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6 미천왕의 대활약
이렇게 등극한 미천왕은 백성들이 기대했던 대로 옛땅을 되찾는 일에 적극 나선다. 3년(302) 9월에는 왕이 3만 군사를 직접 거느리고 현도군을 정벌하여 아우르고 거의 해마다 요동성을 공격하여 모용외를 괴롭힌다. 그래서 ‘양서(梁書)’ 권54 고구려전에서는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다.
“진(晋)나라에서 영가(永嘉, 307∼312년)의 난이 일어나자 선비족인 모용외가 창려군(昌黎郡) 대극성(大棘城)에 도사리니 동진 원제(元帝, 317∼322년)가 평주(平州)자사를 제수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왕 을불리(乙弗利)가 자주 요동을 습격하였고 모용외는 제압할 수 없었다.”
현도를 손안에 넣은 미천왕은 한반도 안에 있는 낙랑과 대방을 몰아낼 계획을 세운다. 마침 미천왕 12년(311)에 이르러 진나라가 극도의 내분과 이민족의 반란에 시달리다가 6월에는 흉노족 유요(劉曜)에게 수도인 낙양이 함락돼 황제인 회제가 사로잡히고 비빈들이 능욕당하는 수치를 당하며 멸망의 문턱에서 허덕이게 되자, 미천왕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낙랑과 요동을 잇는 통로인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을 급습하여 빼앗아 버린다.
통로가 막히고 본국의 구원이 가망없게 된 낙랑과 대방은 고구려의 압박에 견딜 수 없어 드디어 미천왕 14년(313) 10월에 자국민 1000여 가구를 이끌고 요동지방으로 옮겨간다. 이로써 한 무제가 우리 땅에 한 4군을 설치한 지 421년 만에 이들을 한반도 밖으로 완전히 몰아내게 되었다.
이때 정황을 중국의 역사책인 ‘자치통감(資治通鑑)’ 권88 진 효민기(晋 孝愍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건흥(建興) 원년(313)에 요동사람 장통(張統)이 낙랑과 대방에 자리를 틀고 앉아 고구려왕 을불리와 서로 공격하였는데 해를 거듭해도 풀리지 않았다. 낙랑사람 왕준(王尊)이 장통을 설득하여 그 백성 1000여 가구를 거느리고 모용외에게 돌아가니 외는 그들을 위해 낙랑군을 설치하여 장통을 태수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參軍事)로 삼았다.”
요동 출신 장통이란 자가 낙랑과 대방을 지켜보려고 2년여 동안 미천왕과 겨뤄보다가 견딜 수 없게 되자 들어와 살던 중국인 1000여 가구를 이끌고 요동으로 달아나 모용외에게 빌붙어 그곳에 낙랑군을 옮겨 세웠다는 내용이다.
고구려에 의해 서안평이 막혔으므로 그들은 응당 바닷길로 달아났을 터이니 요동지방에 재건한 낙랑도 요동 반도의 갯가 어느 곳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미천왕은 낙랑이 다스리던 우리 강산을 모조리 되찾은 다음 그 이듬 해인 미천왕 15년(314) 9월에는 남쪽으로 대방이 다스리던 지역까지 진격하여 손안에 넣는다. 한반도 안에 있던 중국세력을 완전히 몰아낸 미천왕은 그 다음 해인 16년(315) 2월에 현도성을 다시 침공해 요동 땅을 되찾는 일에 앞장선다.
그러나 미천왕은 이 현도성 정벌에서 모용씨 세력을 소멸시키지 않는 한 요동지역 진출이 어렵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이를 외교적인 방법을 통해 해결하려 한다. 그래서 미천왕은 20년(319) 12월에 평주(平州)자사 최슬(崔瑟)을 통해 모용씨의 서북쪽에서 세력을 떨치던 선비족 우문(宇文)씨와 서남쪽을 점거하고 있던 선비족 단(段)씨를 움직여 모용외를 포위 공격해 들어간다.
위기에 몰린 모용외는 반간계(反間計; 연합세력을 반대로 이간질하는 계획)를 써서 우문씨 군사에게 음식을 보내고 최슬의 사자가 간밤에 도착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려서 고구려군이 의심을 내 철군하도록 한다. 그래서 미천왕은 모용씨를 섬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되고, 고구려와의 밀약이 탄로난 최슬은 도리없이 집안을 버려둔 채 10여기만을 이끌고 12월에 고구려로 망명하고 만다.
삼국의 연합군을 계략으로 물리친 모용외는 그 장자 모용황()을 시켜 우문부를 격파하고 그 소자 모용인(仁)에게는 요동을 지키게 한 다음 낙랑태수 장통을 시켜 고구려군을 하성(河城)에서 격파하여 고구려 장수 여노(如)를 비롯한 1000여명의 군사를 사로잡아 극성으로 돌아오게 한다. 이후 미천왕은 계속해서 모용씨가 차지하고 있는 요동성을 공략하였으나 모용한(翰)과 모용인 형제가 굳게 지켜내는 바람에 이를 차지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그래서 미천왕은 31년(330)에 갈()종 석륵(石勒, 319∼333년)이 하북성 양국(襄國)에서 후조(後趙)를 건국하여 모용씨를 압박하자 그와 동맹을 맺는다. 미천왕은 모용씨를 섬멸하기 위해 석륵에게 사신을 보내 건국을 축하하고 호시( 矢; 호나무로 만든 화살. 품질이 우수하며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북지방에서만 난다)를 선물하기도 했다.
아무튼 선비족의 영웅인 모용외는 소위 영가(永嘉)의 난이라고 부르는 서진(西晉) 말기의 대혼란을 틈타 대극성을 중심으로 요동을 장악하고 주변을 아울러 만주 일대를 호령하려 하였으나, 모용외를 능가하는 영웅인 미천왕에 의해 번번이 좌절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민족의 지배를 받던 낙랑과 대방 두 군을 되찾은 미천왕도 모용외의 동방 진출은 막았다 하나 모용외로 인해 서방진출의 길이 막혀 끝내 요동정벌을 이루지 못하고 만다. 미천왕은 이런 천추의 한을 남긴 채 미천왕 32년(331) 2월에 돌아가고, 모용외 역시 적수를 잃고 버틸 힘이 다하였던 듯 2년 뒤인 고국원왕 3년(333) 5월에 뒤따라 죽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