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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과 손님의 처지가 뒤바뀐다’는 뜻을 가진 사자성어로 주객전도(主客顚倒)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물의 경중, 선후, 완급 따위가 서로 뒤바뀌는 상황에 쓰이는 말입니다. 비슷한 의미의 사자성어로 객반위주(客反爲主)라는 것이 있는데 ‘손님이 도리어 주인 노릇을 한다’라는 뜻입니다. 비슷한 우리나라 속담으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는 것도 있습니다. 방금 보았던 사자성어와 속담은 모두 주객이 바뀌는 것,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본말이 전도되어 완전히 주종이 뒤바뀐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분문을 보면 우리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의 행동을 지적할 때 우리가 신앙적 가치관이 잘못되어 원래 의미를 잃어버릴 수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안식일을 열심히 지키며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이 제대로 된 안식일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음을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며 안식일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진정 회복하시려는 안식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주일의 삶, 아니 신앙인으로서의 삶에 참된 안식일의 의미를 회복해서 참된 신앙생활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제대로 깨닫고 참 안식일의 의미가 우리 신앙속에 회복하게 될 때 우리는 제대로 된 주일예배와 주일성수를 비롯해서 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속에서 가르쳐주시는 안식일의 의미가 우리 신앙생활에 적용되어 바른 신앙인으로 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식일 의미 회복을 위해 깨달을 것, 첫째는 안식일은 인간에게 유익되도록 주신 날입니다.
마태복음 12장 1,2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오늘 본문과 동일한 상황이 기록된 마가복음 2장과 누가복음 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 본문을 조합해서 살펴볼 때 오늘 이 본문의 상황은 제자들이 너무 배가 고파 밀이삭을 잘라 먹은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아직 덜 익은 밀이삭을 손으로 비벼 먹을 수 있게 만들어 약간의 요기를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오늘 하루를 버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본성에 따른 생물학적 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본성으로 인해 굶주림을 참을 수 없었던 제자들이 이삭 조금 잘라서 비벼 먹었다고 그게 과연 엄청난 책망을 받을 일인가?’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마저 이 일을 통해 무너진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제자들을 책망하는 내용은 “왜 밀이삭을 잘라 먹었냐?” “왜 안식일에 그 일을 했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부르셨다는 사실을 자랑하지 않고 자기들 스스로 여러 종교적인 회괴망측한 규칙들을 만들고 그것을 지켜서 자신들 스스로 거룩을 만들어 냈습니다. 거룩하게 부르신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이 거룩하게 만들어 스스로 거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유대인들의 구전 율법서인 미쉬나에 보면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39가지의 생활 속 활동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그 규칙에는 너무나 세세한 규칙을 만들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 매듭을 묶거나 풀어서는 안 되었고 한 땀 이상의 바느질을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심지어 글씨를 한 자라도 적는 것은 안식을 범하는 죄였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하루에 1999보 이상 걸어서도 안 되었습니다. 그 이상 걸으면 그것은 여행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을 위한 시간을 보낸 것이 되었습니다. 이런 행위는 안식을 범하는 죄였습니다. 1999보까지 걸었으니 안식일을 범하지 않았고 2000보 걸었으니 안식을 범했다고 한다면 얼마나 신경 쓰일까요? 단 한 발짝 차이로 죄의 갈림길이 된다면 정말 한 걸음 한 걸음이 불안한 한 걸음이 될 것입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숫자를 세었을 것입니다. 만보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 스스로 숫자를 머릿속에 계산하며 하루 종일 살았을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 안식일은 이런 시시콜콜한 것에 주눅들어 살아야 했기에 안식일자체가 고달픈 날이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그런 규칙을 만들어 불안한 삶을 사는 것뿐 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죄를 짓나 안짓나 살펴보며 남들이 그 규칙을 범하기라도 한다면 정죄했던 것이 유대인들의 더 큰 문제였습니다.
