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52
8월14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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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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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2IEVM6w2oG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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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인간이 만든 가장 불행한 장소인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사랑과 기적의 장소로 변화시켜나간 사제!>
연인(戀人)들 사이에서 종종 벌어지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그 누군가에게 눈길을 주거나 가까워지는 모습을 볼 때 즉시 분노가 폭발합니다. 눈에 불길이 이글거리기 시작하며 배신감에 치를 떱니다. 그런 상황을 도무지 견디지 못하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따집니다.
그런데 우리의 하느님 역시 질투의 화신이라고 여호수아는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거룩하신 하느님이시며 질투하시는 하느님으로서, 너희의 잘못과 죄악을 용서하지 않으신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리고 낯선 신들을 섬기면,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선을 베푸신 뒤에라도, 돌아서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망시켜 버리실 것이다.”(여호수아기 24장 19~20절)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느님에 대한 반역과 불충실, 그리고 진노와 처벌, 회개와 용서, 그리고 화해와 새 출발이 거듭 반복되는 역사였습니다. 하느님 눈을 가장 이글거리게 만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는 우상숭배였습니다. 당신과 맺은 계약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이방신들에게 몰려가는 백성들을 바라보는 그분의 눈에서는 그야말로 불꽃이 튀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마치 우리들의 연인처럼 우리 때문에 분노하시고 눈에서 불꽃이 이글거린다는 것, 생각해 보니 참으로 감사하고 은혜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엄청난 거리에 떨어져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느님, 우리 인간 각자와 연격적인 관계, 연인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 분이라니, 참으로 놀랍고도 기쁩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는 것을 못견뎌하십니다. 하느님 당신을 뒤로 하고 점집으로, 무속인에게로, 사주관상 봐주는 집으로, 사이비 종교로 걸어가는 것을 참아내지 못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녀들이 세상의 좋은 것들에 한눈이 팔려 당신께서 2순위, 3순위, 4순위로 밀려나는 것을 크게 슬퍼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선택에 있어서 최우선권이 어디에 있는지 잘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의 눈길에 불꽃을 튀기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는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을 최우선 순위로 선택하신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특히 지금 이 순간 고통당하고 울며 있는 이웃들 안에 계신 하느님을 최우선적으로 선택한 결과가 위대한 사랑의 순교로 이어졌습니다.
콜베 신부님의 일대기를 읽고 묵상하면서 떠오른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그의 순교는 1941년 8월 14일 단 한번에, 혹은 순식간에 또는 엉겁결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제로서, 성모님의 종으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매일 순교를 준비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의 감동적인 죽음은 그가 매일 매일 살아온 삶의 결론이었습니다.
콜베 신부님과 함께 죽음의 수용소 생활을 견뎌낸 생존자들의 증언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는 폐결핵으로 인해 가장 병약한 수감자중의 한 사람이었음에도 늘 동료들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했답니다.
자신에게 배당된 말라비틀어진 작은 빵 한조각도 허기로 고생하는 젊은 동료들에게 양보해주었습니다. 매일 배당되는 강제노역 가운데 가장 힘든 일을 먼저 선택했답니다.
간수들의 번득이는 경계의 눈초리를 피해가며 동료 수감자들에게 사목자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영적지도와 고해성사를 통해 지옥의 도가니 속에서도 깊은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얻었으며 또한 자살충동을 극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인간이 만든 가장 불행한 장소인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사랑과 기적의 장소로 변화시켜나갔습니다. 폭력과 증오심을 기도와 사랑으로 이겨냈습니다. 지하 아사 감방으로 내려간 후에도 그의 영웅적 덕행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부들부들 떠는 동료들 한명 한명에게 종부성사를 베풀었습니다. 동료들은 그의 무릎에 얼굴을 기대고 평온한 얼굴로 하느님 나라로 건너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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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gcwcOwa4YC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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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자의 살리는 사랑, 진화론자의 죽이는 사랑>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하느님 가족입니다. 하느님 가족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어린이들은 사랑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왜 어른은 사랑할 수 없고 어린이는 사랑할 줄 알까요? 형제간의 우애는 어린이가 좋을까요, 어른이 좋을까요? 당연히 어린이가 좋습니다. 하수구가 있어 자신보다 더 어린 여동생이 건널 수 없게 되자 오빠가 인간 다리가 되어준 동영상은 많은 감동을 줍니다. 그런데 그 오빠는 진정 순수한 사랑으로 그렇게 한 것일까요, 아니면 부모님의 영향이 있었을까요? 당연히 같은 부모님에게서 나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면 형제에 대한 사랑도 사라집니다. 아이들은 ‘부모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난 너를 사랑해.”라고 말할 때, 그 ‘나’는 뱀과 같은 이기적인 본성입니다. 어제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에서 말씀드렸듯이 내가 사랑하려 하면 그 나 때문에 그 사랑은 이기적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나를 만들어주신 분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이것을 압니다.
어렸을 때 아이들은 “엄마, 나 어디서 나왔어?”라고 묻습니다. 이 말은 본성적으로 아이들은 자신이 창조되었음을 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부모로부터 창조된 형제를 부모를 사랑하듯 사랑하겠다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춘기 전까지만 영향을 줍니다. 그 이후에 부모가 나의 창조자가 아님을 알게 되면 부모뿐만 아니라 형제들에 대한 사랑도 줄어듭니다. 부모에 대한 사랑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은 내가 어디서 나왔는지 관심을 끄게 만들어 결국엔 사랑을 해도 이기적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래서 ‘진화론’은 세상에도 큰 해악을 끼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부모를 위해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이기적인 ‘나’가 죽고 나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온전히 부모와 형제를 위한 사랑이 되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을 믿는 사회는 거짓 사랑으로 가득한 고통스러운 세상이 됩니다.
