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동국 선수 팬카페정모를 다녀 왔습니다. 동국선수는 못봤지만,회원분들과 친목을
다졌습니다..그러던중..카페에서 아는척좀 하게 생기신-_-; 어떤아저씨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동국 걔 빈골대에 골도 못넣는 xx 뭣하러 아직도 좋아해?"
참 기가 막혔습니다..; 대놓고, 욕을 하시니..저흰 그냥 무시했고,곧바로 그 카페에서
나왔습니다. 제가 지금 이글을 쓰는것은 그렇게 생각안하시는분들도 계시겠지만,
이동국은 국대용이 아닌 덩치있고,네임벨류만 있는 무능한 축구선수라는 생각을 하고계신
몇몇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입니다.
98년 당시 이동국 선수는 가히 전성기라 할만큼 대단한 인기였죠. 이동국 선수의 그 당시 모습을 보고서 단연 뛰어나다는 소리를 하긴 힘들다고 봅니다. 그야말로 가능성 넘치는 유망주였죠. 대한민국 축구선수중 25미터 밖에서 도약없이 중거리 슛을 때릴수 있는 유일한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죠. 청대, 국대, 아대 를 오가며 정말 많은 플레이들을 했습니다. 혹자들은 당시의 플레이를 두고도 너무 미화된게 아니냐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대회 결승전이 끝나고 당시 일본 감독이 "트레이드가 가능하다면 오노나 다카하라를 내주더라도 이동국을 데려오고 싶다." 라고 할 만큼 독보적이었습니다. 요즘 많은 우리의 유망주 선수들이 청소년대회를 통해 인상깊은 플레이를 펼치지만 그것은 98년, 99년 이동국이 보여줬던 것보다는 못미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동국은 사실상 한국 언론과 축구계의 영웅이었습니다. 프랑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전 0-5 대패. 차감독에대한 어이없는 경질등으로 뒤숭숭한 가운데에 굳이 희망을 찾으려한 언론과 축구계에 의해 일약 스타로 만들어진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하지만 98년 이동국은 그 육중한 몸에도 불구하고 전북전 페널티박스 사각에서 오버헤드킥으로 득점을 올리기도 했고 키퍼가 나와있으면 중거리에서 키퍼의 키를 넘기는 득점도 보여줬었습니다. 이 장면은 당시 KBS 스포츠 뉴스 타이틀로 사용되기도 했었죠. 그 골은 마치 작년 이동국이 부산과의 경기에서 헤트트릭을 기록하던 골과 흡사했습니다.
아무튼 그런 이동국은 98년 프로와 대표를 오가며 엄청난 혹사를 했고 태국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최용수와 투톱을 이루어 최악의 플레이를 펼쳤습니다. 당시 이동국이 한거라곤 예선 첫경기에서 쏜 중거리 슛이 골문앞에서 수비하던 베트남 선수의 얼굴에 맞고 그 선수가 바로 교체 아웃된것 뿐이었죠.
외국을 나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시차적응이라는게 생각처럼 쉬운일은 아닙니다. 게다가 이동국은 당시 시차는 물론 기후까지 바뀌는 장거리를 돌고 또 돌아야 했습니다. 각종 대표마다 차출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죠. 아마 그해에 가장 세계를 많이 돈 우리나라 운동선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무튼 그런 극심한 노정은 당시 19세의 이동국에게 큰 부담이고 체력적인 치명타였을것입니다.
맨유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EPL 진출후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크리스티아누 호나우도에 대해 "뛰어나지만 두경기 중 한경기에만 뛰게 하는게 원칙."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경기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어린 나이기 때문에 운동량을 적절히 조절해가며 성장을 시켜야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반면 그 나이때의 이동국은 각종 대표와 프로팀을 넘나들며 엄청난 부담을 느껴야 했습니다.
아시안게임에서 최악의 부진을 보이고 돌아온 이후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기 시작한 이동국. 솔직히 당시 공항에 있어서 직접 확인한 바입니다만, 당시 피곤해서 인터뷰를 나중해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이동국에게 몇몇 기자들이 건방지다며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을 하더니 일주일도 안되 그대로 기사로 터뜨리더군요..
