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말, 서울 용산구 후암동 길 약국 골목.
한 형사가 그 부근에서 잠복 중이었다. 약국을 털고 나오는 도둑이 잠복근무 중인 형사의 눈에 띄었다. 젊은 도둑이었다. 형사는 재빨리 이
젊은이의 손을 나꿔챘다. 그 도둑의 손에 들려 있는 장물은 영양제 종류였다.
형사는 그 젊은이에게 「왜
돈을 훔치지 않고 약을 훔쳤냐」고 물었다. 젊은이는 『어머니가 중병에 걸려 약이 필요했지만 약 살 돈이 없어서 약을 훔쳤다』고 했다.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형사는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 젊은이를 앞세우고 그의 집으로 갔다. 허름한
단칸방에 누워 있는 야윈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인은 자식의 얼굴을 보자마자 스르르 눈을 감았다. 아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 여인은
세상을 떠났다.
젊은이는 어머니의 주검 앞에서 풀잎이 쓰러지듯 넘어졌다. 형사는 주검을 안고 통곡조차 못
하고 흐느끼는 젊은이의 손에 차마 수갑을 채울 수 없었다. 젊은이와 함께 울어 주는 게 그 형사가 그 순간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 눈물 많은 형사의 이름이 崔重洛(최중락·78) 現 에스원 고문이다. 1950년 경찰에 입문한
이래 1990년 12월 정년퇴직 때까지 그의 손에 잡힌 강력범만 1300여 명이다. 경찰생활 40여 년의 대부분을 그는 「눈물」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강력계에서 근무했다.
1963, 1968, 1969년에는 범인을 가장 많이 체포한 경찰관에게
수여되는 「捕盜王(포도왕)」을 수상했다. 제1회 청룡봉사상 용상, 대통령포장, 근정포장, 근정녹조훈장 등 상훈도 손으로 꼽기 어려울
정도다.
살인사건 현장에서 그가 다룬 시체만 2600여 구에 달한다. 그를 수식하는 말이 「영원한
수사반장」이다. MBC에서 1971년부터 1989년까지 인기리에 방영됐던 「수사반장」의 실제 모델이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이다. 극중에서
최불암씨가 맡은 수사반장의 실제 모델이 그인 것이다. 극중에서 최불암씨는 崔重洛 고문이 경찰에서 진급을 하면 경감·경정·총경 등으로 함께
진급했다.
崔고문은 「수사반장」 제작에 도움을 주면서 때로는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지난해 연말 MBC
창사 45주년 기념으로 조사한 「다시 보고 싶은 프로그램」에서 「수사반장」은 1위를 차지했다.
지난 1월
중순 崔고문은 그가 처리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지난 40여 년간의 경찰생활을 회고하는 책을 냈다. 그 책의 제목은 「우리들의 영원한
수사반장」이다. 기자가 네 차례 그를 만나는 동안 느낀 것은 그가 참으로 부지런하고 건강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부지런함이 건강 비결
MBC에서 인기리에
방송됐던「수사반장」출연자들과 프로그램 제작 관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崔고문.
그는 경찰 퇴직 후에도 매일 아침 6시면
경찰수사연구관 신분으로 경찰청 형사당직실에 들러 밤새 발생한 강력사건을 살펴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는 보안경비 전문업체인 에스원의
고문으로 16년째 일하고 있다. 고문으로서의 업무량이 적은 게 아니다. 그는 고문이지만 서울 중구 순화동에 소재한 에스원에 상근하고
있다.
4000여 명 사원들의 고충처리, 신입사원 교육, 민간경비와 관련 있는 경찰들에 대한 교육 등
휴일을 빼고는 쉴 틈 없이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만 78세의 나이로는 소화하기 힘든 일정이다. 그는 건강유지 비결에 대해 『바쁘게
일하다 보니까 늙는 것을 잊은 모양』이라고 한다. 崔고문을 「형님」이라고 호칭하는 최불암씨는 『강력계 형사 같지 않은 포근함과 따뜻한 인정이
형님의 매력이고 그 심성이 건강유지의 비결일 것』이라고 말한다.
기자가 찾아낸 崔고문의 건강유지 비결은
다른 데 있었다. 「인간관계」였다. 네 차례 만남 동안 그의 휴대전화는 인터뷰가 어려울 정도로 울려 댔다. 그는 수사 베테랑들의 모임인
「수우회」, MBC 드라마 「수사반장」 출연자·연출자 등 관계자들의 모임인 「반장네 모임」 등 수십 개의 모임에 관여하고 있다. 이 가운데 그가
회장직을 맡은 모임만 해도 朝鮮日報 제정, 청룡봉사상 수상자들이 만든 「청룡봉사회」 회장 등 20여 개에 달한다.
