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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쌤의 힐링 노트] 마음을 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 마음은 그야말로 제멋대로 움직입니다. 문득 수십 년 전의 안 좋은 일이 떠올라, 불현듯 가슴이 두근거리고 기분이 안 좋아지기도 합니다. 낮에 있었던 모임에서 친구가 툭 던진 말이 기분 나빠 ‘그 사람이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했지?’라고 곱씹으며 씹으며 잠을 못 자는 분도 있습니다. 자식 걱정, 돈 걱정, 친구 걱정, 내 몸 걱정 등 미래에 대한 갖가지 걱정을 하느라 실제로 내 앞에 닥친 일은 제대로 하지 않기도 합니다. 머리가 생각으로 꽉 차 있을 때, 많은 분들이 “어떻게 하면 마음을 비울 수 있죠?”라든가, 마인드 컨트롤을 잘 할 방법을 구합니다. 하지만 정신건강의학과에는 안 좋은 기억을 잊어버리게 해 주는 약도 없고, 생각을 덜 할 수 있게 해주는 치료도 없기 때문에 저는 참 난처합니다. 물론, 노력을 해서 잊을 수 있거나 “생각하지 말자” 해서 되는 일이면 그보다 좋은 것도 없지만 그러기에는 마음속 상처가 깊고 삶이 참 무겁습니다.
뇌과학과 정신건강을 공부한 사람 입장에서 보면 생각을 내 마음대로 조절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첫째로 두뇌의 활성을 스스로 조절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원래 생각과 그에 따르는 몸의 반응은 자율신경, 즉 자기 마음대로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 식은땀을 나게 하고, 소화불량을 일으키는 신경을 통해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을 비우는 것은 수도하는 분들만 할 수 있는 고난도의 기술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안 좋은 생각에서 허덕여야 할까요? 그건 아닙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양은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평소 100만큼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10만큼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100만큼 생각하는 사람은 남을 더 배려하고, 일을 할 때도 꼼꼼하게 계획을 세워서 하는 등 섬세한 면이 있겠지만, 평소 걱정이 많고 예민해서 같은 난관에 부딪쳐도 머리가 아프도록 고민하고, 지나간 기억까지 꺼내 보며 힘들어 할 가능성이 높은데요. 이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타고난 기질을 버리고 10만큼만 생각하는 상태로 바뀌기는 어렵습니다. 방법은 90만큼을 다른 것으로 채워서 겨우 10만큼만 생각하는 상태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우리 뇌는 100 전부를 생각하는 데 씁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서 걷다 보면 생각만 100을 하던 우리 뇌는 80을 생각하는 데 쓰고, 15를 걷는 데 쓰고 5를 주위를 둘러보는 데 쓸 것입니다. 즉, 몸이 힘들면 앉거나 누워서 쉬는 것과 반대로, 뇌가 힘들면 걷고 음악을 듣고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등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하루 종일 가만히 누워만 있으면 당연히 몸도 처지고 안 좋은 기억이 많이 떠오르게 마련입니다. 저는 평신도라 기도하는 법을 가르칠 입장은 아니지만, 풀리지 않는 고민이 있을 때 “우리 애 이번에는 시험 붙게 해 주세요”, 또는 “남편이 술 안 마시고 일찍 들어오게 해 주세요”와 같이 내 고민이 묻어 있는 바람에 대해서만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되새김질과 걱정을 더 부풀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차라리 묵주기도나 성경 읽기 등을 통해 그 내용에 대해 묵상하거나 친구와 대화하듯이 하느님과 대화하는 게 마음 건강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내 욕심을 버리고 그 자리를 하느님께 내어 드리는 것도, 결국은 가만히 앉아 매번 결심만 한다고 쉽게 이루어지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말씀을 찾고, 그 의미를 이웃들과 나누는 행동이, 즉 뇌를 세상 시름에서 쉬게 해 주는 매일매일이 쌓여서 이룰 수 있는 관계가 아닐까 합니다.
