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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
헬마니온의 서(Forward of Helmania)
불의 장(Section of Fire)
파이어 볼트(Fire bolt)!!!!
말 한마디로도 태산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낭랑하게 퍼지는 내 목소리에, 내 손바닥에서는 거대한 화염의 화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라고 하고 싶지만, 정작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내가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작은 불길 하나가 손바닥 앞에 나타나 한겨울 칼바람에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와 동시에, 굵직한 목소리가 내 옆에서 들려왔다.
“5번 김가현, 점수는 C. 뭐하는 거냐? 그 정도로는 상대방 담뱃불도 못 붙여 줄 정도다. 남자답게 힘차게 주문을 외웠다는 점이 마음에 들긴 한다만, 정말 눈 뜨고 못 봐줄 정도로 형편없는 마법이구나.”
마법 담당 선생님이신 부룩 선생님의 미간이 험상궂게 구겨졌다. 안 그래도 ‘비주얼 매직’이라고 불릴 정도로 험악한 얼굴이 세 배는 무서워 보였다. 그것보다 뒤에서 신나게 웃어대는 급우들의 목소리가 더 못마땅했다. 쳇, 이게 무슨 창피람. 나는 6번 학생이 올라오는 것을 확인하며 시험대에서 내려왔다.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데 와아, 하는 함성소리가 나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는 6번 학생이 산뜻하게 마법을 날려대는 모습이 보였다. 파이어 볼트(Fire bolt). 말 그대로 손에서 작지만 매우 빠른 불화살을 날려 보내는 마법이다. 그런데 내가 쏘지 못한 그 마법을 6번 학생은 너무나도 완벽하게 발사하고 있었다. 그것도 6발 연속으로. 나는 그 6번 학생을 쳐다보았다. 그린블랙의 더벅머리, 그리고 180cm정도는 충분히 되어 보이는 키를 가진 그 녀석은 내가 고등학교 입학을 하고 처음 만난 친구인 김웅 이라는 녀석이었다. 김웅 녀석은 파이어 볼트 6발을 날린 후 앞머리를 거만하게 쳐 내면서 미소를 지었고, 그 장면이 내 마음을 더욱 좋지 않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 미소가 나를 향한 것이라는 사실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녀석, 일부러 연발로 마법을 쏜 것이었다. 젠장, 저 녀석은 왜 저리 마법을 잘 쓰는 거야. 나는 풀이 죽은 채로 내 자리로 돌아와 털썩 앉았다. 화재의 위험 때문에 시험대를 야외에 지었
기 때문에, 3월의 추위가 온몸에 전해졌다.
“으, 추워.”
내가 3월에 학교를 오게 되는 불상사를 겪게 되다니. 중학교 때에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지 않아도 되었는데. 물론 일반 고등학교도 이런 짓을 하지는 않는다. 내가 중학생 때에 진학하기로 결심한 이 학교가 상당히 이상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퀴나스 고등학교라는 외국 냄새가 물씬 나는 이 학교는 실제로도 외국 자본으로 지어졌다. 이런 매력적인 내용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내 중학교 성적으로 1년 전액 장학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기에 지원하게 되었다. 집이 워낙 벽지에 있어서 교육이나 문화생활에 많은 애로사항이 있어서 도시로 진출하려고 하던 찰나, 전액 장학금을 받아 엄청난 시설을 공짜로 이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내 선택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문제는 여러 가지, 아니 엄청나게 많이 생기게 되었다. 우선 이 학교에는 방학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점이었다. 대신, 1년에 60일 동안 사용할 수 있는‘휴가’를 신청할 수 있었다. 따라서 휴가를 가지 않는 학생은 휴일을 제외한 1년 전체를 학교에서 보내게 되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이런 엄동설한인 3월에 학교에 나와 수업을 받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교육 시스템을 전부 깨버리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시스템이 통과한 것도 놀랄 노자인데 한 가지 더 웃긴 것이 존재했다.
“여기서 무슨 궁상을 떨고 있는 게요, 레이디 가현.”