영화 ‘설국열차’는 지구 온난화 대책으로 온도를 낮추기 위해서 뿌린 냉각제가 온 세상을 얼려버리는 지구 멸망을 초래했다는 배경에서 시작합니다. 열차의 앞칸으로 갈수록 돈과 권력과 쾌락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뒤 칸은 그들을 증오하지만, 그들에게서 떨어지는 단백질 덩어리로 박해당하며 살아가는 하층민들이 있습니다.
꼬리 칸의 지도자인 커티스는 반란을 일으켜 한 칸 한 칸 앞쪽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남궁민수란 사람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는 빙하기가 끝나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의미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커티스는 맨 앞칸까지 가서 기차를 만든 윌포드를 만납니다. 그는 어린이들을 엔진부속품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윌포드로부터 자신의 자리를 이어가라고 제안받습니다.
그러나 커티스는 낮은 자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낮은 자들을 계속 부품으로 이용하며 사는 삶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자기 한쪽 팔을 잃어가면서 부속품으로 있는 아이를 꺼내 냅니다. 그리고 남궁민수에게 기차 문을 열라고 마지막 남은 성냥 하나를 건네줍니다. 그것이 있어야 크로놀을 폭파해 문을 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커티스와 남궁민수는 아이들의 방패막이가 되어주며 두 남녀 아이들만 살아남고 모두 죽게 됩니다. 두 아이는 마치 아담과 하와처럼 빙하기가 끝난 세상의 새로운 인류가 됩니다.
커티스는 짓눌리는 자기 형제들을 위해 세상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라 여겼습니다. 윌포드는 자신이 만든 기차 때문에 살아있는 이들을 약간은 부속품으로 여겨도 된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는 사랑은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나’가 죽지 않은 이기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남궁민수는 ‘새로운 창조’를 희망했습니다. 기차로 상징되는 이 세상이 아닌 새로운 아담과 하와를 위한 창조를 위해 자신들이 희생해도 된다고 믿었습니다. 상징적으로 그는 창조자를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창조자가 자신을 창조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야 했듯, 부모가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주었듯, 창조 때문에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의 상징입니다. 사랑은 이 세상에서 나와 가까운 이들의 불합리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새로운 하느님 자녀를 탄생시키는 일입니다. 결국, 커티스도 이 사랑에 동참하여 둘은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팔도 잃고 생명도 희생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어린이들의 것인 이유는 어린이들은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자신이 어디서 나왔는지 찾을 줄 압니다. 그리고 그 부모 때문에 형제를 사랑합니다. 이 말은 부모의 창조에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부모가 돌아가셔도 형은 동생을 위해 부모처럼 생명을 바칠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기심이 없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자신 때문에 사랑한 것이기에 사랑을 잃으면 마치 전부를 잃은 것처럼 자기 삶도 포기합니다. 하지만 형제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의 마음을 더는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 죽은 형제의 몫까지 더 살아보기 위해 노력합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은 바쳐도 남의 생명은 빼앗지 않습니다.
자신의 원천을 찾아야만 하는 이유는 그래야 창조자처럼 형제들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창조자의 본성입니다. 어린이 중 진화론자는 없습니다. 다 부모가 필요합니다. 부모로부터 창조되었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사랑을 본받습니다. 부모 때문에 형제를 사랑합니다.
우리도 어린이처럼 되어 하늘 나라의 행복을 누리려면 이웃을 내 형제처럼 사랑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 이웃을 창조한 하느님을 부모로 여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을 창조하셨기에 다른 이들의 생명을 빼앗아가면서까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를 기뻐하실 수 없으십니다. 창조자 하느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할 때 이 세상은 생명이 충만한 하늘 나라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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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9,13-15 :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
예수님께서 영적인 고자를 칭찬하시면서 복을 받은 이들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어떤 사람들이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순결한 아이들이다. 육체적으로 순결한 사람을 칭찬하시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영적으로 순결한 것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13절) 제자들은 아이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피곤해지시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바로 얼마 전에 예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앞에 세우시고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들었지만, 제자들은 어린이의 순수함을 잊어버리고, 그들이 예수님께 올 자격이 없는 것처럼 막고 있다. 순진한 어린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막는 것은 그분의 영광을 빛바래게 하는 것이다. 그 아이들이 자격이 없다면 누가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런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14절) 주님께서는 어린이들이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거룩한 삶의 방식으로 그리고 하늘 나라에 대한 사랑으로 갖추라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우리가 어린이들처럼 죄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 되지 않는 한, 주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18절) 사도 바오로는 “생각하는 데에는 어린 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고”(1코린 14,20)라고 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5) 하느님께서는 어린이가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이 자질들을 우리가 선택하여 갖추기를 바라신다.