崔重洛 고문과의 본격적인 인터뷰는 두 번째 만남이 있었던 지난 2월26일 에스원 고문실에서 이루어졌다. 인터뷰 시작 전 직원
한 명이 청첩장을 들고 찾아왔다. 崔고문에게 주례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주례 부탁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작년 말까지 우리 사원들의 주례만 300여 차례 섰어요. 전과자들 주례까지 포함하면 그것보다
훨씬 많죠』
―주례라는 게 처음 출발하는 부부의 앞날이 무탈하도록 축복해 주는 의미가 있는 건데 전과자라는
게 마음에 걸리지는 않으셨습니까.
『처음 주례를 선 게 1975년 여름이었어요. 난지도 넝마주이였는데 초범
때 나한테 체포돼서 전과 3범이 됐는데, 새사람이 되겠다면서 간청을 하는데 안 받아들일 수 없었죠. 그렇게 해서 선 주례가 경찰 퇴직 때까지
80쌍 정도 되죠. 주례를 구하지 못하는 전과자들이 안타까워서 선 적도 많죠』
―주례를 선 전과자 중에
나중에 실망시키는 사람은 없었습니까.
『주례를 서기 전 재범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반드시 받아요. 유명한
「맘보파」 칼잡이도 제가 주례를 섰지만 지금까지 저와의 약속을 어긴 사람은 딱 한 사람뿐입니다』
『범죄 유발 유전자는 없다』
―40여 년간 범죄현장을 지켜보면서 선천적인 「범죄형 인간」이 있다고 보십니까.
『생김새를 보고 범죄형이다, 아니다들 말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절대 범죄형은 없습니다. 선천적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범죄형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범죄 유발 유전자가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요.
『자기들 책
팔아먹기 위해서 하는 말이지. 범죄형은 후천적인 환경으로 인해서 만들어지는 거죠. 저는 그렇게 믿어요』
―고문님은 육감수사를 강조하시는데 아직도 과학수사보다 육감수사가 더 중요하다고 보십니까.
『젊은
수사관들한테는 통하지 않는 얘기죠(웃음). 사건 현장에서 경험법칙에 의해서 추리하고 추정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강력범만 1300명을 잡으셨는데 육감수사가 더 중요하다는 실증적 사례가 있습니까.
『경찰을 떠난 후인 1999년에 강원도 삼척에서 신혼부부가 엽총에 피살된 사건이 있었어요. 원한에 의한 살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사건이 미궁에
빠져 들고 있었죠. 사건 해결이 안 되니까 저를 부르더군요. 사건 발생 20일 만에 가봤어요.
저는 제
경험상 원한 때문이 아니라 순간적인 감정싸움으로 일어난 사건일 것이라고 봤어요. 차가 서로 추월 경쟁을 벌이다가 이루어진 감정싸움으로 앞에 가는
차가 차를 세워 놓고 엽총을 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이죠. 실제 사건은 그렇게 해서 발생됐고 범인이 잡혔죠』
―요즘도 경찰에서 풀리지 않는 사건이 있으면 찾아가서 조언과 지도를 해주십니까.
『아니, 지도는 아니고 제가 찾아가는 일이 많죠』
59주년「경찰의 날」행사에 참석해 허준영
당시 총장 등과 함께 기념촬영한 崔고문(맨 오른쪽).
화성 연쇄살인 모방 사건 해결
화제는 지난 2월 말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에서 발생한 여성 4명의 연쇄실종 사건으로 옮겨졌다. 이 사건은 1986년 9월부터 1991년 4월까지 화성지역에서 발생해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는 10건의 연쇄 성폭행 살해 사건을 연상케 하면서 사회적 관심을 끌고 있는 사건이다. 崔고문은 화성 연쇄살인 사건 당시 그
지역에서 발생한 연쇄살인 모방 살해 사건을 해결한 적이 있다.
1988년 12월 화성군 장안면에서 어린
여자아이의 유골이 발견되면서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 관련된 사건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 사건에 차출된 崔고문은 화성군 장안면에 수사본부를 차리고
수사에 들어갔다. 수사 결과 이 사건은 구로동에 사는 계모가 딸아이를 화성으로 유인한 후 언론에 보도된 화성 연쇄살인 사건 수법을 모방해 저지른
범죄로 밝혀졌다.
―화성에서 여성 연쇄실종 사건이 발생했는데, 옛날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까.