생각은 억누를수록 더욱 떠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부터 눈을 감고, 분홍색 코끼리에 대해서 1분만 생각하지 말아 보세요. 아마도 평소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던 분홍색 코끼리가 계속 떠오를 것입니다. 내 삶에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본 적도 없는 분홍색 코끼리조차 ‘생각하지 말자’고 결심하기 시작하면 자꾸 떠오르는데, 내가 상처받은 일이나 눈앞에 닥친 걱정이 어떻게 억누른다고 사라질 수 있겠습니까.
생각을 줄이려는 시도가 잘 안 된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나쁜 생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좋은 생각, 말씀, 기도, 잠시라도 행복을 불러일으키는 활동,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을 통해 나쁜 생각이 있던 자리를 채워 버리자는 것입니다. 힘들 때는 왜 나는 생각이 많은 사람으로 태어났을까 한숨이 나오겠지만, 삶 전체를 돌아보면 생각이 많은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스스로에 대해서 뭘 못했다거나 앞으로도 잘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버리고 오늘에 충실하면서 우리 뇌, 우리 마음을 조금만 쉬게 해 주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하쌤의 힐링 노트] 감정의 격리, 불안의 전염에 대한 대책은 아닙니다
중동의 낙타에서 옮은 메르스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은 수백 명에 불과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감염되었습니다. 옛날에 비해 인간의 행동반경이 넓어지긴 했지만, 인터넷이나 SNS의 발달로 바이러스가 전염되는 속도보다 공포가 전염되는 속도가 더 빠른 것 같습니다. 물론 정부의 초기 대응, 소통의 부재가 불신을 낳았고, 불신이 불안을 더 키우기도 했을 것입니다. 정부에서는 괜찮다고 하는데 사태가 점점 확산되는 모습이나 편 가르기를 하는 모습, 전문가들을 존중하지 않는 모습이 세월호 때와 너무 비슷합니다. 재난의 성격은 달라도 재난에 대한 반응은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과도한 불안이 비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뱀에 물린 사람이 뱀을 또 만나면 처음보다 훨씬 더 놀라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뱀에 물린 것도 서러운데 “그러게 산에 왜 갔어?”라고 비난을 받거나, 상처 부위가 아물기도 전에 위로는커녕 엄살 좀 그만 피우라고 닥달한다면, 심리적인 트라우마를 쉽게 극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채로 시간이 흐르면 다음에는 나뭇가지를 봐도 뱀으로 오인하여 더 불안해집니다. 더 나아가 뱀과 비슷하게 생긴 것만 봐도 내 자신과 가족 등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애쓰게 됩니다. 누구나 맞은 자리를 또 맞으면 아프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메르스가 한번도 발생하지 않았던 지역에 살아도 늘 불안합니다.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막는 방법은 격리입니다. 격리는 오랜 역사를 가진 전염병 예방법입니다. 14세기 유럽에서는 흑사병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베네치아에 들른 배를 40일간 강제정박을 시키기도 했고, 우리나라에서도 한센병 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격리 치료소를 소록도에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격리를 통해 실제 전염병의 확산이 방지되기도 했지만, 남은 사람들의 공포가 줄어드는 효과도 보았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함께 생활하고 싶어 할뿐 아니라 자유를 원하기 때문에 격리를 당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힘들고 불안합니다. 격리가 강제일 때는 물론이고, 스스로 선택했다 하더라도 불안이나 공황발작까지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광장공포(agoraphobia)는 원래 넓은 광장 같은 곳에 가면 공포나 불안감이 생기고 동시에 식은땀이나 두근거림, 숨 막힘 등의 신체적 증상을 느끼는 것입니다. 요즘은 지하철이나 극장과 같이 사람이 많은 장소 또는 엘리베이터처럼 폐쇄된 곳에서 많이 생깁니다. 옛날과 지금의 모습은 달라도 공통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아프거나 힘들어도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고, 불이 나거나 사고가 생겨도 무사히 탈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병원 안에 격리된 사람들은 이러한 공포에 시달리게 됩니다. 메르스가 발생한 지역의 사람들은 물론 자신이 감염되는 것도 두렵지만 사회에서 격리되거나 피하는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해서도 더 두려움을 느낍니다. 격리병동은 물론 자가격리를 택한 사람도 광장공포를 겪는 경우는 흔하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 치료를 받아야할 정도로 발전하지는 않습니다. 심한 경우에만 공황발작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우울증을 겪을 확률도 높아집니다.