즉 순박함, 남들에게 당한 악을 악으로 갚을 줄도 모르는 것, 부모를 사랑하는 것 같은 자질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에게 손을 얹으신 것은 바로 그 안수를 통해 그가 하느님의 권능으로 무장하게 해 주신 것이다. 그 아이들에게 축복하시고 떠나시는 예수께서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어린 아이와 같은 자세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를 초대하신다. 이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도 순박한 어린이와 같이 앞뒤를 재가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즉시 실천하며 주님께 나아가는 삶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구체적인 삶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이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평화와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할 수 있는 우리 되도록 기도하자. 주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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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1941년 7월 어느 날, 아우슈비츠 수용소 14호 막사에서 수감자 한 사람이 탈출하였습니다. 그를 잡아들이는 것에 실패한 나치는 연대 책임을 물으며, 탈출에 대한 경고로 다른 열 명의 수감자를 굶겨 죽이는 형벌을 내립니다. 죽을 운명에 놓인 열 사람 가운데 하나였던 프란치세크는 아내와 자녀들을 떠올리며 울부짖기 시작합니다. “이제 나는 여기서 죽는구나. 나의 부모, 아내, 자식을 다시는 볼 수가 없구나!” 그 자리에 있던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는 모자를 벗고 조용히 앞으로 나서 지휘관에게 말합니다. “저는 가톨릭 사제입니다. 저 사람을 대신하여 제가 죽게 해 주십시오.” 죄수 번호 16670번이었던 콜베 신부는 보름 넘게 굶주림의 큰 고통을 겪은 뒤, 8월 14일 독극물 주사를 맞고 순교합니다.
이러한 그의 순교는 한순간의 선택이 아니라, 그가 온 생애를 통하여 추구해 오던 신앙 여정의 최종 열매입니다. 성인의 가장 큰 가르침은 ‘모든 신자는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인의 길은 몇몇 사람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로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성모님의 ‘거룩한 순명’은 천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순명은 또한 하느님을 닮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탈출 3,7) 하신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고통받는 이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움직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순명은 고통받는 이들의 울부짖음 속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엄마가 아이의 부름에 응답하듯이, 콜베 신부가 다른 수감자의 울부짖음에 응답하였듯이, 우리도 고통받는 이들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응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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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산보를 다니면서 잘려진 나무를 볼 때가 있습니다. 나무에는 둥글게 나이테가 있습니다. 나무의 둥근 나이테는 사실 대부분 죽어 있다고 합니다. 나무는 가운데 부분으로만 양분이 올라간다고 합니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높이 자랄 수 있는 것은 죽어 있는 나이테가 나무를 지탱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둥근 나이테처럼 우리사회를 지탱해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매주 화요일과 토요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청소차가 와서 집 앞에 내어 놓은 쓰레기를 가져가 줍니다. 그분들이 일하지 않는다면 동네는 마비가 될 것입니다. 고마운 분들입니다. 2주에 1번씩 잔디를 깎아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일하지 않는다면 집 앞의 정원은 엉망이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분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누님들은 재봉틀을 돌렸고, 가발을 만들었습니다. 서독으로 간호사가 갔고, 광부가 갔습니다. 우리의 형님들은 멀리 중동에 가서 사막의 모래바람을 이겨냈습니다. 국민소득 1,000불, 수출 100억불을 향해 늦게까지 일하던 산업현장의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미사를 도와주는 퀸즈 한인성당에도 나무의 나이테와 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제일 먼저 나오시는 분은 수녀님입니다. 미사시작 2시간 전에 나오셔서 문을 여시고, 앰프를 키고, 에어컨을 틀어놓습니다. 복사, 반주자, 해설자, 독서자도 일찍 와서 준비합니다. 미사를 마치면 많은 봉사자들이 다음 미사를 위해서 의자를 소독합니다. 로사리아회에서는 물품판매를 위해서 아침 일찍 탁자를 마련합니다. 주차봉사자들은 차량이 쉽게 들어오고 나갈 수 있도록 마당에서 안내합니다. 사제가 미사를 봉헌하기 전에 많은 분들이 수고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에도 나이테와 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2살 이하의 아이들이 순교하였습니다. 교회는 성탄이 지난 3일 후에 무명의 아기 순교자들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했던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습니다.’ 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 부제를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신앙 때문에 순교하였습니다. 그분들이 흘린 순교의 피가 오늘 교회를 지탱하는 나이테가 되었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막시밀리아노 콜베 사제는 따뜻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 있었기에 다른 이를 대신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은 그런 따뜻한 마음에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밀밭에 가라지가 들어오듯이 따뜻한 마음에 욕심, 시기, 질투, 원망, 미움이 들어오곤 합니다. 그런 것들이 거센 바람을 일으키면 우리의 마음은 닫히고, 불평과 불만이 자라게 됩니다. 그런 바람 속에서는 좋은 기억이 생기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학식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권력으로 차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하면 갈 수 있습니다. 작은 것에 만족하고, 나눌 수 있으면 갈 수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 공동체를 위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나이테’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이곳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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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내가 저 사람을 대신해서 죽겠소>
“내가 저 사람을 대신해서 죽겠소.”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막시밀리아노 꼴베 신부님은 자원하여 처자식이 있다면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처형자를 대신하여 죽음을 택했습니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을 몸소 실천한 성인의 죽음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순교자였습니다. 미사를 봉헌하기에 앞서 죄 없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 죄 없이 동료를 위해 죽어간 꼴베 신부님의 모습 앞에 우리는 과연 예수님 때문에 너를 위해 나의 것을 내어 놓고 포기하며 참된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 반성하며 주님의 자비를 청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오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 막시밀리아노 꼴베 신부님의 축일입니다. 신부님께서 나치의 수용소에서 동료 죄수를 대신해서 죽음을 자처했고, 아사형에 처해졌지만 14일이 지나도록 죽지 않자 독극물을 투여하여1941년 8월 14일 성모 승천 대축일 전날 아우슈비츠의 감옥에서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신 것에 대해서는 하도 많이 들어서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저는 꼴베 신부님의 이러한 “영웅적인 이웃 사랑의 실천이 어떻게 가능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분의 삶과 영성이 어떠했기에 이러한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요? 저는 꼴베 신부님께서 가지셨던 두 가지 영성이 이를 가능하게 한 밑거름이 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먼저 성모님에 대한 영성입니다. 신부님은 특별히 원죄 없으신 동정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매우 깊었고, 성모님의 보호 아래에서 당신 스스로도 사셨고, 이 영성을 보급하기 위해 일생을 노력하셨습니다. 신부님은 편지(O. Joachim Roman Bar, O.F.M. Conv., ed., Wybor Pism, Warszawa 1973, 41-42; 226)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모님의 지도를 받고, 성모님의 인도를 받아, 그분의 보호 밑에서 마음 놓고 안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원죄 없으신 동정녀를 통하여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성모님께 봉헌함으로써 우리도 성모님 손안에서 하느님 자비의 도구가 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성모님이 보살펴 주실 것이고,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실 것이며, 영육간의 모든 어려움 중에 성모님이 우리를 기꺼이 도와주실 것이며 어려움과 불안도 그분이 제거해 주실 것입니다.”