아무튼 그후 99년을 맞아 이동국은 나이지리아에서 또한번 엄청난 역적이 되고 맙니다. 청소년 선수권 대회 우르과이 전에서 골키퍼까지 쓰러져 있는 빈 골문에 밀어넣은 공이 하필 넘어지던 수비수 발바닥에 맞고 튕겨 나가며 조별 예선 탈락의 원흉으로 지목된 것이지요. 하지만 대회 내내 이동국이 보여준 플레이는 그리 악평을 받을만한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당시 기대를 받던 새내기 게임메이커 김경일은 "너무 긴장해서 공도 보이지 않았다." 라고 말을 했죠. 이동국은 예선 세경기 내내 미들과 포워드 라인을 오가는 플레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유기적인 패스가 이루어 지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리고 돌아온 청대팀.. 팀의 수장이라 할수 있는 당시 조영증 감독은 아주 가증스러운 말을 했습니다. 일부 프로 선수들이 건방진 태도로 감독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아서 이길수가 없었다는 것이지요. 박창선 감독체재에서 이룩한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대회 우승이 부담이었는지 조영증씨는 얄팍하게 언론에 힘을 빌려 그 잘못을 선수들에게 일방전가 시켰습니다. 그에 격분한 당시 포항 감독이던 박성화 감독은 "그런 무책임한 소리를 할거라면 다시는 우리 선수들을 대표로 내놓지 않겠다." 고도 했었죠.
그리고 그 후 이동국은 어떠했습니까? 아시안컵에서 득점왕을 차지하고 독일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6개월만에 돌아왔죠. 여기서는 생각해야할 문제점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우선 이동국이 독일로 왜 갔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동국은 애초부터 독일로 가고 싶어 하지 않았고 포항도 그다지 원하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축구협회에서는 2002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유망주들이 유럽에서 경험을 쌓아야 한다며 등떠밀기 식으로 일을 추진했고 상당한 헐값에 포항은 손해를 보며 이동국을 브레맨으로 임대시켰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브레맨이 독일 2부팀도 아니고 분데스리가 중상위권을 유지하는 팀인데 과연 이동국이 가자마자 주전으로 뛴다는게 가능했을까요? 게다가 이동국은 부상중이었습니다. 득점왕을 차지했던 아시안컵때도 이동국은 무릎에 엄청난 두께의 붕대를 칭칭감고 경기에 뛰어야만 했습니다. 그런 그가 독일로 가서 바로 주전을 차지한다는것이 가능했을까요?
하지만 언론의 얘기들은 다릅니다. 이동국이 연습경기에서 골을 넣으면 "주전 확보"를 넘어서 "분데스리가 득점왕" 까지 운운했습니다. 뭐.. 축구뿐 아니라 무슨 스포츠건간에 우리나라는 외국에 진출한 선수에 대해 상당히 우상화, 신격화 해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무튼 그런 상태의 이동국은 부상재활과 훈련을 병행했고 '당연히' 분데스리가 무대는 밟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이러한때에 컨페더레이션스 컵이 개최되었고 히딩크 감독은 "실전 경험이 없는 선수는 뽑을 수 없다." 며 이동국을 대표에서 탈락시켰습니다.
여기서 부터 문제가 꼬여집니다. 축구협회는 나름대로 머리쓴게 엉켜버린 것이고 이동국과 포항구단입장에서는 축구협회한테 사기당해버린 것이니 말입니다. 2002 월드컵을 위해서라고 해서 헐값에 임대시켰더니 정작 월드컵 리허설이라는 컨페더 컵에선 대표 탈락을 시킨거죠.
그리고 얼마가 지나 이동국의 6개월 임대 기간이 끝나자 브레맨은 종전과 같은 값에 임대 연장을 요구했고 포항 구단은 당연히 거부했습니다. 그래도 이동국이 포항 간판 선수인데 (어떤 분들은 이동국이 포항 간판이라는 점에대해 심히 불쾌하실지 모르지만 이동국은 포항 프렌차이즈 선수이며, 또한 구단 프런트에서도 당연히 포항의 간판선수라고 주저 없이 뽑습니다.) 그런 헐값에 보낼순 없다고 했고 축협은 더이상 뭐라할 명분조차 잃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K리그.. 사실상 월드컵 전시 체재였죠. 이동국은 부상 치료가 제대로 되지도 않은채로 대표를 들락거렸고 결국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됐습니다. 한때 최순호 포항 감독이 이동국을 제대로 만들어 낼테니 두달만 맡겨달라고 호소했으나 히딩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죠.
대표팀 팀닥터였던 김현철 주치의는 대표 탈락된 선수중 가장 안타까운 선수로 이동국을 꼽았습니다. 이동국은 당시 발목 부상이 완쾌 되지 않았지만 부상치료는 곧 대표탈락으로 이어지는 길이었고 이동국은 그 상태로 계속 훈련에 임할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박자 빨리 뛰어 들어가라는 감독의 주문을 소화할 몸상태가 도저히 되지 못했고 이것은 대표 탈락으로 이어졌다는 것이죠.
