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콥스키는 러시아의 위대한 천재 작곡가이자 러시아 클래식 음악의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계획에 없던 음악가로서의 인생은, 갖은 역경과 시련을 거쳐 이제는 불멸의 명성을 남겨 주었다.
러시아어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그런데 2005년에 외래어 표기법에 러시아어 한글 표기법이 추가되기 전까지는 죄다 '차이코프스키'로 써서 오히려 '차이콥스키'가 어색할 지경이다.
러시아인들은 '취꼽스키'에 가까운 발음으로 읽는다. 직접 들어보자. 이는 차이콥스키 철자(чайковский) 중 가운데 알파벳 'о'에 강세가 있어 '오'로 발음하고, 대신 앞 а의 발음이 '이'로 약화되는 현상 때문.(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а를 /и/('이') 로 발음하는 경우는 ч,ш 뒤에 위치하고 강세가 없는 경우에만 한정한다. 대표적인 예로 시계를 뜻하는 'часы'는 'ы'에 강세가 있어 '차씌'가 아닌 '치씌'로 읽는다. ч와 ш의 경우에는 연자음이기 때문에 'а'의 발음이 사실상 'я'(야)와 같게 되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우랄 지방 캄스코보트킨스크에서 출생. 아버지는 광산 감독관으로 우랄 지방 곳곳의 광산을 전전했고, 그 때문에 가족들도 아버지를 따라서 이곳 저곳으로 이사하면서 살았다.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교육으로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지만, 아버지나 어머니는 차이콥스키가 별로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가 법률가로 키우려고 했다.
1850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법률 학교에 입학하여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법률학교 내 합창단에 들어가서 음악 공부도 이어 나갔다.
1859년에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법무성의 1등 서기관으로 근무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을 끊지 못하던 중 1860년에 안톤 루빈슈타인 형제가 주재한 음악교실에 입학했고, 그것이 1862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으로 승격되어 1기 학생이 됐다. 초반에는 안톤 루빈슈타인과 절친한 사이였지만 음악적 노선의 갈등으로 결국 안톤 루빈슈타인과 불화를 일으킨다. 루빈슈타인 형제는 서유럽의 음악을 중시하고 소위 러시아 국민악파라 불리는 "러시아 5인조"의 음악을 수준이 낮다고 절하했다. 그러데 차이콥스키가 이 "5인조"의 음악적 성향에 접근한 작품인 "폭풍우"라는 관현악곡을 작곡하자 루빈슈타인이 격노했으며, 이것이 불화의 요인이 되었다.
결국 차이콥스키는 안톤 루빈슈타인의 동생인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이 설립한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난다. 차이콥스키는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던 밀리 발라키레프의 소개로 국민악파인 "러시아 5인조"와 친분을 나누지만 차이콥스키의 음악적 성향이 리스트나 바그너의 영향을 받아 서유럽 쪽으로 기울면서, 자신과 코드가 맞지 않았던 국민악파와 결별하게 된다.
2.2. 중기
1874년에는 차이콥스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피아노 협주곡 제1번 B♭단조"를 작곡했다. 당초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에게 연주를 의뢰했으나 니콜라이는 이 작품이 난해하고 연주 불가능한 곡이라며 거절했다. 결국 한스 폰 뷜로의 지휘로 보스턴에서 다른 피아니스트와의 협연으로 초연되었지만 당대의 평가는 니콜라이의 평가와 썩 다르지는 않았다. 최근 현대건설 힐스테이트 아파트 광고에도 나오는 이야기다.
이후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서 1878년까지 근무하며 작곡활동을 병행하다가 러시아 철도왕의 미망인 나데즈다 폰 메크 부인의 후원을 받게 되면서 교수직을 사임하고 작곡에만 전념하게 된다. 폰 메크 부인은 약 15년동안 차이콥스키를 후원해 주었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실제로 본 것은 오직 2~3번뿐이라고 한다.