꼴베 성인은 이미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서 자신과 세상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리라는 굳은 믿음을 간직하셨기 때문에 죽음의 두려움도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둘째, 꼴베 신부님이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 놓을 수 있게 한 원동력은 바로 “기도”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폴란드에서의 어린시절부터 수용소의 아사 감옥에까지 기도는 그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기도를 통해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온전히 하느님의 은총에 의탁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을 얻어 초자연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우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으며,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도움 아래서는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최문기,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 신부 (8) 기도와 일”, 가톨릭평화 신문, 2017.06.11 발행 [1418호] 재인용)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은총을 입은 그는 하느님의 도움 아래에서 목숨마저도 이웃을 위해 내어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꼴베 신부님은 어떻게 기도하셨을까요? 기도할 때에 콜베 신부님은 마치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어린 아기처럼 단순하고 친근하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형식적인 기도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성적이며 뜨거운 마음으로 기도하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는 “기도 없는 좋은 설교나 활동은 어떤 열매도 우리에게 가져다 주지 못할 것입니다”(위의 인용)라는 말씀은 기도가 우리의 사도직에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그렇다고 그에게 항상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문제 없는 곳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겪고 있는 시련을 “OO”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뭘까요? (명상의 집에 미사 오시면 정답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시련이 OO이라고 부르며 긍정적인 생각을 해 왔던 그에게 죽음의 고통과 두려움은 더 큰 행복을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했을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시련이 다가 올 때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하느님께서 달콤한 OO을 또 주셨군! 감사합니다!”라고 할 수 있다면 좀 더 고통 앞에 여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꼴베 신부님의 영웅적인 순교는 한 순간의 선택이었을지라도 하루 아침에 형성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는 성모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그분의 보호를 굳게 믿고 있었으며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사랑의 일치를 이루며 은총에 은총을 받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미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왔던 그에게 자신의 목숨을 봉헌하는 것은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요 최고의 사랑의 나눔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이웃을 위해 무엇을 나누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벗을 위해 무엇을 포기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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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어린이와 하늘나라>
<이현주 목사의 마르코 복음 읽기, 예수에게 도를 묻다>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정말 재미있는 책입니다. 마태오 19,13-15과 병행구절인 마르코 10,13-16의 대목을 예수께서 해설하는 부분 한 대목을 인용하려 합니다.
“어린아이의 순진한 마음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에게는 악과 선이 따로 없고 아름다움과 더러움이 따로 없으며 너와 내가 따로 없다. 그래서 악과 선이 따로 없고 아름다움과 더러움이 따로 없으며 너와 내가 따로 없는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물이 물을 받아들이고 불이 불을 받아들인다.... 사람은 어른이 되면서 어렸을 때 지녔던 ‘순진한 마음’을 버리고 이것과 저것을 가려 좋은 것은 잡고 싫은 것은 버리는 ‘분별심’을 키우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고통과 절망을 가져다줄 뿐이다.”(예수에게 도를 묻다. 351-352쪽)
사족(蛇足)을 붙이자면 성(聖)과 속(俗), 선(善)과 악(惡), 명(明)과 암(暗), 미(美)와 추(醜), 호(好)와 오(惡)를 따지고 분별하는 마음(分別心)이 지옥(地獄)을 만들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기뻐하며 받아들이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般若智)이 하늘나라를 누립니다.
예수님은 어린이가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별심(分別心)을 버리라는 말씀이지요. 분별심을 버리려면 도리 없이 ‘나’(妄我)를 버려야 합니다.