그때, 김웅이 어처구니없는 말투로 나를 향해 말을 걸어왔다. 그러더니 내 옆에 털썩 앉았다.
“멍청아, 누가 레이디라는 거야? 마법만 잘 하는 멍청이 같으니라고.”
김웅은 내 시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예의 마음에 들지 않는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후후후. 레이디 가현도 인정하는군. 본좌의 뛰어난 마법실력을 말일세. 그야말로‘군계일학’이라는 사자성어가 한 번에 떠오르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것이 내가 이 학교에 가진 부정적인 이미지 중 하나이다. 이런 마법만 잘하는 멍청이에게도 전액 장학금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안겨주는 곳이 이 아퀴나스 고등학교라는 점이었다. 애당초 마법이라는, 말도 안 되는 과목을 가진 학교가 이 학교밖에 없다는 것도 웃기지만 말이었다. 하지만 겨우 마법 하나 잘 하는 것으로 특기생으로 몰아 전액 장학금을 주다니. 이 학교 재단, 돈이 썩어나나? 나 같이 마법에 대해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의 고충을 생각하란 말이다. 나는 덕분에 다른 과목을 거의 만점 받아야하는 불이익을 받고 있었다. 애당초 ‘0’단위가 춤을 춰대는 이 학교의 미친 등록금을 악덕 사채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야 낼 수 없는 학생들의 고충을 생각하란 말이다, 이 망할 학교야. 나는 나와 똑같은 절차를 밟고 힘없이 내려오는 11번 학생을 보며, 하얀 입김을 동반한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아침부터 마법 실습 때문에 진을 다 뺀 나는 교실에 들어와 자리에 엎드려 잠을 청하려고 했다. 젠장, 힘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그렇게 엎어져있는데, 머리 위에서 누군가의 말이 들려왔다.
“어이, 웬만하면 일어나도록 하게나. 본좌께서 친히 납시셨는데 말이야.”
나는 누군지 대충 짐작하며 고개를 들었다. 김웅이란 녀석이었다. 나는 대꾸하는 것도 귀찮아서 다시 엎어졌는데, 김웅의 쓸데없는 말 때문에 다시 고개를 들어야 했다.
“김가현. 마이 스위트 프린세스. 어서 일어나지 않으면 잠을 깨는 키스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네.”
나는 남자에게 감히 공주라는 별명을 멋대로 불러대는 한심한 녀석에게 고개를 들며 말했다.
“닥쳐. 미친 녀석아.”
나는 고개를 들며 대꾸해버렸다. 아 젠장, 또 이 녀석 페이스에 휘말려 버렸다. 나는 이 시답잖은 녀석에게 딴죽까지 걸어주는 친절함까지 보여주고야 말았다.
“아, 젠장. 잠이 오려고 했는데 김웅이라는 미친놈이 키스하려는 꿈을 꿔서 깬 것 같은 느낌이야. 아침부터 똥을 밟은 느낌이랑 비슷한 것 같아.”
그러자 김웅 녀석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해버렸다.
“오, 레이디 가현. 본좌가 나온 꿈을 꾸다니, 역시 본좌를 사모하는 것이 분명하구나. 허허. 그렇다고 부끄러워 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뭐, 그게 더 매력적이긴 하지만 말일세.”
“닥쳐. 더 이상 내 귀를 더럽히지 마. 멍청한 녀석아.”
김웅은 내 책상에 걸터앉으며 말을 꺼내들었다.
“후후. 귀여운 독설가 아가씨. 그런데 왜 오늘 같이 약동하는 봄의 기운을 만끽할 수 있는 날에도 이리 기운이 없이 앉아있을꼬?”
“그 망할 마법학 숙제 때문이야. 어제 밤을 완전히 새 버렸거든. 뭐, 너야 마법 실기로 삼라만상을 채울 수 있는 고등학생이겠지만, 나같이 마법 실기가 모든 성적의 재앙을 초래하는 학생들을 그렇지 못하잖아. 그러니 다른 곳에서라도 점수를 메우기 위해 고생하고 있는 거지.”
