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잠안와서 생각정리하다가 쓴글이니 무시하셔도 좋습니다 ㅎㅎ
일본 전국시대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 하시는 이야기중에 하나가 '임진왜란을 이해하려면 전국시대를 알아야한다' 죠.
백번 맞는 말씀이죠. 그런데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사건이 바로 을묘왜변과 명나라의 가정대왜구라 봅니다.
'거의 임진왜란 40년 전에 발생한 사건인데 시간차가 너무 나는 거 아님?'이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는데, 사실 맞는 이야기기는 합니다만, 전법과 무기발달 병사동원 등 임진왜란시기와 관련있는게 을묘왜변과 가정대왜구시기에 보이기 때문이죠.
우선 무기에서 보면
조총이 저때부터 전장에서 활약했다는 거야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일본에서 전국시대 거치면서 더 개량되고 여러 형태로 나타나기는 했는데, 그 시초가 가정대왜구시기 부터이고, '그 조총을 일본에 전해 준 사람'이 중국인 왜구 왕직이었죠.(물론 전해준건 포르투갈 사람 맞는데 그 배가 왕직 거......)
또한 중국이나 조선의 문헌에서 '복건이랑 이쪽 중국아해들이 자꾸 일본에 포술가르쳐주는데 이러다 이거 X되는 거 아님?' 이라는 글이 이 시기에 줄기차게 나타나는데, 포르투갈 사람 뿐만이 아니라 다른 중국해적 집단이 왜구와 일본 다이묘들에게 총포술을 가르쳤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는대목이라 봅니다(그래서 엄밀히 말해 척사마가 최초로 조총을 도입한 중국인은 아니죠).
그리고 이 왜구를 진압하기 위해 척계광이 조총을 비롯한 불량기포 등의 새로운 총포와 무기를 도입하였고 이 무기들이 왜구와의 전투에 매우 효과적이었으며, 그 무기들이 훗날 임진왜란에서 활약하고 조선육군에 도입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을묘왜변이 명종조에 발생하는데, 이 당시 중국에서 새로운 총통을 도입했다는게 사람들에게 인상을 많이 주지 못해서 그런지 무시하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는데, 실록에서 보면 중국인을 통해서 새로운 총통이 도입되었고 그를 활용해 보는 기록이 존재합니다(물론 관통력이 약해서 무시되기는 합니다만). 그리고 일본사람 信長이 조선에 와서 새로운 총통을 시연해 보기도 합니다(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훗날 '승자총통'개발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하는데, 어디까지나 개인 추정입니다 ㅎㅎ;;)
그리고 '판옥선의 건조'가 이 일을 계기로 이루어집니다. 이 중요성이야 뭐 말할 필요도 없죠.......
전법에 있어서는
뭐니뭐니해도 기효신서-절강병법의 탄생이 가장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이 절강병법과 절강병으로 왜구와의 전투에서 재미를 보았던 명나라 측에서 임진왜란때도 써먹고 효과가 있는 걸 본 조선측에서 '우리도 저거 써먹어야 겠다'하고 조선육군에 대단히 적극적으로 도입하죠. 물론 총은 일본군의 조총을 사용하고, 살수와 조총수 비율이 4:1이어야 하는데 2:1 상황까지가는 기현상을 보이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는 합니다만.
개인적으로 척계광의 조총 도입의 의미는, 그동안 체계적으로 전투에서 활용되지 못한 조총을 '체계화 및 규격화' 시켰다는데에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복건사람들이 왜구에게 조총술을 가르쳐주기도 하는 등 강남지방 장군들이 개별적으로 왜구와 싸우면서 조총을 적게나마 사용하기는 했을 겁니다(명나라는 장군 개인이 거느리는 '사병'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게 조정차원에서 정식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체계적인 전술 및 전략에 입각해 활용된 것이아니었기 때문에, 왜구와의 전투에서 그다지 효과를 보지 못했던것에 반해, 척계광은 대응 전술 및 전략을 확립하고난 다음에 체계적으로 조총의 활용법을 구상했기 때문에 효과를 보았던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최초로' 사용했다는데에 의미가 있는게 아니라 '제대로 활용했다'는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체계적으로 정리 해놓았기 때문에 조선이 받아들일때 순조롭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거기도 하고요(연병실기는 나중일이고.....)