『이번 사건은 그놈 짓은 아닐 겁니다. 1986년 9월15일부터 시작한 사건의
범인은 다른 사건으로 잡혔거나 죽었을 거예요. 변사로 죽었거나 병사했거나. 지금의 화성사건과 연관시키는데 그렇지 않아요. 화성사건 피해자 중
유일한 생존자인 여자가 범인이 30代 후반이라고 했어요. 그러면 지금은 60세가 다 된 거지. 사람이 물리적인 힘이 들어가는 범죄는 50세가
넘으면 못 해요. 체력적으로도 그렇고 용기도 없어져요. 사기꾼들은 80代까지 할 수 있겠죠』
―이번
연쇄실종 사건과 관련해서 화성에는 가보셨습니까.
『아직 못 가봤는데 시신이라도 나오면 가봐
줘야죠』
―화성사건 때 「범인이 주한미군일 것이다」, 아니면 「간첩이 민심혼란을 유발시키려 한 짓이다」
하는 이야기가 떠돈 적 있었습니다.
『많이들 그런 소리를 했죠. 그건 아닙니다. 저는 거기서 4개월 정도
수사했지만 범인은 고교 졸업 이상의 학력에 신문을 보고 라디오를 듣는 민감한 사람이라고 봤어요. 왜 그러냐 하면 경찰을 배치하고 사건과 관련해
신문에 요란하게 기사가 실리면 몇 달 동안 범행을 안 해요. 경찰 움직임을 안다는 거죠. 미군이나 간첩이라면 어려운 일이죠』
제2의 현장 남긴 화성사건
―범인은 어떤 사람일 것으로 보십니까.
『화성하고 절대 관계가 있는 사람이에요. 골목을
돌아다니는 걸 보면 지리를 너무 잘 알아요. 여자에 대한 철천지 한이 맺힌 사람이기도 하고요. 화성사건은 꼭 제2의 현장을 남겼어요. 사건
현장에서 이동을 했어요. 시체를 끌고 가서 농수로에 갖다 넣거나 솔가지로 덮어 놓거나 깻잎으로 덮어 놓거나 짚단으로 덮거나 했죠. 보통은 사람을
죽이면 도망가기 바쁠 텐데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봐서는 여자하고 철전지 한이 맺힌 사람이라고 본 거죠.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았다든지, 마누라가
도망을 갔든지』
―그런데 왜 안 잡혔을까요.
『밤중에 잡으려고 저도
전경을 배치하고 했는데 잡을 수 없는 것이 꼭 화성 군내 전체를 범행 대상으로 하니까 어렵죠. 또 전경들한테 향수 뿌리고 화장시키고 변장시켜서
가방 메고 범행 예상지역을 다니게 하는데 전경들이 겁이 나니까 못 버티고 도망와요』
―故(고) 이형호 군
유괴사건을 다룬 영화 「그놈 목소리」는 보셨습니까.
『안 봤습니다』
감옥에서 좌경의식화된 살인범들
최불암씨가 맡은 MBC 드라마「수사반장」의
실제 모델이 崔고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저는 범인이 한 명이 아니라
공범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던데요. 영화가 화제가 되면서 그런 분석을 내놓는 범죄심리학자들도 있었구요.
『영화로는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사건의 범인은 하나로 봤습니다. 제가 육감수사를 말하면서 주장하는 것인데 둘이 했으면
언젠가는 둘 사이에 의견충돌 때문에 깨지면서 발설해서 경찰에 귀에 들어오죠. 그렇기 때문에 단독범행이 가장 미제사건이 많아요. 둘이 있으면
언젠가는 말이 나와요』
―수사한 사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뭡니까.
『조경수·김태화 사건이 있죠. 둘다 사형 집행이 됐는데 끔찍한 사건이었습니다. 정치 이념의 색채가 있었던
사건이죠』
「구로동 샛별 룸살롱 살인사건」으로 알려진 「조경수·김태화 사건」은 1990년 1월에 발생한
사건이다. 감옥에서 출소한 조경수와 김태화가 샛별 룸살롱에서 접대부에게 몸을 요구했다가 거부하자 10대 접대부 2명과 이들을 보호하려던 같은
건물 당구장 종업원 2명을 생선회 칼로 무참히 난자한 사건이다.
이 사건 이전인 1989년 12월 말
이들은 광주에서 맥주집 여주인을 살해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이들은 사건 후 50일간 도피하면서 강남구 신사동, 서초구 방배동 등지의 호화주택과
미용실 등을 습격하며 여자들을 발가벗기는 등의 행패를 부리고 아무 이유 없이 지나가는 여대생의 등을 칼로 긋는 등의 범행을 저지르다가
검거됐다.
