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이런 저런 일이 생긴다.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고.
이런 저런 일이 생기는 건 자칭 타칭 작가란 놈들도 마찬가지.
글발이 받을 때가 있고 바닥일 때가 있다.
문제는 이런 일보다 저런 일이 더 빈번하다는 것. 굴비 엮이듯 줄줄이 나올 때는 그야말로 한철, 보통은 오래된 변비처럼 꽉 막힌 때가 대부분이란 게 문제다.
낭만배달부의 2022년 가을이 유독 힘겨운 이유.
막혀도 너무 막혀버렸다는 데 있다. 통상 더운 여름 혀 빼문 똥개처럼 헐떡거리다가도 선선한 바람이 불면 막혔던 글발이 어느 정도나마 풀리게 마련인데 올 가을은 영 아니다. 비루먹은 시는커녕 글러먹은 잡글이나 두어 꼭지 끄적거렸을 뿐이다. 그렇다고 밥 빌어먹는 수단인 배달이 신통했느냐? 그것도 아니다. 이래저래 힘겨운 가을이다.
답답한 마음에 새벽 거리라도 쏘다녀본다.
낭만이 글러먹었으니 앙상한 나뭇가지, 구르는 낙엽을 봐도 도통 감흥이 없다.
막힌 속을 뚫어줄 마실 거리라도 있으려나... 들러본 편의점.
딱히 눈에 띄는 게 없어 평소대로 2+1 커피우유를 안고 계산대 앞에 섰는데 계산대 하단에 손-글씨로 적은 뭔가가 보인다. 詩다.
황동규 ‘즐거운 편지’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서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1938~) 시인은
<소나기> 황순원 작가의 장남으로 평남 숙천 출신. 월남 후 서울대 문리대에 입학해 문학도가 되었다. ‘즐거운 편지’는 고 3때 쓴 시고, 서정주 시인이 이 시와 함께 몇 편을 현대문학에 추천해 등단하게 된다.
‘즐거운 편지’는
2번이나 영화(<기쁜 우리 젊은 날> <편지>)에서 소개된 시. 최진실&박신양 주연으로 1997년 개봉된 <편지>가 흥행에 성공하자, 영화 속에서 낭송된 시도 일반에 많이 알려졌다.
김용택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김용택(1948~)은
전북 임실 출신으로 ‘섬진강 시인’이란 애칭이 붙은 시인. 시의 대중화를 위해 ‘섬진강 연작시’에서 보여주었던 意識을 기꺼이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 <시>엔 직접 출연하기도 했고, 드라마 <도깨비>에선 시집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를 공유가 홍보해주기도 했다.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변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 ‘섬진강 1’ 중에서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는
말랑한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번쯤 읇조려 보았을 시. (이곳저곳에 많이 소개되었지만) 아마도 1992년 ‘푸른숲’에서 발간한 시집 《그대 거침없는 사랑》에서 처음 공개되었을 것이다. 세간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창작가곡(오숙자/김주원)이나 시노래(최성수), 인디밴드의 러브-송(Joaband)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찌는 계절.
하지만 2022년 낭만배달부의 가을걷이는 망했다. 흉년이다.
그나마
새벽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말랑한 시 2편이,
후미진 뒷골목에서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임에도 시를 걸어놓은 편의점 주인장의 도타운 마음이
늙은 배달부의 을씨년스러운 늦가을을 위로해준다.
첫댓글 가을 낭만을 즐기시되 우울해지시지는 마셔요~
조금 전까진 울고 있었눈디, 첫댓글을 보고 곽 티슈를 잡았습니다. ^^
즐거운 편지가 고3때??.... 천재였네요.
천재가 아녀도 우리들 글 밭에 계신 낭만님을 스릉합니다~ ^^
화요일 새벽 1시. 남들 곤히 자고 있는 시간에 뭘 하냐고 묻진 마시길. 민망하잖아.
시간은 그저 흘려 보내는 것. 안달할 필요는 없지. 김치 없는 컵라면도 먹을 만한 것처럼. 그렇다고 청승은 사절!
철학은 불을 꺼야 비로소 시작되고, 가만히 누우면 반 평 침대가 무덤이 되지. 그렇게 반만 죽어야 해. 마지막 한 모금은 남기는 게 예의인 세상이니까.
이 시간에 울 소프님은 뭘 하고 계실까? 울 식구들은 좋은 꿈 꾸고 있을까? 울 방장은 언제부터 노랑머리였을까?
모두 스릉합니다~
@낭만배달부 ㅎ ㅎ ㅎ 🤔 나이에 어긋나게 풍성해지는 흰머리를 커버하고자 아예 🧑 가기로 한게. . 4년정도 된듯싶네요. 인쟈 시그니쳐가 되서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