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열전]
<20>용맹한 무골 가문의 김시민 장군
활 쏘는 족족 명중… 진주성 지킨 ‘향토의 신궁’
1차 진주성 싸움 2만 왜군 쳐들어와,
3800명 군대로 철통 수비하며 격퇴,필사 항전 후 젊은 나이에 세상 등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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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으로 임진왜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김시민(金時敏·1554~1592)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면오(勉吾), 시호는 충무(忠武)로 이순신 장군과 같다. 고려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며 지평(持平) 김충갑(金忠甲)의 셋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체구가 장대
김시민이 천안 지역에 남긴 많은 일화 중 두 가지만 소개해 본다.
그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총명하고 체구가 장대했다고 전한다. 여덟 살 때 친구들과 길가에서 병정놀이할 때다. 때마침 원님 행차가 있었는데 수행원이 길을 비키라고 호령하자 김시민은 “아무리 고을 원님이라 할지라도 진중을 함부로 통과할 수는 없다”라며 늠름한 기상을 보였다. 이를 지켜보던 고을 원님이 김시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큰 재목이구나!” 하면서 도리어 길을 비켜 지나갔다고 한다.
아홉 살 때의 일이다. 백전마을(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상백마을) 입구에는 백전천(지금의 병천천)이 흘렀다. 백전천 가에는 물에 잠긴 바위가 있고, 그 아래 큰 굴이 하나 있었다. 굴속에는 큰 이무기가 살았는데, 수시로 나타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가축에게 해를 끼쳤다. 책에 보니 뱀은 뽕나무 활과 쑥대 화살로 잡는다는 글이 있었다. 김시민은 당장 동네 아이들을 모아 뽕나무 활과 쑥대 화살을 들고 백전천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동네 아이들을 마을 입구의 거북바위(龜岩) 위에 올려세워서 그림자로 이무기를 유인했다. 동네 아이 중 하나를 느티나무에 올려보내 물속에 아이 그림자가 비치게 해 이무기를 유인했다고도 전한다. 이무기가 모습을 드러내자 김시민은 뽕나무 활에 쑥대 화살을 얹어 내리 일곱 발을 명중시켜 이무기를 잡았다. 이때 이무기의 피가 며칠간 백전천을 붉게 물들였다고 한다.
지금도 백전마을 입구에는 큰 느티나무와 거북바위가 있는데 이곳이 활로 뱀을 쏘아 맞힌 사사처(射蛇處)라고 전해 내려온다.
김시민은 1578년에 무과에 급제해 군기시(軍器寺·병기의 제조 등을 관장한 관청)에 들어가면서 벼슬길에 들게 됐다.
1591년에 진주판관이 됐는데 처음에 그의 숙부인 관찰사 김제갑(金悌甲)이 일찍이 진주를 뛰어나게 잘 다스렸기에 진주 사람들은 “이분은 김제갑의 조카다” 하며 모두 기뻐했다. 김시민은 다스림에 이장(弛張)이 적당해 덕이 베풀어지고 위엄도 나타났다. 이장이란 예기(禮記)에 나오는 것으로 “백성을 긴장시켜 일만 시키고 늦춰주지 않거나, 반대로 풀어만 주고 긴장하게 하지 않는다면 어떤 임금도 백성을 다스릴 수가 없다”라는 뜻이다.
무과에 급제, 1591년 진주판관 부임
사람은 적당한 긴장과 이완이 꼭 필요하다. 이 둘을 적절히 잘 조화시키는 것이 유능한 행정가다.
1592년 임진왜란 초기 진주성이 포위됐을 때 숙부 김제갑은 원주목사(原州牧使)였는데 왜군의 공격을 받고 영원산성에서 순절했다는 부고가 오자 진주목사였던 김시민은 크게 슬퍼했다. 이때 진주성 사람들이 모두 친척 상을 당한 듯 슬퍼하며 통곡했다. 왜적이 이를 염탐해 알고 말하기를, “주장(主將)이 인심을 이처럼 얻었으니 성을 칠 수 없다”고 했다.
그 후 같은 해 11월 8일(양력) 일본의 2만 대군이 진주성으로 쳐들어왔는데(제1차 진주성 싸움), 1부대는 마재를 넘어오고, 2부대는 불천을 넘어 들어오고, 3부대는 진양을 무찌르고 들어왔다. 왜군이 성을 둘러싸고 포위공격을 감행하자 김시민은 관내의 모든 백성을 성으로 불러들이고 여자는 남장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조직된 38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성을 철통같이 지키며 격전을 벌여 끝내 왜군을 물리쳐 퇴각시켰다. 11월 12일 마지막 날 전투에서 김시민은 격렬한 접전 도중 유탄에 맞고 의식을 잃었지만, 이광악이 지휘권을 이어받아 전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필사적으로 항전해 진주성을 지킨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은 11월 21일(음력 10월 18일) 조용히 눈을 감는다. 향년 39세였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과 영의정에 각각 봉해졌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됐다.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에 제향됐다.
양옆에서 화살 공급할 정도로 활 잘 쏴
훗날 김시민의 조카 김유(金維)가 진주를 지나다가 초가에 묵었는데 연로한 주인이 물어서 김시민의 조카임을 밝히자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 그리고 소를 잡고 머무르게 하고 말하기를, “김 공의 덕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며 자신은 지인(知印·지방관의 관인을 맡아 보관·날인하는 일을 하던 고을 벼슬아치)으로 일찍이 공을 가까이서 모셨다며, 그때의 일을 대강 전했다.
김시민은 활을 잘 쏘아서 싸움에 임하면 지인이 양옆에 서서 화살을 공급하게 해도 오히려 부족했고 오래 쏘아 무지(拇指·엄지손가락)의 힘이 떨어지면 식지(食指·집게손가락), 장지(長指·가운뎃손가락)로 이어서 쏘아 세 손가락이 다 병나면 쏘지 못했다 했다.
<박희 한국문인협회 전통문학위원장>
추억의 영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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