―정치 이념의 색채가 있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조경수와 김태화는 가진 사람을 미워했어요. 집단 살인사건 이전 복역 중 이들은 감옥에서 이념적으로 의식화돼서 나왔어요. 같은 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이른바 민주화·노동운동권 학생들로부터 의식화 교육을 받았어요. 당시는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수사를 통해서 이들의 목적이 감방 안에서 세뇌
받은 대로 시국을 어지럽히려던 것이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때는 그 사건 말고 여러 사건이 있는데, 그 후에 발생한 「지존파」 사건 같은
것들도 그런 범주로 볼 수 있어요』
―감옥에서 그런 좌경 의식화 교육이 가능합니까.
『의식화 교육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죠. 조경수·김태화가 감옥살이 하던 1980년대
말에는 시국사범들이 많았어요. 노역을 같이 할 수 있고, 세면장에서 만날 수도 있고, 그 만나는 순간순간에 보이지 않는 이념화가 이루어진 거죠.
유영철 사건도 저는 그런 유형이라고 봐요』
피해자의 성장과정에서 실마리 찾는다
―살인사건 피해자의 80%
이상이 평소 죽을 짓을 했다고 주장하는데, 근거가 있습니까.
『제가 1982년에 발생한 살인 및 강도살인
등 흉악범 81건을 분석한 적이 있어요. 이 가운데 60건은 원한·치정 등을 원인으로 가족 및 친지 등 근친 간에 일어난 살인이었어요. 재물을
노린 강도살인 등 흉악범에 의한 살인은 21건이었죠. 그게 근거죠. 근친 간에 왜 죽이겠습니까』
―수사를
하면서 因果應報(인과응보)를 많이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분명히 권선징악이니 인과응보니 하는 것들이
있다고 봐요. 나쁜 짓을 했으면 결과적으로 자기한테도 불이익이 온다는 건 알아야 합니다. 정년퇴직 직전이었는데 한 사람이 살인범으로 잡혀
왔습니다. 피해자가 완도에서 친구한테 굴비 한 차를 가져와 팔아서 제 사업 밑천으로 다 쓰고 돈을 안 갚은 거예요.
살인범이 된 친구는 굴비 한 차 값을 받기 위해서 완도에서 17번을 올라왔습니다. 17번째 올라왔을 때도 굴비값을 주지
않으니까 죽인 사건입니다. 그게 인과응보지 뭡니까. 그 살인사건을 보니까 잔인하게 죽였기에 「이놈도 죽을 놈 죽은 것 아닌가」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가락시장에 다 소문이 나 있더라구요. 죽을 놈 죽었다고』
―그럴 경우에는 수사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지 않습니까.
『없어지죠. 말을 못 해서 그렇지 「잘 죽었다」는 생각이 들죠. 그렇다고 수사를 안
하는 것은 아니고』
―수사를 시작할 때 제일 먼저 알아보는 게 어떤 겁니까.
『성장과정이죠. 어떻게 자랐느냐, 친구가 얼마나 있느냐, 이게 육감수사입니다』
―성장과정을 보면 사건의 윤곽이 나옵니까.
『사건의 전후가 보이죠. 사건 발생 후 사흘이면 성장과정이 다
조사됩니다』
―살인사건이 과거와 비교하면 증가하고 있죠.
『그렇지는
않아요. 인구가 증가했으니까 살인사건도 그만큼 많아지는 것이지 살인사건 증가율이 인구 증가율을 넘지 않아요』
―과거와 비교해 살인범죄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잔인해졌다는 것과 뻔뻔해졌다는 게
과거와 달라요. 죄의식이 없어요』
―無동기 살해사건이 증가하는데요.
『그게 무섭잖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無동기라고는 하지만 살인에는 틀림없이 동기가 있어요. 동기만 찾으면 범인을 잡아요. 요즘은 그 동기를 못
찾아내니까 無동기 살인사건이라고 하는 거죠』
―사형제도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이십니까.
『나는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과응보, 권선징악입니다』
―체포한 범인 중 사형수가
여러 명 있었죠. 모두 사형집행이 됐습니까.
『다 집행이 된 걸로 알고 있어요』
―사형이 집행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언짢지 않습니까.
『즐겁지는 않지만 죄를
지었으면 그 代價는 치러야 한다고 봐요』
시체를 끌어안고 자다 ―경찰생활을 하면서 屍身(시신) 2600구를 만지거나 보셨는데, 시신을 볼 때 기분이 나쁘지는
않습니까.
