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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일환 목사(장안중앙교회)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최일환목사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아는가?
고전10:31~33
2015년 2월 1일 장안중앙교회 주일낮예배 최일환 목사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설교:
찬양 한 곡 부르겠습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나의 가고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나의 가고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뜻하신 그 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뜻하신 그 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성도 여러분!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겠습니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 서겠습니다.
나의 가고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주님 나를 이끌어 주세요.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뜻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내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느 기독교 기관의 설문 통계에 의하면 약 50%의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 관심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약 40%의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 관심은 있지만 그길로 가지 못하고 산다고 합니다.
그리고 너머지 약 10%의 사람들만이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고 있고 그길로 가려고 힘쓰고 있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면서도 그 길을 못가는 것일까요?
이유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내가 해야 할 일이며 어디로 가야하는지 확신이 없으니 형편 핑계대고 환경 핑계대면서 어쩔 수 없다면서 원치 않는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확신이 없는 것일까요? 무엇이 하나님 뜻인지 분별이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하나가 우상 숭배 문제입니다. 고린도는 항구 도시입니다. 그러다 보니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우상숭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우상숭배에 드려졌던 우상 제물이 시중으로 나와서 판매되기도 하고 일반인들이 먹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그 우상제물을 먹어야 하느냐 먹지 말아야 하느냐 문제로 교회 안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우상 제물 먹는 문제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분별하는데 기준이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얼마 전 어떤 목사님과 만나 대화중에 그분이 심각한 고만을 털어 놓는 중에 자주 쓰신 말이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뜻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말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래서 그 후배 목사님에게 야단치며 말을 했습니다.
“뭘 몰라요? 하나님의 뜻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돼서 하나님 뜻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랬더니 자기는 도대체 하나님 뜻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 후로 저도 고민하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분별해야 할까요? 그런데 하나님이 오늘 말씀을 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내가 원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잖습니까?
성경에는 사55:8~9절을 보세요.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릅니다. 내 길과 하나님의 길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우리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방법을 제시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는 어떻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오늘 주신 말씀을 보면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1.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31절 보세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그것이 하나님 뜻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가 왜 살고 있나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나요? 왜 이 일을 하며 살고 있나요? 우리는 우리 삶의 의미와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보면 우리가 사는 첫 번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 말씀을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에는 이 말씀에 거부 반응이 있으신 분이 몇 분 계실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43:21절을 보세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함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가 사는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베다니의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그 소식을 예수님께 전한 것입니다. 빨리 와서 고쳐주길 바라고 그렇게 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요11:4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그리고는 며칠을 더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나사로가 죽었다 하니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가자” 하십니다. 가보니 죽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썩어서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무덤에 돌을 옮겨 놓으시고 “나사로야 나와라” 외치시며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냅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왜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렸나요?
그 이유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사람은 물론이고 병든 자들을 보실 때도 그들이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할 존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시시한 존재가 아닙니다. 불행하게 살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각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의 삶에는 변화와 혁명이 일어납니다.
우리 사는 이유는 죽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멘! 그런 믿음과 확신이 있다면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가 보람과 감격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자신도 삶의 의미와 가치의 전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데 두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4: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했습니다.
또 빌립보서 1:20~21절에도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려면 내가 하는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내가 하는 일이 위대한 일이나, 거창한 일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그 기준은 내 욕심이 아니어야 합니다.
내게 이익이냐 손해냐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안 되느냐 입니다.
아무리 큰돈을 벌고 유명해져도 하나님께 영광이 인되는 것이면 단호하게 포기해야 합니다. 또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라면 그것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눅9:23절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서 자기 부인이 뭡니까? 나를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생각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입니다. 어쩌다가가 한번 지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순간마다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또 그냥 졸래졸래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남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주님 십자가도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못 집니다. 그럼 누구 십자가입니까? “자기” 십자가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렇게 살 때 주님의 뜻을 이루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2. 교회에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가요?
32절을 보세요.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우리가 하는 일이나 하고자 하는 일이 사람들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게 거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거친다는 말은 걸려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 많이 넘어졌습니다. 한쪽 다리가 장애가 있다 보니 달리다가 돌에 걸려 넘어지고 무릎과 손에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인사하면 어머니는 “늘 조심조심 다녀라”가 인사였습니다. “늘 조심조심 다녀라” 지금도 환갑이 다되어 가는데 부모님은 늘 조심해서 다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길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신앙생활도 늘 조심조심해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를 넘어트리려는 세력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넘어트리는 걸림돌이 우리 인생길 곳곳에 있습니다. 특별히 현대사회에서는 더 더욱 많습니다. 그래서 늘 주의해야 합니다. 정신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해야 하나 우리가 남을 넘어지게 하는 걸림 돌이 되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대인은 누구고 헬라인은 누굴까요? 이들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입니다.
