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일
이돈형
내 기일을 안다면 그날은 혼술을 하겠다
이승의 내가 술을 따르고 저승의 내가 술을 받으며 어려운 걸음 하였다 무릎을 맞대겠다
내 잔도 네 잔도 아닌 술잔을 놓고 힘들다 말하고 견디라 말하겠다
마주앉게 된 오늘이 길일이라 너스레를 떨며 한 잔 더 드시라 권하고 두 얼굴이 불콰해지겠다
산 척도 죽은 척도 고단하니 산 내가 죽은 내가 되고 죽은 내가 산 내가 되는 일이나 해보자 하겠다
가까스로 만난 우리가 서로 모르는 게 많았다고 끌어안아보겠다
자정이 지났으니 온 김에 쉬었다 가라 이부자리를 봐두겠다
오늘은 첨잔이 순조로웠다 하겠다
말짱
가을국화가 피어난대 새겨들어야 할 말이 생겨나는 거겠지
익숙한 사람
익숙해서 더는 익숙해질 수 없는 사람
더는 익숙해질 수 없어 내가 나를 데리고 어딘가를 좀 걸었으면 싶은데
그 사람이 웃는다
피는 국화처럼 웃고 있어 나는 웃음을 거두는 수용소가 된다
수용은 백번 고함쳐도 단 한 번 수긍이 필요한 거라 했다 그 말에 수긍해버리고 나니
한 움큼 가을빛이 붕대에 감겨 있다 나도 곧 이방인이 될 수 있겠다
오늘이 생일인데
비가 온다면 일주일 동안 생일이 될 수 있을 텐데
익숙한 사람 앞에 서있는 것보다 오래 태어나는 일이 더 수월할 텐데
웃으며 썼던 반성은 다들 어디 가서 돌아오지 않는지
말짱
돌아오지 않는지
시작노트
흙을 모른다고 하면 흙은 서운할 것이다 흙을 안다고 하면 흙은 노怒할 것이다 내게서 흙냄새가 날 때 나는 있거나 말거나 할 것이다
2019『문학의 오늘』겨울호
채찍
몸에 갈겨쓴 생활의 기록들이 지워진 곳에서 피 냄새를 맡는다
자백은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라 끝까지 버텨야 하는 말이라 피 냄새를 동반한다
나에게 너는 왜 와 있니? 터치, 터치, 너 좀 빌려도 될까
아직 모른 체 해야 할 것들이 많다 저물어 흐르는 민낯 같은 그런 거
짝다리 짚고 흘러가려 했지만 쉽게 고이고 말았다 그러니 너 좀 빌려도 될까
죽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피의 가시에 찔릴 때면 웃어도 된다
목숨 건 일이란 게 알고 보면 식욕 때문이란 걸 깨닫는 순간 웃기는 일이 된다
생활은 걷잡을 수 없었으나 비굴할 수도 없었다
그때마다 어린것들, 낙원상가 한 귀퉁이 같은 것들, 순한 양 같은 것들, 밑도 끝도 없이 손바닥 안에서 노는 것들이 자백에 들었다
사랑해! 말해버리면 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는 내 어린것들
귀에 못 박힌 나는 그만 없었으면 해
내 자백에 너는 왜 와있니? 휘둘릴수록 한쪽이 찍혀나가도 웃기는 일을 즐기는 나였는지 모른다 한동안 금식이 필요한
막걸리를 사들고
비뇨기과를 갈 때마다 의사는 의자를 젖히며 전립선 비대를 말한다
탈모치료제로 전립선 약을 쓰는 경우도 있다는데 의사의 머리는 자꾸 벗겨지고
물이 고이면 썩게 되죠 일주일에 한번 이상은 사정을 하세요 사정을 말하는 의사의 말이 사정으로 들린다
한때는 꿈의 궁전에서 신물 나도록 사정을 해봤지만 지금은 사정만큼 힘든 일도 없다
통사정해도 통하지 않는 일이 수두룩해지고
사정의 순간마다 체위를 바꿔 봐도 그 끝은 언제나 어떻게 되겠지 였다
새 생명을 얻는 일은 다시 태어나는 일보다 어려웠다
지나간 것을 두고 다시 사정할까 싶었지만 그건 차후의 일, 약봉지를 들고 가다 배뇨를 위해 막걸리 두병을 샀다
봉지 속 덜렁거림은 사정을 알 리 없는 순한 소리였다