전염병에 감염된 사람들은 잠재적으로 남에게 병을 옮길 수 있는 사람이기 이전에 본인이 피해자입니다. 또한 손해를 감수하며 자가격리를 택한 분들은 용감한 분들입니다. 그분들에 대한 감사와 인정이 중요한데, 오히려 격리 대상이라고 하면 그 집 근처도 가지 않거나 그 가족마저도 피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메르스에 걸리기 싫고, 내 가족들을 지키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입니다. ‘나랑 내 새끼들만 괜찮으면 돼’라며 비극을 피할 궁리만 하는 것은 결국 감정을 격리하는 것입니다. 바이러스랑 맞서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남의 일처럼 여기는 이기적인 내 마음을 이겨내야 합니다. 어쩌면 팽목항이 저 멀리 진도에 있어 마음이 더 편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정의 격리는 당장에는 병이 되지 않지만, 결국에는 내 감정에 대해서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감정불능증(alexithymia)으로 빠지게 되며 사는 즐거움과 행복을 해치게 됩니다. 내가 목표로 하는 길만 빨리 걷는 것, 환경 보호에 대해 SNS에 글은 올리면서 내 쓰레기는 분리수거하지 않는 것, 메르스가 불안하다면서 손을 제대로 씻지 않는 것. 감정과 행동의 불일치 또한 감정의 격리의 일종입니다. 처음에는 격리당하는 쪽에서 광장공포와 같은 불안을 느끼지만, 반대쪽에도 마음의 후유증은 남습니다. 정부가 할 일과 감염 의심자가 할 일 말고 내가 지금 할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거창한 행동이나 주장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조용한 기다림도 힘이 될 수 있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눈처럼 하얗게 피부병을 앓은 미르얌이 7일간 격리되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격리 기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미르얌이 다 나은 다음에 함께 출발했습니다. 비록 약속의 땅을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은 7일이나 지체되었지만, 그 피해는 사람들에게 불안을 사라지게 한 효과보다 훨씬 적다는 말입니다. 타인의 고통이 혹여 자신에게 옮아 오지 않을까 몸을 사리는 우리에게 이 성경 이야기가 시사해주는 바가 사뭇 큽니다.
[하쌤의 힐링 노트] 인간의 뇌, 하느님께 중독될 수 있나요?
중독하면 아무래도 알코올 중독을 떠올리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술 좋아하는 사람 많은데, 단지 우리가 뭔가를 좋아한다고 중독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그냥 좋아하는 것과 중독에는 몇 가지 차이가 있는데요. 일단 내성이 생깁니다. 원래는 술 한 병으로 만족감을 느끼던 사람이, 나중에는 한 병으로 전혀 만족하지 못하게 되어 점점 늘어납니다. 그리고 양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고요. 없으면 못산다는 것도 중독의 특성인데, 술을 마시지 않는 상태에서 술을 갈망하고 불안과 같은 금단증상을 느낍니다. 술 이외에 다른 곳에서 기쁨이나 의미를 찾기 어렵고, 직업이나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도 지장을 줍니다. 중독은 마음에서 시작해도 결국에는 뇌의 기능에 문제가 생기는 등 몸의 변화로 끝납니다.