지금 당신 곁에 어린아이가 있다면 아이의 눈을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거기 하늘나라(天國)가 있습니다. 오늘도 하늘나라(天國)를 누리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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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를 보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을 섬기는 일에 관하여 나눈 대화에서 몇 가지 놀라운 점이 드러납니다. 첫째는,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님을 섬기라고 명령하면서 그들에게 자유롭게 선택하라고 합니다. 그 다음, 백성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풀어 주신 하느님을 섬기겠다고 하자, 여호수아는 이를 확인하는 대신 백성에게 방해와 난관을 제시하면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단념시키려고 애씁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렇게 엄한 자세를 보이는 것은, 백성의 형식적인 선택에서 오는 위험을 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맺는 계약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진지한 일입니다. 이는 삶과 무관한 외적 의식, 곧바로 기억에서 사라질 의식뿐만 아니라, 생각과 말과 행위를 포함한 사람 전체와 관련된 근원적인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책임을 떠맡도록 아무도 강요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데 관여한 사람은 진지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인간의 품위는 바로 중요한 책임을 맡고 이를 유지하는 그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스켐에서 백성에게 선택과 책임을 일깨운 뒤에 그들과 계약을 맺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멀리하려고 하는 어린이를 받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오는 사랑에 온전히 자유로운 마음을 보이시면서, 모든 이, 특히 철부지 같고 덜 성숙한 어른들의 그릇되거나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이지 않는 어린이들을 기쁘게 맞이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대를 막론하고 가정과 교회가 당연히 보여 주어야 할 관심이라고 선포하시듯이, 어린이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십니다. 악의 없이 열린 마음을 갖고 있는 어린이들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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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김광태 야고보 신부님]
<어린이와 같은 사람>
초등학교 1학년 시절, 엄마와 떨어지는 게 싫어서 학교에 가는 걸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수업 끝나고 돌아올 때는 동네 초입쯤부터 달리기 시작하다 대문을 박차고 집에 들어가면서 “엄마” 하고 외칩니다.
어느 날, 엄마가 집에 안 계셨습니다. 부엌에도 뒤뜰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자주 가시던 옆집에도 안 계셔서 마침내 울음을 터트리며 온 동네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홀연히 어느 집에서 엄마를 만났고, 마치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난 양 엄마 치마폭을 붙들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없이 살던 때였으니 엄마가 과자를 준비해놓았다가 주시는 것도 아니었고, “우리 새끼 잘 갔다 왔어?”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는 일 말고는 특별한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울음을 멈출 때쯤, “왜 울었어?” 하는 엄마의 질문을 받고 정말 그땐 왜 울었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 누굴까? 착한 사람일까? 아니면 단순한 사람일까? 어린 시절 내 모습을 돌이켜 보면 이런 설명에 그다지 동의하고 싶지 않아서 뭔가 다른 측면이 있지 않나 많이 묵상했습니다.
그래서 떠올린 이미지가 바로 앞에서 언급한 일화입니다. 엄마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행복한 아이처럼, 자기의 능력을 과신하거나 다른 어떤 것에 의미를 두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그분 안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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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린이를 데리고 와서 축복해주기를 청하는 사람들을 제자들이 꾸짖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해줍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작심하시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벌어진 상황에 따라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부자청년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두 이야기를 다 같이 ‘하느님 나라’에 관련하여 이끌어갑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사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앞장(18장)에서 제자들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3)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을 가로막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친구로 여기건만 제자들은 그들을 업신여기며, 그들이 예수님께 가는 길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는 성경에서 무력하고 힘없는 사람,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 수 없어 돌보아주지 않으면 곧 죽게 되는 무능하고 약한 이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어린이’는 사회에서 스스로 살 수 있는 힘이 없는 무력하고 무능한 이, 미천하고 버려진 이, 천대받고 소외된 이를 대변합니다. 또한 율법을 모르는 이들이기도 합니다.
사실, 그들에게 우리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우리에게 그들이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다가가면 그들이 오히려 우리를 복음화 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그들이 오히려 우리를 ‘회개하여 어린이 같이’ 되게 해 주고, ‘작은 자’ 되게 하고, 말고 순수하게 만들고 복음화 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지 ‘어린이에게 다가가라’ 혹은 ‘어린이를 돌보라’고 하지 않으시고 ‘어린이처럼 되어라’ 곧 ‘어린이가 되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른이 어떻게 어린이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앞 장에서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대로, 회개하여 다시 태어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어린이’ 곧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 수 없어 돌보아주지 않으면 곧 죽게 되는 무능하고 약한 이, 미천하고 힘없는 이, 오로지 아버지께 의탁하고 신뢰를 두는 이가 되는 일입니다. 바로 이러한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가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에게 다가가면, 우리가 그들에게 시혜를 베풀기보다 오히려 우리가 복음화 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단지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나 혹은 가난한 이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가난한 교회가 되어라’고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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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주님!
어린이같이 아래에 있어 모두를 받아들이는 바다가 되게 하소서.
아래에 있기에 떠받들고 존경하게 하소서.
이해하지 못해도 신뢰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약하기에, 당신께 의탁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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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19,14)
오늘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회원'이고, 성모 신심 단체인 '성모 기사회'를 설립한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과 주보 축일을 맞이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가족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콜베 신부님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 때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히셨을 때, 그 수용소에서 순교한 분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는 예수님의 새 계명을 그대로 실천한 분입니다.
신부님께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히셨을 때, 한 수감자가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수용소 규정이 한 사람이 탈출하면 다른 죄수 열 명을 지목하여 처형하는 것이었는데, 지목된 열 명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에게는 가족이 있다고 울부짖자, 그 사람을 대신해 벌을 받겠다고 나아가, 다른 아홉 명과 함께 '아사형'으로 순교하셨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처럼, '너를 위해 굶어 죽는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사부이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믿고 받아들여서 그대로 행동으로 옮긴 진정한 프란치스칸입니다.