『시체를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면 강력계 형사 못 하죠. 수사하다가 시체 하고 같이 잘 때도
있어요. 1975년이었는데 수유리에서 83세 할머니와 72세 할머니가 살해당했어요. 정말 가난한 집이야. 강도가 돈 8000원 하고 카메라 한
대를 가지고 갔어요.
도대체 왜 이 노인네를 죽였을까, 고민하다가 현장에서 잠들었어요. 밤중에 시신을
발견했기 때문에 다음날 치우기로 하고 눈을 떠보니까 시체를 끌어안은 채 자고 있더라구요. 범인은 잡았어요. 도둑질하러 들어왔다가 들키니까 놀라서
죽인 거죠』
―수사관들은 시체와 대화를 한다는 이야기도 있는데요.
『(웃음) 기자들이 쓴 말이지. 죽은 사람하고 무슨 대화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오래된 형사들이 하는 얘기도 그렇고 나도 그랬지만 후배들한테
「범인이 안 잡히면 시체 옆에 가서 낮잠이라도 자 봐라. 꿈에라도 나타날 것 아니냐」 그런 얘기는 합니다』
―지금까지 처리한 사건 중 가장 잊혀지지 않는 사건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아무래도 고생한 사건이 기억에
남죠. 1960년대 일인데 청계천을 복개한 밑으로 전화 케이블이 있었어요. 도둑들이 청계천 안으로 들어가서 케이블을 잘라 팔아먹는 일이 많았죠.
하루는 신고가 들어와서 청계천 속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에 도둑이 있는 거예요. 메탄가스가 막 올라오는
곳에서 추격전이 벌어졌죠. 숨이 막히고 죽을 지경이어서 도둑과 협상했어요. 「이러다가는 너도 죽고 나도 죽으니까 우리 같이 살자」 그래서 밖으로
나가기로 했는데 한 사람씩만 나갈 수 있는 구조였어요.
누가 먼저 나가야 하느냐를 고민했는데 그때는
도둑놈 잡는 걸 포기했으니까 「너 먼저 나가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 도둑이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밖에서 내 손을 잡아 주는 거였어요. 밖에
나와서는 살았다는 안도감에 서로 끌어안고 기뻐했어요. 도둑과 형사가 말이죠(웃음)』
―그 도둑은 그냥 보내
줬습니까.
『아뇨, 구속시켰어요(웃음)』
가족 위험 우려해 지금도 공개 않는다
盧泰愚 대통령이 1990년 10월「범죄와의
전쟁」선포 후 청와대를 방문한 崔고문.
지난 3월2일 오후 2시 崔重洛 고문의
사무실로 다시 찾아갔을 때 그는 분주했다. 비서인 차은숙씨에게 메모를 들고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메모에는 「전경 211명, 경찰 22명,
간호사 60명」이라고 적혀 있었다. 경찰병원에 입원해 있는 부상 전경과 경찰들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에게 보낼 위문품의 수를 기록해
놓은 것이었다.
메모를 훔쳐보고 있는 기자에게 崔고문은 이렇게 말했다.
『해병대만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 아니지. 경찰도 「한 번 경찰은 영원한 경찰」입니다. 특히 강력계는 더
그렇죠』
그러나 이 자부심 많은 전직 강력계 출신 경찰관은 경찰관 생활을 하면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가족을
공개하지 않는다. 가족의 안전 문제 때문이다.
―강력범만 1300명을 잡으셨는데 보복 위협은 받지
않았습니까.
『없는 것은 아니죠. 가족들에게 저는 항상 강조하는 게 어디 가서 경찰의 가족이라는 티를 내지
말라고 당부해요.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위험 때문이죠. 강력계 형사 10년 이상하기가 힘든 이유가 그런 이유들 때문이에요. 아무리 올바른
법집행을 했어도 불만과 앙금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일이거든요』
범죄자들의 보복과 관련해 崔고문은 이런
얘기를 전해 주었다.
崔고문이 서울시경 형사과장으로 있을 때였는데 하루는 두 달 전 정년퇴직한 선배가
경찰서로 엉금엉금 기어왔다. 온몸은 피투성이가 된 상태였다. 길을 가는데 4명의 사내가 길을 막아서더니 『너 ○○○ 살인 사건 때 나를 두들겨
팬 놈이지』 하면서 『너도 맞아 보라』면서 마구 때렸다는 것이다. 崔고문은 그 선배를 끌어안고 『강력계 형사의 마지막이 이건가』 하며 엉엉
울었다고 한다.
