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27일 연중 제30주일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46ㄴ-52 그 무렵 46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48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9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50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51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52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용기를 내고 어서 일어나 그분께 가라 나는 월남전에 참전하였던 친구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몇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서 돌아온 친구 중에 한 친구 얘기를 소개하렵니다. 그는 맹호부대원으로 월남에 파병되어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겼으나 무사히 귀국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산의 모 부대에서 제대를 기다리게 되었지만 수송부대에 배치되었고 그때 자동차에 약간의 고장이 생겨서 전기 용접기를 들고 용접을 하다가 안전수칙을 어겨 감전되는 바람에 전신이 마비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하여 가까스로 회복이 되었지만 안타깝게 시력을 잃고 스물넷에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때 친구는 정말 미칠 지경이 되어 방황하고 나를 붙잡고 하소연도 하고, 여러 번 자살 시도를 하였지만 주변에서 소생도 시키고 보호해줘서 죽지도 못하고, 너무 젊은 나이에 그렇게 되어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근 십여 년을 방황하다가 주님을 만나고 그 울분을 주님께 토하면서 이제 마음의 평정을 찾고 조용히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50여년 넘게 완전히 자신을 비우고 살고 있습니다. 나는 그 친구를 보면서 이제는 내가 더 마음의 평화를 찾고 주님의 뜻을 살피게 된답니다.
오늘 예수님을 보고 자신의 눈을 뜨게 해 달라는 예리고의 소경도 열병을 앓았던지, 벼락을 맞았던지, 어떤 이유에서든지 시신경의 손상으로 갑자기 소경이 된 듯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는 불감청이언정 고소원 (不敢請 固所願)<감히 청할 수는 없으나 간절한 소원은 가슴에 가득하여 표현할 수 없다는 것>으로 예수님께 자신의 답답함을 호소하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맞이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전에 마지막 기적은(성경에 표현된) 이렇게 실현됩니다.
1) 소경은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듣습니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으나 예수님의 기적이나 사랑과 말씀에 대하여 사람들의 말을 들어서 조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2) 그는 예수님을 찾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절히 호소합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걸고 주님을 부르고 호소합니다. 교만한 마음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진실한 부름은 사람들의 제지를 받고 꾸중을 듣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그와 같이 겸손하고 간절한지 반성해 봅니다.
3) 주님께서는 그 부름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응답하십니다.
“그를 불러오너라.” 주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매 순간 그렇게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응답을 항상 의심하면서 삽니다. 그를 부르심과 같이 우리에게도 매일 부르십니다. “얘야, 어서 오너라.”
4) 사람들은 그 소경에게 말합니다. ‘용기를 내고 어서 일어나 그분께 가라고’ 그 사람을 인도합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용기를 내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는지 모릅니다. 왜 그렇게 망설이고 있는지 또 그분께 가려고 하지 않는지 생각해 봅니다.
5) 그 사람은 겉옷을 벗어버리고 벌떡 일어나 그분께 갑니다.
겉옷을 벗어버렸다는 것은 체면과 위신과 모든 명예를 모두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체면과 위신과 허례허식에 파묻혀 눈치를 보느라고 주님께 달려가지 못하고 사는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
6) 그 소경에게 주님은 소원을 묻습니다.
그러면 나의 소원은 무엇일까? 지금 이 순간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소원을 물으십니다.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두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마치 확인이라도 하시는 것처럼 물으십니다.
7) 그 소경은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씀드립니다.
소경이니까 당연히 눈을 뜨게 해달라고 하였을 것이라고 치부할 수 있습니다. 소경의 이 소원은 우리의 모든 소원을 상징합니다. 내 소원은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 소원이 성령의 눈으로 찾은 소원인지 생각해 봅니다. 엉뚱하고 엉터리 같은 소원을 아뢰는 자신을 발견하고 송구스럽다는 생각입니다.
8) 그 소경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은 보게 해주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지 반성해봅니다. 아직 아무 것도 그 분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9) 다시 볼 수 있게 된 그 사람은 주님을 따라갑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 소경이 눈을 뜨는 아홉 고개의 길을 밟고 삽니다. 그 길의 굽이굽이에 한고비씩 넘기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오늘 그 과정과 꼭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매일 되풀이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매 순간 주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이 순례의 길을 걸어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