나는 힘이 없어서 고개를 팔에 묻으며 대답했다. 1학년 성적을 악착같이 유지한 덕분에 2학년 장학금은 전액 지원받을 수 있었지만, 3학년을 생각한다면 이런 숙제에 목숨을 걸어야하는 것이 내 비참한 현실이었다. 그러자 김웅 녀석이 거만하게 팔짱을 낀 채 손가락을 흔들며 말했다.
“허허. 고작 그런 일 때문에 하늘에 별을 보는, 매우 우매한 짓을 하다니. 뭐, 어제는 정말 고생이 많았구려. 그렇다면 말일세, 오늘 같은 날은 활발하게 돌아다니면서 새내기의 풋풋함과 동급생들의 한껏 성숙해진 얼굴을 보면서 기분을 한껏 업! 시키는 것으로 어제의 노고를 푸는 것은 어떠한가? 이 반을 보더라도 안 보이던 얼굴들이 꽤나 있지 않은가? 아, 역시 봄의 여왕은 위대한 여인일세! 아니, 여자야 말로 신의 축복일세!”
아주 연설을 하는 구나. 무슨 얼어 죽을 신의 축복이야. 게다가 봄은 왜 여왕인데?
“어차피 신학기도 분위기만 있는 것이고, 학급도 작년과 거의 비슷한 녀석들로 채워졌잖아. 게다가 나는 봄이 싫어. 시끄럽잖아. 졸려 죽겠는데 말이야.”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반패는 바뀌지만, 전학생이나 특이하게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 월반 또는 전반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비슷한 반이 유지가 되는 것이 이 아퀴나스 고등학교의 특징이었다. 무슨 새로운 클래스메이트가 나타나겠나. 게다가 한두 명으로 바뀔 분위기가 아니란 말이다, 이 망할 학교는. 그 때, 김웅이 말을 꺼냈다.
“그렇단 말인가? 그럼 레이디 가현께서는 무슨 계절이 좋아하시는 겐가?”
내 머릿속에 문득, 달리아 꽃과 해바라기 꽃이 가득 차 있는 꽃밭이 떠올랐고, 어느 여자의 얼굴까지 생각이 났다. 그런데 이 장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나는 무의식적으로 말을 꺼냈다.
“여름.”
그러자 김웅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여름 좋지. 여름은 비키니의 시즌 아닌가. 게다가 더울수록 짧아지는 무언가가 너무나 사랑스럽단 말이지. 게다가 해도 길어서 광란의 밤이 희소가치를 가지는 계절이지. 아, 짧은 수영복을 입은 레이디의 모습이 보고 싶구려. 여름이야 말로…….”
“됐어. 닥쳐. 시끄러워. 조용히 해.”
나는 손을 흔들며 김웅의 말을 끊었다. 그러자 김웅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자네가 그러니까 더 여자라는 말을 듣는 걸세. 레이디 가현. 남자라면 응당 여자라는 생물에게 관심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나. 자네는 얼굴도, 공부도 뛰어난 인재인데 자꾸 이렇게 은거기인처럼 살아가면, 결국 진흙 속에 다이아몬드처럼 빛을 바라지 못할 걸세.”
“아, 시끄럽다니까. 다이아몬드든 라이브아몬드든 그냥 가! 졸려 죽겠는데 아까부터 방해만 하고, 시끄럽게 굴기까지 하잖아!”
“흠. 뭐, 나중이라도 관심이 있으면 오게나. 본좌는 언제나 마음을 열며 기다릴 터이니.”
김웅은 말을 마치더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뭐, 어차피 또 같은 반이니 계속 말을 섞을 녀석 아닌가. 게다가 신학기도 명목상의 신학기이다. 물론 새 학년이 들어온다는 것도 있지만, 나머지 학년은 방학도 없이 수업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신학기라는 기분도 나지 않는 날이었다. 그런 날인데 그냥 조용히 지나가자. 아, 젠장. 왜 이렇게 사람을 귀찮게 하나 모르겠다. 나는 김웅의 말이 조금이나마 걸려서 고개를 들었다. 그래, 평생 혼자 살 거 아니면 주변에 관심을 가져봐야겠지. 하지만 이내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래봤자 거의 다 같은 반 녀석들이잖아. 얼굴이나 성격도 변한 게 하나도 없네.”