강력사건은 순간적으로
발생
이한동 前 총리가 검사 시절 맡은 문화재
해외 유출 사건 수사를 도왔다.
―범죄자들이 출소한 후 형사들에게 보복하는
일이 자주 있습니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죠. 범죄자들은 경찰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에 감히 보복할
엄두를 못 내요. 제가 보복 범죄를 저지른 범인을 7명 잡았는데 특징이 있더군요. 공매예요. 조사를 하는 담당 형사가 아니라 주변에 있는 형사가
조사에 끼어들면서 때리면 범인들은 공매 맞았다고 생각하면서 담당 형사보다 오히려 그 주변에 있던 형사에게 앙심을 품게 돼요』
―강력사건 뒤에는 돈과 여자가 있다는 속설이 있는데요.
『아니에요. 강력사건은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게 많아요』
―그 속설은 횡령이나 사기 등 경제사범이나 지능사범에 해당하는
이야기네요.
『그렇죠』
―강력반에 계시면서 다른 부서로 옮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까.
『왜 없었겠어요. 강력계는 정말 힘들어요. 다른 데로 옮겨 볼까 했는데, 꼭지
붙었다고(포도대장) 옮겨 줘야 말이죠』
상급자의 김홍일씨 고문 요구 거부
崔고문은 가장 후회되는
사건으로 1965년에 있었던 동아일보 정치부 崔永喆(최영철) 기자 테러사건을 꼽았다. 崔永喆 기자는 서대문 영천동 집앞에서 테러를 당하고 차고
있던 시계를 뺏겼다. 崔永喆 기자는 훗날 국회 부의장, 체신부 장관, 노동부 장관을 역임했다. 이 테러사건 때 崔고문은 테러를 단순날치기
사건으로 만든 후배 경찰의 범인조작을 묵인했다고 한다.
―崔永喆 장관한테는
사과하셨습니까.
『친해요. 자주는 못 만나지만 서로 웃고 말았죠. 그 당시 그 사람들이 왜 몰랐겠어요.
당시 3공화국에 비판적인 언론인에 대한 테러가 이어졌는데 그게 누가 한 일이겠어요』
―정치인에 대한
테러사건도 많았는데요.
『김영삼 초산 테러사건도 있었고, 김대중씨 집 폭발사건도 있었죠. 특히 김대중씨
집에 폭발물이 터졌을 때는 軍 관련기관이 한 것은 틀림없는데 감히 경찰이 어떻게 그 당시에 입을 벌려요. 당시 저희 윗사람 중에는 김대중씨 아들
김홍일이 자작한 것으로 몰고 가려고 했어요. 「홍일이 데려다가 쥐어박으면 된다」고 했는데 제가 「차라리 못 잡으면 못 잡았지 그러지 말자」고
건의했어요. 그때 고문을 나더러 하라는 것을 거부했어요』
경찰생활을 통해 崔고문은 서울 금당골동품상
살해사건 등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됐던 사건들을 해결한 이력에 걸맞게 알고 지내는 「유명 범죄자」가 꽤 있다. 大盜(대도) 조세형과 김태촌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조세형은 1963년 열여섯 살이 되던 해 절도를 하다가 처음으로 체포되는데 그 체포자가 崔고문이다.
그 첫 만남 이후 두 사람은 쫓고 쫓기는 관계로 수십 년을 지냈다. 1998년 11월 59세에 세상에 복귀할 때까지 조세형은
감옥에서 25년을 보냈다. 감옥에서 나온 후 조세형은 崔고문의 추천으로 에스원 범죄예방연구소에서 일하는 한편, 기독교인으로서 간증집회를 다니는
등 사회생활에 적응하는 듯했다.
그러나 조세형은 2001년 11월 일본에서 절도행각을 벌이다가 3년을
살았고, 형기를 마친 후 귀국한 지 1년도 안 된 2005년 3월 서울 마포구 가정집에 침입해 절도를 한 혐의로 체포돼 현재 복역
중이다.
―지금의 부인과 자녀 말고 조세형씨에게는 가족이 없습니까.
『조세형이는 만나 보면 불쌍한 인간입니다. 부모는 없었지만 고모도 있고 형도 있었습니다. 버림받은 후 혼자 지내다가 도둑질의 길로 빠진 겁니다.
부잣집에 들어가서 훔친 돈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인간입니다』
―돈을 못 쓰다니요.
『쓸 시간이나 있었습니까. 도둑질하고 잡히고 또 잡히고 하다 보니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요』
보스 기질 조세형, 후배 돌보다 다시
범행 ―조세형이 훔친 장물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장물은 다 압수했는데
신문에 날까봐서 피해자들이 찾아가지 않은 게 많아요』
―에스원에는 왜 추천하셨습니까.