누가복음 6장 2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안식일의 의미보다 인간적인 수 많은 기준을 만들어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엄청나게 많이 만들어 냈습니다. 이런 현상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그들이 살았던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인간이 수행해야 할 고행의 종교, 인간이 지켜야 할 억압의 종교, 속박과 구속 속에서 자신을 성찰해 내려는 종교로 유대교를 새로 만들어 낸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뭔가 어떤 틀을 찍어내고 그 틀에 갇혀 있으면 그것이 참 종교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종교라고 말하는 수 많은 종교들을 보십시오. 이슬람, 힌두교, 불교, 심지어 카톨릭 이런 종교들을 보면 형식과 틀을 만들고 그 형식과 틀에 맞는 행동을 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어떤 수행법을 만들어서 그 수행법대로 해야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규칙, 그런 행위가 궁극적 세상, 내세의 구원의 세계로 인도할까요?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종교라고 불리는 이념들에는 자신의 종교 기준을 가지고 그것이 마치 참된 종교의 가치인 것으로 가장하며 사람들을 책망하고 지적하고 그 법칙에 따라 살아가도록 가르칩니다. 심지어 우리 기독교도 자칫 말씀을 근거로 하지 않고 내 가치관으로 말씀을 오해하게 될 때 온갖 제약으로 자신을 속박하고 온갖 제약으로 남들을 판단합니다. 약 30년, 40여년 전 제가 어린 시절에 한국교회에서 주일에 버스비를 지불해서 버스를 타고 교회로 갔다면 주일을 범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주일에 밥을 지어 먹기 위해 불이나 전기를 사용하면 주일성수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주일에 개인적인 용도로 돈을 쓰면 어떤 이유가 있어도 제대로 주일을 지키지 못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 때에는 성경말씀에 따른 주일성수가 아닌 자기 나름대로 기준을 정하며 자신을 짓누르며 주변 사람들의 신앙을 정죄하면서 주일성수를 했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도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각종 규제에 매여 행동 하나하나가 부자연스러운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 고행의 삶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안식일은 말 그대로 안식을 할 수 있는 날이 되어야 하는데 유대인들에게는 진정한 안식이 없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고 그 안식일은 더 힘든 날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며 평안을 누려야 할 안식일이 더 고통스러운 날이 되어버리니 이것은 완전히 참 신앙에서 벗어난 마음 상태가 된 것입니다.
마가복음 2장 26, 27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오늘 본문 마태복음 12장, 마가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에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날이 아니라 인간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는 날이고 이 날은 참 쉼이 허락되는 날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신앙적인 내용의 본질은 형식이나 규칙이 아닌 참된 사랑의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2장 7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여기서 말하는 ‘자비’는 신실한 마음을 뜻하는 것일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사’는 하나님께 예배하는데 정해놓은 어떤 규칙이나 법칙을 뜻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신실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그들이 마음도 담지 않은 어떤 형식의 제사, 어떤 형식의 예배를 규칙에 맞게 꼼꼼하게 진행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참된 안식일의 의미를 깨닫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생활 속에서 진실된 마음을 담으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속에 참된 마음을 담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찾는 자,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좋아지도록 더 큰 유익을 얻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안식일같은 날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인간을 위해 허락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감사하며 살아가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식일 의미 회복을 위해 깨달을 것, 둘째는 안식일은 생명 구원을 위한 날입니다.
마태복음 12장 5,6절입니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지적을 받으시면서 다윗의 예를 들며 배고픔을 해결한 사람들에게는 죄가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다윗일까요? 지금이나 예전이나 유대인들이라면 당연히 최고의 성군을 다윗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인간적인 업적에서뿐 아니라 유대교 정통신앙의 관점에서도 최고의 왕이었습니다. 즉 왕으로서도 인정받는 사람, 신앙적으로도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치 세종대왕을 생각할 때 부정적인 모습을 거의 찾지 못하고 최고의 성군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유대인에게 다윗은 최고의 왕이었습니다. 그런 다윗도 유대인의 율법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일을 했던 적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제사장 말고는 먹을 수 없는 진설병을 먹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에 몰래 들어가는 것도 죽을 죄인데 그 곳에서 배가 고파 본인뿐 아니라 자신과 함께 한 사람들에게까지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 차려진 진설병을 나눠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상기시켜 주시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물건, 하나님께 예배하는 형식도 중요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출애굽시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주셨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17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어느 율법교사를 만나 참 이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시며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는 그 사람의 옷을 벗기고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빼앗고 거의 죽을 정도까지 때렸습니다. 결국 강도는 죽을 지경이 된 이 사람을 버려두고 떠났습니다. 얼마 후 그 길을 지나던 제사장은 그 사람을 보고도 모른 척 하며 지나갔습니다. 