유대인은 율법을 중요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어 구원 받은 우리가 우상 제물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 우상제단에 올랐던 음식을 먹어도 된다면 우리가 그들에게 거리끼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믿지만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내기준으로 그들을 넘어지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헬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헬라인은 지혜를 소중히 여깁니다. 그래서 그들은 합리적인 삶의 방식을 중요시하고 그래서 지혜를 중요시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왔는데 우상 음식을 굶어 죽을지언정 먹지 말라 하면 우리가 그들에게 거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내 중심으로만 생각해 남에게나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면 남을 실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하는 일이 남을 실족케 한다면 그것은 큰 죄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지혜롭게 함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합니다.
또 하나,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저와 여러분이 주님이 세우신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어서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거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가는 길이나 하려는 일이 교회에 유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뜻은 이것으로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교회에 유익이냐 손해냐? 아니면 교회에 덕을 세우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분별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아무리 좋아도 교회에 덕이 안 되거나 교회 생활에 거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 뜻이 아닌 것입니다. 성도가 하는 일이 교회를 멀리하고 교회중심의 삶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치는 자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죽어야 합니다.
지금은 돌아 가셨으나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이 “힘빼 신앙”을 강조한 적이 있습니다. 붓글씨를 쓰거나 악기 연주를 배울 때, 그리고 어떤 운동을 시작할 때 제일 힘든 것은 힘빼는 일입니다. 피아노를 치려면 손가락에서 힘을 빼야합니다. 테니스나 골프를 배우려면 어깨와 팔에서 힘을 빼야합니다. 제가 운전면허증을 얻고 치를 처음 운전할 때 어떤 성도님이 저를 도로연수를 해주셨는데 그때 제게 어께에 힘을 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보자들은 그 말이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고수가 되면 그 말이 뭔 말인지 알게 됩니다.
주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일을 할 때도 내가 할 수 있다고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사람은 결국 넘어지고 힘들어집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실 때 자기 힘을 다 뺄 때 건져서 사용하십니다.
모세를 보세요. 그가 왕궁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 권세와 지식과 젊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그를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미디안 광야로 피신시켜 40년간 그 힘을 뺐습니다. 80세 노인으로 늙어서 아무 힘이 없을 때 그때 나타나셔서 그를 붙들어 사용하셨습니다. 그런 모세를 통해 애굽의 바로 왕을 꺾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셨습니다. 아멘?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무엇이 된 것처럼 여길 때는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닌 것임을 깨달을 때 사용하십니다.
김장을 담글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뭡니까? 배추를 쩍쩍 갈라서 소금에 절여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간도 배고 맛도 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내가 살아있으면 성도들에게도 걸리적거리고 교회에도 걸리적거립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님의 맛도 향기도 능력도 우리에게 스며들게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마음 놓고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교회에 유익한 존재입니까? 거치는 존재입니까? 문제는 내 딴에는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힘을 잔뜩 줌으로서 주변 성도들에 거치는 사람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떻게 하라고요? 어깨에 힘을 빼세요. 목에 깁스를 푸세요. 그래서 낮아지고 낮아져서 겸손하게 섬기려 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바라기는 거침돌이 아닌 디딤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3. 많은 사람에게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33절을 보세요.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여기 중요한 말은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오늘 성경을 보면 “나와 같이”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사도 바울은 자기도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라는 것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면 내가 하는 일이 많은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가를 살펴봐야합니다. 유익이 되면 하나님 뜻이고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쉬운 예를 들면, 성도가 술집을 경영하는 것, 하나님 뜻일까요? 아닐까요? 한 20여 년 전에 우리교회 어느 성도가 등록을 했는데 술집을 차리고 개업예배를 드려달랍니다. 제가 갔을까요? 못 갔습니다. 왜요? 축복을 해줄 말이 없었습니다. 그 일은 많은 사람을 죄짓게 하고 고통을 가져다주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 성도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왜냐고요? 33절 하반부를 보세요.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남의 영혼을 구원하려면 내가 그 사람에게 예수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내 삶을 통해서 예수님이 들어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양보해야 하고 내가 희생해야 합니다. 어떻게요? 예수님처럼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말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대가지불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대가를 지불해야 남들이 기뻐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여러분이 있기 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대가지불을 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가장 큰 대가지불은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자신의 주장을 하나님 앞에서 내세우거나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 대가 지불로 우리가 구원받고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그리고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위해, 다 버리셨습니다. 하늘의 보좌도 버리셨고, 육체도 버리셨습니다. 낮아지고 낮아져서 죄인의 자리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주님이 저주의 가시관을 쓰셨고, 고통의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나를 대신해서 온갖 욕설과 수치와 조롱을 다 받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버리려야 버릴 것이 없는 지경에까지 가서 사형 언도를 받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온통 타인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우리도 그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나와 같이” 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그 안에 예수님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내속에 들어오면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예수처럼 복된 인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시기를 바랍니다.
2) 주님의 몸 된 교회에 거치는 인생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3) 내 유익보다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자기 종이 되게 하려고 우리를 하나님 뜻을 분별치 못하게 하여 혼란을 겪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내 욕심만 버리면 쉽게 분별이 됩니다. 내 눈앞의 시험, 내 눈앞의 유혹만 이기면 하나님의 뜻은 금방 들어납니다.
그러기에 내가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교회유익을 위해, 그리고 만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살기를 결단하시길 축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여러분을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통성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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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