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 지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마세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 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마세요.
그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가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고
가을이면 어머니, 그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때
나와 함께 그 샛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 신석정 시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나와
하늘과
하늘 아래 푸른 산뿐이로다.
꽃 한송이 피어낼 지구도 없고
새 한마리 울어줄 지구도 없고
노루새끼 한 마리 뛰어다닐 지구도 없다
나와
밤과
무수한 별뿐이로다.
밀리고 흐르는게 밤뿐이오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뿐이로다.
내 마음 둘곳은 어느 밤 하늘 별이드뇨.
- 신석정 시 ’슬픈 구도‘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삼처럼 두 팔을
드러 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지니고 사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 보자.
푸른 별을 바라 보는 것이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어니...
- 신석정 시 ‘들길에 서서’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한 줄기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검은 밤이 흐른다.
은하수가 흐른다.
낡은 밤에 숨막히는 나도 흐르고
은하수에 빠진 푸른 별이 흐른다.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못 견디게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빛나는 태양이
다다를 무렵
이 강물 어느 지류에서 조각처럼 서서
나는 다시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리....
- 신석정 시 ‘어느 지류(支流)에 서서‘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혼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날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곤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 굽이 하늘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아란 하늘에 백로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 신석정 시‘ 임께서 부르시면‘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여섯 해가 지나갔다.
다시 우러러 본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풀에 아득히 안겨보리라.
- 신석정 시 ‘꽃덤불’
나무 사이로
가시 사이로
잎 사이로
엽맥이 드러나게 햇볕이 흘러들고
젊은 산맥 멀리 푸른 하늘이 넘어갑니다
어머니
한때는 하늘을 잃어버리고
한때는 햇볕을 잃어버리고
슬픈 전설을 가슴에 지닌 채
죄 없는 짐승처럼 살아왔지만......
죄 없는 짐승처럼 살아왔지만......
하늘이 너무 푸르지 않습니까?
햇볕이 너무 빛나지 않습니까?
어머니
당신은 아예 슬픈 전설을 빚어내지 마십시오
너그러운 햇볕을 안고
저 푸른 하늘을 우러러
무성한 나무처럼 세차게 서서
무성한 나무처럼 세차게 서서
슬픈 전설은 심장에 지니고
정정한 나무처럼 살아가오리다
- 신석정 시‘슬픈 전설(傳說)을 지니고‘
별도
하늘도
밤도 치웁다.
얼어 붙은 심장 밑으로 흐르던
한 줄기 가는 어느 난류(暖流)가 멈추고.
지치도록 고요한 하늘에 별도 얼어 붙어 하늘이 무너지고
지구가 정지하고
푸른 별이 모조리 떨어질지라도
그대로 서러울리 없다는 너는
오 너는 아직 고운 심장을 지녔거니
밤이 이대로 억만 년이야 갈리라구......
- 신석정 시‘고운 심장’
요요한
산이로다.
겹겹이 쌓인 풀 길 없는 우리 가슴같이
깊은 산이로다.
아아라한 오월 하늘 짙푸른 속에
종달새
종달새
종달새는 미치게 울고
산은
첩첩
청대숲보다 더 밋밋하고 무성한데
아기자기한 우리 두 가슴엔
오늘사 태양 따라 환히 트인 길이 있어
이 나무 등걸에 널 껴안은 채
이토록 즐거운 눈물이 자꾸만 쏟아지는 것은
진정 죽고 싶도록 살고 싶은
사랑보다도 뜨겁고 더 존엄한 꽃이
가슴 깊이 피어난 까닭이리라.
- 신석정 시 ‘나무 등걸에 앉아서‘
우수도
경칩도
머언 날씨에
그렇게 차거운 계절인데도
봄은 우리 고은 핏줄을 타고 오기에
호흡은 가뻐도 이토록 뜨거운가?
손에 손을 쥐고
볼에 볼을 문지르고
의지한 채 체온을 길이 간직하고픈 것은
꽃피는 봄을 기다리는 탓이리라.
산은
산대로 첩첩 쌓이고
물은
물대로 모여 가듯이
나무는 나무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우리도 우리끼리
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 신석정 시‘대춘부(待春賦)‘
살아보니
지구(地球)는
몹시도 좁은 고장이더군요.
아무리
한 억만년(億萬年)쯤
태양을 따라다녔기로서니
이렇게도 호흡(呼吸)이 가쁠 수야 있습니까?
그래도 낡은 청춘을
숨가빠하는 지구(地球)에게 매달려 가면서
오늘은 가슴 속으로 리듬이 없는
눈물을 흘려도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여보!
안심하십시요,
오는 봄엔
나도 저 나무랑 풀과 더불어
지줄대는 새같이
발음하겠습니다.
- 신석정 시‘발음(發音)‘
‘루오’의 그림처럼
어둡게 살아가지만,
눈부신 햇볕을 원하는 건 아니다.
꾀꼬리
옥을 굴리듯 우는 소리보다는
차라리 가슴을 에어내는
귀,
촉,
도,
소리로 멍든 가슴을 채워 달라.
저 검은
까마귀떼가 지구 밖에서
하늘을 뒤덮는 건
차라리 견딜 수 있는 일이지만
안쓰러운 것들이
눈에 걸리는데
자꾸만 자꾸만
눈에 걸리는데,
그저
소라껍질을
스쳐가는 바람결처럼
차마 눈감을 수도 없거늘,
아아
하늘이여
피가 돌 양이면,
저어
야물딱진
민들레꽃을 피워내듯이
어서 숨을 돌리게 하라.