이는 폰 메크 부인이 차이콥스키를 후원하기로 했을 때 서로 한 약속 때문이었다. 또한 차이콥스키는 폰 메크 부인과 약 15년간 1,20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 받으며 플라토닉한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그러다가 1890년에 폰 메크 부인은 파산을 이유로 더 이상 차이콥스키를 후원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일설에 따르면 폰 메크 부인의 재정적 불안은 작은 이유 중 하나일 뿐이며, 실제로는 차이콥스키와의 관계를 중단하라는 폰 메크 부인의 가족들의 압박과 폰 메크 부인이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된 것이 후원을 중단한 결정적 이유였다고 한다. 폰 메크 부인의 일방적인 결별 선언에 차이콥스키는 극심한 괴로움에 휩싸이게 되었고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차이콥스키가 아무리 편지를 보내도 폰 메크 부인은 더이상 답장을 보내지 않았으니 사실상 둘의 관계는 끝난 것이다. 이 때문에 차이콥스키는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폰 메크 부인에 대해 강한 애증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임종 직전에도 폰 메크 부인의 이름을 부르며 '저주받을 여자'라고 외쳤다고 한다. 흠좀무…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여성과의 연애나 결혼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그는 9살이나 어리고 음악원 제자였던 안토니나 미류코바의 열성적인 구애에 시달리다가 미류로바가 결혼해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협박까지 한 탓에 결국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마음에도 없는 결혼인 탓에 결혼 생활은 행복할 리가 없었고, 차이콥스키가 석달을 못 버티고 도망쳐 버리면서 결혼생활은 파탄으로 끝났다.
말이 좋아서 파탄이 되었다지 그렇게 간단하게 끝난 것도 아니었다. 차이콥스키는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고 이혼할 것을 주장하면서도, 아내의 성관계 요구에는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미류코바는 결혼을 지속할 것을 원했기 때문에 법적으로 이혼하지는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아내가 자신의 동성애 사실을 폭로할 것이라고 두려워한 차이콥스키가 이혼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 이 복잡한 결혼관계는 미류코바가 정신병으로 숨지면서 끝났다. 이 결혼 사건은 그의 음악의 분위기까지 바꿀 정도로 중대한 사건이었다. 결국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된 그는 신경쇠약으로 이어진 후 유럽으로 도피성 요양여행을 떠났고, 이탈리아에 이르러서야 겨우 심신을 회복할 수 있었다
2.3. 말년
1878년에 귀국한 차이콥스키는 명작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했고 1888년에는 발레음악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완성했다. 이 때에 이르러 차이콥스키는 세계적인 음악가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1890년 그간 차이콥스키를 후원하던 폰 메크 부인이 갑자기 후원을 중단하면서 차이콥스키는 후원이 끊긴 후에도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폰 메크 부인과의 교류가 끊기게 되면서 큰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차이콥스키는 미국 여행후, 오페라 "욜란타"와 발레음악 "호두까기 인형"을 작곡했다.
그의 생애 마지막 해가 된 1893년,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작품 중 최후 걸작이 된 "교향곡 제6번 비창"을 작곡했다. 그리고 그 해 11월 6일, 의문의 죽음으로 세상을 떠났다.
공식적으로는 끓이지 않은 물을 들이켜서 콜레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그런 엉터리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비난이 적지 않았다. 당시 콜레라는 불치병이나 다름없었기에 만일 이걸로 사망했다면 진즉 격리되었을 테지만 그의 장례식에는 무려 6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였으며 러시아 모스크바 정교회 주교를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이 장례식 미사까지 했고 음악 동료, 친구들, 지인들, 친척들도 죄다 참석했다.
