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가 서역의 변경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조치로 당태종은 홍화공주를 토욕혼왕 모용약갈발(慕容諾曷鉢)에게 시집보내 안정화시켰다. 그의 묘가 甘肅省 武威縣 祁連鎭에서 발굴되었다.
현경(顯慶) 3년(658), 금앙(金盎), 금파라(金頗羅) [주001]
金頗羅: 『新唐書』 「南蠻傳」에 의하면, 南詔의 관료가 이것을 徽章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호랑이 가죽으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등을 진헌하고 다시 구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욕혼이 [당에] 내부하자 녹동찬이 원망하고 노하여 정예병을 거느리고 토욕혼을 공격하니 토욕혼의 대신 소화귀(素和貴) [주002]
素和貴: 소화귀는 원래 토욕혼의 대신이었다. 641년 慕容諾曷鉢 부락의 丞相 宣王이 반란을 일으키고 토번과 내통했다. 얼마 후 慕容諾曷鉢은 弘化公主와 함께 청해호 주변의 영토를 버리고 당의 변경으로 옮겨오게 되는데, 素和貴는 아마도 이러한 과정에서 토번에 귀부한 토욕혼의 장수인 것으로 보인다.
가 토번으로 달아나 토욕혼의 허실을 알려주었으므로 토번은 능히 그 나라를 격파할 수 있었다. 모용낙갈발(慕容諾曷鉢)과 홍화공주(弘化公主)가 잔여 부락을 이끌고 양주(涼州) [주003]로 달아났다
涼州: 甘肅省 武威縣.
慕容諾曷鉢이 내란과 唐의 공략으로 당에 귀부하자 태종은 그를 河源郡王에 봉하고, 烏地也拔勒豆可汗이라는 칭호를 수여하였다. 640년 慕容諾曷鉢이 청혼하여 弘化公主를 처로 삼게 했다. 이듬해 641년 慕容諾曷鉢 부락의 丞相 宣王이 山神에 제사지낸다고 하면서 병사를 일으켜 공주를 습격하고자 하였고, 토번과 내통하는 등 토욕혼 내부가 매우 혼란했다. 이에 당은 鄯州刺史 杜鳳舉와 威信王이 나서 丞相 宣王을 제거하고 이로써 토욕혼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황상이 조를 내려 양주도독(涼州都督) 정인태(鄭仁泰)를 청해도(靑海道)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으로 삼아 장군(將軍) 독고경운(獨孤卿雲) 등을 거느리고 양(涼)·선(鄯)주 [주005]
鄯州: 靑海省 西寧市.
에 주둔하게 하고, 좌무후대장군(左武候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안집대사(安集大使)로 삼아 여러 장수를 총지휘하여 변란을 평정하게 했다. 토번이 논중종(論仲琮) [주006]
論仲琮: 뢴충상(blon cung bzang)을 음차한 것이다.
을 사신으로 삼아 입조하게 하여, 토욕혼의 죄를 고하니 황제가 사자를 보내 꾸짖었다. 아울러 사자를 보내 토욕혼과 원한을 풀 것을 요구하자 [토번은] 유목지로 적수(赤水) [주007]
赤水: 靑海省 西寧市 서남 지역에 토욕혼이 건설했던 赤水城이 있었다. 대개 그 인근 지역인 것으로 보이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의 땅을 달라했는데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녹동찬이 죽었다.
묘주는 다음과 같다.
(주)慕容諾曷鉢이 내란과 唐의 공략으로 당에 귀부하자 태종은 그를 河源郡王에 봉하고, 烏地也拔勒豆可汗이라는 칭호를 수여하였다. 640년 慕容諾曷鉢이 청혼하여 弘化公主를 처로 삼게 했다. 이듬해 641년 慕容諾曷鉢 부락의 丞相 宣王이 山神에 제사지낸다고 하면서 병사를 일으켜 공주를 습격하고자 하였고, 토번과 내통하는 등 토욕혼 내부가 매우 혼란했다. 이에 당은 鄯州刺史 杜鳳舉와 威信王이 나서 丞相 宣王을 제거하고 이로써 토욕혼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