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자 여사는 일본의 4대 귀족 가운데 하나인 나시모토(梨本家) 가문에서 1901년 태어났다.
히로히토 국왕비와는 사촌 사이로 귀족학교인 학습원 동기동창이다. 영친왕(英親王)과 합환주(合歡酒)를 나누어 마신 것이
19세 때 일이며 1920년 4월 28일이다. 이후 세월이 흘러 이방자 여사는 87세를 일기로 1989년 4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올해 35주년을 맞이한다.
여사는 평생 일기를 썼다고 한다. 그는 일본사람을 만나면 예외 없이 시집 나라의 좋은 점을 설득력 있게 말하곤 했다.
‘대륙적인 너그러움이 있는 나라’ ‘시장의 잡답(雜畓) 속에 억센 생활력이 숨어 있는 나라’ ‘인정 속에 법이 녹아버리는
나라’ 등등.
이방자 여사는 비록 일본사람이지만, 여성이 갖춰야 할 덕목(德目)을 모두 지닌 사람이다.
오늘은 여사 생전에 金正權장로와 가까이 지낸 일을 살펴보기로 한다.
김정권장로가 사랑의 이야기인 ‘斷想’ ‘영친왕비 이방자 회장 회상(回想)’ 글을 쓴 것이 있다. 요약해서 보기로 한다.
역사(歷史)가 만들어지는 것이 특별한 게 아니다. 세류(細流)가 계곡(溪谷)을 만들고 계곡이 강을 이루고 강이 바다를
이루듯이 이 또한 역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내가 일본 대학에 자료를 구하려고 잠시 가서 있을 때의 일이다. 1967년 12월 일본 고오베(神戶)에서 이방자 회장의
편지를 받았다. 나는 그때 대구대학교와 교분이 있으신 교포댁에 숙식하고 있었는데 저녁에 학교에서 돌아오니 그 집주인
되시는 분이 내 손을 덥석 잡더니 ‘김 선생님이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갑자기 주인이 손을 잡고 이런 말을 하니 나는
어안이 벙벙하였었다.
’김 선생님! 이방자 비 전하(妃 殿下)에게서 김 선생께 편지가 왔어요.‘ ’이방자가 누굽니까?‘ ’아! 이거 한국 사람도 아니고만‘
하고 영친왕 비를 소개해 주었다. 주인의 말을 듣고 나니 영친왕, 이방자 비전하 등 어렴풋이 회상되는 동시 무척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그 주인이 정갈스러운 차상(茶床)을 내오더니 그 위에 편지를 올려놓고 큰절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편지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편지 내용은 네가 특수교육을 연구하고 있다는데 열심히 해서 한국 특수교육을 빛내라는 격려의 말씀이었고, 귀국하면
한번 계시는 곳에 들러 달라는 당부이셨다. 이 편지로 인해서 이방자 회장과 나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이방자(李方子; 1901-1989) 회장은 일본 황실의 일원이시고 또 조선조 말기의 불행했던 시절 정략적으로 영친왕(英親王)의
비가 되셔서 어떻게 보면 매우 불행한 한평생이셨는지 모른다. 또 우리나라에서도 그 누가 달갑게 생각했겠는가!
광복 즉시 영친왕께서 귀국하시지도 못하고 5․16 이후 군사정권 하에서 귀국하셨으나 그때 영친왕께서는 거의 병원 신세를
지시게 된 때이니 얼마나 세상이 원망스러웠겠는가. 이때 이방자 회장은 지극한 정성으로 영친왕을 간호하시고 또 자기 일도
하셔야 하는 어려움을 겪으셨다고 본다.
이방자 회장은 금지옥엽(金枝玉葉)과 같은 분이셨지만 내가 느낀 바로는 서민적이고 또 농담도 잘하시고 아주 근검절약
(勤儉節約)하시는 분이셨다. 자신의 생활은 최소로 하시면서, 지적장애인(精神遲滯)과 지체부자유인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셨고 수입금 대부분을 이들을 위해 쓰셨다.
이방자 회장은 한국의 장애인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귀국과 동시에 자행회(慈行會)를 조직하셨고
1965년 이를 사단법인으로 만드시고 초대 회장이 되셔서 일을 시작하셨다. 1968년 재단법인으로 명휘원(明暉園)을
설립하시고 초대 이사장이 되셨다.
