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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믿음 · 희망 · 사랑 : 믿음의 촛불 밝히기 (2) 인물 편
오늘은 믿음의 모델들을 만나, 어떻게 믿음이 그들의 생애를 드라마틱하게 연출해 냈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성경 속 인물들을 만나러 가 볼까요?
첫 번째 인물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어느 날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별안간 나타나시어 ‘네 고향과 집을 떠나, 내가 보여 줄 땅으로 떠나라.’(창세 12,1 참조) 하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편안히 잘 살고 있는데 모르는 곳으로 떠나라는 말씀이 따르기 쉬웠을까 싶지만, 아브라함은 하느님 말씀대로 순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말씀을 하시지요. 바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땅도 주고, 만나는 사람마다 복을 받게 된다는 세 가지 약속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 될 것이라며 아들 이사악을 보내주셨을 때 아브라함은 100세, 사라는 90세였습니다. 하느님의 약속 말씀이 조금은 의심스럽고 허황되게 들렸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가라면 갔고, 또 하라면 했습니다.
아브라함 믿음의 절정은 바로 이사악이 12세 되던 때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시지요. 바쳐야 할 제물이 보이지 않자, 아들 이사악이 제물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대답합니다.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8) 아브라함의 온전한 믿음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이후 그는 물론 후손들까지 주님의 복을 한껏 받게 되고, 그의 이름에는 늘 ‘믿음의 조상’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게 됩니다.
다음은 ‘방패’의 믿음 다윗입니다. 다윗과 골리앗 전투 현장을 상상해 볼까요? 거인 골리앗이 기세등등하게 서 있습니다. 모두가 무서워 대적하지 못하는 중에, 소년 다윗이 그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전투 경험도 없었고 갑옷과 무기도 없습니다. 주님을 향한 ‘굴하지 않는 믿음’과, 어찌 보면 무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두려움 없는 용기’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저를 빼내 주신 주님께서 저 필리스티아 사람의 손에서도 저를 빼내 주실 것입니다.” (1사무 17,37), “오늘 주님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1사무 17,46) 다윗의 확고한 믿음과 용기가 느껴집니다. 갑옷도 무기도 없는 다윗은 평소 자신에게 익숙한 스타일대로 돌멩이 하나를 던지고, 그 돌멩이는 골리앗의 이마에 명중합니다. 작은 소년이 한 방으로 거인 골리앗을 보내 버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든든하게 지켜 주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믿었기에, 이런 용기와 기세가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이후 하느님 체험을 수도 없이 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 (시편 28,7)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여러 어려운 순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아브라함이 보여 준 ‘야훼 이레’ 믿음과 다윗의 굴하지 않는 ‘방패 믿음’을 생각하며 우리의 믿음을 키워 나가기를 희망합니다. 그 걸음걸음마다, 기대하는 순간이나 또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희년의 표징들 (2) 성문, 화해
희년을 드러내는 두 번째 요소는 성문(聖門)입니다. 성문은 희년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가장 특별한 표지입니다. 지난주에 알아본 ‘순례’의 최종 목적은 예부터 성문을 통과하는 것이었습니다. 희년은 교황님이 성문을 개방함으로써 시작합니다. 본래는 로마의 주교좌 성당인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당의 성문 하나뿐이었지만, 시간이 흘러 더욱 많은 순례자가 희년을 체험하도록 다른 로마 대성당들도 성문을 개방하도록 확대되었습니다. 이번 희년의 시작을 알리며 지난 12월 24일에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성문이 열렸고, 이후 12월 29일에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당, 1월 1일에는 성모 마리아 대성당, 1월 5일에는 성 바오로 대성당의 성문이 열렸습니다.
