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경(心經)』을 편찬한 사람은 송나라의 서산(西山) 진덕수(眞德秀·1178~1235)였는데 주자(朱子 1130~1200)의 고제(高弟)로서 마음의 훈련에 관한 책을 만들었다. 사서(四書)와 삼경(三經)의 경구, 그리고 북송 유학자들과 스승 주자의 잠명(箴銘) 가운데 37조항을 뽑고 간략한 보충과 해설들을 덧붙였다. 명나라 초기의 정민정(程敏政)이 이들 주석이 너무 소략하고 잡박하다 생각하여 대폭 보완하여 『심경부주(心經附註)』를 간행했는데 이 확장본이 조선에 유통되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먼저 이 책을 좋아하여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에 비견하니, 그의 문인(門人)들 가운데 읽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정민정이 지은 『심경부주』서문(동양고전종합DB 역문)은 다음과 같다.
西山先生 眞文忠公(眞德秀)이 일찍이 聖賢의 格言을 뽑아 《心經》 한 편을 만들면서 ‘危微精一(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16글자를 앞에 놓고 子朱子(주자)의 〈尊德性齋銘〉으로 끝마쳤으니, 나는 공경히 이것을 욀 때마다 엄숙하여 上帝가 下降한 듯하고 聖師가 눈앞에 계신 듯하였다. 그러나 그 註 가운데에 《西山讀書記》라고 칭하였으나 모든 程朱(정자와 주자) 大儒들이 열어 보여주고 간절히 경계한 말씀은 대부분 이 卷에 들어 있지 않은 점이 의심스러우니, 생각하건대 이 《心經》은 본래 先生에게서 나왔으나 註는 後人들이 뒤섞어 넣었기 때문인가 보다. 서재에 거처하는 여가에 삼가 이것을 參考하여 校正하고 또 그 아래에 註를 붙이고는 그 머리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아! 사람이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어서 三才(才는 才質과 才能을 겸하여 말한 것으로, 곧 天·地·人을 가리킴)에 참여되어 만 가지 造化를 낼 수 있는 것은 本心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다만 한번 생각하는 잠깐 사이에 〈마음을〉 잡아 보존하고 놓아 버리며 얻고 잃어서 聖人과 狂人, 舜임금과 盜蹠(도척)이 여기에서 나누어지니, 두려워할 만함이 이와 같다. 옛사람은 이 때문에 本原을 涵養(물건을 물속에 담가서 기르는 것과 같으니, 의리 가운데에 침잠하여 깊이 완미하고 충분히 기르는 것)하는 계책이 지극하여 감히 거문고와 비파를 거두지 않고 左右에 경계하는 글을 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體가 확립되고 用이 넓어지며 드러남과 은미함이 두 가지가 되지 않게 하여 聖人을 바라고 하늘을 바라는 지극한 공부에 이르렀으니, 바로 이 때문이다.
性理學이 밝지 못하므로 사람들의 마음이 빠져서 性命의 올바름을 귀와 눈의 욕망에 맡겨두고, 입과 혀로만 理致를 말하고 있으니, 이것이 선생이 깊이 슬퍼하여 《心經》을 지으신 이유이다. 그렇다면 배우는 자가 어디에 힘을 쓴 뒤에야 사람이라는 이름에 욕됨이 없겠는가. 일찍이 반복하여 생각해서 程子의 말씀을 얻었으니, 말씀하기를 ‘天德과 王道는 그 요점이 다만 謹篤(근독)에 있다’ 하였고, 또 말씀하기를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敬을 가지고 마음을 곧게 하여 涵養하여야 하니, 마음을 곧게 하는 것이 根本이다’ 하였고, 朱子 또한 말씀하기를 ‘程先生이 後學들에게 가장 功이 있는 것은 敬이라는 한 글자이다. 敬은 聖學의 始와 終의 요점이다’ 하였으니, 이 《心經》에서 가르친 것은 敬 한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말이 간략하면서도 뜻이 정밀하고 그 공부가 쉬우면서도 효과가 넓으니, 진실로 이른바 ‘냇물을 막는 砥柱山이요 남쪽을 가리키는 수레요 어둠을 밝히는 거울’이란 것이다. 그리하여 이 道에 크게 功이 있어서 造次(짧은 시간)와 顚沛(전패.엎어지고 자빠짐)에도 소홀히 할 수 없다.
晩生末學(늦게 태어나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못해 학식이 부족함)이 무엇을 알겠는가마는 곧 손수 기록하여 책을 완성해서 同志들에게 告하되 敬을 말한 내용을 특별히 상세하게 하였으니, 어찌 감히 이것을 가지고 先生의 책보다 더 낫기를 바라겠는가. 聖經賢傳(성현이 남긴 글)의 가운데에 마음을 두어서 몸을 檢束하여 욕심을 막고 익숙히 반복하는 터전으로 삼기를 꾀할 뿐이다. 弘治 5년(1492) 壬子 7월 보름에 後學 新安 程敏政은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