조선에서는 그 제승방략 전략이 이 을묘왜변을 계기로 하삼도에 적용이 됩니다. 물론 이 방식이 임진왜란시기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문제점이 노출되어 초기 전역에서 조선군 붕괴의 큰 원인이 되죠;;
병사 동원에 관해서 인데,
특기할 만한 사항이 을묘왜변 당시 '승군을 동원하려 하였다'는 점이죠. 남치근 같은 일선의 장군들이 '사찰 종으로 총통 만듭시다'라는 식의 주장 말고도 진짜 축성하고 전투하려는 요원을 배치하려고 시도 했습니다.
조선에서 불교를 탄압해서 사찰세력하고 척치고 승려들이 국가활동하고 연을 끊었다는 이미지가 강한데(물론 고려시대 비교하면 그렇고), 실록에서 보면 의외로 '사역'에 승군들이 많이 동원이 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다만 임진왜란 시기처럼 전투요원은 아니었고, 그 회수가 많지는 않았지만요.
을묘왜변 당시에는 꽤나 본격적으로 이 승병들을 동원하려고 합니다. 물론 위기상황에 의한 병력동원 차원일수도 있겠지만, 이 시기가 '문정왕후가 살아있고 보우가 중용되던 시절'임을 감안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실제로 임진왜란에서 활동하던 휴정이 이 시기에 발탁되었고, 영규가 휴정의 고제, 사명대사가 휴정의 제자). 물론 명종의 반대로- 아마도 문정왕후의 입김이었겠지만 - 흐지부지 됩니다만 승군을 전쟁에 투입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것 자체는 훗날 임진왜란 시기와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조정 차원에서 승려들을 전장에 투입 시킬 수 있다는 인식과 체계가 이미 있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고, 승군조직이 유사시에 투입될 수 있는 상태였다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대충 생각해본게 이정도네요. 마무리가 많이 엉성하기는 한데, 그냥 '어떤사람은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해주시면 됩니다.
여담으로 한국 매체에서는 딱히 을묘왜변을 다루지 않았던 것 같네요. 그나마 좀 다룬게 임꺽정에서 임꺽정과 이봉학이 활약하는 용도로만 나오고 말죠(이건 북한드라마 임꺽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아예 처음부터 임꺽정이 왜구토벌하는 것 부터 시작) 원작소설이 그런건지 드라마에서 각색을 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뭔가 아쉽기는 하더군요 ㅎㅎ;;
첫댓글 거의 정론에 가까운 이야기 아닌가요? 한국매체가 워낙 역덕요소가 적어서 그렇지... ^^
22222222
근데 제가 느끼기에는 별로 저 중요성들에대해 언급들을 안하는 거 같아서요;; 개인감상이라 그럴 수 있지만 ㅋㅋㅋㅋ
@배달민족 역사학이 그렇게 쉬운 학문은 아니라서 그런듯 합니다. 사학은 팩트만 나열하는 것이 아닌데, 보통 평민들은 역사를 자기가 원하는 바를 충족시키기 위한 팩트 조달원으로만 보거든요. 한글같이 오늘날도 직접적으로 적용되거나,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것들이 아닌 한, 역사적인 사실들간의 관계를 잘 따져보려는 경우는 역덕커뮤에서나 가능하죠.
예를 들어 위 내용과 관련 어느 한 블로그에서는 관련 실록 내용을 와전되게 이해하여 '대포만들자는데 절 가지고 신하들이 태클걸었다. 대포만드는데 종교가지고 왕에게 태클거는 신하들이니 임진왜란때 발렸지 ㅉㅉ'라고 비난하는 글이 올라오더니 인기글로 올라가더군요 ㅋㅋㅋㅋ
@havoc(夏服ㅋ) 딜레마기는 하죠. 뭣보다 명종조는 문정왕후와 윤원형에 의한 정치문란과 그로 인한 임꺽정의 난이 워낙 강하게 인상이 남아서 매체에서는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ㅎㅎ
좋은 내용이라서 스크랩 했습니다.
옙 ^^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이신기오로 훌륭한 답변과 지적 감사합니다~ㅎㅎ ^^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이신기오로 제가 봤을때는 호종헌이 서포트 한게 매우 크다고 봅니다. 척가군만들때도 지원많이 해줬고 또 기다려 줬거든요(척계광이 절강에 온 게 1555년이고 척가군이 만들어진건 1559년. 그리고 태주대첩이 1561년일이죠) 호종헌이 유도해서 왕직이랑 서해를 각기 죽여버린 것도 한몫했고요(서해1556년 왕직1557년). 호종헌 자체가 1551년 호광순안으로 묘족반란 평정할때 참여하기도 했고, 주환의 실패 이후 명 조정이 인선을 잘 한 거죠.
잠 자기 전 대충 끄적이신 내용 이라뇨. 아주 잼나게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