성문의 문턱을 넘으면서 순례자들은 자연스레 요한 10장의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9절). 성문을 통과하는 것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의 인도를 받겠다는 결심을 표현하는 행동입니다. 구조적으로 보면, 성당의 문은 순례자를 성당 안으로 인도하는 통로이지요. 순례자는 성문을 통해 성당으로 들어와 그리스도와 결합하고, 그분께서 주시는 화해와 평화를 맛볼 수 있습니다.
화해(Reconciliation)는 희년의 주요 주제입니다. 희년의 세 번째 요소인 화해는 처음부터 하느님을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 그분을 향해 나아가도록 부르심 받은 우리 모두의 소명을 깨닫게 해줍니다. 하지만 개인적, 구조적 죄와 모순으로 하느님과 이웃과 세상과의 관계가 상처 입었고, 이로써 우리는 자유가 아니라 억압과 부조리에 짓눌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희년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최우선에 두며 사회 정의를 회복하고 지구에 대한 존중심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먼저 자비의 얼굴로 다가와 주시며 당신의 거룩함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실천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화해의 성사를 받고, 이 놀라운 체험을 바탕으로 고해성사의 가치를 재발견하며, 하느님의 용서를 개인적으로 깊이 체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화해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피조물인 자연환경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고해성사는 뒤에서 알아볼 ‘대사’(大赦)의 중요한 요건이 됩니다.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2) 현대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시작
가톨릭신자로서 교회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무엇인지를 묻는 일은 마치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그래도 마주해야 하는 물음이기에, 성령의 도움을 청하며 여러분과 함께 이 여정을 시작합니다. 사실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은 지난 2천 년 동안 교회가 끊임없이 해온 질문이고, 그때마다 교회는 당시 처했던 역사적 상황 속에서 그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동시대의 언어로 복음을 해석하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렇게 쌓아온 교회의 자기 인식들은 오늘의 교회가 자신을 성찰하는 데 밑거름이 되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교회의 모습을 정립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서 20세기에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교회가 무엇인지 다시금 묻고 초대교회부터 함께 걸어온 길을 계속 이어가게 해주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2년 10월 11일, 성 요한 23세 교황의 개막 선언으로 제1회기를 시작했습니다. 20년간 교황직을 수행했던 전임 교황 비오 12세의 뒤를 이어 77세의 고령이던 베네치아 대교구장 안젤로 론칼리 추기경이 1958년 10월 28일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과도기적 교황이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요한 23세 교황은 즉위 3개월 만인 1959년 1월 25일, 로마 추기경단에 그동안 중단되었던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잇는 새 공의회를 개최할 뜻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1960년 6월 5일, 자의 교서 「하느님의 높으신 뜻」을 반포해 공의회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마침내 1962년 공의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성 요한 23세는 개막 연설에서 현대 세계 안에서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내적 외적으로 쇄신되는 것이 공의회의 목적임을 강조하면서, 특별히 ‘현대화’와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강조하였습니다. 여기서 현대화란 ‘현대 세계에 상응하여 새롭게 한다.’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를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아조르나멘토에서 조르노(giorno)가 ‘날’이란 뜻이므로 영어로는 ‘업데이팅’(updating)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교회라는 구원의 장치가 과거의 지나간 프로그램으로 운용되지 않고, 현대 세계라는 환경에서 구동이 가능한 버전으로 업데이트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의 아조르나멘토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상징적 개념이 되었습니다.
