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상 변호사가 《월간천관》에 '이청준문학관 건립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故 이청준 작가의 인물과 문학세계를 심층적 소개 중이다.
2022년 8월호를 시작으로 9월호, 10월호, 11월호, 12월호, 2023년 1월호, 2월호, 3월이다. 이번 3월호가 여덟번째 연재기고이다. (편집자 주)
이청준과 회진초등학교 시절 -이청준 문학관을 위하여(8)
1. 누구에게든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이 있다.
-누구든 어린 시절 친구들과 선생님들, 고향 땅에의 그리움과 원망이 남게 된다. 소설가 이청준(1939~2008)도 그러했다. 그는 '해중산골'로 불리며, '우렁이 막창자 끝 같다'는, 진목리 출신으로, 대덕면소이든 회령포구이든 어린 소년에게 그 길은 퍽 멀었을 터. 1945년 해방정국을 맞아 여기저기 비인가 공민학교가 등장하였고, 진목리 주변의 일곱 공민학교가 합쳐 정식 학교설립을 추진하였다고 한다. 1946년 가을에는 선유리 어업조합 김 보관 창고가 임시분교가 되었고, 회령리 포구 동네회관은 임시본교가 되었다한다. 1948년에 '대덕동국민학교로 정식 개교되고, 인근 분교들은 통합되었다. 1948년에 신축된 4칸 목조교실에 소년 이청준은 입학생이 되었으며, 1954년에 졸업하였으니, 6.26 전쟁기를 체험하면서 그 참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청준 선생의 소설이나 산문에는 그 시절 초등학교 모습과 이런저런 선생님들 모습이 등장하고 있다.
2. 그 시절 이청준의 배움터 장소
그 배움터는 '초등학교'와 더불어 '진목리 마을, 진목교회, 마을회관, 진목리 서당'이 되었을 것. 뒤쪽 '큰산'과 앞쪽 갯밭과 갯벌과 수평선 그리고 형제와 누나들 그리고 외갓집 친척에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국민학교 5학년 때, 1996년경에 고쳐진 명칭으로는 '초등학교' 5학년 가을 소풍에 '큰산 구룡봉'에 올랐다고 했다. 그때 처음으로 더 멀고 높은 세상을 보았을 것이며, 가장 먼 수평선을 접했을 것이다. 1948년 9월에 대 덕동교에 '이종남' 선생이 정식교사로 부임하였고, 그 겨울에 '이열' 교장선생(1948. 12~1951. 1. 31.)이 음악을 맡은 '전옥' 여선생과 함께 부임하였다.
3. 여선생님 '전정옥'
'전정옥'이란 이름은 소설과 상황에 따라 '전정자' 이름으로도 등장한다. 그녀는 '풍금을 잘치던 여선생님'도 되지만, '판소리를 잘하던 국악전공은 선생'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전정옥' 또는 '전정자 여선생은 이청준의 3학년 담임이었으며, 비록 소설 속 이야기이지만, 어린 이청준이 최초로 겪은 여자라 지칭할수 있다. 파마머리에 화장냄새, 풍금소리와 다정한 목소리에 약동하는 교양으로 넘쳐났을 것이다. '이열' 교장과 '강모, 방모, 허모' 등 젊은 선생들의 남녀간 교제도 목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학교는 좌우이념 대립현장으로 변모되었고, 1950년 10월경에는 학교건물이 소실되고 말았다. 학생들은 각 마을회관에서 다시 분산 수업을 받게 되었으며, 그 마을회관 5학년 시절에 이른바 교탁 오물 투척사건이 있었는데, 그 '선생님이 보여준 실망스런 모습'이 이청준의 몇 글에 언급되고 있다. 1951년 2월경엔가 학교 건물이 복구되긴 하였어도, 좌우이념의 대립은 여전했던 것 같다. '이열' 교장과 '전정옥' 여선생은 그 무렵에 북쪽 유치산 중으로 '풍금'과 함께 입산을 하였다. 그들의 자발적 선택인지, 누명을 쓰고 몰린 데서 어쩔 수 없는 피난인지 단언할 수 없으나, 그들 젊은 목숨값은 결국 유치 산중에 숨어든 '좌익' 빨치산으로 취급되었다. <장편 흰옷, 1993> 에 '3장 - 젊은 교 장과 여선생과 풍금'이 등장하는데, 그 부제로 "교장과 여선생은 산으로 들어가 원혼이 되었고, 주인 잃은 풍금만돌아왔다"고 했다.) 이청준은 그 혼란스럽던 초등학교 시절을 두고 늘 '전정옥' 여선생의 '풍금소리'와 더불어 회상하였다. 그 시절 회진포구에 들렸다가 떠나간 여객선 같은 여선생이었다.
4. '초등학교 시절'과 '여선생'이 등장하는 소설과 수필
<단편, 전근발령(1966)> <소설집, 거인의 마을(2017), 여선생(1967년 8월)>, <장편, 흰옷(1993년)> 등과 <수필집, 광대의 외출(1993), 어린 날의 추억독법 '여선생과 피난민>, <산문집, 아름다운 흉터(2004), '수줍던 여선생님> <수필집, 마음 비우기(2005), '빛과 사슬을 남겼다. <소설집, 키 작은 자유인(1990)>에도 그 교탁 오물투척사건이 등장하고 있다. 이청준은 그 시절 추억과 회한을 남긴 사건들을 반복 묘사하면서 그 방향과 강도를 약간씩 달리 하였다. '어린 날의 추억독법'으로 "죽음, 삶, 보리밭, 연, 허기, 해변의 육자배기, '여선생과 피난민', 내쫒긴 자의 귀향"이란 키워드로 요약하였다.
5. 만약 이청준이 광주진학을 하지 아니했다면
이청준은 초등학교 시절에 내내 수재 취급을 받았으며, 드디어는 '광주서중에 진학을 하였는데, "광주서중을 졸업한 옛 은사와 주변 분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가정형편과 노모처지로 보아서 이청준이 광주와 서울로 가는 대신에, 예컨대 장흥읍에서 그 학교생활을 마쳤을 수도 있었으며, 장흥의 대덕회진 고향 땅을 지키는 굽 은 소나무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청준은 <산문집, 사라진 밀실을 찾아서 (1994)> 에 실린 <독창적 삶만이 진짜 삶이다> 라는 글에서 "(자신 이 회진 땅을 떠나지 않고 계속 살았더라면), 남루하나 건강하고 경험이 많은 농사꾼, 작은 어선의 선주겸 선장어부, 또는 과수원집 주인이나우 편배달부가 되었을지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러나 현실은 당당하지 못한 소설가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덧붙임>
1. 1948년경 개교 시점에야 '대덕동국민학교었지만, 대덕면에서 회진면이 1986년에 분면이 되면서 '회진초등학교'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그 회진초등학교에서는 그 '졸업생 이청준'을 전혀 기억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청준 문학관'을 회진초교 건물과 부지 등을 활용 또는 연계해 볼 수도 있을 일.
2. 이청준의 5학년 담임이 '이종남' 선생으로 같은 경주 이씨 집안에 '광주서중 졸업선배'로 이청준의 광주서중 진학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다.
3. 언젠가 '탱자도' 건너편 길가마을을 지나다 이청준 선생이 차를 멈추고서 초등시절 은사님 집을 찾아가 인사를 올리는 모습을 옆에서 목격한 일도 있다.
4. 이 글은 이청준 선생의 회고담과 소설 등에 의지했지만, 그 초등학교 설립에 관련한 시점과 장소, 상황이 부정확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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