조금도 손해 보는 것을 잘 허락하지 않는 요즘 시대, 물질만능주의와 이기주의가 만연되어 있는 요즘 시대에 콜베 신부님 같은 사람들이 과연 나올 수 있을까?
오늘 독서에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합니다.
"이제 너희는 주님을 경외하며 그분을 온전하고 진실되게 섬겨라.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여호24,14.15)
콜베 신부님은,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을 온전하고 진실하게 섬긴 분, 오늘 주님을 선택한 분, 가장 작은 너를 선택한 분입니다.
콜베 신부님의 삶을 닮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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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어린이>
마태오 19,13-15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어린이>
어린이는 먼저 다가갑니다
반기는 사람이든
해코지 하려는 어른이든
그 순간 곁에 있으니까요
어린이는 그저 믿습니다
아낌없이 내어주는 엄마든 아빠든
위험에 빠뜨릴 그 무엇이든
곁에 있는 순간 모든 것이니까요
어린이는 마냥 웁니다
자기 피를 보고도
다른 이의 피를 보고도
모두 같은 피니까요
어린이는 먼저 미워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모두를 좋아하듯
모두가 자기를 좋아하리라
그저 이유 없이 믿으니까요
어린이는 소유를 모릅니다
나의 것이 너의 것이 되고
너의 것이 나의 것이 되면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니까요
어린이는 알 수 없습니다
나의 편 너의 편 갈라
서로에게 아픔을 주는지를
모두 함께 하는 벗이까요
어린이는 모두 압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미움이 무엇인지
좋음이 무엇인지 나쁨이 무엇인지
온 마음 온 몸으로 느끼니까요
어린이는 꿈을 꿉니다
어린이답게 어른이 되어
어른이 되어도 어린이일 수 있는
많은 이가 비웃는 이루기 힘든 꿈을
어른이 되어서 꼭 이루고 싶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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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평생 거짓말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 지금 막 태어난 아기 외에는 어떤 사람도 거짓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짓말을 하게 된 시작점은 언제였을까요? 결혼하고 나서? 아니면 어른이 되고 나서? 당연히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어떤 상황에서 거짓말을 했을까요? 어른들이 하는 거짓말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 순간은, 진실을 이야기했는데 그 진실을 믿어주지 않았던 순간부터라고 합니다. 상대방의 불신이 아이를 거짓말하게 했습니다. 자신을 믿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이렇게 상대방의 믿음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서 진실이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먼저 의심하고 봅니다. 믿지 않다 보니 거짓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믿어주시기에 계속 기회를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인가요? 어린이처럼 부족함을 많이 간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이처럼 철없는 모습으로 살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어린이가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질들을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제거할까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린이는 예수님 앞에 가려고만 합니다. 어린이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기를 믿어준다는 것을, 그래서 아이 역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서 거짓을 배우며 거짓말을 늘려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이웃을 향해서도 믿어줄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의심하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해주고 지지하는 사랑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런 삶이 우리를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이 되도록 합니다.
이렇게 어린이와 같은 우리가 될 때, 오늘 복음에서 어린이들에게 보여주신 모습처럼 손을 얹어 주시는 은총과 사랑을 계속해서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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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마귀의 구분>
이집트의 은수자인 성 안토니오 성인은 부유한 양친의 사망 이후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재산을 나누어 주고는 사막에 들어가 금욕생활을 했습니다. 이때 많은 마귀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이를 두고 그의 제자들이 질문했습니다.
“사막에서 허름한 옷을 입고 찾아온 천사들과 화려하게 치장한 마귀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안토니오 성인은 그들이 떠난 후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대답하십니다. 천사가 왔다가 떠나면 그의 존재로 인해 힘이 솟고, 악마가 왔다 떠나면 공포에 사로잡혔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 않을까요? 천사의 일, 하느님의 일은 우리를 더 힘차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세속적으로는 좋아보이지만 옳지 않은 일을 하게 되면 불편함이 가득해집니다.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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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린이들과 같은>
지금은 함께 모이고 싶어도 모이지 못하는 코로나19의 비대면 시대입니다. 모두가 힘을 모아 위기 극복을 해야 합니다. 이시대에 태어나는 아기들과 어린이들은 사회성이 떨어지고, 억압된 자아가 형성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습니다. 속히 평화의 시대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래전의 일입니다. 구역미사를 봉헌하러 갔더니 어린이들은 따로 한 방을 차지하고 자기들만의 놀이에 열중했습니다. 어른들‘미사에 시끄럽게 굴지 말아라.’하면서 특혜를 준 것입니다. 그러니 미사참례는 어른이나 하는 줄로 압니다. 시끄러우면 좀 어떻습니까? 좀 더 거룩한 분위기에서 미사봉헌 하기에 앞서 어린이들에게서 거룩한 미사참례의 기회를 빼앗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19,1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을 통해 그들의 순수성을 배우려면 그들 곁에 있어 봐야 합니다. 시끄럽고 교회의 거룩함의 수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진득하게 오래 견디지는 못할지라도 ‘기도손’한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진정, 어린이들로부터 하느님의 은총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미새의 소리를 듣고 노래를 배우는 어린 새들과 같이 어린 아이들도 세상에서 그들을 가르치기로 되어 있는 아주 열심한 부모 곁에서 하느님 사랑의 숭고한 노래와 덕행의 지식을 배워야 합니다.”(성녀 소화 데레사) 또한 우리도 어린이의 단순함과 의존성을 배워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선뜻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린이가 부모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듯이 우리도 주님의 가르침을 그렇게 받아들일 때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어린이는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어른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젖 떨어진 어린 아기, 어미 품에 안긴 듯이”(시편131,2) 주님의 품에 안겨 평온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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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 나라의 삶>
-주님의 종이 되어 어린이처럼 사십시오-
-“주님, 언제나 제가 주님을 모시어 제 오른쪽에 계시니
저는 흔들리지 않으오리다.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고,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하리이다.”(시편16,8.11)-
오늘 시편 화답송이 참 감미롭고 깊은 위로가 됩니다. 오늘은 꼰벤투알 프란치스꼬회 수도자였던 폴란드 출신의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만47세로 순교한 성인의 삶은 늘 대해도 새로운 감동입니다. 성인의 마지막 행적을 나눕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중 콜베는 나치 독일의 박해로부터 보호해주기 위해 유대인 2천명을 포함한 난민들에게 수도원을 은신처로 제공해 오던중 1941년 2월17일 독일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파비악 형무소에 투옥된후 5월28일 죄수번호 16670을 부여받고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동됩니다.