공의회는 성 요한 23세에 의해서 시작되었지만, 교황은 1963년 6월 3일 제1회기를 마치고 선종하였습니다. 이후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선출되어 공의회를 제4회기까지 이끌었으며 1965년 12월 8일에 폐막하였습니다. 이 공의회에서 발표된 문헌은 4개의 헌장과 9개의 교령, 3개의 선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중 우리가 지금 다시 묻고 있는 ‘교회’에 대한 성찰은 「교회 헌장」에 담겨 있습니다.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1) 불러모음, ‘교회’란 말의 뜻
누군가로부터 “교회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신앙생활을 20년이나 했는데 그것도 대답 못 할까?” 하고 반문하지만, 막상 교회를 설명하려고 하면 그동안 귀동냥한 것들이 뒤죽박죽되어 횡설수설하기 십상입니다. 세례 후 신앙생활을 통해서 내가 체험한 교회의 모습을 돌아보고 그중 좋은 기억을 추려서 내놓기만 해도 교회에 대한 좋은 설명이 될 텐데 말입니다. 사실 제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새신부로 첫 본당에서 주일학교 어린이 청소년 친구들 그리고 청년들과 지낸 시간을 돌아보면, 길게 느껴졌던 교리와 미사 시간도 신났던 여름 캠프와 숙연했던 겨울 피정도 모두, 내가 지금 있는 곳이 교회이고 그것이 교회의 삶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공부 거리가 되고 사제의 연차가 쌓이면서 어느새 교회가 삶이 아니라 일로 다가왔고, 그럴수록 교회를 누군가에게 설명한다는 것이 더 복잡하고 어려워졌습니다.
여러분도 교회의 새 식구가 되었을 때는 교회가 어떤 곳인지 궁금해하면서 신앙생활을 기쁘게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교회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성사 생활, 성경 공부, 단체 활동은 열심인데 그러는 동안 교회는 점점 잊혔습니다. 신앙생활의 바탕인 교회를 감지하는 센서에 오류가 났습니다. 그저 “교회? 갑자기?”입니다. 오늘부터 여러분에게 건네려는 이야기가 언제부턴가 으레 그러려니 하고 묻어두었던 교회에 대해서입니다. 교회를 공부로 삼았던 실수(?)로 인해 이론적인 말을 많이 하겠지만, 그것들을 여러분의 체험으로 녹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교회’란 말의 뜻부터 알아볼까요?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천주교용어자료집』을 보면,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모인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가톨릭신자는 교회 다닌다는 표현보다 성당 다닌다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용어집에 의하면 ‘성당’은 ‘하느님을 경배하기 위해 축성한 거룩한 건물이며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장소’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모임이고 성당은 모임의 장소로 구별하는데, 사실 라틴어는 똑같이 ‘ecclesia’(에클레시아)입니다.
이 ecclesia가 한자어 ‘敎會’(교회)로 번역된 것입니다. 라틴어 ecclesia는 그리스어 ek-kalein(에크-칼레인)에서 나온 말인데, ek는 ‘밖으로’, kalein은 ‘부르다’란 뜻입니다. 결국 ecclesia는 어원적으로 ‘밖으로 불러서 모으다’ 곧 ‘불러모음’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불러모음’이란 의미가 교회(敎會)의 ‘모을 회’(會)자 안에 담겨 있으니, 적절한 번역인데 많이 모르고 지냅니다.
교회의 말뜻이 ‘불러모음’이라는 것은 교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신자들이 스스로 모인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무한한 사랑으로 구원의 은총을 주시고자 당신을 믿는 사람들을 ‘불러모은’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기원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2테살 2,14 참조)!
[사회교리에서 희년을 보다] 계엄(戒嚴)과 희년(禧年)
계엄(戒嚴). 경계할 ‘계’에 엄할 ‘엄’이 붙습니다. 엄하게 경계하라는 뜻이죠. 대한민국 헌법 제77조 1항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대통령은 전시 ·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 전시(戰時)란 전쟁이 벌어진 때를 의미합니다. 사변(事變)이란 한 나라가 선전 포고도 없이 침입하거나 혹은 경찰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무력이 난무하는 그러한 상황을 이야기하죠. 지난 2024년 12월 3일엔 전쟁이 일어나지도, 누군가가 우리나라에 침입하지도 않았습니다. 폭도들이 거리를 점령하지도 않았죠. 하지만 대통령은 그날 밤,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대통령에게는 그날 밤의 우리나라가 전시 · 사변에 준하는 비상사태였다는 것인데요. 그게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희년(禧年). 복을 의미하는 ‘희’자가 붙는 한 해입니다. 말 그대로 복된 하느님의 은총이 넘쳐나는 일 년이죠. 지난 2024년 12월 24일, 교황님께서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의 성년 문을 여는 것으로 희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복된 시간에 교황님께서는 특별히 ‘희망(希望)’을 노래하십니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2025년 희년을 관통하는 로마서 5장 5절의 말씀입니다. 희망은 무엇입니까? 교황님께서는 희년 선포 칙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일 무슨 일이 닥칠지 알 수 없지만, 희망은 좋은 일이 생기리라는 기대와 바람으로 저마다의 마음속에 자리합니다.” 희망은 과연 그렇습니다. 지금 아무리 힘들어도 나를 살게 하는 힘입니다. 지금 아무리 괴로워도 나를 웃게 하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 힘의 중심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로마 5,2).