원래는 알코올이나 마약 등 어떤 걸 마시거나 섭취하는 경우에 ‘중독’이라는 말이 쓰였습니다. 하지만 행위에 중독되는 것만으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도박과 인터넷 게임인데요. 처음에 카지노에서 천만원을 따서 기뻤던 사람은 그 다음에는 천만원을 따도 기쁘지가 않고, 더 큰 돈을 따야 그만큼의 기쁨이 느껴집니다. 뇌가 그렇게 요구합니다. 돈을 정해놓고 잃으면 거기서 그만 두어야 하는데 멈추지 못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빌립니다. 그러다 보면 거짓말도 늘게 되고요. 돈을 땄을 때의 쾌감이 그렇게 생생하고 짜릿한데 도무지 다른 곳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을까요? 그래서 도박 외에는 다른 것을 하기 어렵고 안하는 동안에는 늘 초조합니다. 술이나 약물 같은 물질 섭취가 없더라도 특정 행동에 중독되면 마치 오랜 시간 술이나 마약을 했을 때와 같은 변화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행동에 중독되는 경우는 도박중독과 인터넷 게임 중독이 대표적이고, 인터넷을 통해서 손쉽게 도박이 가능하기에 요즘은 두 가지가 함께 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최근에는 스마트폰 중독도 심각해서 치료가 필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운동중독이나 성중독, 쇼핑중독 등도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스트레스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한 충동적인 행동이 나중에는 결국 습관이 됩니다. 일상 생활 속의 내 자신이 오히려 어색해지는 것입니다.
알코올, 마약, 수면제, 음식과 같은 물질중독이나 도박, 인터넷, 게임, 쇼핑, 운동중독과 같은 행위 중독의 공통점은 바로 ‘즉각적인 보상’입니다. 자녀가 공부에 중독되면 좋겠다고 하는 어머니들을 뵙게 되는데요. 공부에는 즉각적인 보상으로 인한 짜릿한 쾌감이 없기 때문에 그건 어렵습니다. 즉 공부에 중독이 되려면 지금 공부를 1시간쯤 엄청나게 열심히 하면 바로 몇 시간 뒤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어야 합니다. 몇 년씩 참고, 견디고, 열심히 해서, 비로소 성취감을 얻기 때문에 중독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삶에서 이뤄야 하는 정말 가치 있는 변화는 대부분 인내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였다가 또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사회는 눈 앞에 보이는 편안함에 중독되기 쉽게 되어 있습니다. 즉각적으로 나에게 돌아오는 금전적 혜택이나 눈 앞에 보이는 편리함만 좇고 본질적인 해결을 외면한다면 사실 중독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삶입니다.
종교에도 중독이 될 수 있냐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답은 같습니다. 만약 종교를 통해 세속적이고 즉각적인 보상을 얻는다면 당연히 중독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종교를 통해 좋은 지위를 얻고, 금전적 이득을 얻거나 단체에서 주도권을 잡는 등의 목적에는 역시나 내성도 있고 금단도 있습니다. 저도 하느님을 왜 믿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아직도 답을 찾고 있지만, 우리가 눈 앞의 부귀영화와 같은 즉각적 보상을 얻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느님은 외아들이 고난의 길을 걷도록 하셨으니, 저희에게도 늘 행운과 즐거움만을 가져다 주시는 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게임 속에서 내가 왕이 될 수 있고, 홈쇼핑 결제버튼을 누르면 물건이 오고, 폭탄주를 마시며 남을 험담하면 곧바로 쾌락을 얻을 수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 인간의 뇌가 하느님과 고요한 관계에 중독되기는 물론 어렵겠지요. 양념치킨을 먹다가 첨가물 없는 담백한 두부를 먹는 것이 어렵고 재미없겠지만, 오히려 그래서 우리는 그 밋밋하고 한결같은 관계를 위해서 늘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쌤의 힐링 노트] 행복에 대한 고정관념
아무리 하느님 말씀을 접하며 산다고 해도 우리는 행복에 대해 어느 정도 고정관념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만 행복할 것이라고 은연 중에 생각합니다.