단순히 이동국이 느리다라고 하시는데.. 이런말 좀 웃기지만 이동국이 느리다는 편견을 우선 버리는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최근의 설기현, 차두리, 이천수, 최성국 등에 비해 이동국이 느린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상무 선수들 종합 훈련에서 이동국과 함께 100미터를 측정받은 운동선수들은 "이동국이 너무 빨라서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확실히 국가대표를 뛴 선수는 다르다." 라고 했습니다. 이동국은 상대적으로 큰 몸집과 몸동작으로 실제속도보다 더 느려보입니다. 대표적으로 또 그런 선수가 울산의 박진섭 선수지요. 박진섭 선수는 대표시절, 달리는 폼이 엉성해서 당시 허정무 감독이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오해까지 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동국이 확실히 "빠른 스피드"의 선수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렇다고 특출나게 "느려터진" 선수라고 보기도 힘듭니다. 위에 열거한 설기현, 차두리, 이천수, 최성국 등보다 느린것은 사실이지만 김도훈, 최용수 선수나 현역시절의 황선홍 선수와 비교할때 스피드가 차이난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이동국의 성장을 가로막은 건 안팎으로 빚어진 혼선이 큰 몫을 했습니다. 이동국은 뛰어난 타겟맨으로 무릎 아래로 빠르게 깔리는 패스를 골로 연결하는 것은 100%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수비를 등지고 있다고 패스가 올때 돌아 들어가며 골을 연결 시키는 능력도 뛰어났고 국내 선수중에 가슴 트레핑이 가장 좋다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황선홍 선수도 정통적인 타켓맨이었으나 언제부턴가 경기장을 넓게 쓰며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니는 스타일로 바뀌었지요. 개인적으로 이동국 선수를 상당히 '편애'하는 황선홍 선수는 "내가 돌아다니고 이동국이 가운데 서 있으면 된다." 라는 말까지 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볼배급을 받아서 줏어먹더라고 골을 연결시키기를 바라는것이 감독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동국은 적절히 득점을 올려줬었지요.
하지만 99년이 되면서 이동국의 이런 상황은 바뀌기 시작합니다. 98년까지 강한 전력을 보여줬던 이동국의 소속팀 포항의 미드진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죠.
고정운이 전력에서 이탈했고 백승철도 부상끝에 선수생활을 끝내야 했습니다. 아까운 나이에 서효원 선수는 돌연 은퇴를 선언했고 포항맨 박태하 선수의 노쇄화도 서서히 나타났죠. 곧 포항 미드진의 붕괴였습니다. 기대했던 김세인선수는 잠시 반짝했으나 역시 부상으로 그라운드를 떠났습니다.
이제 이동국에게 적절한 패스를 넣어줄 수 있는 포항의 미드진은 전멸했다는 것이죠. 게다가 이동국은 투톱파트너 또한 적절히 만나지 못했습니다. 정상남, 정재곤 등은 항상 기대 이하에 머물렀고 이동국은 항상 상대 수비의 집중견제에 시달렸습니다.
박성화 감독이 중도에 물러나고 최순호 감독이 들어왔지만 이동국에게 달라진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포항은 이동국 같은 타켓맨이 버틸만한 토양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잠시 포항에서 뛰었던 보야델 이라는 브라질 용병을 기억하십니까? 보야델은 브라질 리그에서 득점 2위까지 오른 선수였지만 결국 별 활약없이 한시즌도 마치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보야델 역시 전형적인 타켓맨이었죠..
포항은 김기남, 김상록 등의 선수를 영입했으나 이들이 타팀의 플레이 메이커들처럼 공간 침투 패스나 킬링 패스를 만들어 주지 못했습니다. 특히 언제부턴가 포항의 스트라이커로 뛰었던 윤보영 선수는 이동국의 어시스트 마져 무위로 날려버리곤 했습니다.
패스조차 원활이 배급되지 않자 이동국은 미드까지 내려오고 쉼없이 왔다 갔다하며 많은 운동량을 보였습니다. 이동국은 적절치 못한 포항의 미드진때문에 오히려 패싱력만 부쩍 늘었죠. 이때부터 언론에선 이동국이 변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한편에서 이동국을 비판했던 사람이 바로 최순호 감독이었습니다.
최순호 감독은 이동국에게 이동국다운 타켓맨의 역할을 바랬습니다. 사실 이동국이 아무리 미드까지 내려와 나름대로 날카로워진 패싱력으로 전방에 챤스를 열어줘도 코난이나 윤보영은 적절한 마무리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특히 윤보영은 01년 FA컵 울산과의 4강전 PK 외엔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준 기억이 전혀 없다시피 하죠.