정말로 우리가 모르는 전시 · 사변에 준하는 비상사태였든, 아니면 권력자가 자신의 목적을 관철(貫徹)하기 위해 감히 국민의 자유를 폭력으로 제한하려 하였든, 어쨌든 우리는 ‘계엄’이라는 어둠의 시간을 겪었고 아직도 그 그늘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어두운 그 시간에, 세상에서 가장 밝은 ‘희년’의 태양이 떠올랐습니다. 동이 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했던가요? 계엄의 밤이 너무 어두웠기에 하느님의 빛이 얼마나 밝은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불의(不義)가 너무 차가웠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희망이 얼마나 따뜻한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희망은 우리를 살게 합니다. 이 복된 희년에 정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희망을 통하여 우리를 살게 하실 것입니다. 불의는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만,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언어] Home
홈(Home)이 가진 어감은 참 따뜻하고 친밀합니다. 오래 사귄 연인이 프로포즈하는 장면입니다. 나랑 결혼해줄래? 이걸 멋지게 표현하면, “You, come home to me.” 이제 모든 방황을 끝내고 나에게 와서 쉬어. 내가 늘 너와 함께 있어줄게. 결혼은 서로가 서로에게 홈이 되어주는 고귀한 시작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런 초대를 하십니다. 세례를 받으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홈이 되어주십니다. 누워 쉬는 푸른 풀밭이며 생기 얻는 잔잔한 물가이십니다. 주일미사는 우리에게 바로 그런 홈입니다.
홈은 따뜻한 고향집, 친정집입니다. 스트레스나 긴장감 내려놓고 양말 벗고 쉬어도 되는 곳, 내가 소속감을 느끼며 친밀감을 나누는 곳이 홈입니다. 지상을 사는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는 천국본향(heavenly home)입니다. 고향에서 멀어져 나그네 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는 고향집 같은 곳이 필요합니다. 그런 곳을 제2의 고향(home away home)이라 합니다. 본당을 뜻하는 말 패리쉬(parish)라는 말은 나그네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제2의 고향집 같은 곳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본당에서 홈을 느끼시나요? 서로에게 홈이 되어주시는 한주간 되시길.
[가톨릭 교리 상식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미사 때 왜 포도주에 물을 섞나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첫 표징을 일으키셨습니다. 교회는 이 표징을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때’를 이미 예고하고 있으며,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변한 새로운 포도주를 마시게 될 하느님 나라 혼인 잔치의 실현을 나타낸다.”(가톨릭교회교리서 1335항)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물과 포도주는 전례 안에서 그리스도 신비의 중요한 상징으로 지금까지 거행되고 있습니다.
성찬 전례의 예물 준비 기도에서 사제는 ‘성작에 포도주를 붓고 물을 조금 따르면서’, 속으로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문을 좀 더 라틴어 원문에 가깝게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이 물과 포도주의 신비로운 표징으로 저희도 그리스도의 신적 본성에 함께하게 하소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간 본성에 기꺼이 참여하셨나이다.”