가장 널리 퍼져있는 고정관념은 부유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사실 경제적 수준과 행복이 아예 관련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주거 환경이 안정되지 않아 1년에 몇 번씩 이사를 해야 한다거나, 끼니를 거르는 상황, 일은 했는데 급여가 자주 밀리거나 해고되기 쉬운 직장을 다니는 경우에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조차 행복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심지어 교육 수준도 행복하고 관련이 있습니다. 그냥 제목만 보고 지나치면 자녀에게 잔소리를 한번 더 하거나 학원 하나 더 등록하기 쉬울 얘기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얼마나 좋은 대학을 가느냐에 따른 차이가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학교에 가지 못하거나 글을 못 배우면 삶의 만족도는 확실히 떨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문맹인 경우 우울증도 많아집니다. 이런 똑같은 자료를 보고 ‘역시 돈이 최고다’라고 느끼시는 분도 있고, ‘결식아동이 있거나, 학교가 없는 마을에는 도움이 필요하겠구나’라고 느끼시는 분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도지를 읽는 정도의 수준을 갖춘 독자들께서 “돈이 많아야 행복하다.”라고 외칠 리야 없겠습니다만, 막상 돈 많은 사람들도 아픔과 걱정이 있고 속앓이를 한다는 이야기를 접하면서 은근히 안심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사실 경제적으로 더 풍족하면 더 행복할 것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기 때문에 부자의 불행과 가난한 이의 불행을 평등하게 바라보지 않는 것 아닐까요?
행복을 쉽게 느끼게 하는 조건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통계적으로는 신체가 건강할 경우, 정기적인 문화나 종교 활동을 지속할 경우, 배우자가 있는 경우, 16세 이전에 부모님이 모두 살아계셨을 경우 더 행복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확률이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또한 어느 정도 기준 이상일 때에는 사실 행복과 크게 관계 없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저런 것이 모두 갖춰졌음에도 불행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몸이 불편하거나 부모님을 잃었다고 불행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50년 이상 여러 인생을 추적하여 행복과 관련된 요소를 찾은 연구보고서인 『행복의 조건』에도 나오듯 20대에는 그렇게 불행해 보이던 사람이 50대에 행복을 찾기도 하며, 때로는 그 반대가 됩니다. 타고난 부분도 있겠지만 의지와 노력도 관여합니다. 엄청난 행운보다는 오랫동안의 규칙적인 생활이 더 도움이 되며, 꾸준히 운동이나 산책을 하는 것도 행복감을 느끼는데 도움이 됩니다. 집에서 은둔하며 단절된 삶을 사는 경우보다는 주변 사람들과 의미있는 관계를 지속할 경우가 좋다고 합니다. 저는 여기서 ‘의미있는 관계’라는 대목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거의 매일 모임과 약속이 있지만 거기서 내 속마음을 숨기고 핸드백이나 자녀를 자랑하는 자리로 여긴다면 혼자 고요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오히려 더 행복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 봅니다. 지금 행복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것 중에 또 하나는 바로 긍정적 사고입니다. 하지만 긍정적 사고에 대한 그릇된 이해가 만연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긍정적 사고는 ‘다 잘 될거야’ 또는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생각과는 전혀 다릅니다. 모든 문제를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고 긍정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사회적 문제 등을 비판한다고 부정적인 사람으로 몰고가는 것과 같습니다. 현재의 내 자신과 내가 처한 환경이 모두 괜찮다고 최면을 거는 것이 아니라, 약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어쩌면 더 중요합니다. 완성된 나를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약점은 인정하고 강점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 변화하는 과정을 걸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행복의 조건입니다.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이 조화를 이룰 때 더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쌤의 힐링 노트] 행복한 날에는 행복하게 지내라
