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화(摘花)* - 아오리가 있던 여름 [정현우]
모르는 당신에게 어둠을 돌려주고 오는 길, 서늘한 길은
기울어 잠이 들고, 비 오는 과수원이 활시위처럼 나를 당깁
니다. 벌레의 눈으로 걸음으로 별을 옮기는 밤, 저의 음색은
낮을 사랑하는 별자리입니다. 걸어온 길은 갈변되고, 지키지
못한 사과들이 굴러와, 어둠을 할퀴고, 투신하는 사과 속으
로 그어지는 연붉은 적화
형제들과 둘러앉아 노래를 잇지, 모닥불을 피워 악몽을
잊지, 짐을 챙길 즈음 여름이 익고 여치를 튀기면서 가을이
오지, 자세히 보면 추악하고 멀리서 보면 그리운 것, 그대를
껴안고 얼굴을 묻지, 좋은 맥주에선 홉내가 나고, 좋은 사람
에겐 흙내가 나지, 호기로운 건배로 인사를 하자, 벌써 옛일
이다
재가 날리네, 박차에 찍힌 말은 놀라 달리고, 들판의 달빛
은 녹아가는 빙하 같지**
텅 빈 가지들이 눈을 가리는 누군가의 긴 노래
아오리가 익어가, 툭, 툭, 등 뒤로 사과꽃이 떨어져, 두 눈
이 붉어지는 것은 자꾸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일이라, 오래
도록 저물어야 알게 되는 늦여름의 일이라, 누군가는 금방
잊게 되는 묽음,
누군가는 부푼 계절을 붙들고 오래 살고 싶은 붉음,
과육을 도려내듯 칼끝을 숙여
그리움의 알몸을 베어내고
사과 반쪽을 입속에서 입속으로 옮기면
내 안 붉음이 넘실거려
단물을 입속에 오래 맡깁니다
나는 변치 않는 물빛을 바스러뜨리고,
발목을 걷고
당신 모르게 입술에 핀 꽃까지
톡, 톡
따주고 싶은 적심(赤心)
* 열배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꽃을 속아내는 일.
** 이 시를 위해 김재현 시인이 문장을 보내주었다.
-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창비, 2021
첫댓글 * 해마다 덥지 않은 여름이 없었지만 올해는 전세계가 덥다.
그나마 우리나라는 사,오십도까지 올라가진 않으니 다행이다.
그래도 더운 건 더운 거다.
벌써 아오리 사과가 나왔지.
한 입 베어물면 상큼해서 더위를 잊게 하지.
내게도 청춘이 있었다고 떠올리게 하지.
적화한 그 손길, 감사하지.
맥주 마시며 노래하지, 입술에 묻은 거품 닦아주지...... 요우!
더워서, 너무 더워서 랩으로 시를 읽지, 요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