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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충북 진천군 진천읍/백곡면 | |
높이 | 611m | |
문화재 | 진천 연곡리 석비(보물 404), 보탑사 삼층목탑 |
[고스락의 만뢰산 안내판과 헬기장]
만리산·만노산·아흘산이라고도 불린다. 주능선은 충청북도와 충청남도를 가르는 경계선이다. 정상에는
화가 최양호가 제작한 장승이 세워져 있다. 이 장승은 한자 뫼 산(山)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진천에서
가장 높은 산을 상징한다.
산행 제1코스는 백곡면 대문리 하수문에서 시작한다. 하수문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면 절골이 나오며 계곡
능선길을 따라 40분 정도 오르면 정상이다.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고, 1984년에 세운 삼각점이 박혀 있다.
시야에 연곡저수지와 몽각산(403m)이 전망된다. 하산은 정상에서 동쪽으로 난 주능선을 따라 540봉을 거
쳐 연곡리 쪽으로 내려가거나 남쪽 연곡지를 통하여 내려온다.
[등로 아래에 보탑사 3층목탑이 보인다.]
연곡리 보련마을 쪽 하산은 남쪽으로 정상의 헬기장을 가로지른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 내려서면 보련마을
에 도착하며 이곳에는 진천 연곡리 석비(보물 404)와 보탑사 삼층목탑이 볼거리이다. 계속 내려가면 연곡지
가 나온다. 연곡지는 겨울철 얼음낚시로 유명한 곳으로, 작은 길을 40분 정도 내려가면 김유신의 탄생지에
닿게 된다. 산행거리는 6.8㎞이고, 약 3시간 20분이 소요된다.
제2코스는 연곡리 보련마을이 산행기점이 된다. 마을 왼쪽으로 올라가면 천수탑과 기도터를 지나며 주능선
에서 오른쪽으로 따라가면 정상이다.
하산은 동북쪽으로 난 능선길을 따라 540봉을 거쳐 남동쪽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된다.
산행거린는 7.5㎞ 거리이며, 약 2시간 40분이 소요된다.
대중교통편은 청주에서 진천으로 가서 백곡행 버스로 갈아타고, 하수문 마을에서 하차한다.
승용차로는 진천읍에서 충남쪽 34번 국도를 따라 백곡면 방향으로 가다가 대문리 하수문 마을에 하차한다.
만뢰산 인근에는 숙박시설이 없으므로 진천읍으로 나가야 한다.
백곡면 대문리와 성대리는 마을 전체가 안개꽃 단지이다.
이곳에는 진천 연곡리 석비(보물 404) 등 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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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뢰산에는 김유신의 부친인 김서현 장군이 만노군의 태수로 부임 했을때 돌로 성을 쌓았다는 만뢰산성의
흔적이 남아 잇으며, 남동쪽 자락인 문봉리 계양마을은 김유신이 자라고 성장했다는 곳이다.
특히 계양마을 담안밭 뒷산인 태령산에는 김유신 장군의 태를 묻어둔 태실이 남아 있다.
[보탑사 3층 목탑]
보탑사의 목탑은 겉모습은 탑이지만 각층마다 법당인 다층집으로 황룡사 9층 목탑이래 1300년만에 사람이
오르내릴 수 있게 지어진 목탑이다.
각층은 부처님과 경전. 그리고 미륵불을 모시고 있는데 신라가 통일국가를 염원하여 황룡사 9층탑을 세웠듯
이 남북통일은 물론 옛 고구려 땅까지 통일하려는 염원을 담아지은 것이 바로 보탑사이다. 목수 신영훈 선생
은 쇠못하나 쓰지 않은 순수한 목탑으로서 42.7미터의 3층탑을 삼국시대 목탑 형식을 빌어 고스란히 재현했다.
흔히 절에는 불국토를 상징하는 여러 구조물들이 미혹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순서처럼 차례차례 펼쳐지기 마련
이다. 그러나 이 목탑은 한층의 사방에 각기 다른 편액이 붙어있다. 즉 한 건물에 법당 다섯과 대장전을 모두
포함한 샘이니 편액만도 열두 개나 붙어 있다. 1층 사방의 약사불전, 극락보전, 대웅보전, 적광보전의 편액은
이곳이 각 부처님을 모신 곳임을 알려주고 있으며, 2층 사방이 구장전, 수다라전, 법보전, 보장전, 편액은 경전
을 모시고 있음을. 3층 사방에 걸린 용화보전, 대자보전, 미륵보전, 도솔천전은 이곳이 미륵전임을 알리고 있다.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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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곡리 비선골은 정감록을 믿던 이들이 숨어들어 화전을 일구던 곳으로 고려시대에 세웠다는 석비가 있으며
당시 큰절이었다는 보탑사가 있어 등산객에게 좋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또 능선길이 부드러워 만뢰산 정상에
오르기가 수얼한 장점이 있고, 봄철이면 능선상에 진달래가 만발하여 봄철 산행지로 인기가 높다.