우울증, 공황장애부터 조울증, 조현병까지 세상의 수많은 정신 건강 문제가 내 탓으로 인해 생기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나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마음이 더욱 피폐해질 수도 있습니다. 괴로움을 잊기 위해서 술이나 게임 또는 도박에 빠진다거나, 사람들과의 갈등이 두려워 모든 것을 그만두고 숨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약한 어린이나 사회적 약자에게 화풀이를 하거나 애꿎은 사람 탓으로 돌리는 일 같은 일탈 행동을 통해 스스로의 마음 건강을 더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도 훨씬 무서운 것이 바로 지난 일에 대해서 계속 되새김질 하는 것입니다. 물론 원해서 그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을 살고, 현재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요.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자신과 이웃에게 행하는 크고 작은 잘못에 대해서, 스스로 점검을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고해성사라는 좋은 제도가 있습니다. 자기 반성과 점검을 적절하게 한다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령 별일 아닌데 아이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심한 말을 했다면, ‘내가 왜 이랬지’라고 자책하기 보다는 그 과정을 되짚어봐야 합니다. 아이의 잘못이 심하지 않았음에도 시댁행사를 고민하느라 신경이 날카롭고 피곤하여 소리를 지르게 되었다는 원인 분석을 해야 합니다. 그와 함께 하루가 지났지만 아이에게 사과를 해야겠다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면 좋겠죠. 특히 당시의 감정(불안, 슬픔, 분노, 혐오 등)과 생각(나를 무시하는 것 같았다, 내가 초라해 보였다 등)을 구별해서 돌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감정’은 어쩔 수 없는 것이므로 스스로 인정을 하고 그걸 고치지 못하더라도 감정에 이름만 붙여도 도움이 됩니다. 그냥 짜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게 불안과 초조 때문인지 아니면 분노 때문인지 정확하게 알아 보는 것이죠. 그러나 ‘생각’의 경우 당시 생각의 내용이 잘못되거나 강도에 있어 과한 부분이 없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만약 내 생각이 피해의식으로 가득 찼다거나, 지금 돌아봐도 말이 안되는 비합리적인 것이라면 조금 더 나은 생각을 찾아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미 소리도 지르고 화도 내버려서 늦었다 할지라도 그게 늦은 게 아닙니다. 이번에 바꾸어 보게 되면 다음번에는 좀 더 합리적인 대안을 바탕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대한 끊임없는 되새김질로 힘든 사람들의 경우 단순히 내가 잘못한 일에 대해서 곱씹지 않습니다. 이상하게도 반복해서 곱씹는 일일수록 실제로는 자기 잘못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배우자가 외도를 했을 때 ‘내가 잘 했으면 저 사람이 외도를 안 했을 것이다.’라든가 ‘빨리 알아챌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못한 내가 바보다.’라는 생각으로 하루 종일을 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비난하면 반추(rumination)는 더욱 심해지죠. 배우자가 미묘한 변화가 있었는지 아닌지, 도대체 언제부터 그랬는지를 혼자 상상하고 자꾸 그려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어렵사리 1%라도 ‘내 책임’을 찾아내면, 그로 인해 계속 힘들어집니다. 저도 예전에 사기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사람이 너무 교묘하게 계획을 세워놓고 접근했습니다. 순식간에 속임수에 휘말렸고 그 분야에 지식이 없는 저로서는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꽤 오랜 시간을 저의 잘못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왜 그때 똑똑하게 처신하지 못했을까’, ‘그 때 그 사람에게 좀 더 잘 물어보았더라면 어땠을까’, ‘주변사람들과 의논했더라면 그 일이 생기지 않았을 걸’, 부질없는 가정을 반복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이 확대되어 제가 의사가 된 것부터 시작해서 결혼한 것까지 전부 잘못된 일처럼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배우자의 외도, 교통사고, 질병, 사랑하는 이의 죽음, 사고 같이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진짜 커다랗고 파괴적인 사건은 내 탓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반추의 무서움에 대한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만약 우울증에 걸린 두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앞날에 대해서 자꾸 걱정을 하고 불안해 합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자꾸 뒤를 돌아보면서 과거를 곱씹고 반복적으로 옛날 일만 떠올립니다. 그런데 후자와 같이 과거를 반추하는 사람이 오히려 우울증을 극복하기 어렵고 오랫동안 앓는다고 합니다. 다가올 미래에 대해 부정적으로 예측하는 것도 좋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앞날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죄책감이 더 강력하고 어두운 힘을 지니고 있나 봅니다.