그 뒤에 오던 레위인도 이 사람을 보았지만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이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며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봐주다가 이튿날 데나리온 둘을 주막 주인에게 주며 잘 돌봐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돌보는 비용이 더 들었으면 돌아오는 길에 자신이 갚아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다 들려주고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와 이런 대화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 36,37절입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들으면서 저와 여러분의 신앙은 어떤 지를 우리를 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는 주위에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 대해 어떻게 대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영적인 죽음 가운데 우리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육체적 고통 속에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한 사람, 우리의 조그마한 사랑의 섬김을 통해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우리 주변에 있는데 우리는 그냥 모른 척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신 사마리아인처럼 우리의 가진 것을 다 주고 사람을 살리고 “모자라면 더 구해와서라도 갚아줄테니 제말 이 모르는 사람을 살려달라”고 할 수 있는 지 우리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지난 주 우리는 고주리마을 섬김의 날 행사를 했습니다. 이 행사에 많은 분들이 섬겼고 많은 재정이 들었습니다. 왜 이런 일을 합니까? 효과가 크지 않을 것 같고 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로지 사랑을 베풀고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하신 하나님의 뜻가운데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냥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은혜를 누릴 수 있다면 그냥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참 사랑을 베풀지 않고 자신의 의만 찾아서 살아가려는 유대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 4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우리는 율법적인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한 나머지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선을 행하지 않고 생명을 구하지 않는 모습을 보시며 한탄하시는 하나님을 말씀에서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인으로 살아갈 때 어떤 것이 바른 삶인지, 어떤 것이 참 신앙적인 생활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참 사랑으로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참 섬김으로 이웃에게 나눔과 베풀어주는 삶을 살아야 할 하나님 백성이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십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미가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신앙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 대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미가서 6장 8절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사랑을 품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신실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을 사랑하며 사람들을 살리며 사람들의 어려움을 돌볼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신앙적인 삶이 우리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영혼을 살리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라고 그러기 위해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식일 의미 회복을 위해 깨달을 것, 마지막 셋째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만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2장 8절입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인자’라고 번역된 부분이 많이 나옵니다. 많은 부분에서 ‘인자’가 그냥 보통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많이 쓰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인자’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의 ‘인자’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해당됩니다. 그럼 보통의 사람을 뜻하는 ‘인자’와 예수님을 뜻하는 ‘인자’를 어떻게 구별할까요?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영적인 의미를 분명히 깨닫고 앞뒤 문맥을 통해서 차이를 구별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맥과 영맥을 잘 모르는 경우에도 구별해 낼 수 있는 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관사의 사용여부입니다. 성경 원문 헬라어성경에서 오늘 본문의 ‘인자’라는 단어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말로 번역할 때 ‘그 인자’라고 번역했다면 더 의미가 분명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어 문법에는 정관사의 의미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원래 정통 한국문법에는 정관사, 부정관사라는 설명이 없어서 한국어자체에는 잘 사용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서구 유럽쪽 언어들의 특징은 부정관사, 정관사가 붙는 것과 붙지 않는 것에 따라 의미가 확연히 차이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인자’라는 단어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고 성경에서 이렇게 인자앞에 정관사가 붙으면 오직 예수님만을 나타내는 의미로 ‘인자’라는 단어가 쓰여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안식일에 대한 모든 기준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5장 17,18절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지키던 안식일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회복하고 우리가 제대로 된 안식일의 의미대로 신앙생활하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는 온전한 안식을 이루고 예수님을 통해 예배하는 삶을 통해 진정한 안식일을 지키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대한 권위자는 누구이십니까?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우리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시기 위해 우리가 죽임당해야할 죄값을 우리 주님께서 대신 지불해주셨습니다. 그 죄값을 대신지불하시며 자신이 죽어주셨고 죽으신 지 사흘만에 부활하시며 승천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감사하며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며 참된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주일예배속에 안식일의 개념을 완성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으로 살아간다면 “안식일이 무슨 요일이냐”, “안식일에 무슨 일을 하느냐, 무슨 일을 하지 않느냐”는 무의미한 논쟁입니다. 예수님 안에 진정한 안식을 누리며 예수님을 기억하며 기념하는 날 예배를 드리며 에수님안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리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누구든지 예수님앞에 나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 짐을 대신 짊어져 주십니다. 