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정겨운 덕담이 오가는 십이월의 마지막에 섰다. 해마다 한 해를 되감을 때면 점점 미궁에 빠져들게 된다. 한 해를 보내고 맞이하면서 아쉬움만큼이나 설렘이 있기 마련인데, 이제는 설렘의 자리에 더 큰 두려움이 도사리고 앉는다. 나이가 든다는 것이겠지. 생각하니 피부로 느껴지는 현실의 나이가 제법 사무치게 다가온다.
겨울나무가 울긋불긋한 상념들을 내려놓고, 눈송이를 맞이하기 위해 빈 몸으로 서 있다. 한 방울의 수분마저 증발하면 더 이상 머뭇거릴 수는 없다. 이제 모든 걸 털어내야 할 때라는 걸 알게 된다. 나뭇가지에 매달렸던 나뭇잎들은 스스로 손을 놓아버린다. 나무에게서 살아온 시간을 스스로 거두어들이는 일들이 수고로운 것만이 아니라는 걸 배운다. 살아온 시간들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었고, 그 시간들 속에서 지혜가 영글지 않았는가.
살면서 쓰라린 경험들은 한 번씩 찾아와 상처를 남기고, 상처가 아물만하면 다시 쓰린 일들이 찾아오곤 했다. 십 년 전 이맘때, 또 한 번의 아픔이 찾아왔었다. 마음이 온통 가시밭이었다. 수능에 실패한 큰 아이의 방문은 안으로 굳게 닫히어 집은 적막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몇몇 날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아이에게도 지켜보는 가족들에게도 고통의 시간이었다. 내 마음은 수없이 아이의 방문 앞에서 맴돌았다. 어서 문을 열고 나오라고, 다그치고 싶었다. 그리고 아이의 책상 위에 내 답안지를 펼쳐놓고 싶었다.
스물이 되는 그 아이가 날개를 달고, 파랗게 비상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십 년 가까이 공들인 수고와 노력이 예기치 않은 결과로 돌아와, 쓰라린 상처를 견뎌야 하는 어린 마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엄마의 몫은 거기까지임을 알아야 했다. 이제부터는 스스로 일어나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자신의 힘으로 걸어 나가야 한다. 실패를 통해 더욱 값진 것을 얻을 수 있게 되리라. 마음으로 위로하며 문 밖에서 지켜만 보았다.
그때 아이는 이제야 자기 앞에 놓인 삶이 무겁고 버거운 것임을 어렴풋이나마 감지했으리라. 그리고 그때 나는 자식의 실패를 통해서 삶의 고단함을 다시 한 번 맛 봤다. 그것은 나의 실패 보다 더욱 아팠다.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좌절을, 내가 일으켜 세울 수 없는 희망을, 한없이 나약한 아이의 존재를 확인했다.
아이는 문을 열고 나왔다.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결과 앞에 재수를 결심하고, 남편과 내게 한 번의 기회를 더 달라고 말했다. 그 선택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깊은 생각을 했을까. 닫힌 방 안에서 얼마나 많은 선택을 했을까. 아이의 눈빛에서 흔들림이 없음을 알았다.
2년 터울로 고2가 되는 둘째가 있기에 재수를 뒷바라지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비빌 언덕 없는 살림이었다. 게다가 형편이 어려운 형제가 있으면 모른척하지 못하고 살아 왔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 도와주다 보니 늘 통장은 마이너스였다. 남편은 무조건 점수에 맞추어 가라고 했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쉽지 않은 선택을 한 아이의 뜻을 지지해주고 싶었다.
나의 스물도 그랬었다. 내 삶의 첫 번째 선택에서 재수를 포기하고 취업을 선택했다. 그리고 평생 내 마음은 내가 선택한 그 시점에 머물며 살아 왔다. 만약 그때 내가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면, 후회 없는 삶을 살았을 텐데....... 나는 아이가 평생 뒤를 돌아보며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남편은 내 뜻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이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일 년을 보냈다.
한 번의 실패가 두려워 물러나기에는, 두려움 없는 나이임을 감사히 여기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음을 기약하며 더욱 단단하고 멋진 날개를 달아 더 높이 날아오르는 꿈을 갖기를 응원했다. 아이는 그 이후로 다시 시작했고, 최선의 시간을 보냈다. 부모의 간섭이나 참견이 아닌 선택이었기에 결과에 대한 책임도 자신에게 있다는 걸 알았다.