뒤를 아예 돌아보지 않고 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내가 잘못한 일과 운이 없어 어긋난 안타까운 일을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은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자아(ego)와 그런 자아를 감시하는 초자아(superego)로 이루어집니다. 초자아는 CCTV와 같은 것이라서 잘못된 일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파악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초자아가 너무 강력하고 자아를 옭아매게 되면, 자아는 살아가는 게 힘들어집니다. 나쁜 일을 예방하는 CCTV 정도의 화질이면 충분하지, 최고 성능의 고화질 카메라와 같은 시각으로 자아를 감시할 필요는 없거든요. 털면 먼지 안 나는 사람 없지 않습니까? 우리의 과거에 대해서 모두 고화질 카메라로 들여다 본다면 내 잘못이 아닌 것까지도 몰아부쳐서 ‘나는 역시 못난 사람이야’라는 서글픈 결론에 이르는 것이죠. 이런 강력한 초자아는 어렸을 때 엄격한 집안 환경 등에서 서서히 생겨났고, 또 갑자기 바뀌기는 어려우므로 하루에 하나씩이라도 스스로를 칭찬하는 것으로 조금씩 상쇄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어쩌면 지난 날이란 누구에게나 슬픈 것입니다. 아름다웠던 과거는 다시 돌아갈 수 없어서 슬프고, 힘들었던 과거는 떠올릴 때마다 그 때의 아픔을 다시 경험하니까 또 힘듭니다. 하지만 영원한 하느님 나라에 아직 들어가지 못한 우리는 절대로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평등합니다. 바로 오늘에 충실한 것이 마음 건강에 가장 도움이 되는 삶의 자세가 아닐까 합니다.
“행복한 날에는 행복하게 지내라. 불행한 날에는, 이 또한 행복한 날처럼 하느님께서 만드셨음을 생각하여라.”(코헬 7,14).
[하쌤의 힐링 노트] 잠 못 이루는 그대에게
예수님은 항상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사람의 마음은 늘 깨어 있어야 하겠지만, 사람의 몸은 잠을 자야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매일같이 잘 자지 않으면 큰일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생존에 중요한 음식 섭취의 경우에도, 어떤 날은 너무 맛있게 먹고 소화도 잘 되는 날이 있는가 하면, 어떤 날은 입맛이 없기도 합니다. 잠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자는 날도 있고, 피곤한데도 잠이 잘 들지 않는 날도 있고, 중간에 자주 깨거나 유난히 꿈이 많은 날도 있습니다. 가끔 잠이 오지 않는 밤을 보내고 나면 몸이 괴롭긴 합니다. 어둠 속에서 누워서 말똥말똥 잠을 기다리는 것도 힘들고, 깊이 잠들지 못해 잔 것 같지도 않은 느낌이 듭니다. 그 상태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그 다음부터는 잠이 오지 않는 상태를 너무나 두려워하게 됩니다. 눕자마자 ‘오늘도 잠이 오지 않으면 어떡하지?’라고 걱정하게 되는 것이지요. TV에서 나오는 대로 잠자기 전에 따뜻한 우유도 마시고, 커피도 끊고, 체조까지 했는데 잠이 안 온다면 불면증에 대한 두려움은 점점 심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반드시 잘 자고 말겠다, 또는 몇 시간은 자야한다는 생각으로 인해 실제로 불면증이 계속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이들의 경우, 불을 끄고 자장가를 불러주는 등의 노력을 해서 일정한 시간에 잠을 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아이들의 경우 스스로 ‘나는 반드시 자고 말겠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어른들은 왜 다를까요? 스스로 잠에 집착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하거나 공부할 때 뭔가 주먹을 불끈 쥐는 심정으로 결심을 하면 약간 긴장이 되고 그로 인해 집중이 잘 되고 의욕이 생깁니다. 그런데 잠은 반대라서 그렇게 강하게 결심하고 집중하면 몸과 마음이 긴장되어서 잠을 쫓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너무 열심히 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야하는데 혹시 일어나지 못할까봐 긴장이 되어 오히려 잠이 안 오는 경험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그럴 때도 일찍 일어나기 위해서 빨리 잠들고 푹 자야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기에 오히려 잠이 오지 않는 것이죠.