- 신석정 시‘비가(悲歌)‘
길이 넘는 유리창에 기대어
그 여인은 자꾸만 흐느껴 울었다.
유리창 밖에서는 놋낱 같은 비가 좌악 좍 쏟아지고
쏟아지는 비는 자꾸만 유리창에 들이치는데
여인의 흐느껴 우는 소리는
빗소리에 영영 묻혀 버렸다.
그때 나는 벗과 같이 극장을 나오면서
그 여배우를 아무래도 잊을 수가 없다고
이야기한 일이 있다.
생활의 창문에 들이치는 비가 치워
들이치는 비에 가슴이 더욱 치워
나는 다시 그 여인을 생각한다.
글쎄 여보!
우리는 이 어설픈 극장에서 언제까지
서투른 배우 노릇을 하오리까?
- 신석정 시‘비의 서정시(抒情詩)‘
동백꽃이 떨어진다
빗속에 동백꽃이
시나브로 떨어진다.
수(水)
평(平)
선(線)
너머로 꿈 많은 내 소년을 몰아가던
파도소리
파도소리 부서지는 해안에
동백꽃이 떨어진다
억만 년 지구와 주고받던
회화에도 태양은 지쳐
엷은 구름의 면사포(面紗布)를 썼는데
떠나자는 머언 뱃고동소리와
뚝뚝 지는 동백꽃에도
뜨거운 눈물지우던 나의 벅찬 청춘을
귀대어 몇 번이고 소근거려도
가고오는 빛날 역사란
모두 다 우리 상처 입은 옷자락을
갈가리 스쳐갈 바람결이여
생활이 주고 간 화상(火傷)쯤이야
아예 서럽진 않아도
치밀어오는 뜨거운 가슴도 식고
한 가닥 남은 청춘마저 떠난다면
동백꽃 지듯 소리 없이 떠난다면
차라리 심장(心臟)도 빙하(氷河) 되어
남은 피 한 천 년 녹아
철 철 철 흘리고 싶다.
- 신석정 시 ‘빙하(氷河)’
지구엔
돋아난
산이 아름다웁다
산은 한사코
높아서 아름다웁다
산에는
아무 죄없는 짐승과
에레나보다 어여쁜 꽃들이
모여서 살기에 아름다웁다
언제나
나도 산이 되어보나 하고
기린같이 목을 길게 늘이고 서서
멀리 바라보는
산
산
산
- 신석정 시 ‘산산산‘
밋밋한 오리나무 숲을
성낸 짐승처럼 함부로 헤쳐나오면
성근 소나무 소나무 사이로
아스므라한 바라 푸른 언덕에 솟아오르고
꾀꼬리 호반새 울어예는 산협에
홈초로니 푸른 오월이 지르르 흘러
시냇물 졸졸졸 사뭇 지즐대는 기슭에
전나무 상나무 대 수풀 우거지고
간지람 나무 바람풍나무 제자리 잡아 서고
언덕을 돌아드는 오월 바람이 간지러워 간지러워
나뭇잎새들은 푸른 손을 자꾸만 뒤흔들며 몸부림친다
나는
짐승도 아니란다
나무도 아니란다
얇은 모시두루마기에 덮인 채
백로처럼 날아볼 수도 없고나
태화처럼 흔들릴 수도 없고나
- 신석정 시 ‘산협인상(山峽印象)‘모두
체온(體溫)도 스며들지 않는
서글픈 악수에 지친 주민(住民)이기에
나는 문득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숨이 가빠
그래도 숨이 가빠
어항도곤 좁은 지구를
뛰어나가고 싶었다.
- 신석정 시 ‘생존(生存)‘
란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란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란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 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 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란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란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그늘에 말없이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순하디순한 짐승이었다
- 신석정 시 ‘작은 짐승‘모두
하도 햇볕이 다냥해서
뱀이 부시시 눈을 떠보았다.
그러나 아직 겨울이었다.
하도 땅속이 훈훈해서
개구리도 뒷발을 쭈욱 펴보았다.
그러나 봄은 아니었다.
어디서 살얼음 풀린 물소리가 나서
나무움들도 살포시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머언 산엔 눈이 하얗다.
핸 멀찌막히 ‘경칩(驚蟄)’을 세워 놓고
이렇게 따뜻하게 비췰 건 뭐람?
그러나 봄 머금은 햇볕이어서 좋다.
미치고 싶도록 햇볕이 다냥해서
나도 발을 쭈욱 펴고 눈을 떠본다.
그러나 ‘입춘(立春)’은 칼렌다 속에
숨어 하품을 하고 있었다.
- 신석정 시 ‘하도 햇볕이 다냥해서‘모두
* 신석정(辛夕汀) 시인, 전북 부안 출생. 본명 석정(錫正). 생애 1907년 7월 7일 ~ 1974년 7월 6일(향년 66세)데뷔 1924년 시 '기우는 해' 1931년 “시문학” 제3호에 ‘선물’을 발표하며 등단. 1973. 한국예술문학상. 주로 자연을 제재로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시를 썼으나 광복 이후에는 현실 참여 정신과 역사의식이 강한 작품을 썼다. 시집으로 “촛불”(1939), “슬픈 목가”(1947), “대바람 소리”(1974)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