최순호 감독은 그런 패스를 주는 것이 이동국의 역할이 아니라 그런 패스를 받아서 결정 짓는 것이 이동국의 역할이길 바랬습니다. 그런 패스가 전혀 오지 않더라도 꿋꿋이 자릴 지키며 한번의 챤스를 골로 연결 시켜 주길 바랬죠. 그래서 종종 "이동국은 아직 멀었다. 스트라이커로서의 움직임은 코난에게 배워야 한다." 고 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이동국이 그렇게 자릴 지키며 기다리는 축구를 하면 언론의 뭇매가 쏟아졌습니다. 게으르고 발전이 없고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말이었죠.
이동국이 경기장을 누비며 달리게 되면 이제 언론은 칭찬하지만 감독으로서는 맘에 들지 않는 상황이었구요. 곧 이동국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한 상황이었습니다. 팀 성적이라도 좋으면 최감독이 이동국을 위한 변명을 해주겠지만 팀 성적도 변변치 않은 터에 최감독도 뭐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요.
결국 이동국은 군대를 갔고 상무에서 뛰었습니다. 애초에 저는 각광받는 스트라이커 조재진과 흑상어 박성배가 있는 상무가 어쩌면 포항보다 나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지난 시즌을 본 결과.. 솔직히 상무나 포항이나 공격진은 오십보 백보.. 그나물에 그밥이었습니다. 오승범이나 한상구 같은 선수들이 있긴 했지만 서동원, 박성배 선수는 시즌 내내 부진했고, 투톱 파트너였던 조재진은 심하게 말하자면 윤보영 주니어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조재진이 까먹은 이동국의 어시스트는 제가 경기장에서 본 것만으로도 4개는 됩니다.
알고계십니까? 이동국 선수는 지난 2002 월드컵 엔트리 발표 직전까지 영국과 호주에서 발간되는 월드컵 가이드에서 "한국 대표 선수중 월드컵때 가장 많은 골을 넣을 선수"에 뽑혔던 선수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토록 도마위에 놓고 난도질하고 있지만, 아시안게임에서 골대를 맞췄던 이동국 선수의 슈팅에 대해서도 호주에서 방영된 "World football show"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아르헨티나 바티의 슈팅을 보는것 같다. 아시아 권에서 저런 슈팅을 터뜨릴 수 있는 선수가 있다는 것이 놀랍다." 고 평했습니다.
물론 지난 일들만 놓고 그랬었다~ 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작년 시즌 이동국은 11골에 5어시스트를 기록했습니다. 피로골절로 일찍 시즌을 접지만 않았어도 더 좋은 기록이 가능했습니다.
작년 광주와 성남과의 경기에서 이동국은 박충균을 앞에 두고 스피드로 돌파를 해서 완벽한 센터링을 올렸고 (제 기억이 맞는다면 손정탁 선수가 노마크에서 헤딩을 떠서 골대를 넘겨 버렸습니다.) 박충균과 싸빅의 마크에 걸리자 둘 사이를 드리블로 치고 나오며 전방으로 패스 연결을 했습니다. (이 패스는 수비수한테 걸리더군요.. ㅡ.ㅡ;)
이동국은 예전 각광받던 시기보다 오히려 기민한 움직임과, 몸싸움, 헤딩력, 돌파와 드리블, 특히 패스가 많이 발전했습니다. 다만 월드컵 영웅으로 불리는 이들과 같은 비약적인 발전의 모습을 결과물로 보여 주지 못했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발전이 늦다는 혹평과 다됐다. 혹은 애초부터 싹이 아니었다는 폄하를 듣고 있습니다.
이동국에게 진정으로 안타까운 것은 많은 부상으로 인한 수술후 예전만큼 가공할만한 슈팅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던 180도 터닝슛이나 2002년 성남전에서 기록했던 논스톱 중거리 골 같은 파워넘치는 득점이 줄고 있다는 것이죠.
코엘류감독이 최전방에 타겟맨 스타일의 선수를 선호한다면 이동국에게도 충분한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회를 통해 이동국이 왜 98년에 한국 축구가 이동국에게 주목했는지를 확실히 증명해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첫댓글 100% 공감합니다.
여담으로 작년 이동국의 파트너가 김도훈,마그노,도도,에드밀손같은 선수라면 많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11골 5어시보다 더 좋은 기록을 보였을껍니다. (부상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허나 11골 5어시 또한 풀시즌으로 뛰어도 좋은 기록입니다.
제가 좋아하던 최용수, 이동국선수가 왜 이리 욕을 듣는지 너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좋은글이군요..
마치 만화 "슛"에서 전중 같다고 할까요? 제가 본 이동국은 전중과 흡사 합니다!
좋은글이군요.....저도 이동국선수 제철고 시절때 경기를 보고 팬이되었는데... 사실 정통 스트라이커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옵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표팀에 발탁만 된다면...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