1941년 7월 말, 죄수 중 한 명이 수용소에서 사라진 일이 발생하자 수용소 소장은 죄수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수용되어 있던 열 명을 끌어내어 처형할 것을 명령합니다. 바로 이 순간 일어난 일입니다.
-“나는 안 돼, 나는 죽을 수 없어. 내가 죽으면 나의 처 자식은 어떻게 살란 말이냐!”
지목된 10명중 ‘프란체스코 가조우니체’라는 젊은이 한 명이 울부짖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 순간 콜베 사제가 포로들 대열을 뚫고 천천히 걸어 나와 말합니다.
“내가 대신 죽겠소. 나는 처자식도 없고 병들어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오.”
“도대체 너는 누구냐?”
“가톨릭 사제요.”
그러자 수용소장은 충격받은 듯, 잠시 침묵했다가 신음하듯 대답합니다.
“좋다. 함께 가자!”-
콜베를 포함한 지명된 열 명은 굶겨 죽이도록 지하 감옥에 감금되었고 콜베는 감옥 안에서 기도하며 같이 갇힌 사람들에게 용기를 줍니다. 3주 후 기도의 힘으로 살아 있던 콜베를 비롯한 3명의 죄수를 나치는 페놀을 주사하여 1941년 8월14일 모두 살해한 후, 시신은 성모 승천 대축일인 8월 15일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 화장장에서 소각합니다. 이어 1982년 폴란드 출신의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콜베 사제를 순교자로 기록하고 그의 시성식을 거행합니다’-
죽음은 삶의 요약입니다. 언젠가의 갑작스러운 선종의 죽음이 아니라 평상시 삶의 종합인 죽음입니다. 죽음을 통해 그 사람의 삶이 다 드러납니다. 하늘 나라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과 깊은 관계의 신뢰와 사랑을 지니고 성인처럼 사는 이들 자체가 바로 어둠을 밝히는 하늘 나라입니다.
바로 지옥 같은 환경의 어둠을 잠시 환히 밝히며 하늘 나라를 앞당겨 보여준 성 콜베 사제입니다. 그대로 평상시 성모기사회를 조직하여 깊은 성모신심의 영적 삶을 살다가 성모승천대축일에 성모님과 함께 승천한 콜베 사제입니다. 문득 월요일 3시경시 두 번째 후렴이 생각납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라, 그렇지 않고는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바로 오늘 짧은 복음과 일치합니다.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당신께 손을 얹어 기도해 달라고 청하는 이들이 제자들이 만류하며 꾸짖자 주님의 즉각적인 반응입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어린이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십니다. 이런 예수님 자체가 그대로 하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어린이와 같은 성인들이 있는 곳이 바로 하늘 나라입니다. 나이가 어려서 어린이가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여 끊임없이 회개의 삶을 사는 영적 탄력 좋은 이들이, 세월 흘러 가면서 육신은 늙어도 나날이 내적으로 그 영혼 새로워지는 이들이 바로 하늘 나라의 주인공인 어린이같은 사람들입니다.
늘 배움의 자세로 살아가는 단순하고 겸손하고 개방적이고 순종적인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들이 진정 하늘 나라를 사는 어린이와 같은 성인들입니다. 그러니 언젠가의 그날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어린이와 같이 되어 하늘 나라를 살아야 하는 과제를 부여 받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요즘 곳곳에 만개하기 시작한, 샛노란 청초한 사랑의 향기 은은한 달맞이꽃들이 한창입니다. 아무도 가꾸고 돌보지 않아도 하느님 친히 가꾸시고 돌보시기에, 하늘 사랑만으로 행복하기에 저리도 청초한 아름다움의 달맞이꽃들 같습니다. 마침 어제 써서 나눈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자리 탓하지 않는다
어디든 뿌리 내리면 거기가 꽃자리 하늘 나라다
아무도 탐내지 않는 버려진 땅
샛노란 청초한 사랑! 달맞이꽃들 땅을 덮었다
오, 땅이 하늘이 되었다
꽃별들 가득 떠오른 하늘이 되었다.”-
아사 감옥에서 콜베 사제의 순교적 사랑을 통해 분명 하늘 나라를 맛봤을 동료 죄수들입니다. 성지가 있어 성인이 아니라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사랑의 성인이 있어 하늘 나라 거룩한 땅 성지입니다. 오늘로서 여호수아서는 끝납니다. 모세에 이어 등장한 여호수아가 그 역할이 끝나자 삶의 무대에서 조용히 퇴장하는 죽음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책임을 다하며 하늘 나라를 살아 내는 모습이 참 거룩한 아름다움입니다. 책임을 다하는 일보다 숭고한 아름다움도 없습니다. 바로 하늘 나라의 구원을 살았다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역시 여호수아의 평상시 삶을 요약하는 감동적인 죽음입니다. 임종전 이스라엘 백성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며 이들의 신앙을 확고히 다지는 여호수아입니다.