이 경문을 더 이해하기 위하여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의 한 단락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퀴나스는 그의 주저 《신학대전》 III부 74문에서 성체성사의 재료들에 관하여 논하며, 제6항에서 포도주에 물을 섞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첫째로,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제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잠언에서 “너희는 와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술을 마셔라.”(9,5)고 하였듯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축제 때 포도주에 물을 섞어서 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목요일에 사도들과 마지막 파스카 축제 만찬을 나누시며 성체성사를 제정하실 때, 유다인들의 관습대로 포도주 잔에 물을 섞으셨습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재현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4절은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전합니다.
셋째로, 물은 그리스도교 백성을,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작 안에서 물이 포도주와 섞이는 것은 백성들이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뜻합니다.
넷째로, 성체성사의 궁극적인 효과는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탈출기 17장에 모세가 광야에서 바위를 쳐서 백성들에게 물을 먹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가 바위를 건드리자 물이 터져나와 백성들이 생명을 얻었듯이, “성작 속으로 떨어진 물은, 영원한 생명을 향해 샘솟는다.”는 암브로시오 교부의 말씀을 인용하며,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제가 성작에 물을 넣는 것을 사막에서 모세가 바위를 건드려 물을 터뜨린 탈출기의 장면과 연관시킵니다.
이렇게 교회가 거행하는 전례에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풍부한 상징과 깊은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연중 시기에 그리스도의 공생활을 따라가며 그분의 모든 말씀과 행적을 묵상하면서 그분의 신적 본성과 인간적 본성이 어떻게 결합되는지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가톨릭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교의 형성 과정)
지난 달부터 청년성서모임 연수 준비를 동반하고 있습니다. 연수를 함께 준비하는 청년들을 보고 있노라면 여러 생각이 들곤 합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인데 어쩜 이렇게 손발이 잘 맞을까,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닌데 어떻게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할까….’ 더 놀라운 것은 이 친구들이 그 많은 일을 해내면서도 일에만 집중하지 않고, 삶을 나누는 데 충실하다는 것입니다. 각자가 경험한 하느님에 대해 진솔하게 나누고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가까워지기 위해 시간과 정성을 다하는 모습에 매번 감동했습니다.
교의(dogma) 신학을 연구하고 글을 쓸 때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지금 이 시대에 교회와 신앙에 대한 교의와 신학자들의 저서를 연구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고 말이지요. (교의는 종교에서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기본적인 교리나 원칙을 의미합니다.) 우리 삶은 시시각각 빠르게 변화하는 반면, 교의는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랜 시간 동안 교의는 위에서 아래로 선포되는 것이며 신자들은 그것을 따라야만 한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렇게 해야 교회가 하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신앙의 질서가 확립된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초대 교회 교부들의 삶을 바라보면 교의를 선포한 최초의 과정은 우리의 생각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는 교의가 먼저 선포된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삶이 먼저였으니까요. 그리스도인들이 지켜 나간 올바른 삶은 그 자체로 강한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지역 사회 안에서도 그들의 모범적인 삶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 보편적인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은 교의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삶에서 출발했습니다. ‘가르치는 교회’(ecclesia docens)에서 ‘듣는 교회’(ecclesia audiens)로 굳어진 것이 아니라 믿음의 행위로부터 믿음의 내용이 정해지는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청년성서모임처럼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이들을 보며 오랜 기간 형성된 전통과 마음가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따르는 방식을 선택해 살다 보니 교회의 규정과 법도를 알게 되었고, 마음을 열고 나누며 서로에게 귀감을 주는 행위를 통해 하나의 유기체가 되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생활하던 방식’(lex vivendi)이 그들의 ‘믿는 방식’(lex credendi)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처럼, 살아있는 교회의 전승은 삶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수행할 때 그 빛을 발휘하며 우리의 신앙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보증합니다. 오늘날의 교의신학은 변화하는 우리의 삶 속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찾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