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 고려가 황제님 한 분만의 나라입니까. 아닙니다. 고려를 세운 것은 황제님이시지만 목숨 바쳐 싸운 장군들의 몫도 있사옵니다.
이것는 백성들의 나라, 미륵 부처 용화세상을 고집하는 궁예 앞에서 부르짖는 왕건의 항변이다. 궁예와 왕건 두 사람의 출신 성분은 물론 각자 가금에 품고 있는 이상마저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왕건은 29명의 부인과 25남 9녀의 자식을 두었을 정도로 호족세력에게 꽁꽁 묶여 있었다. 왕건의 고려가 왕권이 약화된 호족연합국가 형태로 경영되었던 점에 비춰보면 자명해진다.
궁예는 불과 십여 년 사이에 국호를 고려, 마진, 태봉으로 바꿨다. 연호 또한 무태, 성책, 수덕만세, 정개로 바꿨다. 국호와 연호를 자주 바꾼 것은 귀족과 평민과 노비의 차별이 없는 백성들의 용화세상을 이루자는 바람이 담겨 있다. 모든 백성이 차별 없이 살아가는 용화세상을 이루자는 깃발을 내걸고 나라를 세웠건만, 휘하의 장수들은 여전히 몸에 밴 욕망과 습성을 버리지 못하여 백성들 위에 군림하려 하고, 신라의 진골 귀족들처럼 관직과 명예와 부를 자식들에게 세습하고자 했다. 이들을 끊임없이 경계하고 심기일전하기 위해서라도, 연호의 변경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궁예가 신분을 따지지 않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백성들의 나라 고려를 세우자, 그때까지 신라 땅에서 골품제도에 막혀 불만을 키우고 있던 육두품 이하 세력들이 출셋길을 찾아 귀순해 온다. 신라에서는 진골 아닌 탓에 중용될 수 없었던 그들을, 새 나라 고려에서는 능력에 따라 관직을 맡겨 나라의 기초를 닦는 데 나름대로 기여하도록 한다. 나라의 기틀이 잡히는 사이에 어느덧 기득권 세력으로 변모한 그들은, 이번에는 자신들이 고려의 진골이 되어 자손 대대로 영화를 누리기 위해 송악의 호족 출신인 왕건을 앞세워 모반을 일으키고 사민평등, 백성들의 나라를 고집하는 궁예를 몰아낸다.
궁예는 선지자였다. 귀족 신분사회에서 모든 백성은 똑같다는 사민평등을 주창함으로써, 그것을 수용할 수 없었던 기득권 호족연합 세력에게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혁명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