아이가 어렸을 때 엄마의 역할은 명확했다. 아이의 위기 속으로 뛰어들어 함께 헤쳐 나가는 것이었다. 아이가 자라면서 아이에게 닥치는 위기는 더욱 커져간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계속해서 아이의 위기 속에 뛰어들어 함께 허우적댈 수는 없다. 이때 엄마의 역할은 달라져야 한다. 아이에게 처음으로 걸음마를 가르쳤을 때처럼 조금씩 거리를 두면서 멀어져야 한다.
처음에는 손도 잡아주고, 등도 밀어주다가 점점 아이의 위험이 놓인 바깥의 공간으로 물러나야 한다. 그리고 말없이 지켜보는 것이다. 이외의 모든 것은 아이의 역량이다. 더 이상의 간섭이나 참견은 아이에게 독이 된다. 위험을 스스로의 지혜로 뚫고 나왔을 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다.
높이 나는 새인 독수리들은 일부러 절벽에 둥지를 짓고 알을 낳는다. 알을 깨고 나온 어린 독수리는 어미에 의해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절벽은 창공을 비행하기 위한 어린 새의 연습 무대이다. 절벽 아래로 계속 떨어지며 비행飛行을 연습한다. 어린 날개를 펴서 수천수만 번의 파닥거림으로 나는 법을 배운다.
창공을 날 수 있는 단단한 날개를 얻을 때까지 어미 독수리는 쉽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 독수리가 어린 새를 키우듯이, 어린 날개를 단련시키듯이 아이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랄 수 있도록 그저 지켜볼 줄 알아야 한다. 위험에 빠진 아이를 외면할 수도 있어야 한다.
새들이 나는 법을 배우면 둥지를 떠나듯이 스스로 걸어갈 수 있도록 부모는 비켜서야 한다. 세상은 또 하나의 정글이다. 맹수들이 언제 나타나 위협을 가할지 모르는 밀림 속을 살아가야 한다. 연약한 아기 사자가 스스로 먹이를 구하고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처럼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해야 한다. 직관적으로 절벽을 뛰어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누구에게 물을 것이며, 누가 답을 줄 것인가.
우리는 아이들의 선택에 너무 많이 간섭한다. 아이들이 위험에 노출될까 봐 지나치게 보호한다. 관심이 아닌 통제, 이해가 아닌 참견 속에서 아이들은 성장하지 못한다. 아이들의 결정 장애는 부모의 지나친 참견 탓이다. 성인이 되어도 자립을 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아이들은 선택의 순간마다 물어온다. 스스로 선택하는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선택할 때마다 부모의 참견이 있었기에 선택능력은 퇴화하고 말았다. 대학의 문 앞에 세워놓고 등 떠밀려 입학한다. 이후 어떤 동아리를 들어야 하는지, 어떤 친구를 만나야 하는지, 졸업하면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는지....... 모든 게 선택이다. 그런데 그 선택에는 스스로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실마리를 찾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빠져 있다.
우리는 언제나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내 삶이기에 누구에게 맡길 수 없는 게 선택이다. 돌아보면 행복한 선택 보다 어렵고 힘든 선택이 더 많았다. 잘못된 선택으로 삶의 방향은 엉뚱한 곳으로 치닫거나, 거꾸로 흘러가기 일쑤였다. 순간순간 감당키 어려운 괴로움으로 눈물 젖던 밤들이었다. 세상 가장 괴로운 삶을 살아가는 몸부림이었다. 그런 날에는 누군가에게 내 삶을 맡겨버리고 싶었다. 전지적 능력자에게 모든 걸 던지고, 누군가의 참견 뒤에 숨고 싶었다.