2019『시와 문화』겨울호
청소역靑所驛
청소靑所에 머문다는 것은 내가 보려는 미지의 처마 끝에 머무는 거다
나는 누군가 꽂아놓은 깃발처럼 이를 악물었지만 끝을 향해 나아가는 투사의 깃발은 될 수 없었다
무재해라 쓰인 깃발이 수신호처럼 이전 역을 향해 펄럭이고 나는 어린 마음과 늙은 마음을 달래보지만 낱알처럼 흩어졌다
가려는 것도 오려는 것도 아닌 혼자의 마중은 잠시 멈춤
무궁화호는 익산을 떠나 코레일이라 쓰인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보며 오고 있을 것이다
가을빛이 선로에 부딪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흡사 고요의 심장을 헌정하는 신의 가늘고 긴 손가락처럼
기차는 아장아장 올 것이다 간이역마다 덜컹거리는 심장을 내려놓거나 무료한 역사驛舍를 툭툭 건드리며
청소는 내 첫 울음의 처소, 쓸어내도 유적이 되어 작은 새들이 먼저 푸르게 지저귀기 시작하였다
기차가 가을빛을 뒤적이며 들어오고 있다 이 시는 곧 기차를 탈 것이다 들고 내릴 것이 없을 때까지
마음이 푹 썩어 청소靑所에 들 때까지
만화방
생활의 달인이 많고 쨍하고 해 뜰 날도 많지만
심심함의 달인이 되는 것은 오늘의 감옥을 탈출하는 일
우리는 전진하고 또 전진한다
어제의 주인공이 어제의 악당들을 물리쳐 오늘이 신물 나거나 텅 비어 낮잠 자기 좋지만
잠은 달인의 적
꿈 깬 자 오래도록 앉아있어라
심심함의 달인이 될수록 어제가 신기하거나 신神의 일 같아도
오늘에 할 일은 오늘의 악당을 물리치는 일
누군가 한 악당을 물리치고 오늘을 탈옥하는 순간 나의 악당도 새 발의 피가 되어
우리는 줄줄이 탈옥한다
신神은 우리의 침 묻은 손아귀에 있었으나 신나는 심심함이었으나 악당은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불사조
내일의 악당은 내일 물리치러 간다
2019 『시현실』겨울호
변명
나를 지그시 밟은 말이 깍지 낀 손에서 빠져나간다
흘린 마음이 손으로 입술을 가렸으나 사실이 삐뚤어지고 한발 앞서간 말이 타올랐다
쉽게 떨어진 사과나 쉽게 뱉어진 예언엔 육신이 없다
어지러운 말의 뒤편에서 쓸쓸함을 차리게 되고 말 앞의 상처가 뜨거워지고 윤곽은 딸려 나와
기억에서 사라졌다는 말과 우리가 쉽게 사라지겠다는 말, 모두 옳다
신앙의 말처럼
말의 신앙처럼
그러나 덧붙인 한마디 말이 불에 탄 육신처럼 검게 그을렸다 이 또한 가난한 사실이고 둥글어지기 위한 자위다
깍지 낀 손이 풀릴 때까지 나는 말의 뒤편에서 말에 붙어있는 선악을 떼어내려 한다
어떤 말도 소멸하지 않아 가끔은 말 혼자 울부짖기도 한다
무리생활
순댓국집 뒷마당에 한 무리의 여자애들이 간밤의 남자친구를 까발리며 히히덕거린다
쭉쭉 빠는 담뱃불은 빨갛게 달아올라 양은솥의 순대는 숨을 죽인다
어젯밤엔 죽을 뻔, 글쎄 잠을 재워야지 더워 죽는 줄, 나중엔 배고파 죽는 줄, 아직 술이 덜 깼나봐
가래를 뱉는다
동조는 무리의 힘, 함께 가래를 뱉고
손선풍기로 어젯밤 죽을 뻔한 아이를 식혀주는 애는 바람에 휩쓸릴까 눈을 내리깔고
쭉쭉 웃지 못해 쪽쪽 담배를 빨고 있다
떼의 후미는 곁눈질할 겨를이 없고 눈치껏 성실 빼면 남는 게 없어
대빵이 식당으로 들어가자 한 애는 꽁초와 가래를 발로 비비고 나처럼 소심해 보이는 애는 동조의 힘만 믿고 따라 들어간다
다른 무리가 올 때까지 양은솥의 순대는 간밤을 떠올리며 굵어지다 무리 없이 잘려나가고
2019『세종문학』2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