아무리 봐도 신선한 기분을 느낄 수가 없잖아. 뉴 페이스는 가뭄에 콩 나듯 보일 뿐이고, 이 삭막한 고등학교에 신선함을 가진 학생들은 원체 보기 힘들었다. 게다가 신학기임에도 면학분위기에 눌린 학생들은 암울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안 그래도 어제 마법학, 특히 내가 매우 취약한 마법사(魔法史)에 대한 숙제를 하느라 밤샘 작업을 했기에, 나는 식상한 교실을 뒤로 한 채 잠이나 더 자는 것이 건설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만약 그때, 또 다른 방해꾼이 나타나지만 않았다면야 잠이 들었을 것이다. 김웅이 나가면서 닫았던 문이 열리면서, 처음 보는 여자애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색 머리카락이 상당히 인상적인 여학생이었다. 이 고등학교에는 이미 많은 수의 외국인 학생들도 다니기 때문에 이색적인 색의 머리칼을 가진 사람들이야 많았지만, 저렇게 붉은 머리칼을 가진 사람은 한 명도 없었기에 상당히 인상이 깊었다. 중학생 정도의 외모를 가진 그 여학생은 두툼한 머플러와 갈색 더플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우리 학교 교복인 군청색 재킷과 스커트와 꽤나 어울려 보였다. 다만, 뭐가 그리 불만인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것이 조금 흠이었다. 붉은 머리 여학생은 성큼성큼 다가와서 상당히 커 보이는 가방을 내 자리 옆에 쿵, 하니 내려놓았다. 그러고 난 뒤, 자리에 앉아서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는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이 보였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이라는 것에서 조금 흥미를 느껴 그 여자애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 게 아닌가.
“저, 저기!”
여자아이가 갑작스레 나를 불렀다. 꽤나 박력 있게 이야기했지만, 그 여자애의 겉모습처럼 상당히 미성숙한 톤의 목소리였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귀여운 느낌이 들었다.
“왜?”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 여자애는 오른쪽으로 시선을 잠시 두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 그러니까. 저, 저기. 반갑다.”
……. 뭐지? 다짜고짜 와서 반갑다는 말을 전하는 것이 요즘 인터넷 유행어인가. 아무래도 내가 요즘 시대에 뒤떨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맞대응 했다. 다행히도 먹혀들었는지, 여학생은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옮겼다. 그러더니 그 여학생은 또 고민하는 것 같은 제스처(주먹을 쥔 채 정면을 노려보는 것 같은 제스처랄까. 상당히 전투적인 모습이었다. 만약 저런 포즈를 부룩 선생님이 하신다면, 심신이 약한 사람은 바로 도망갈 것 같은 얼굴이었다.)를 하더니, 또 다시 나를 휙 돌아보면서 말을 꺼내왔다.
“그 으, 러니까. 내 이름은 강진아라고 한다, 아니 진아라고 해. 잘 부탁할게.”
고장이 난 인형에서 나는 것 같이 뚝뚝 끊어지는 말투였다. 한눈에 봐도 상당히 긴장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도대체 뭐 때문에 긴장을 하고 있는 건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뭐, 여하튼 결코 공격적이거나, 나를 비방하는 말은 아니기에 나도 호의적으로 나서기로 했다.
“어. 그렇구나. 나는 김가현이라고 해. 나야말로 잘 부탁한다.”
일본어나 중국어 초급을 배울 때 나오는 대사 같은 인사를 하자, 마치 미국인 두 명이 한국말 배우는 것 같은 느낌이 팍팍 들어서 왠지 모르게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그리고 왜 이 따위로 통성명을 하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 여자애, 엄청난 괴짜 아냐? 이 여자애, 그러니까 진아는 다시 또 기를 모으는 것 같은 제스처를 취하더니 또 나를 획 돌아보았다. 왠지 겁나는데.