[보물 4040호 백비]
요사채 옆 비각에는 비석에 아무 글자도 새기지 않은 백비(白碑) (진천 연곡리 석비 보물 404호)
우리나라에 4, 5기 정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백비는 무자비(無字碑)라고도 한다.
연곡리 백비는 조형양식과 수법으로 보아 고려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말을 닮은 귀부의 머리는
전면과 좌우가 모두 깎여져 모습을 알 수 없지만 여의주를 문 용 아홉 마리가 뒤엉킨 이수는 사실적인
조각이 돋보이는 비석이다.
처음부터 글씨를 새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비석 귀부의 거북 등 표면이 박리현상으로
벗겨지고 있는데 한 꺼풀 벗겨진 곳에서도 표면과 같은 거북 등 무늬가 선명하게 드러나 사람들의 관심
을 끈다. [한국의 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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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비' 인근에 만뢰산 등로 들 날머리 이정목이 있다.
충북 진천군 백곡면 대문리 산2-9일원에 자리한 만뢰산이라는 이름은 고구려 시대의 지명을 본따 그대로 붙인 이름으로 추측된다. 옛지명으로는 금물노산, 만리산, 만노산, 이흘산이라고도 불리며 높이는 611m이다. 대 자연의 만물이 내는 온갖 소리라는 멋진 이름이다. 산 정상 일원에는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이 쌓았다는 옛성터 흔적이 남아 있는데 그 중앙이 되는 정상 꼭대기에는 지금은 메말라 버린 우물터가 있어 신라의 옛흔적을 볼 수 있다. 국립지리원 지도에는 만근산으로 잘못 표시되어 있다.
만뢰산은 유서 깊은 곳이다 . 동쪽 산줄기를 이어간 태령산 산정에는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김유신장군(595-673)의 태를 묻어둔 태실이 천사백년이 지난 오늘에도 잘 보존되고 있다 . 최근에 건립된 보탑사의 3층 목탑법당은 최대의 규모와 빼어난 목조 건축물로 길이 남을 것이다.
@▲ 경기 안성, 충남에서 충북 진천으로 넘어가는 엽돈재 (엽둔령,엽둔치)
금북정맥이 지나는 엽돈재. 이곳을 넘어서면 진천군 백곡면이다. 사람이 살기 좋다고 전해오는 고장 진천
生居鎭川 死後龍仁(생거진천 사후용인)에 대한 이야기 中
"옛날에 진천 어는 생원의 딸이 용인으로 시집을 가서 아들을 낳고 유복하게 살다가 남편이 일찍 죽어서 청상과부가 되었다. 그래서 어린 아들을 시집에 두고 진천으로 개가를 하여 아들을 낳고 남부럽지 않게 사는데, 용인에 두고 온 아들이 늘 마음에 걸린다. 한편 용인의 아들도 그동안 장성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게 소원이라 진천으로 찿아와서 여쭈니 어머니는 흐뭇하나 진천의 아들이 그럴 수는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러나 용인 아들은 그만두지 않고 진천의 원님에게 소장을 내어 해결해 달라고 하였다.
고을 원님은 고심 끝에 생전에는 진천에서 살다가 죽어서는 용인에서 제사 지내라는 "생거진천, 사거 용인" 이라는 판결을 내린다. 여기에서 '생거진천'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또한 일설로는 진천 지방은 예부터 평야가 넓고 비옥하여 가뭄의 해가 없어 농업경영이 순조로와 살기 좋은 곳이기에 '생거진천'이요. 용인은 산자수명하여 산세가 순후하여 사대부가 유명한 산소가 많다하여 '사거용인'이라 하였다고 한다.''
@3도의 경계지점 엽돈재 (葉屯峙) 혹은 협탄령(脇呑嶺)리라고도 부른다. 3도란 충남 천안시와 충북 진천시, 그리고 경기도 안성시를 말한다.