흔히 참견을 ‘내 인생에 참견 마.’라든가, ‘내 일에 따따부따 하지 마.’ 등 부정적으로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내가 어찌 세상사를 전부 알 수 있는가. 누군가의 진정어린 참견을 통해 실패하지 않을 수 있고, 실패한 후에도 난관을 뚫고 나올 수 있지 않겠는가. 오롯이 내 몸으로 부딪히고, 내 자신의 선택으로 답을 얻어야 한다면 삶은 구렁텅이의 연속이 될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자신이 주체가 된 1인칭 주인공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위해 부모는 전지적 ‘참견’ 시점으로만 간섭해야 한다. 아이가 1인칭 주인공인 무대를 연출할 수 있을 때까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부모의 참견은 지혜로워야 한다. 참견의 시점에서 결국 선택의 몫은 아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자칫하면 아이의 삶 속으로 뛰어드는 잘못된 참견을 초래한다. 마치 소설 속 주인공들의 생각과 운명을 꿰뚫고 있는 전지적 작가인 양 아이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려 하지 말자. 아이들의 삶을 통째로 무대 위에 올려놓고, 연출하려 들면 그 무대는 성공할 수 없다.
3인칭 관찰자와 전지적 작가 시점 사이에 ‘전지적 참견 시점’이 있다. 부모는 아이 보다 더욱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실패하더라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약간의 참견만 있으면 그만이다. 깊숙하게 아이의 삶을 파고들지 않도록 적당히 긴장해야 한다. 내가 만족하는 삶이 아니라 아이들이 행복한 삶을 살아갈 때, 그 작품은 아름다운 결말에 이르기 때문이다.
첫댓글 2018년도에 안팎으로 많이 수고하셨네요... 얼마 남지 않은 연말 잘 마무리하시고 새해에도 변함없는 열정을 기대하겠습니다. 화이팅~~
감사합니다. 제주에 계신가요? 건강하시고 행복한 새해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이가 제 힘으로 설 때까지 부모의 참견 시점이 중요하긴 합니다.
참 잘했어요.
나도 애 때문에 집사람과 자주 티격태격하는데 나는 그냥 내버려둬라 주의인데
집사람은 애가 23살인데 아직도 잔소리가 끊이지 않아요.
스스로 찾지 않은 해답은 쓸데가 없지요.
요즘 부모들이 아이들을 약하게 만드는 장본인이지요.
냉철한 행간에 사랑이 듬뿍 담겨있군요... 바람직한 자녀교육관이십니다...
우리 문봄에 대해서도 전지적 참견시점으로 접근하면 문봄이 무럭무럭 커겠죠...
ㅎㅎㅎ 알겠습니다. 전지적 참견 시점으로...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부모의 역할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부모들이 세상에는 참 많이 있습니다. 제가 교직에 있을 때, 그런 부모들이 자식의 장래를 망치고 바보로 만드는 일을 자식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태연자약하게 나서서 하는 경우를 수없이 많이 목격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결정 장애지요. 선생님들도 보다 못해 결국 '엄마한테 물어 보고 와.' 하신다니...
소설을 쓰다보면 또한 어려운것이 시점입ㆍ니다ㅡ어느선에서 주인공을 조정해야하는지 늘 고민이지요 ㆍ하물며 자식은 경계선을 긋기가 더 어렵겠지요ㅡ좋은 어머니가 계시니 다 잘될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군요. 소설 속의 인물도 내맘대로 못하거늘...
모든 결정을 부모가 하다보면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결정장애가 되더라구요. 우리 아이들이 그랬어요.
그거 고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구요.
선택은 본인이 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지요.
우리 세대에는 대부분 그랬지만.
아이들 교육에 정답은 없지요.
전부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둘 수도 없고, 다 알아서 해줄 수도 없고..
전지적 참견이란 게 가능할까요.
실패하면서 배우는 거겠죠. ㅎㅎ
저는
내 자신이 게을러서인지
너무나 그냥 내버려 뒀어요~
참견하는것도 부지런함이 필요하더군요
수고 많으셨어요
이런저런 참견들이 아이들을 키웠을테죠
그냥 자라는 아이들이 있을라구요 ㅎ
수고하셨어요 ^^
내가 자식일때, 내 부모를 대했던
나와,
내가 부모일때 내 자식을 대하는 나.
어려운 문제임에는 누구나 다
동감하겠지만,
그럼에도
부모는 부모이기에....
내가 지금에 와서
엄마, 아버지를 미워하지않듯이,
내 자식도 부모를 미워하지않을
먼훗날이 있었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깊은생각을 하게하는
감사의 글입니다.
부모마음이야 한결 같지요.
지금 당장은 서운해도,
그 마음을 알게 되는 날 오기 마련이지요.
너무 늦지 않으면 좋겠지만,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자식 농사라는 말.
절감 통감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