“나는 말이지! 그러니까, 나는……. 미국에서 왔어. 그, 보스턴 쪽이야.”
그리고는 다짜고짜 자신이 입학생이라는 것을 밝히는 강진아 양. 뭐야, 입학 첫날부터 술이라도 한 잔 걸치고 왔나, 말을 왜 이리도 더듬거리는 거야? 게다가 혀도 꼬인 것 같고. 미국이라는 말만 안 했어도 알코올 중독자로 치부할 뻔 했다. 미국에서 와서 이렇게 말을 못하는 구나. 게다가 왠지 모르게 ‘생활 한국어 회화’같은 소책자에서 나올만한 대사만 줄줄 읊는 게, 한국말을 잘 못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진아를 돕기로 했다.
“아, 진아라고 했지? 그렇다면 한국말 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네. 그냥 영어로 해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 편하게 말해.”
“아냐! 나 한국말도 잘해. 한국에서 산 적이 있으니까.”
“아무리 봐도 잘 못하는데.”
“잘 한다니까!”
또 전투종족으로 변신했다. 눈에는 ‘더 이상 못한다고 하면 죽이겠어.’라는 살육의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만 둬야겠다. 이러다가 정말로 살해당할지도 모를 것 같았다. 또 말이 끊기자, 진아는 다시 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당첨. 이 포즈는 이제부터 기를 모으는 자세라 칭하겠다. 진아는 다시 고개를 휙 돌려서 나를 바라보았다. 야, 이 포즈 나름 흥미와 궁금증을 마구 유발시키는데. 다음 이야기는 뭐가 나올까. 하지만 아쉽게도, 다음 이야기는 이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진아의 주머니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진아는 핸드폰을 붙잡고 상당히 미안한지 손을 모으더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어, 미안해. 잠시 실례할게.”
“아니야. 정말 수고하는구나.”
“그럼.”
진아는 벌떡 일어나더니 후다닥 뛰쳐나갔다. 어찌나 빠르던지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오랜만에 재미있는 녀석이 굴러온 것 같다. 1년 전에는 김웅이라는 괴짜를 만나서 즐겁긴 했지만, 이만큼 기대되지는 않았는데. 긴장감까지 들게 하는구나. 재미있는 여학생일 것 같다.
“뭐가 그리 웃긴 겐가?”
언제 옆으로 왔는지, 김웅 녀석이 내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나는 지금까지 참았던 웃음을 흘리면서 대답했다.
“아, 나름 기대되는 애가 한 명 온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어.”
“오, 설마 여자인 겐가?”
“어. 맞아. 여자애야.”
갑자기 침묵이 찾아왔다. 나는 뭔가 이상해서 고개를 돌렸는데, 김웅이 묘한 포즈를 잡은 채 얼어 있는 것이 아닌가. 얘는 또 왜 이래. 진아보다 자신이 밀린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가.
“야, 그러지 않아도 돼. 너는 말투 하나로도 괴짜 반열에 충분이 오를 수 있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닐세. 지금 자네, 여자라고 한 겐가? 그, 마음에 든다는 사람이 말일세.”
“그렇다니까.”
그러자 김웅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설마, 자네 마음에 드는 여인이 나타날 줄이야. 도대체 어떤 여인인지 궁금하긴 하군. 천하의 레이디 가현 마음에 드는 여인이라.”
김웅은 마치 자신이 도인인 듯 알 수 없는 단어를 중얼중얼 나불대기 시작했다. 이 녀석, 진아에게 밀린다고 생각한 건가. 나는 그렇게 혼자 궁상을 떠는 김웅을 보며, 문득 숙제 생각이 나서 김웅에게 질문을 던졌다.
“야, 근데 너 숙제는 다 한 거지?”
의외로 김웅은 고개를 저었다.
“노우, 어차피 숙제는 3월 5일, 즉 3일이나 되는 데드라인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우매한 자들이나 숙제를 미리 끝내놓는 거지, 본좌와 같이 우등한 자들은 당일 날 끝낼 여유 정도는 가지고 있다는 말일세.”