아주 먼 옛날 백곡면 엽전고개마루에서 주막을 하던 노랭이 박서방이 있었다. 박서방은 많은 돈을 벌어놓고 써 보지도 못하고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핏줄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어서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장례를 치러주었다. 장례를 끝낸 사람들은 박서방이 생전에 벌어 놓았던 돈을 찾기 위해 집 안팎을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그날부터 이 주막은 주인 없는 빈집으로 오고가는 길손의 휴식처가 되었는데, 해가 갈수록 돌보는 이가 없어 폐허로 변하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어느 여름 밤이었다. 고개를 넘던 길손이 날도 저물고 비가 와서 이 주막에서 쉬어 가려 들어갔는데 웬지 으시시하였다. 그러나 피곤에 지친 길손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다음날 인근 마을에 사는 농부가 밭에 가기 위해 고개를 넘다 주막에 짚신이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어 방문을 열었더니 사람이 죽어 있어서 놀라 소리 지르며 사람들을 불렀다. 모인 사람들은 무서워서 벌벌 떨기만 하였다. 그런데, 마을에서 담이 세기로 소문난 청년 한 사람이 방으로 들어가 시체를 끌어내어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다. 그 후로도 이곳 주막에 들기만 하면 어떤 사람이던지 아침에 시체가 되어 나오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주막에 귀신이 붙은 집이라 하여 날만 저물면 얼씬도 않게 되었다.
귀신이 붙었다는 소문이 돌자 담 세기로 이름난 청년이 자기 손으로 귀신을 잡겠다고 하며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그 주막으로 들어갔다. 주막에 들어서니 등골이 오싹하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 물에 빠진 사람처럼 젖었다. 그렇지만 청년은 정신을 바싹 차리고 불을 밝히고 커다란 몽둥이를 준비해 놓고 귀신이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자정이 되자 방안에는 바람이 일고 방문이 덜컹덜컹 흔들리기 시작하며, 이상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천장 속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청년은 마음을 가다듬고 "귀신이냐? 사람이냐? 어서 썩 나오지 못하겠느냐!" 하고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 잠시 발 소리가 멈추더니 천장 판자가 떨어지며 별안간 사람의 다리 하나가 축 늘어져 흔들리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청년은 벌떡 일어나 저도 모르게 발목을 잡고 힘껏 당겼다. 다리가 쑥 빠지는 순간 천장 속에서 '와르르' 하고 엽전꾸러미가 쏟아지는 것이었다. 어찌나 많았던지 방에 가득 쌓였다.
이튿날 날이 밝자 청년은 곧장 마을로 내려왔다. 청년을 본 마을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어찌된 영문이냐고 묻는데 청년은 태연하게 집으로 가서 커다란 자루를 가지고 다시 주막으로 올라가 엽전꾸러미를 자루에 담아 가지고 내려왔다.
이 소문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천장 속에 감춰 놓앗던 엽전들이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둔갑을 한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뜻하지 않은 횡재를 한 청년은 그 후로 이 고장에서 제일가는 부자로 살았다고 전한다. 당시에 주막이 있었다는 곳은 도로확장과 오랜 풍상 탓인지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길이 없다.
@만뢰산을 오르는 코스는 다양하다. 엽돈재에서 만뢰산~보탑사까지 능선길을 이어도 되고(약 11km) 엽돈재에서 내려와 개죽교를 건너 수문마을 하수문으로 오르는 코스도 있다. 또한 가족산행,자가 운전자들은 보탑사로 들어가 원점회기 산행(약 5km)을 한다.
개죽(介竹)마을
개죽마을을 개죽이 가죽골 대촌등 이름이 많다. 또 한자로도 여러가지 쓰인다. 介竹洞, 嘉竹洞, 佳竹洞 이라고 쓰는데 글자는 틀리지만 음은 같다 하겠다. 신라시대에 김유신 장군이 이 곳에서 군사 훈련을 할 당시 가죽으로 말 안장 갑옷 등을 만들었다 하여 가죽골이라 하였다는 설과 동리 뒷산에 조리 대나무가 많아서 개죽 또는 대골 등으로 일컬어 왔다. 마을 동편에 절터가 있어 지금도 깨진 기왓장이 나오고 있다. 40여호에 전주 이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대문리 (大門里)
수문(水門)마을
동네가 서쪽으로 만뢰산을 등지고 산계곡에 산재(散在) 위치하여 숨은골이라 하였다. 따라서 하수문, 절골, 궁수문, 쇠당이, 칡목, 새터, 대삼 등 자연마을이 골짜기마다 자리잡고 있다. 동리 입구에 돌벙거지가 있기에 돌벙거리가 숨어 있다고 하여 숨음이라 칭하였다 한다. 또한 옛날 군사 훈련을 할 당시 물을 가두었다가 이용하는 수문(水門) 이 있었다하여 수문이라고 한다는 설도 있다. 수문골 50여호 가구에 경주 김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한국의 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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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사이트 : 만뢰산 [산림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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