 세대를 본받으면 안 된다는 것일까요? ‘이 세대’는 하나님보다 세상, 즉 사탄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민속신앙이나 자연신앙은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을 섬기도록 하는 것은 바로 사탄입니다. 우상에 사로잡히면 하나님과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성도들을 유혹하여 온전한 헌신을 하지 못하도록 막으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거리를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은 너무 쉽게 사탄의 지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귀신이 들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불신앙적이고, 불순종적인 생각을 하게 합니다. 또 그런 마음을 먹게 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과 마음을 조종하는 것입니다. 마치 리모컨으로 로봇을 조종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면 평상시에는 별다른 현상이나 반응이 없이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사탄의 지배를 따라 생각하고 마음을 먹고 결단하게 합니다. 컴퓨터에 악성코드를 심어놓은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청소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사탄의 지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극복해야합니다. 이 세대를 따라가다가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합니다.
Γ. 우리 마음이 새롭게 함을 받아야 합니다(2b).
이 세상은 생활양태가 가치가 일시적입니다. 일회용품을 좋아합니다. 사용하기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일회용품이란 말 그래도 한번 사용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일회용품이 얼마나 많은 그 가지 수를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영속적입니다. 이 세대와 하나님 나라는 다릅니다. 이 세대를 본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 이 세대의 가치는 계속 변하고, 계속 바뀐다는 것입니다. 가장 빠르게 변하는 것 중의 하나가 IT사업입니다. 핸드폰을 들고 다니게 된 것은 그리 오랜 역사가 아닙니다. 그런데 핸드폰이 얼마나 빠르게 변했습니까. 처음에는 그저 들고 다니는 전화기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냥 전화만 하지 않습니다. 핸드폰 안에 컴퓨터가 들어가 있습니다. 컴퓨터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핸드폰 하나로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전에 처음 나온 핸드폰은 어디 있을까요? 그것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박물관에나 전시될 뿐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이 세대를 따라 살아가다보면 엄청나게 바쁩니다. 그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좇아가도 결국 따라잡지 못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우리는 홀리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합니다.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순식간에 ‘이 세대’를 따라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의 모든 문명을 거부하고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판사의 판단기준은 오직 헌법을 비롯한 법률인 것처럼, 우리 성도들의 판단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
Ⅲ.
1941년 어느 날, 신경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에게 미국대사관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빅터 프랭클씨, 이민비자가 발급되었습니다. 찾으러 오세요.” 이때는 많은 유대인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던 시기였기에 유대인이었던 그에게는 생명을 보장하는 전화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비자는 자신과 아내에게만 허락되었기 때문에 결국 노부모를 남기고 떠나야 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숙고 끝에 그는 미국행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얼마 후 그와 아내, 부모님은 수용소에 끌려가고 맙니다. 머리는 빡빡 깎이고 죄수복에, 목숨을 연명할 정도로 적은 양의 음식만 먹으며 매일 극심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점점 몸이 망가져서 서있는 것도 신기할 정도였지만, 어딘가 살아 있을 아내와 부모님만 생각하면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났습니다. 오직 가족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그는 결국 살아남아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아내와 다른 가족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었습니다.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묻는 사람들은 삶의 의욕을 잃지 않으며 어떤 고통과 시련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빅터 프랭클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 내용처럼 희망을 찾아볼 수 없었던 그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던 것처럼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주님이 나의 삶의 의미가 된다면, 우리는 항상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며, 그곳을 향하여 나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더 높은 곳에 마음을 두고,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살아가시기를 축복(祝福)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