『이게 일종에 범죄와 관련이 있는 기업이라 건의했죠. 유명 도둑을 통해 방범진단도 해볼 수 있다는 판단을 했고요. 윗사람들이
받아 줘서 데려다 놨는데 이놈이 그렇게 배신할 줄은 몰랐어요』
―품성은 어떻습니까.
『아주 착해요. 순박하고 남을 도와주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런 사람이 왜 또
절도를 한 겁니까.
『사회 적응이 안 되는 거죠. 59세에 나와서 지금은 64세인데 교도소 생활을 빼면
사회생활은 불과 8, 9년 한 겁니다. 교도소에만 있었으니 사회적응을 못 한 거죠. 돈도 문제였어요. 조세형은 지금도 그 세계에서 영웅소리
들어요. 교도소에서 출소한 과거 동료들이 하루에 대여섯 명씩 찾아와서 용돈 달라고 하는데 그걸 어떻게 조달할 수 있었겠어요』
―절도 범죄 출신자들이 많이 찾아왔나 보죠.
『그럼요. 교도소 나온 놈들의 왕이었어요.
그 비용이 만만찮았어요. 간증을 하러 다니면 한 달에 1000만원씩 생겼어요. 그거 다 그놈들한테 풀어 준 것 아닙니까. 그래서 마포에서
도둑질하다가 또 잡혔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세콤한테 걸렸어요』
―경험칙상 도벽은 정말 고칠 수 없는
건가요.
『고칠 수 없는 것 같아요. 에스원에서 월급을 줬어요. 도벽으로 봐야죠. 일본에 갈 때는 원래
선교를 위해서였어요. 기독교도 전파하고 많은 교인들을 확보해서 일본에 교회를 한번 세워 보겠다는 얘기를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게 꿈이라면
해봐라」 했어요. 그런데 절도 사건이 난 겁니다』
―마포사건은 왜 벌였답니까.
『제가 면회를 가서 「야, 이 자식아 너는 마누라한테 돈을 달래지 왜 남의 집을 들어가냐」고 야단을 쳤어요. 제 생각에는
교도소를 나온 애들은 찾아오지, 줄 용돈은 없지, 옛날 가락은 있고 해서 한 거예요』
―교도소 후배들
도와주겠다는 마음이 절도의 한 원인이 된 거네요.
『나도 봤지만 출소자들이 줄줄 따라다녔어요. 세콤에
다닌다 그러고, 간증해서 돈 잘 번다고 하니까 따라다녔어요.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다 죽게 된 전과자가 있었는데, 그 부인이 아프다니까 있는 돈
다 갖다 주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 당시는 나한테 거짓말 안 할 때였어요. 보스 기질도 있었고요』
―보스 기질 때문에 후배들을 외면할 수 없었겠군요.
『그렇게 봐야죠』
―조세형씨는 기독교 신앙을 지금도 가지고 있는 겁니까.
『그럼요』
―교도소 안에서 전도활동도 하겠네요.
『그럴지도 모르죠. 말을 잘합니다. 간증할 때는
대학교수 이상의 유식한 말을 합니다. 대단합니다. 안타까워요. 저는 지금도 조세형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이제 64세가 돼야
나오는데』
김태촌, 『형님 칼
맞아야겠습니다』
―前 「서방파」 두목 김태촌씨하고는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1989년 제가 형사과장일 때 김태촌이 찾아왔어요. 와서는 「형님 내 손에 좀 죽어야 됩니다.
칼을 맞아야 합니다. 삼청교육대에 형님이 나를 넣었다고 형사들이 그럽디다」고 하는 겁니다』
―등골이
서늘했겠습니다.
『명색이 형사과장인데 겁을 먹겠습니까. 그때 오해를 풀어 줬어요. 그 후 김태촌이 우리
사무실에도 오고 밥도 같이 먹고 그랬어요.
한번은 파주에 있는 순복음교회 기도원에 김태촌과 함께 가는데
「형님, 나 간증해서 용돈 잘 생깁니다」 하면서 봉투를 건네는 거예요. 칼잡이한테 봉투를 받아먹을 형사과장이 아니죠. 당시 영등포에서 한 시민이
도둑 들어온 걸 쫓다가 칼을 맞은 사건이 있었어요. 그래서 최불암이 하고 함께 가서 그 돈을 그 시민에게 주었어요. 그 이야기는 신문에도
났어요』
―그게 나중에 「김태촌의 배후에는 최중락이 있다」는 보도가 나오게 한 배경이죠.