쳇, 좋겠다. 나는 검토를 위해 일부러 일찍 끝내놓은 건데. 역시 아는 자의 여유라는 건가.
“너는 뭘 했기에 그렇게 마법학에 대해 잘 아는 거야?”
김웅 녀석은 씨익 웃더니 대답했다.
“본좌가 모르는 것을 보기나 했소이까. 본좌야말로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닫고 있으며, 마법도 그 중 하나기에 잘 아는 것일세.”
자기 잘난 맛에 사는구나, 김웅이란 놈은. 김웅은 잠시 말을 끊더니 나를 보면서 말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레이디 가현은 모르는 부분에 대해 나를 통하여 지식을 습득하려 하는 건가?”
날카로운 녀석. 역시 대단한 녀석이다. 나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A4용지를 꺼내들었다.
“맞아.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그래. 이놈의 학교는 왜 마법이라는 요상한 과목이 있는 거야, 젠장.”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아퀴나스 고등학교는 마법 실습과 쌍두마차를 이루고 있는, 악명 높은 ‘마법학’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말 그대로 마법이라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인데, 거의 암기를 요구하는 이론식 교육이라는 점 때문에 학생들의 적으로 규명되는 과목이었다. 게다가 마법의 원리만 수업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및 문화까지 한꺼번에 섞어놓은 소위 ‘부대찌개’학문이었다. 마법 원리 하나만 공부해도 미칠 노릇인데, 종합 선물세트라니 너무 한 거 아닌가. 김웅은 이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태연하게 말을 던졌다.
“아퀴나스 고등학교는 여타 고등학교들과 설립 목적부터 다르니, 취급하는 학문도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 학교의 설립 목적을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면 섭섭하네만.”
물론 알고 있다. 1학년 입학 때 들었던, 학교장의 잊지 못할 연설을 들었으니 말이었다. 아퀴나스 고등학교는 범국제적인 학교로서, 실력 있는 인재를 양성하여 차후 ‘언데드’라는 괴물들로부터 세상을 수호하는 이른바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아주 창피하고도 식상한 타이틀을 달 수 있도록 하는 전문 교육 기관이라는 것이었다. 젠장, 서양에만 잔뜩 창궐했다는 그놈의 언데드 때문에 이런 끔찍한 과목을 수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싫어졌다. 그 놈의 언데드라는 존재 때문에 우리나라에도 이런 학교가 개교하게 되어 이렇게 여러 사람을 물 먹이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 학교에서 나에게 등록금 면제라는 떡밥을 던지지 않았다면, 입학이라는 미끼를 덥석 물지는 않았을 텐데. 여하튼 내 발로 걸어 들어왔으니, 전적으로 내 책임이기는 하다. 그래도 그렇지. 피도 눈물도, 자비도 없는 학교 같으니라고. 나같이 평범하게 살다가 처음으로 이런 과목을 접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어쩌라는 거냐. 내가 학교를 향해 무언의 저주를 퍼붓고 있자, 김웅이 나에게 말을 꺼냈다.
“뭐, 여하튼 모르는 부분이 있다면 본좌에게 직접 물어보도록 하게나.”
“모르는 것도 많지만, 일단 내 숙제나 한 번 읽어봐 줘. 틀린 부분이 있으면 바로 지적해주고.”
“알겠네.”
김웅은 말을 마친 뒤, 진아의 자리를 엉덩이로 뭉개며 내 숙제를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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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너무 덥네요;;; 다들 건강 조심하세요!
오늘로 두 번째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는 허접댕이 작가 다카입니다^^;;;
항상 열심 쓰려고 노력하는데, 앞으로도 잘 봐주셨으면 정말 감사드려요^^
더불어 댓글도 달아주신다면 이 보라괭이, 목숨걸고 열심히 쓰도록 하겠습니당! 그럼 다음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같이 건필하기로 해요^^ 소설 봐주셔서 정말 고마워요^^