자행회는 1973년 자혜학교(慈惠學校)를 설립하게 되고, 명휘원은 1981년 명혜학교(明惠學校)를 설립하였다. 자혜학교를
인가받고 수원 탑동에 학교 건물을 짓는 과정에 나는 대구대 학생 30여 명을 데리고 봉사활동을 가서 학교 건물 건축하는
일에 보탬이 됐던 일이 생각난다. 그 당시 학교 근처는 아직 지반 조성이 되어 있지 않아서 자혜학교 옆에 있는 푸른 지대
(green zone)에 왕래하는 작은 도로가 있을 뿐이었다. 탑동에 학교를 건축할 당시 사회 상황이 어렵고 모든 것이 힘들었을
때였다. 그 여름은 무척 더웠을 뿐 아니라 여건이 나빠서 이춘섭 교장 등 초기 교사들의 노고가 무척 컸었다.
대구대학교 이태영 총장과 내가 1978년 초여름 창덕궁(昌德宮) 낙선제(樂善齋) 가든파티에 초청되어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자행회 총무 일을 보고 계셨던 종친이신 이창렬 선생이 나를 따로 보자고 하더니 회장님 말씀이라면서 자혜학교 교장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사실 교장을 하고 싶은 사람도 많고 가벼이 추천할 만한 사람도 상당히 있었다. 그러나
이방자 회장의 고매한 정신이 깃든 학교에 아무나 선뜻 추천할 수가 없었다. 이방자 회장의 이상을 구현하되 적극적이고
힘차게 발전시킬 사람이어야 했다.
무척 고민하다가 당시 대구 남양학교 교장으로 계셨던 김동극 교장이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김동극 교장은 대구 남양학교
창설 교장이시고 11년이나 남양학교 교장을 하셨고 교육장 물망에 올라 곧 발령이 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나와 이태영 총장, 김학수 교수 등이 극구 권했으나 김동극 교장으로서는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 노이로제 증상까지
나타났으나 끝내 용단을 내어 이동하시게 되었고 그 결과는 자혜학교나 김 교장 모두에게 잘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명휘원(1968년 설립)을 통해 지체부자유인의 직업 교육을 수행하시고 여기서 명혜학교가 설립(1981년)됨으로 지체부자유인의 요람이 되었다. 이방자 회장은 자혜학교보다는 명혜학교에 더 많이 심혈을 기울이셨다고 보인다.
노후에 이방자 회장은 이 기관을 잘 운영할 사람을 찾던 중 1985년 가톨릭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에 운영을 넘기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시어 미련 없이 넘기셨으니 이방자 회장은 오로지 장애인의 복지와 재활을 생각하신 것이지 소유에 대한 개념은
없으셨다.
이방자 회장의 고매하신 인품과 장애인에 대한 사랑과 헌신적 봉사에 대하여 아무것도 우리가 보답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이태영 총장님과 상의하여 대구대학교에서 1978년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드리도록 하였다. 이 일로 나는 조그마한
위안을 받았지만, 이방자 회장이 우리나라 장애인에게 베푸신 사랑에 비하면 아주 작은 일일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 또 장애인을 사랑하신 분으로 다정다감하시고 인간미가 넘치신 분이다. 왕족으로 고대광실(高大廣室)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사교계나 누비셨다면 오늘 나는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皇太子妃)로서
보다는 장애인의 어머니로, 사랑의 사도로, 극히 서민적 검소한 생활을 하셨던 이방자 회장을 나는 기리는 것이다.
그 복된 이름 위에 영광과 영원한 평화와 안식이 있으시길 기원한다. <
여사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장거리 버스를 타고 갈 때 양손을 무릎에 얹어 놓고 처음 그대로 흐트러짐 없이 종착지까지 간다고
한다. 궁중 예절이 몸에 배어 나이가 들어도 늘 눈길을 내려다보며 다소곳한 몸가짐을 보였으며, 결코 얼굴을 두리번거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방자 여사는 정략으로 흔들릴 뻔했던 자신의 삶을 인내와 정성으로 바로잡았고, 국내에 들어온 뒤에는 생활고에 시달리
면서도 장애인들에게 사랑을 쏟아부은 분이다. 세인들에게 고귀함이란 신분이나 지위가 아니라 인간의 따뜻한 마음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그로 인해 한국인들은 오늘날 그녀를 일본 여인 마사코가 아니라 조선의 어머니 이방자로
인식하게 되었다. 나는 이방자 여사와 같은 여성의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방자 여사의 제35년 추도일(追悼日)을 맞아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