다른 분들의 신앙생활을 간섭해서는 안되겠지만, 그래도 제가 하지 말라는 기도가 딱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잠 오게 해주세요”라는 기도입니다. 그러한 기도를 통해 잠에 대한 집착과 불안이 더 심해지기 때문입니다. 잠이 들지 않아 힘들다면 차라리 묵주기도를 하거나 약한 스탠드 불을 켜놓고 성경을 읽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잠이 오겠죠. 물론 불면증의 공포가 상당한 상태에서 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잠아 네가 오든지 말든지 네 마음대로 해라’, 라고 태도를 바꾼다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는 것은 저도 압니다. 그러나 잠이 무엇이라고 안 오면 어쩌겠습니까? 언젠가 오겠지요. 두부를 손에 꽉 쥐어버리면 부서져 버리는 것처럼, 잠을 자려는 넘치는 노력 이해가 됩니다. 누워서 30분 이상 잠이 오지 않을 경우, 누워서 잠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보다는 이부자리 밖으로 나와서 물을 마시거나 거실 같은 곳에 10분 정도 앉아 있다 다시 들어가는 것이 좋은데, 이런 과정 역시 자신이 잠에 너무 끌려가는 상태에서 벗어나고 과도한 집중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수험생 기법이라고 해서 ‘잠을 자야 돼’라고 되뇌이던 것을 ‘잠을 자면 안돼’라고 바꾸면 오히려 잠이 잘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잠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빛’입니다. 우리 뇌의 시상하부에는 생체시계가 있습니다. 그 생체시계는 잠들어라, 또는 깨어나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 명령이 있어야 우리 몸이 잠을 잡니다. 벽시계도 건전지가 있어야 돌아가듯이 그 생체시계는 빛을 받아서 돌아갑니다. 예를 들어 깜깜한 동굴에서 생활해도 사나흘 정도는 원래 밤에 해당하는 시간에 잠을 자고 낮시간에 깨어나 있는데, 생체시계가 기억하는 덕분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결국 밤낮이 바뀌는데 생체시계가 오랫동안 빛을 받지 못해서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낮과 밤의 빛 차이를 통해서 생체시계가 움직이고 잠을 자는데, 요즘은 밤이 너무 밝아졌으니 문제입니다.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호롱불 켜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방마다 등이 달려있고 창밖에도 가로등이 훤합니다. 게다가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스마트폰 같이 강한 빛이 나오는 기계가 너무나 많습니다.
밤낮의 빛 차이가 클수록 생체시계는 잘 돌아가게 되는데, 그 방법은 간단합니다. 첫 번째는 밤을 어둡게 만드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을 보다 보면 빛이 눈으로 직접 쏘이게 됩니다. 눈을 통해서 그런 강한 빛이 들어가면 우리 생체시계는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 헷갈리게 되어서 잠들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텔레비전을 보며 잠드는 습관으로 인해 잠을 깊이 자지 못할 수가 있으며, 불을 끄고 누운들 스마트폰으로 내 눈에 직접 빛을 쏘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전자기기들은 잠자리에 들기 30분에서 1시간 전부터 멀리 하는 것이 좋겠지요. 사실 스마트폰이나 모니터 불빛에 비하면 스탠드 불빛은 굉장히 약하기 때문에 약하게 스탠드를 켜놓는다고 크게 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두 번째는 낮을 더 밝게 만드는 방법이 있는데요. 낮에 더 많이 밖으로 나가서 햇빛을 쬐여야 합니다. 태양을 마주해서 직접 바라보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쏟아지는 햇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생체시계는 잘 돌아갑니다.
잠에 대해서 무엇을 먹으면 좋다는 소문, 무슨 기계가 좋다는 광고가 넘쳐납니다. 불면에 대한 정보가 많지만 그렇다고 모두들 잘 자는 것은 아닙니다. 제 생각에 잘 자기 위해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말씀드려 보았습니다. 결국 버리는 자는 얻고 얻으려는 자는 잃을 것이라는 말씀처럼 너무 잘 자려는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하느님이 주신 햇빛, 밤과 낮이라는 자연의 섭리에 맞는 생활을 통해 더욱 편한 밤을 지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못 잘까봐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설마 못 자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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