『맞아요. 경찰 그만둔 뒤 1992년 1월17일자 동아일보에 그렇게 났어요. 검찰에 알아보니까 김태촌과 내가 기도원 갈 때
운전했던 구 아무개 목사가 진정을 했던 거였어요. 그 돈의 용처가 신문에 났으니까 다행이었죠』
―요즘도
연락하십니까.
『그저께(2월28일) 전화가 왔어요.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그래서 쾌유를 빈다고
했죠』
―지금은 부하도 없다고 하던데요.
『부하가 있을 턱이 없죠.
김태촌을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놈도 자꾸 애들한테 베풀어 줬어요. 지금은 아프니까 그렇지만 나오면 후배들이 저 사람 또 두목을 만들려고
할까 봐 걱정돼요』
―양아치 신세라고 하던데요.
『요즘 돈이 없으면
힘 없습니다. 건달 세계에서 돈 없으면 부하들이 따르지 않아요』
조폭과 연예인
崔重洛 고문은 동양방송의 「다이얼
330수사대」, 문화방송의 「수사반장」 제작에 참여하면서 많은 연예인들을 알게 된다. 이 인연으로 인해 연예계 비리 수사에서도 이름을 날리게
되는데, 그가 관여한 연예인 비리 수사는 연예인 보호를 위한 것들이었다.
1975년에는 서울 무교동·명동
밤무대에서 박노식·구봉서·김정구·김희갑·장동휘씨 등 당대 최고 인기 연예인들의 출연료 20%를 갈취한 관광업소 연예부장 안 모씨를 구속시켰다.
이듬해에는 출연代價로 연예인들을 갈취한 PD 등 40명을 사법처리했다.
―최근 탤런트 권상우씨와 김태촌씨가
협박 논란을 일으킨 일도 있었는데 연예인과 조폭이 어떻게 해서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는 겁니까.
『연예인들이 조폭들을 겁내기 때문에 가까워졌죠. 당시 내가 연예인들 보호해 준 것은 지금도 연예인들이 얘기할 겁니다. 연예인들이 먹고살 만큼
되니까 폭력배들이 벌떼같이 덤벼든 거죠』
―조폭과 결혼하는 연예인들도 꽤 있었죠.
『오래가지 못하고 대부분 헤어진 것으로 압니다』
―경찰 출신으로서 경찰 수사권 독립에는
당연히 찬성하시겠죠.
『독립이 아니라 현실화입니다. 매년 140만 건을 경찰에서 잡아 보내는데, 그게 다
경찰 의견서를 보고 기소 붙이잖아요. 현실이 그렇기 때문에 수사하는 것 간섭하지 말고 경찰에게 맡겨 달라는 거죠』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경찰이 각 후보들에게 공약으로 내걸 것을 요구할 가능성이 많겠죠.
『아마 그럴지도 모르죠. 盧武鉉 대통령도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실현되지는 못했어요』
지난 2월28일 서울시내 한 식당에서
열린「반장네 모임」. MBC「수사반장」출연자들과 제작진이 3개월에 한 번씩
모인다.
「반장네 모임」
취재 도중 기자는 지난 2월28일 서울 서대문
소재 경찰청 맞은편 한 식당에서 있었던 「반장네 모임」에 참석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탤런트 최불암·박원숙·김애경씨 등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반장네 모임에서 범인으로 제일 많이 나온 사람은 누구입니까.
『요즘 「주몽」에서 인기를 끈 이계인이죠』
―임현식씨 아닙니까.
『임현식은 정말 배고파서 도둑질하는 순진한 생계형 범죄자로 많이 나왔죠』
그 모임에서는
崔重洛 고문에게 더 이상 질문을 할 수 없었다. 崔고문은 20여 명의 참석자들의 안부를 일일이 챙기는 일만으로도 바빠 보였기
때문이다.
崔고문에게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재주가 있다. 그 재주가 폭 넓은 인간관계 구축의 밑거름임이
틀림없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2600구의 시신을 만지고 1300여 명의 강력범을 잡을 수 있었을까. 기자의 이런 의문에 대해 崔고문은 이렇게
말했다.
『경찰 인생 40년 동안 집에서 10년, 경찰서에서 20년, 길거리에서 10년을 살았습니다』
요즘 崔고문은 저녁 약속을 최대한 자제한다고 한다. 40년 경찰생활 동안 제대로 챙겨 주지 못한 아내와의
저녁식사를 위해서다.
첫댓글 향기 님 잘 읽었습니다. 최고문과 최불암의 만남도 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