그래서 지인들은 콜레라로 사망했다는 당국의 발표에 대해서 장례식에서 무척 기분나빠 했고 "이래놓고도 콜레라라고 허풍을 치네요?"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더불어 장례식 끝나고 콜레라가 유행했다는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꽤 부유하게 살았으며, 활동 영역도 부유층, 귀족층이었다. 이들은 깨끗한 물을 마셨는데 당시 콜레라는 지저분한 물을 마시는 빈민층이 걸리는 병이었다.
그런 그가 콜레라로 사망했다니? 심지어 장례식에 모인 지인이나 친지 중 그의 유해에 키스를 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직접 접촉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는데 그들 중 아무도 콜레라에 걸린 사람은 없어서 지인들이나 당시 친척들도 어이없어했다. 러시아 5인조 중의 한 명이자 그의 절친한 지인이었던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역시 이 일에 대해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비꼬았다 한다.
일각에서는 차이콥스키가 당대의 실권자인 스텐본크 톨몰 공작의 조카와 동성애 관계를 맺었고, 이것을 알아차린 공작에 의해서 자살을 강요당해서 사망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또한 다른 주장으로는 공작이 황제에게 차이콥스키를 고소했으며 정교회 국가인 러시아에서 동성애는 죽음의 죄, 혹은 최소 종신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이 고소장을 넘겨 받은 검찰 부총장이자 차이콥스키와 법률학교 동창인 니콜라이 야코비가 동창들과 소규모 비밀 명예 재판을 연 다음 독극물에 의한 음독 자살을 종용했다는 증거도 여럿 있다.
동성애는 차이콥스키의 업적과 인지도 등을 감안한다 해도 최소 종신형은 선고 받을 만한 사례였기 때문에 그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킬 우려와 더불어 동성애자로서 죽는다면 장례식도 제대로 치루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콜레라의 증거로 언급되는 쌀뜨물 같은 설사가 비소를 먹은 경우에도 나타나는 증상이기 때문이다. 1979년에 소련 문화부에서 부검했더니, 그의 몸에서 비소가 나왔다.
3. 능력과 평가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러시아 고전주의 음악을 완성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의 음악에 대해서는 당대에 평가가 엇갈렸다. 서유럽에서는 그의 음악을 대중적이라고 평가절하했고, 러시아에서는 민족주의적인 경향과 거리가 있다고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의 음악은 쉬우면서도연주하기엔 결코 쉽지 않다 깊은 울림을 가진 것으로 오늘날에 클래식 애호가들의 깊은 사랑을 받는 작곡가가 되었다. 물론 듣기에 쉽다는거지 바이올린 파트가 어렵기로 유명하다. 심지어 발레곡들에도 어려운 바이올린 솔로가 한두개씩 들어있는데 아직도 오케스트라 오디션에서 많이 연주된다.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아름다운 음율(멜로디)감은 후배 프로코피예프가 제일 부러워했다고 한다.
피아노, 바이올린의 연주기법에 있어서 당대 음악가들을 능가하는 진보를 이뤘는데 이 때문에 그의 피아노, 바이올린 협주곡들은 난해하고 음악형식에 맞지 않는다는 평가를 당대에 받았다. 다양한 작품들을 남겼는데 "예브게니 오네긴" 같은 오페라, "백조의 호수" 같은 발레음악 등의 무대음악부터 6곡의 교향곡, 다양한 표제음악적 성격의 교향시와 관현악곡들, 피아노 음악과 실내악곡 등에서 여러 걸작들을 남겼다.
차이콥스키는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과 함께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전문가들의 견해는 차이콥스키의 음악에 보이는 정서와 한국인들의 정서가 맞아 떨어져서라는 분석을 하기도 하는데, 어쨌든 피아노 협주곡 1번이나 바이올린 협주곡, 교향곡 6번 비창이 한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클래식 음악의 상위권에 늘 랭크되는 걸 보면 한국인과 뭔가 맞는 부분이 있는건 분명한 것 같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비창" 1악장 (Tchaikovsky - Symphony No.6 in B minor op.74 "Pathetique" mvt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