우리는 그로 인해 가볍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우리 예수님안에 있을 때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우리 스스로 뭔가를 이뤄내려고 애쓸 때에는 그것은 무거운 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말씀 읽은 것, 기도하는 것, 찬양하며 살아가는 것, 신앙인이기 때문에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별해서 살아가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우리 스스로 뭔가는 해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정말 큰 고통이며 무거운 짐입니다. 하지만, 참 사랑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느끼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은혜를 느끼며 살아가는 인생이고 하나님께서 다 이뤄주시는 기쁨의 삶입니다. 연애시절 하루종일 일을 하고도 먼 곳에서 일하고 있는 애인, 먼 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애인을 만나러 달려가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일과를 마치고 밤 늦은 시간이 되었지만 그 곳에 달려가 오랜 시간 볼 수 없음에도 잠시라도 만나기 위해 달려가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게 잠시 만난 이후에 내일의 삶을 위해 또 집으로 돌아오는 아쉬움을 느낀 적이 있으십니까? 오고가는 것이 육체적으로는 고통입니다. 잠시 만나서 다시 헤어지는 것은 마음적으로 아픈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부담을 다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감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찾아오는 교통편과 소요시간, 하나님을 찾아와서 예배하고 성도들간에 교제하는 것, 교회에서 온갖 봉사와 섬김을 하고 교육과 양육을 받는 것, 정말 모두 힘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왜 기쁨이 될까요? 왜 그 모든 시간이 행복한 시간이 될까요? 참 사랑과 참 믿음을 가지고 참 은혜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한 분만으로 기쁘고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해주시는 것으로 즐겁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를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안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안식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일성수하며 교회에 와 있다는 것이 기쁨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 주님께 예배하며 주님안에서 함께 하는 동역자들을 통해 안식을 누리는 것이 기쁨입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우리의 의를 삼을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주의 날을 누리며 주님 오실 날을 고대하며 살아가게 될 때 진정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과 함께하는 주일이 되고 주님과 함께하는 주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그 무거운 짐이 주님의 은혜로 인해 평안함과 기쁨으로 느껴 지는 것, 주님안에서 힘든 수고가 오히려 참된 안식과 쉼으로 느껴지는 것을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경험하며 우리 신앙의 주인이 주님이시기에 예수님만 생각하며 예수님의 인도하심, 예수님과 동행함으로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백성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종교개혁을 진행할 때 SOLA FIDE(오직 믿음), SOLA SCRIPTURA(오직 성경), SOLI DEO(오직 하나님), SOLA CRISTUS(오직 그리스도), SOLA GRACIA(오직 은혜)를 기치로 내세웠습니다. 우리의 삶은 오직 말씀을 근거로 해야 할 것과 오로지 믿음으로 살아가고 그 말씀과 믿음의 기준에 의해 우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현대 이단들 중에 토요일이 안식일이라며 주일예배를 거부하고 토요일 예배를 중시하는 이단이 있습니다. 과연 그들에게 SOLA CRISTUS(오직 예수)와 SOLA GRACIA(오직 은혜)가 있을까요? 토요일 안식일만 강조하면 우리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부활절, 생명의 주일은 어떻게 될까요? 분명 안식일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안식일의 영적 의미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주일의 영적 의미를 다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에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저는 맞다고 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안식일만 거룩하게 지키려고 한다면 구약의 유대인과 똑같은 인생입니다. 아직도 구약에 매여 메시야 예수를 만나지 않은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말 주님이 부활하신 그 날을 기념하며 주일에 하나님께 참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어느 요일에 예배드렸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연 주님만 생각하며 주 예수님께 신실한 예배를 드렸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 거룩한 예배를 드렸냐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주일에 모여서 예배드렸다고 하면서 인간적인 편익만 추구하고 자기 유익만 위해 시간을 보내다가 인간의 즐거움만 느낀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면 그것은 주일성수를 한 것도 아니고 주일예배를 드린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뭐가 주된 것이고 뭐가 부수적인 것인지를 먼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의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할 일, 못할 일에만 집중하면서 안식일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왜 안식일을 지키야 하는 것인지를 제대로 모르고 자신의 의를 추구하며 자신의 기준대로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제대로 주일성수하며 참된 안식을 누리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주일에 교회에 왔다면 이 삶 속에서 온전히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행복한 시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역을 할 것인가? 내가 교회에서 무슨 임무를 맡았는가에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만 섬기며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 청소하기 위해 오고, 교회에 화단이나 꽃을 관리하기 위해 오고, 교회에 식사 준비하기 위해 오고, 교회에서 여러 행정사무를 처리하기 위해 오고 이런 여러 목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목적이 우선시 되면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먼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우선하며 영적 안식과 쉼을 누리기 위해 교회에 오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객이 전도되면 절대 안됩니다. 어떤 잡다한 다른 일이 목적이 되어 교회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 교회에 와서 참 거룩한 주일의 예배를 통해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