-“이제 너희는 주님을 경외하면 그분을 온전하고 진실하게 섬겨라.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이어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심을 받아 내는 여호수아입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져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걸어 온 그 모든 길에서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우리는 주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의 다짐처럼 들립니다. 한결같이 주님을 섬기며 주님과 함께 살 때 바로 그 자리가 꽃자리 하늘 나라입니다. 마침내 스켐 전례 집회에서의 온힘을 다해 강론하며 백성들의 신앙을 확고히 한 후 저마다 상속 재산으로 받은 땅으로 돌려 보낸 다음, 참으로 책임을 다한 후 여호수아의 홀가분한 복된 구원의 죽음입니다.
‘이런 일들이 있은 뒤에 주님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죽었다. 그의 나이는 백열살이었다.’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고 거룩한 퇴장의 죽음인지요! 말그대로 나이 110세에 죽어 110세에 묻힌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이자 주님의 종, 주님의 벗이었던 여호수아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하루하루 내 삶의 자리에서 하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기쁘게 주님을 섬기며
한결같이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하늘 나라의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를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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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 앞에 우리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보여 주십니다.
제1독서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야훼 하느님 신앙에 대해 거듭 다짐을 받습니다.
"이제 너희는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온전하고 진실하게 섬겨라."(여호 24,14)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마음을 기울여라."(여호 24,23)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가나안 땅에 대한 정복이 끝나고 여호수아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가야 하는지 힘 주어 이야기합니다.
경외심과 온전한 의탁, 진실된 섬김, 어디에서나 하느님을 향해 기울어지는 마음은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에게도 요구되는 자세입니다.
복음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등장합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제자들이 어린이들을 막자 예수님께서 언짢아하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이미 닳고 닳아 신앙의 순수와 열정을 잃어버린 기성세대에게서보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서 하늘 나라로 가는 자질을 발견할 수 있다고 여기십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아직 어리고 약하고 부족한 어린이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지요. 그들은 생존을 위해 보호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깝게는 부모나 친지의 돌봄을 받고, 근본적으로는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 존재들인 겁니다.
하느님은 어리고 약하고 부족해도 당신께 다가와 의탁하는 이들을 기꺼워하십니다. 세상사에 능한 어른들이 능력 있고 부유하고 수완 좋은 이들과 인맥을 쌓으려 혈안이 된 것과 정반대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믿어주는 이를 계산 없이 반기시는 어린이와 같은 분이시니까요.
"그냥 놓아 두어라. ... 막지 마라."
이 말씀은 오늘날 스스로 어른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에게 던지시는 일갈이기도 합니다. 윤리와 규범으로 무장하고 죄인과 의인을 가르며 흑백을 구별하느라 마음의 온기를 잃어버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 시대에만 존재하시는 않기 때문입니다.
세례, 서품, 서원 연차나 지위, 신분에 기대어, 스스로 주님께 다가가지 않으면서 남들도 다가가지 못하도록 막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오늘 여호수아가 일깨워준 신앙인의 모습에서 다시금 방향을 정돈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께 온전히 의탁하며, 그분을 진실하게 섬기고,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든 하느님을 향한 기울기를 간직한 이는 나이가 몇이건 어떤 신분이건 하늘 나라에 "와락" 받아들여질 어린이의 영혼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도 순수하고 열정 가득한 어린이의 영혼으로 자신의 안위를 계산하지 않고, 누군가를 대신해 자기 목숨을 내놓은 진정한 목자요 순교자셨지요. 성인은 그 영혼 그대로 하느님께 받아들여져 우리를 위한 전구자가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 풍진 세상을 살아내느라 우리 각자가 잃어버린 어린이다움은 무엇인지 되짚어보고 회복하는 오늘 되시길, 그리고 그대로 주님의 축복의 손길 아래로 "와락" 달아드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실 하늘 나라 입성의 자격은 신분도 학식도 능력도 재물도 업적도 아닌, 그저 믿고 의탁하는 순수한 마음이랍니다. 엄지를 척 올리며 "아빠 최고!" 하는 어린이의 기대에 찬 눈망울로 오매불망 주님을 향하고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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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8m5XHeXjdO8&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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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마태 19, 14)
사는 것이
힘들수록
희망 또한
간절하다.
자기
희생없이는
우리의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희망이 있다면
바로 자기
희생이다.
희망과
희생 사이에
예수님이
계신다.
예수님의
희망은
이념과 사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예수님의
희망은
모든 생명과
하나되는
나눔이다.
콜베 사제는
당신의
생명을
나누신다.
희망은
새롭다.
우리 자신이
있는 곳이
희망을
실천해야 할
희망의
자리이다.
절망은
간절한
희망을
이길 수 없다.
콜베
사제같이
빛이 되는
삶이 있다.
삶의 방향을
바꿀 때이다.
다시 시작하는
희망과 희생의
실천이다.
되새겨보아야 할
희망의 삶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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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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